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520화 (1,475/2,000)

1503. 대학 축제-128-

공연을 마친 제희는 투덜거리며 밴에 올랐다.

"뭔데, 분위기 진짜?"

팀의 메인보컬인 그녀는 매번 라이브로 무대를 소화할만큼 프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 곡을 부르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로 팬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고 있었는데, 오늘의 국성대 축제공연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자, 역대급으로 망한 행사가 되고 말았다.

"아씨, 당황해서 랩 가사까지 틀렸잖아."

랩퍼인 린다 역시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

전반적으로 팀원들의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차량으로 돌아온 매니저는 죽상이 되어있는 팀원들을 격려했다.

"다들 수고했어. 오늘 순회 공연은 여기가 마지막이야. 집에가서 푹 쉬면 좋겠지만, 내일 아침 배를 타야하니 인천으로 바로 넘어가자."

"매니저님."

"응?"

"아까 그 사회자가 뭐래요?"

"어, 그게···."

매니저 역시 객석 반응이 평소보다 시원찮다는 정도는 캐치하고 있었다. 관객들이 이미 한번 클라이막스를 겪은 것처럼 다소 김이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공연 내내 영 분위기가 달아오르지 않은 것이다. 사회자에게 연유를 캐물은 매니저가 팀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가 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사회자가 임기응변으로 관객한명을 무대에 올렸나 보더라고."

"관객이요?"

"그럼 일반인?"

"아까 우리 막 도착했을 때 함성이 그것 때문이었어요?"

매니저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 근데 생각보다 노래를 너무 잘했나 보더라고. 그래서···."

메인 보컬이 제희가 자존심이 상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우리보다 잘 부르는 민간인 때문에, 흥이 식어 버렸다고요? 우리가 앞 무대보다 못해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매니저가 땀을 뻘뻘 흘렸다.

걸그룹 매니저란 스케쥴 수행 및 이동을 전담할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 예민한 20대 초반의 여자애들의 비위를 맞추는 멘탈 케어까지 해야하는 하드코어한 직장인이었다.

"아니, 듣고보니 말이 그렇잖아요. 까놓고 말해서 김샜다 이거 아니에요?"

"정말 그런 거였어? 어쩐지 오빠부대들 떼창이 영 맥아리가 없다 싶더라니."

"근데 그 사람이 누군데요?"

"나도 잘 모르겠어.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 듣고 바로 사라져 버렸다고 하더라고. 소수문 해보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했고."

"참나."

"열 받네 진짜."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가순데."

매니저가 기분 상한 팀원을 위로했다.

"자자, 그러지 말고. 인천에서 묶을 호텔은 일부러 가장 좋은 꼭대기 팬트 하우스로 잡아놨으니 가서 푹 쉬라고."

"뭘 푹쉬어요? 내일 아침 바로 출발이라면서. 잠도 제대로 못자겠구만."

"지금 바로 인천 출발하면 그래도 8시간은 푹 쉴 수 있을 거야.

다들 고생하는 거 아는데, 조금만 힘내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군부대 위문 공연이 대학 축제 행사보다 더 중요한 거 알지?

그럼 출발한다?"

겨우 팀원들을 다독인 매니저가 곧바로 차량을 출발시켰다.

뒷좌석에서 앉아있던 멤버들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지 연신 투덜거렸다.

"내가 국성대 다시 오나 봐라. 관객들 매너 꽝이네 진짜."

"뭘 또 그렇게 까지 말해? 돈만 맞춰 주면 오는 거지. 그래도 두 곡 부른 것 치곤 꽤 쏠쏠하지 않았어?"

현실적인 린다의 말에 제희가 반박했다.

"그 흔한 앵콜 요청 한 번 안 들어왔다고요. 이건 굴욕이에요언니."

"맞아요. 나는 당연하게 3번째 곡 준비하고 있었는데."

"근데 그 민간인이란 사람 대체 누구지?"

"가수 준비생 같은 거 아닐까?"

"가수 준비생이라니?"

"왜, 요샌 서바이벌 프로다 뭐다 해서 연예기획사 소속 아니어도 꽤 잘 부르는 애들 많잖아. 제희 너도 그렇게 시작했지 않아?"

"그건 그거고. 아무튼 자존심 엄청 상했어요. 왠지 밀려버린 느낌이야."

"맞아. 우리가 초청가수가 아니라 들러리가 된 기분이었다니까?"

링링이 분위기가 처진 멤버들을 위로했다.

"자자, 그러지 말고 오늘 밤 제대로 놀아보자고. 오늘은 특별손님이 준비되어 있잖아."

"쉿-."

미소가 매니저 쪽을 쳐다보며 눈치를 줬다.

다행히 매니저는 기획사 대표에게 통화를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아차. 미안."

린다가 동생들에게 말했다.

"다들 명심해. 우리가 도훈이 호텔로 부른 거 들키면, 가수 생활도 그날로 끝장이야. 기자 따라붙는지 늘 감시하고, 어디가서 입도 뻥긋 말라고."

"그거야 당연하지."

"무조건 비밀."

"근데 도훈 오빠가 정말 올까?"

