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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517화 (1,472/2,000)

1500. 대학 축제-125-

대근이 급히 욕실에서 튀어나와 물었다.

"미호. 너 혹시 사람 죽였어?"

"······?"

대근이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걱정마.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 일단 사체부터 소각하고 증거를 인멸하면···. 맞다, CCTV에 찍힌건 아니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욕조에 피가 한가득 있던데?"

미호가 피식 웃었다.

"저건 생닭피야. 간이 필요해서 한번에 잡아다 핏물을 뺀 거라고."

"아, 닭이었어?"

대근은 그제야 미호가 보통 사람처럼 음식을 먹지 않고, 사람이나 동물의 생간을 빼먹는다는 걸 떠올렸다.

단, PK단에 입회 조건으로 무고한 살상을 하지 않기로 서약한 뒤로는 생닭을 직접 사와서 간을 섭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근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난 또 사람이라도 죽인 줄 알았네."

"왜? 진짜로 죽였으면? 날 보호해 주려고 그랬어?"

"당연하지. 미호 넌 우리 팀이잖아. 같은 편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

당연하다는 대근의 반응에 미호가 속으로 울컥했다.

하지만 겨우 감정을 숨기며 대근에게 되물었다.

"PK단은 무고한 시민을 해치면 안되는 거 아니야? 지금 그 말은 조직을 배신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배신이라니. 그거랑은 다르지."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데? 그것도 플레이어도 아닌 일반인을?"

"미호 네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리가 없잖아. 분명 죽을 짓을 했으니 죽였겠지. 난 널 믿으니까."

"······."

미호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에 대해 맹목적인 신뢰를 보이는 동료를 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슬펐다.

"참나. 이 아저씨 이제보니 순 나쁜 사람이었네?"

"내가?"

"동료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응징해야지. 그렇게 물러가지고 어떻게 조직에서 버티려고 그래? 만년 지부장인 이유가 혹시 그것 때문 아니야?"

대근이 머쓱하게 웃었다.

"솔직히 난 승진 같은 거 미련없어. 그냥 주어진 일만 열심히할 뿐."

미호가 다시보니 대근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뛰는 일용직 노동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인천까지 불려가서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위해 만사를 팽개치고 달려온 것이다.

'아. 대근 아저씨한테는 너무 미안한데.'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미호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발부터 씻어. 욕실이 께름칙하면 싱크대에 발올리고 씻어도 돼. 어차피 안 쓰는 곳이니까."

"그, 그럴까?"

대근은 양말을 벗더니 주방의 싱크대 위에 발을 올리고 빡빡 씻었다. 그 와중에 미호는 어딘가에서 500ml 생수를 꺼내 식탁위에 놓고 앉았다.

"근데 우리집엔 왜 왔어? 장기 출장 다녀왔으면 집부터 들어가지."

"응? 당연히 미호 너보러 왔지."

발을 다 씻은 대근이 미호와 마주 앉았다.

주변이 온통 암막 커튼으로 쳐진 내부는 주방 옆 간접등 하나로만 불을 밝히고 있어 무척 음침했다.

"난 창범이에게 분명히 내 뜻을 전했어."

"들었어. 물론 난 미호 네가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해."

"근데?"

"그래도 한 번은 내가 설득해봐야지 않나 싶어서.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있는데."

세월이라는 말에 미호는 대근과 함께 했던 임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과 달리 대근이 대머리도 아니고, 젊었던 청년 시절. 두 사람은 늘 호흡을 맞춰 플레이어들을 사냥했다.

그리고 십수년이란 시간이 흘러 대근은 머리가 벗겨진 PC방사장이 되었지만, 미호는 여전히 20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월이라. 인간인 대장에겐 긴 시간이었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나에겐 딱히 긴 시간은 아니었어."

미호가 일부러 정을 떼기 위해 차갑게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수백년을 살아온 미호에겐 그 시간이 생각보다 짧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아. 근데 그만둔다는 진짜 이유가 뭔지는 알려 줄 수 있지 않아?"

"창범이에게 다 설명했어."

"아니. 그런 이유 말고 진짜 이유 말이야."

대근이 너무나 진지하게 물어보는 바람에 미호도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같은 팀원을 보호하기 위해 떠난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도훈이 걸어놓은 금제가 그런 행동을 원천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유?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니야?"

"알고 있겠지만 내가 PK단에 합류한 건 너희들처럼 숭고한 영웅이 되겠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야. 플레이어를 잡게되면 그 정기를 흡수하게 해준다는 거래 때문이지."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껏 활동해 보니, 간간이 사냥하는 플레이어의 정기라는 게 겨우 노화방지의 효과 정도밖에 안되더란 말이지. 내가 정기를 흡수하려는 건 인간이 되기 위한 목적도 있는데."

대근이 경청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 그러다 보니 내가 여기에 속해 있는 게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더라고."

