1515. 대학 축제-140-
현자타임.
온갖 욕망과 번뇌의 굴레에서 벗어나, 냉철하고 합리적인 이성을 강화시키는 기술. 두뇌를 오버클럭한 것처럼 판단력, 분석력 등이 전 부문의 지적 능력이 대폭 상승한다.
하지만 빼어난 효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부작용이 있었으니, 바로 욕망을 거세한 것만으로 모자라 일종의 여성혐오까지 일으킨다는 점이었다.
'으음, 근데 데이트 중에 현자 타임은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지금 위험한 것은 무발기 사정 직전인 주인님의 전립선 건강상태가 아닐까요?]
'아니, 그건 그런데 너무 사람이 정 없어 지던데. 정음이한테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어떻게 해?'
[흐음. 다소 그런 부분이 있긴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정음양이니까 시도해 볼만한 스킬이기도 합니다.]
'정음이라서?'
[다른 여자면 모를까 현모양처 타입인 정음양이라면 주인님을 관대하게 이해해 주지 않을까요? 다소간 실수도 포용력있게 넘어갈 수도 있고요.]
'물론 그렇긴 한데···.'
도훈이 찝찝해하자 로시가 계속 설득했다.
[과거에 현자타임이 패시브인 플레이어도 존재했다는 걸 아십니까?]
'정말? 그럼 평생을 현자 타임 상태였다는 거야?'
[물론 패시브 스킬인 만큼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거의 그렇다고 봐야죠.]
'누군데?'
[니체입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 프리드리히 니체?'
[네.]
도훈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씨, 니체면 더 곤란하지.'
[왜 그러십니까? 인류사에 길이 남은 유명한 철학자였는데요.]
'그 양반이 철학으론 유명했는지 몰라도 엄청난 여성 혐오자였다는 거 몰라?'
[네?]
도훈은 기억나는 대로 니체의 여성혐오 발언을 읊었다.
-여자를 만든 것이 신의 두 번째 실수다.
-여자는 깊이 있는 척하는 껍데기다.
-남자의 눈물은 상대방을 괴롭혔다는 데서 나오는 후회의 눈물이지만, 여자의 눈물은 충분히 괴롭히지 못했다는 후회의 눈물이다.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요?]
'책에 박제되어 있으니 찾아 보던가. 어쩐지 여자를 엄청 싫어 하더니 평생 현자 타임이라 그랬구만. 이제야 이해가 되네.'
[크흠, 주인님하곤 완전 상극이군요. 주인님처럼 여자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도 또 없을테니까요.]
'아무래도 현자 타임은 무리겠어. 부작용 때문에 미쳐가지고 정음이한테 심한 말을 쏟아 낼까 두려워. 닥쳐라, 애 낳는 기계! 이 럴지도 모른다고.'
[호감도 100이라도 뺨 맞을 멘트긴 하네요.]
'어찌 됐건 참아 보겠어. 정음이도 내가 먼저 안 건드리면 먼저 날 유혹하진 않을 테니까.' 도훈은 정음을 믿었다.
색기가 넘치는 몇몇 파트너들은 말끝마다 색드립에, 은근슬쩍 스킨십으로 도훈을 유혹하기 일쑤였지만, 정음의 경우엔 먼저 도훈에게 꼬리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빠랑 같이 등산하니까 너무 기분 좋아요!"
"응. 우리 손잡고 갈까?"
팔짱이 부담스러웠던 도훈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것으로 유도했다. 정음은 손만 잡아도 좋은지 손깍지를 끼더니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네!"
아이처럼 신나하는 정음을 보니 도훈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저럴 땐 정말 초등학생 같다니까?'
[정음양은 순수한게 매력이죠.]
거리가 멀어지자 솟구치던 성욕도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특히 경치 좋은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운동을 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도훈은 이내 야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정음아 가을 옷 사줄까?"
"네?"
"아니 날도 추워지니까 코트 같은 거 필요하지 않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음이 정중히 사양했다.
하지만 도훈은 일전에 받은 게 많았기 때문에 정음에게 꼭 보답하고 싶었다.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래."
"괜히 돈 들잖아요. 저 집에 옷 되게 많아요."
물론 그것은 정음의 생각일 뿐이었다.
옷이 넘쳐 한가득 쌓아놓고 사는 희주만 해도 그렇지만, 정음은 다른 20대 초반 여학생에 비해 지나치게 옷이 없는 편이었다. 일주일의 절반은 운동을 위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고, 나머지 절반도 지난주에 입었던 옷을 돌려막기하고 있었다. 딱히 꾸밀 줄도 모르고, 안 꾸며도 어차피 예뻤기 때문에 굳이 옷을 사거나 액세서리 같은 것에 돈을 쓰지 않았다.
도훈은 그게 마음에 걸렸다.
'정음이는 살짝만 화장하고 옷만 잘 입어도 엄청 눈에 띌 텐데 말이야.'
[축제 때 할리퀸 코스프레한 것처럼 말이죠?]
'어. 화장 싹 하고 옷 갈아 입히니까 싱크로율 쩔었잖아. 맨 얼굴에 대충 옷 입어도 저 정돈데, 제대로 꾸미면 아이돌 뺨치고 다닐걸?'