"이름 부르지 말고 그냥 별명으로 부르자. 매니저 오빠가 눈치 채면 곤란하니까."

매니저는 여전히 통화에 집중하는 지 대화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네네, 대표님. 지금 국성대 공연까지 마치고 인천으로 이동 중입니다. 당연히 숙소는 제일 좋은 곳으로 잡아 놨죠. 내일 배타고 백령도까지 가야하니까요. 네네, 현재가지 일기예보 봐서는 연착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네, 부대 관계자랑도 아까 통화해 공연 시간 조율했고요."

"그럼 뭐라고 부를까?"

"음, 케이크어때?"

"케이크?"

"케이크는 원래 혼자 못 먹고 나눠 먹는 거잖아."

링링의 적절한 비유에 다들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래요. 암튼 새벽에 케이크가 도착할 지 모르겠는데?"

"돈 받았으니까 오긴 오겠지. 택시비 쓰라고 50만원이나 줬는데."

"돈만 받고 먹튀할수도 있지 않아?"

"그렇진 않을걸?"

"또 모르지. 그때도 싸튀. 음, 암튼 전례가 있으니까."

도훈은 모두를 돌아가며 따먹고 그 뒤로 잠적했다.

물론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볼 수 없긴 했지만,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 기별도 없던 터라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다시 한 번 전화해보는 게 어때?"

"안 하는게 좋을 것 같아. 오히려 귀찮아서 질릴지도 모르니까.

남자들은 성가시게 하면 떨어져 나가거든."

"암튼 오늘은 무조건 공평하게 하는 거야?"

"뭐야? 아까 순서 정했잖아."

"케이크를 꼭 순서대로 먹어야 하는 법이라도 있어?"

"그럼?"

"동시에 나눠 먹을 수도 있는 거잖아."

"참나. 이것들이 진자 위아래가 없네? 내가 시켰다는 걸 명심해."

그룹의 최고 맏이인 린다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녀는 여전히 도훈이 자신을 겁내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오빠 통해서 혼 쭐이 났으니 내 말엔 절대 거역 못 할 걸?

그 말은 애들한테 따로 말 안했지만, 내 돈 받고 먹튀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안 그럼 또 혼구녕이 날테니.'

"린다 언니는 욕심쟁이야."

"맞아. 적어도 케이크가 고르게 해야지."

"케이크가 무슨 사람이니? 자기가 고르게?"

"다들 무슨 얘기하고 있어? 야식 주문하게?"

통화가 끝난 매니저는 뒤에서 멤버들이 자꾸 케이크 어쩌고 하는 통에 궁금해서 물었다.

"내일 공연에 지장있으니까 적당히 먹어. 아, 그리고 술은 절대 안 돼. 알았지? 내일 아침부터 배타고 가야하는데 배멀미라도 하는 날엔 공연 완전히 망친다고."

"저희 그냥 달달한 케이크나 먹으려고요."

"맞아요. 하나 시켜서 나눠 먹기로 했어요."

"그 시간에 케이크가 배달이 돼? 인천 도착하면 11시 다 될텐데?"

"그래서, 린다 언니가 미리 주문해 놨죠."

"팬트하우스로 바로 도착하도록."

"아하, 잘했네. 대표님이 오늘 고생했다고 맛있는 거 사먹으래.

법인카드 놓고 갈테니 먹고 싶은 거 시켜 먹어."

"매니저님은 근데 어디서 주무세요? 혹시 저희랑 같은 호텔은 아니죠?"

"아니야. 난 마침 본가가 인천이라서 간만에 집에 좀 다녀 오려고. 그때 한 번 말했던 것 같은데?"

"아, 맞다. 히히."

미소가 씨익 웃었다.

알면서도 재차 확인하기 위해 물어본 질문이었다.

객석 반응에 다소 실망하긴 했지만, 걸그룹 멤버들 모두 새벽배송으로 도착할 케이크를 기다리며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 * *

공연이 끝나자 마자 성수가 주점으로 뛰어와 도훈을 찾았다.

"어디갔어, 우리 슈퍼스타!"

"네? 부회장님, 아 전임 부회장님 누구 찾으세요?"

"누구긴? 우리과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 이도훈이 말이야."

"도훈 오빠 아까부터 주방에서 일 돕고 있는데요?"

"이 자식이 진짜."

성수가 성큼성큼 주방 천막으로 향했다.

말이 주방이지 실제론 커다란 대야에 호수로 연결해 물을 받아 설거지 거리를 씻는 곳이었는데, 도훈은 그곳에서 빨래 장갑을 끼고 그릇을 씻고 있었다.

"얌마. 너 왜 여기 짱박혀 있냐?"

"공연 다 보고 오셨어요?"

"끝나자마자 왔지. 와, 진짜 오늘 너 대박이었다."

도훈은 다른 남자 후배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형, 괜히 소문내지 마요. 애들보기 창피하니까."

"뭘 또 창피해? 아까 진짜 반응 장난 아니었다니까? 네가 무대 내려가고 가수들 올라왔는데도 계속 너 찾고 난리도 아니었어."

"정말요?"