"미호, 혹시 사냥감이 부족해서 그런거면 내가 특임조 같은 곳으로 전출을 건의해 줄수도 있어. 지부 소속이 아니라, 중앙본부에서 활동하는 부댄데, 전국구로 활동하는 특별 조직이거든. 거기에 가면."

"아니야. 그렇게까지 안해도 돼. 실은 근래들어 PK단 활동이 조금 시시해 졌거든,"

"아니, 미호."

"미안하게 됐네. 대장만 헛걸음 시켜서. 난 그만 둘거고, 조만간 이 집도 정리할 예정이야."

"하. 정말이지 설득이 안되는 구만. 미호 없이는 힘든 거 알잖아. 조금만 더 생각해 볼 수 없어?"

대근이 끈질기게 매달렸다.

미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새로온 염동력자 쓸만해 보이더라. 건이라고 했나? 잘 키워봐. 딜러로서 재능이 있어 보이니까."

"걔는 너무 어려. 경험이 없어서 중요한 전투에서 제 역할을 못해낼 수도 있다고."

"흐음. 다 그렇게 크는 거지. 어디 처음부터 완성된 단원이 있던가."

"나참. 너무 의지가 확고하네."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 내가 대장에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걸 알려줘서."

미호가 진심으로 감격하며 대근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20대를 함께했던 미호는, 한때 대근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었을 정도로 애정이 깊었다.

하지만 구미호와 인간은 맺어질 수 없었다.

"미호."

그때 군령자인 미호의 내면에서 영혼들이 떠들었다.

{기왕 가는 거 떠나기 전에 한 번 주고가는 게 어때?}

{미쳤어? 저 대머리랑? 아무리 남자가 궁해도 이건 아니지.}

{왜 이래? 대근도 머리 벗겨지기 전엔 미남이었다고. 지금이야 세월의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벗겨진 중년이 되었지만.}

{맞아. 대근인 힘이 장사잖아. 모르겠지만 정력도 끝내줄 걸?

역발산기개세! 으라차차!}

{다들 그만해. 무슨 남자만 만나면 어떻게 해보려는 못된 버릇좀 고쳐. 미호를 헤픈 여자로 만들지 말라고.}

{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남자랑 이미 자지 않았나?}

미호는 다른 영혼들이 떠드는 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대근에게 말했다.

"손이 많이 거칠어 졌네. 대장도."

"넌 옛날과 똑같아."

"알잖아. 내가 남자의 정기를 빨아 먹으면서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지."

"물론 꼭 그런 목적이 아니어도 가능하긴 해."

"응?"

미호가 유혹적으로 윗입술을 핥았다.

"헤어지는 마당에 한 번 줄수도 있다는 소리야."

"뭐, 뭐래는 거야?"

대근이 극도로 당황한듯 귀가 시뻘개졌다.

대근은 흥분하면 귀가 빨개지는 특성이 있었다.

미호가 그 모습을 보고 깔깔 거렸다.

"이래서 대장이 귀엽다니까? 조금만 놀려도 귀가 새빨개지니까.

미호가 처음으로 웃어 보이자 대근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거참, 젊을 때도 장난이 심하더니, 요즘도 똑같네. 창범이한테만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장난 아닌데? 진심인데?"

"왜 이래? 사람 놀리지 말고. 나 이제 아저씨야."

"알지."

"크흠. 암튼 이러면 창범이한테 부탁할 필요는 없겠네."

"그게 무슨 소리야? 부탁이라니?"

미호가 귀를 쫑긋 세웠다.

"PK단을 탈퇴한다고 했을 때 난 뭔가 곡절이 있나 싶었거든.

그래서 계속 대답을 안하면 창범이한테 속마음을 읽어보라고 할 참이었어."

"······."

미호는 자기도 모르게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났다.

창범의 마인드 리딩 능력이면, 자칫 도훈의 존재가 발각될 수도 있었다.

"근데 사정을 들어보니 충분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미호에게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혹시 창범이 벌써 날 읽은 건 아니지?"

"아니야. 내가 그러지 말랬어. 그건 동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이런, 미호.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창범의 존재가 너무 거슬리는데.}

{나중에라도 창범이 속마음을 읽게 되면 일이 다 틀어질수도 있다고.}

미호는 갑자기 불안감이 들었다.

동료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 자칫 잘못하면, 동료를 궁지에 빠뜨릴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으, 음. 잘했어. 만약 창범이 멋대로 내 머릿속을 훔쳐봤다면 정말로 화 났을 거야."

"걱정마. 네가 PK단에 속해있건 아니건, 우린 너를 끝까지 동료로 생각할 테니까. 지금의 헤어짐이 결코 끝은 아닐거라고 믿어. 언제든 마음 바뀌면 연락하라고."