도훈은 실제로도 현역 아이돌을 최근 만났었기 때문에 정음의미모가 얼마나 출중한지 잘 알았다. 정음은 그야말로 꾸미지 않은 원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도 코트 같은 거 한 벌 사주고 싶은데…."
"코트요? 에이, 너무 비싸요. 오빠 괜히 돈 들잖아요."
도훈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나한테 돈 걱정을 다 해주네.'
[주인님이 엄청난 자산가라는 걸 전혀 모르니까요.]
'확, 그냥 계좌 까?'
도훈은 현재 가상자산에 투자한 500억 말고도 500억의 현금성 자산을 인벤토리에 쌓아놓고 있었다. 예전에 나예림에게 투자한 거금이 푼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자중하시죠. 주인님이 부자라는 걸 알면 정음양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일이억도 아니고 천억대라면요.]
'흐음. 그러려나?' 도훈은 정음이 속물이 아니라고 믿었지만, 본인이 돈이 아주 많다고 밝혀도 똑같은 태도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시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의심하는 것조차 죄악이라고 느꼈다.
'아니다. 역시 안 밝히는 게 좋겠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래."
"오히려 제가 사드리고 싶은걸요?"
"응? 왜?"
"축제 기간에 저한테 옷 주셨잖아요."
도훈은 할리 퀸 코스프레 복장으로 아이템을 건넸다. 정음은 그것을 도훈의 선물로 인식했던 모양이었다.
"에이, 그건 그냥 코스프레용 복장이지."
"그래도요. 멀리까지 나가서 직접 골라오셨잖아요."
"아니, 그래도…."
"전 오빠한테 옷 사주는 게 좋아요."
"왜?"
"음, 보고만 있어도 그냥 기분이 좋더라고요. 오빠한테는 무엇이든 다 주고 싶어요."
정음이 수줍게 고백하자 도훈이 감동했다.
'이렇게 순수한 여자가 또 있을까?'
[콩깍지가 제대로 씌우셨군요.]
'확실히 정음이는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 다른 여자들에게는 없는.'
[주인님이 유독 아끼시니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때였다.
두 사람의 앞에 한 여성이 지나가는데, 하의가 싹 달라붙는 레깅스차림이었다. 엉덩이 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모습에 정음이 민망한 듯 소리쳤다.
"오빠, 저기 단풍 좀 봐요."
"응?"
"아니 저기요."
도훈은 정음이 일부러 시선을 돌리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정음이가 다른 여자 의식하는 건 처음 보네.'
[옷이 너무 민망해서 아닐까요?]
'요샌 등산하는데도 저렇게 입고 다니더라고.'
도훈도 사실 이미 레깅스녀를 의식하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듯, 고자된 지금도 예쁜 여자만 보면 반사적으로 눈이 돌아갔다.
얼굴을 자세히 못 봤지만, 뒤태 하나는 끝내주는 여성이었다.
정음의 시선 돌리기에도 불구하고 레깅스녀는 일부러 더욱 엉덩이를 씰룩이며 두 사람 앞에서 걸었다. 어찌보면 의도적으로 두 사람에게 엉덩이를 보여주려는 동작 같았다.
정음은 그 모습이 불편한지 도훈의 손을 잡고 앞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오빠, 빨리가요."
"응? 그래."
정음이 속도를 올려 속보로 걷자, 레깅스녀도 덩달아 속도를 올렸다. 한낮의 남산 등반에서 졸지에 경보 경주가 벌어졌다.
도훈은 황당한 상황에 웃기면서도 왠지 만족감이 차올랐다.
'정음이가 의식하는 게 뭔가 재밌는데?'
[정음 양도 질투라는 걸 하는군요.]
두 사람은 체력이 원체 좋았기 때문에 끝내 레깅스녀를 재치고 달아났다. 한참을 올라간 정음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정말 민망해 죽겠어요. 왜 저렇게 입고 다니는 건지."
"뭐?"
"오빠도 봤잖아요. 속옷만 입고 다니는 여자."
"레깅스가 속옷은 아니지 않아?"
"몰라요. 암튼 보기가 불편했어요."
정음이 씩씩대는 모습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왜? 내가 쳐다볼까 봐 신경 쓰였어?"
"좀 그렇잖아요. 일부러 몸매 과시하는 것도 아니고."
"걱정마. 난 한 눈 안 파니까."
[얼씨구? 한눈을 파는 정도가 아니라 희대의 바람둥이 아닙니까?]
'말이라도 예쁘게 해야지.'
"정말요?"
"응. 그러니까 안심해. 난 정음이 너만 보니까."
"아앗."
정음이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 조그맣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저, 저도."
"응?"
"아, 아니에요. 엇? 저기 남산 타워 보여요!"
레깅스녀 때문에 속도를 올리는 바람에 생각보다 일찍 타워에 도착했다. 대낮임에도 관광객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서 표 끊나 봐요. 제가 금방 다녀올게요!"
정음이 말릴새도 없이 쌩하고 매표소로 달려갔다.