도훈은 도망치듯 무대를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모르는 상태였다.

"너 자고 나면 슈퍼스타 되어있을 거야. 눈떠보니 슈퍼스타! 진짜로 있는 말이었구나."

"에이, 또 무슨. 무대에서 노래 한 번 했을 뿐인데."

"아니야. 벌써 대나무 숲에 글 올라오고 난리 났어. 한 번 봐 볼래?"

성수가 즐겨찾기를 해놓은 국성대학 인터넷 익명게시판을 도훈에게 들이밀었다.

<오늘 노래부른 오빠 누구야? 완전 내 스타일!>

<가수를 씹어 먹었다 진짜.>

<몸짱에 노래까지 잘 부르는 훈남 체육과 학생 찾습니다!>

<오빠, 절 가져요!>

노래를 부르고 내려온지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익명 게시판에는 거의 한페이지 넘게 도훈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도훈은 뒷골이 땡기는지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아놔, 이게 뭐야."

"뭔긴 뭐야 인마. 슈퍼 인싸 등극이지. 오늘부로."

"형 이건 진짜 아닌것 같아요."

"내 덕인 줄 알아. 좀 있음 너튜브에도 올라올 거다."

너튜브라는 말에 도훈이 기겁했다.

"촬영을 했다고요? 누가요?"

"아까 너 노래 부를 때 몇 명이 영상 찍고 있던데? 대구경 카메라로 찍은 사람도 있으니 4K 화질로 새끈하게 올라갈 거야. 지금쯤 올라오지 않았을까?"

성수가 핸드폰으로 너튜브 어플을 켜서 뒤졌다.

'와씨, 이건 괜한 일을 벌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합니까 주인님?]

'영상 당장 못 올리게 해야지. 초상권이라는게 있잖아.'

[그렇군요. 공인인 가수도 아닌 민간인 얼굴을 허락없이 공개할 순 없죠.]

도훈도 마찬가지로 성수와 함께 영상을 뒤졌다.

업로드 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편집을 거치는 시간 때문인지 아직은 영상이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근데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설마 유튜브에 영상 하나 떳다고 곧장 플레이어로 의심하진 않을테니까요.]

'흐음, 내가 국성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걸 아는 PK단이 미호 뿐일까?'

[그때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미호만 잘 입단속하면 될 것 같긴 한데.'

"아직 안 떴네. 암튼 기대해도 좋아."

"다 형때문이잖아요."

"뭐가 인마."

"갑자기 저를 일으켜가지고."

성수가 껄껄 웃었다.

"야. 나중에 내 덕에 쌔끈한 여자친구라도 사귀게 되면 한 턱내라."

"안 사겨도 된다니까 그러네."

"어차피 너 얼굴이랑 이름 다 팔려서 이제 다른 과에서 다 알아볼 거다. 아, 인싸의 삶이라니. 부럽다 도훈아."

"그럼 형이 나갔어야죠."

"난 노래가 안되잖아."

"아 놔. 진짜."

난감하긴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어떻게든 영상이 올라오면 초상권 침해 어쩌고 핑계를 대고 영상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국성대 안에서 얼굴이 팔리는 건 막을 수 없는 일.

도훈의 입장은 무척 곤란해졌다.

'젠장. 괜히 공연 따라갔다가 이게 무슨 꼴이람.'

[휴학이라도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뭘 또 휴학까지해. 원주인 소원이 교사되는 거였으니 소원은 들어줘야지. 암튼 한동안 조용히 지내야겠다. 어차피 반짝 스타라는 게 오래가긴 힘드니까.'

[만약 계속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요?]

'그땐 다른 방법을 찾아 봐야지.'

[정말 난처하게 되었군요. 성수군이 일을 키우고 말았네요.]

'아오, 진짜 성수만 아니었으면 뒤지게 패버렸을 텐데.'

도훈은 성수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탓할 수 없었다. 더구나 호의로 벌인 일이라는 걸 알기에 더 그랬다.

"여기서 계속 설거지나 할 거야?"

"저도 일 도와야죠. 회장이라고 손넣고 구경만 하면 애들이 욕해요."

[3일내내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마지막이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는 거야. 원래 끝이 좋아야 다 좋다고 하잖아.'

[얍삽한 방식이군요.]

'처세술이라고 봐야지.'

"참나. 그래 간만에 학과 행사나 돕지 뭐."

성수도 옆에 있는 빨래 장갑을 끼더니 설거지를 도왔다.

손님 회전이 빨라 식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일회용품을 쓰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대학 측에서 ESG 축제어쩌고 환경보호를 위해 일회용품 사용을 제한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무슨 형까지 설거지를 해요.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하지."

"오늘은 다 텃어 인마. 하루 쯤 놀아도 괜찮아."

커다란 덩치의 성수가 쪼그려 앉아 그릇을 씻는 모습을 퍽 우스꽝스러웠다. 도훈은 묵묵히 자신을 돕는 성수를 보자 더욱 화를 내기 힘들었다.

'나참. 저렇게 착한 성수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잘 해결 될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 사이 그의 영상은 유튜브가 아닌 단톡방을 통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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