{잘 생각해 미호. 도훈의 옆에 붙어 있으면, 더 이상 밤마다 남자를 찾지 않아도 돼. 굳이 도움도 안되는 PK단에 붙어 있을 필욘없다고.}

{그렇다고 보기엔 창범이란 존재가 너무나 위협적이야. 만에 하나라도 미호가 탈퇴한 진짜 이유를 알게 된다면, 미호까지 위험해 질거야. PK단은 플레이어를 돕는 자들까지 용서하지 않으니까.}

{지금이라도 그냥 창범을 제거해 후환을 없애는 편이 좋지 않을까?}

영혼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부딪쳤다.

미호는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조용히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으니까.'

"흐음. 대장의 뜻은 알겠어. 혹시 하루만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어?"

"정말?"

"응. 나에게 조금만 시간을 줘."

"그야 물론이지! 잔류해준다면 더 좋고."

"그건 아직 결정 못했어."

"그래.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너무 폐를 끼친것 같네. 그럼 푹쉬어. 내일 연락할게."

대근은 미호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얼른 물러날 생각이었다.

후다닥 현관 앞으로 나간 대근은 핏물로 가득찬 욕조가 문득 떠올랐는지 미호에게 말했다.

"맞다. 생닭 필요하면 내가 시골에서 양계장 하는 분이랑 친한데 소개시켜 줄까?"

"얼른 가."

"그, 그래. 암튼 내일 연락해!"

대근이 집을 나서자 미호는 혼자 어두운 거실을 서성 거렸다.

손톱을 깨물며 고민에 빠진 미호는 결심을 한 듯 전화기를 꺼냈다.

'PK단을 나가는 게 어쩌면 동료를 더 위험에 빠뜨리는 결정이 될 수도 있겠는데. 차라리 직접 물어보고 결정하는 편이 낫겠어.'

미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인마. 너 전화온다."

성수가 벨소리를 듣고 꿀잠을 자고 있던 도훈을 흔들어 깨웠다.

그런데 의자에 앉아 자고 있던 도훈은 기절한 것처럼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훈아. 너 전화 온다고."

성수가 한 번 더 어깨를 잡고 흔들자, 그제야 도훈이 번쩍 눈을 떴다.

"네?"

"어제 날샜냐? 의자 위에서 무슨 잠을 그렇게 깊게 자?"

도훈이 손등으로 입가에 흘린 침을 훔쳤다.

"아 네, 조금 피곤해서요."

"너 전화 왔다고. 방금 끊겼으니까 확인해봐."

"아, 네."

도훈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확인했다.

1시간 좀 넘게 잔 것 같은데 5시간은 푹 잔 것처럼 컨디션이 올라와 있었다.

'어라? 이 번호는.'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도훈이 전화를 받았다. 공연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인지, 주변이 시끄러워 통화 소리가 들리진 않을 것 같았다.

"여보세요?"

-저예요.

"갑자기 웬 전화? 혹시 긴급히 내가 알아야 되는 내용이라도?"

전화를 건 상대는 미호였다.

며칠 전 포섭한 PK단의 스파이.

-궁금한게 하나 있어서요.

"뭔데? 말해봐."

-근데 왜 주변이 시끄러워요? 밖이에요?

"응. 그냥 말해. 귀가 밝아서 잘 들리니까."

-제가 계속 PK단에 남아 있는게 좋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제가 PK단에 속해 있으면, 더 위험한 게 아닌가 해서요,

"지금 그걸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저한텐 중요한 문제니까요.

"잘 들어, 마법사 아가씨. 우린 서로 계약을 맺은 거야. 난 너에게 주기적으로 정기를 보충해주고, 그 대신 너는 나에게 PK단에 대한 정보를 주기로. 근데 PK단을 그만둔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데 만약 그 사실을 들키면요? 제가 잡히면 같이 추적당할 수도 있어요.

"잡히다니? 왜? 누가 속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대?"

미호는 순간 움찔했다.

만약 여기서 창범의 존재를 실토했다가는 도훈이 먼저 창범을 노리겠다고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미호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건 아닌데, 아무튼 걸리면 더 위험하다는 뜻이었어요.

"그건 네가 잘 해야지. 이중스파이 노릇이 쉬운 줄 알았어 그럼?"

-음.

"통화 길게 못하니까 다음에 만날 때 다시 얘기해. 근데 PK단을 탈퇴하는 건 허락 못해주니까 알아서 처신하라고. 알아 듣겠어?"

-네.

도훈이 통화를 끝내자 성수가 물었다.

"뭔 얘긴데 그렇게 표정이 심각하냐? 설마 여자냐?"

통화내용이 들리진 않았지만 도훈의 표정을 보고 성수가 지레짐작했다.

"여자는, 짐승이지."

"짐승? 아하, 나처럼 짐승같은 사나이가 또 있었구만?"

성수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뇌까지 근육으로 똘똘 뭉친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는 도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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