졸지에 혼자 남게 된 도훈은, 기다리는 동안 무료한 시간을 떼우기 위해 으슥한 곳을 찾았다.
남산 전체가 흡연 금지 구역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흡연할 곳을 찾기 쉽지 않았다. 곳곳에 금연 금지 팻말과 함께 과태료 부과에 대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흡연자를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인가.'
[주인님이 담배를 끊는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개가 똥을 끊지, 내가 담배를 끊겠냐.'
도훈은 기어코 화장실 뒤편 으슥한 구석을 찾았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 꽁초를 보니, 몰래 흡연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같았다.
'빠르게 피우고 가면 되겠지?'
도훈이 허공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데, 뒤따라 도착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 담배 피우면 안 될텐데?"
"앗, 죄송합니다."
도훈이 급히 담배를 끄려고 하자 상대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저도 몰래 태우러 왔거든요."
도훈이 고개를 드니 아까 경보 경주를 했던 레깅스녀였다. 얼굴을 정면에서 보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늘씬한 미인이었다.
레깅스녀가 가느다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여자친구는 어디에 두고?"
"네?"
"왜 모른척해요? 아까 옆에 손잡고 갔었잖아요. 저 기억 안나요?"
여성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거침이 없었다.
'뭐지, 이 여자는? 여자친구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왜 수작을 부리는 걸까?'
[조심하십시오, 주인님. 꽃뱀일지도 모릅니다.]
'꽃뱀은 무슨.'
도훈은 오는 여자를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태연히 대꾸했다.
"아, 아까 그분이구나. 뒷모습만 봐서 몰랐어요."
"왜요? 막상 앞을 보니까 실망이에요?"
여성이 담배 연기를 도훈을 향해 내뱉으며 대답했다.
일부러 도발하는 것 같은 마음에 도훈이 약간 호기가 치솟았다.
'뭐하자는 속셈이지? 설마 자기가 정음이보다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태도에 도훈은 좀 더 유심히 레깅스녀를 관찰했다. 키는 한 170쯤 될까? 웨이브 진 긴 머리에, 유독 화장이 짙은 타입이었다.
얼굴은 봐줄 만한 정도였지만, 몸매는 확실히 자신만만할만 했다. 커다란 골반도 그렇지만 정면에서 보니 가슴이 상당히 큰 편이었다. 게다가 몸에 꽉끼는 레깅스 덕에 봊이의 둔덕이 훤히 비쳤는데, 어쩌면 일부러 드러내려고 바지를 바짝 올린 것 같았다.
"실망이라기보다는…."
"왜요? 제가 그쪽 여자친구보다 별로 일 것 같아요? 만나보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이제는 대놓고 유혹을 시작하는 레깅스녀에 도훈이 딱 잘라 말했다.
"절 언제 봤다고 그러시는지?"
"오늘 봤죠. 아까 등산하다가. 그쪽 딱 내 스타일이더라고요.
훤칠하고 미남이고. 근데 옆에 여자친구는 너무 학생 같더라."
도훈은 기가 막혔다.
"뭐라고요?"
"둘이 안 어울린다고요. 설마 진지하게 사귀는 건 아니죠? 그쪽이 너무 아까운데."
"저기요, 초면에 말이 너무 심하…."
"원하면 내가 한 번 줄수도 있는데."
레깅스녀가 갑자기 손을 뻗어 도훈의 바지춤을 움켜쥐었다.
도훈이 못 피할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지만, 그런 행동을 설마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도훈은 속절없이 잦이를 내주고 말았다.
"어어?"
"내가 왜 이런 차림으로 등산하는 줄 알아요? 설마 탑골공원 다니는 노인네들 눈요기 시켜주려고? 아니죠, 바로 그쪽같이 새끈한 남자 꼬시려는 거거든요."
레깅스녀가 도훈의 고추를 대놓고 주물렀다.
도훈은 그제야 그녀가 변태라는 걸 깨달았다.
'변녀다!'
[네? 대낮에 남산에서요?]
'변태가 무슨 TPO 가리는 거 봤어? 아무데나 출몰하는 게 변태지.'
[멀쩡히 생겨가지고 저러니까 더 무섭네요.]
"난 임자있는 거 신경 안 써요. 아니, 임자가 있으면 더 꼴리더라? 남의 것 뺏는 것 같아서. 어때요? 원하면 여기서 줄 수도 있는데."
레깅스녀가 계속 도훈의 꼬추를 주물렀지만, 고자가 된 도훈은 미동도 없었다. 이쯤 되자 레깅스녀도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으, 응? 이게 왜."
도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 그 손 안 떼면 경찰에 신고합니다."
"뭐, 뭐야? 너 고자야? 이래도 안 서?"
"분명 경고 했어요?"
레깅스녀가 혀를 차면서 도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아씨, 몸은 무슨 짐승처럼 생겨가지고 별 꼴이네 진짜. 얼굴이 아깝다."
레깅스녀는 씩씩거리더니 먼저 흡연장소를 떠났다.
도훈은 꼬무룩한 얼굴로 담배를 마저 피우더니 꽁초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