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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516화 (1,471/2,000)

1499. 대학 축제-124-

나에게는 늘 상냥한 정음의 모습에 울컥 미안한 감정이 솟구쳤다.

'축제 기간 내내 너무 방치해 버렸구나.'

[주인님이 정음양에겐 약간 그런 경향이 있죠. 말로는 누구 보다 아끼신다고 하면서 정작 다른 여자들에게만 더 신경을 쓰시니 말입니다.]

'아끼니까 닳아지지 않게 해주려는 거지.'

[무슨 신박한 개소립니까 그건?]

'···들켰냐?'

소중한 것은 늘 곁에 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이 떠나간 뒤에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정음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언제나 나를 바라봐주고 응원해 주는.

막상 그녀가 나에게 없다면 나는 너무나 슬플 것 같다.

"늘 고생이 많아, 네가."

"아니에요, 오빠. 동기들이랑 다 같이 하는걸요."

"너한테 괜히 미안해지네."

"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너도 신입생인데 축제도 마음껏 즐기고 싶었을 거잖아. 과대 표 맡고부턴 너무 일만 시키는 것 같아서."

정음은 정말로 괜찮다는 듯 과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정말로 괜찮아요. 주점일 하면서 너무 재밌었거든요. 오빠가 그런 말씀하시니까 오히려 제가 더 미안해지네요."

"네가 왜 미안해?"

"오빠 바쁜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서요."

아, 정음은 그 와중에도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정음에게 나는 늘 바쁜 존재였다.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조차 잘 내지 못하는.

실은 그 시간 동안 대부분 다른 여자를 따먹고 있거나, 혹은 공략하고 있는 건데도 말이다. 완전한 기만이다.

"무슨 그런 말을 해? 신경 쓰이게 하다니."

"네?"

"너한테 신경을 쏟는 건 나에겐 가장 기쁜 일이라고. 그러니 그렇게 말하지 마."

"아···, 오빠."

정음이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말 한마디로도 저렇게 감격해하는 정음이를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정음아. 축제 끝나고 주말에 볼래?"

"이번 주말에요?"

"응. 시간 괜찮아?"

"네."

정음이 잔뜩 기대하는 눈치로 대답했다.

"이제 가을인데 단풍 구경이나 가려고. 간만에 드라이브 어때?"

"너무 좋죠!"

정음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하다 주변을 의식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아니야. 암튼, 이번 주말에 꼭 보는 거다?"

"네."

"정음아, 여기 좀 도와줘."

그때 누군가가 정음이를 불렀다. 정음이 아쉬운 눈초리로 말했다.

"오빠, 저 다시 일하러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일 봐."

"네!"

정음은 신을 내며 뛰어갔다.

간만에 데이트 한다는 약속에 저렇게 기뻐하다니.

평소에 그녀를 더 아껴줄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주말에 단풍 구경이라고요?]

'응. 오늘은 너무 정신없을 것 같고, 정음이도 새벽에 일 끝나면 피곤할 테니까.'

[그나저나 별일이군요.]

'뭐가?'

[주인님은 보통 데이트 같은 건 생략하시잖습니까. 적당히 뭉개다 모텔로 직행하는 게 정석코스였는데요.]

'그거야 공략을 위해서 최대한 시간을 절약하려는 거고. 이제 정음이는 공략 대상은 아니잖아.'

[그럼요?]

'일종의 정실부인?'

[아니 무슨 스무살에 시집도 안간 처녀를 난데없이 유부녀로 만드십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또 혹시 알아? 나중에 나랑 정말로 결혼하게 될지도.'

[그렇게 많은 여자들하고 실컷 즐기셔놓고선, 결혼은 처녀인 정음양하고 하신다고요? 양심은 대체 어디다 팔아먹으신 겁니까, 휴먼?]

'총각 때 좀 논 게 어때서?'

[좀 놀았어야 말이죠.]

'아니 내가 유부남인데 외도를 한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여자 친구를 사귄 상태로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그런 비난을 피하려고 안 사귀는 거잖습니까?]

'음, 암튼 정음이만 모르면 돼. 내가 난봉꾼이란 걸.'

[역시 주인님은 양심이라곤 털끝 만큼도 없는 분이십니다.]

'칭찬으로 듣겠어.' 후배들을 하나씩 격려하는 와중에 성수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네, 형."

-와썹 브로!

"아 쫌. 하지 말라고."

-어? 말이 짧다?

"제가 그랬어요?"

-어디냐, 이도훈 씹새끼야.

"주점 왔죠. 아직 개시 전이에요. 왜요?"

-왜요라니? 거기서 뭐하는데? 얼른 야외무대로 안 튀어 와?

"벌써요? 공연 시작 8시 아니에요? 아직 2시간 넘게 남았는데?"

-장난하냐? 맨 뒷자리서 까치발로 볼래?

"전 키가 커서 그냥 봐도 보일 텐데요?"

-이 새끼가 오늘따라 자꾸 개기네? 너 당장 튀어와라. 10초 준다.

"아 형. 진짜 너무 이르다니까요."

-지금 가도 맨 앞자린 글렀엄마. 조금만 더 늦으면 완전히 뒤로 밀린다고. 벌써 극성팬 새끼들이 앞자리 다 잡아놓고 기다리는 중이야.

"극성팬이요? 신인 아이돌 그룹에도 극성팬이 있어요?"

-너 모르냐? 원래 뜰 것 같은 그룹엔 선착순으로 시조팬 되는 게 요즘 대세거든. 업어키운 걸그룹이랄까?

"당최 뭔 소린지."

-잔말 말고 튀어와라. 아놔, 체육과 군기 다 빠졌네. 선배가 튀어 오라는데 주접이나 떨고.

"아앗,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통화를 끊고 지배인 격인 서현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서현아. 미안한데 성수 선배가 잠깐 보자는데 어디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뭘 그런걸 저한테 꼬치꼬치 허락을 맡으세요. 오빠 편한 대로 하시면 되지."

"아니 못 도와줘서 미안하니까 그렇지."

"에이, 괜찮아요. 오빠가 그렇다고 서빙을 할 것도 아니고."

"그럼?"

서현이 찡긋하고 윙크했다.

"오빤, 오빠만의 역할이 있잖아요. 그걸로 충분해요."

왠지 묘한 뉘앙스의 발언이었으나, 시간이 없었으므로 알겠다고 하고 성수에게 달려갔다.

보법을 이용하면 단숨에 도약이 가능하겠지만, 축제 기간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아 일정 속도 이상을 낼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근데 방금 서현이가 말한 나만의 역할이란게 뭐지?'

[뭐 체육과의 정신적 지주 그런 거 아닐까요?]

'정신적 지주가 아니라 육체적 자지를 말하는 거 같아서 말이야.'

[네?]

'그러니까 8선녀의 기쁨조랄까?'

[너무 나가신 거 아닙니까? 주인님이 무슨 공공재도 아니고요.

···근데 또 아니라고 하기보단 맞는 것 같기도 하군요.]

'에이 모르겠다. 그냥 한 말이겠지.'

야외무대는 밑으로 파인 원형 극장의 형태였다.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을 1/3만 잘라서 가운데 무대를 세우면 딱 그런 모양이 될 것 같았다.

성수는 맨 앞에 자릴 잡고 있다가 내가 등장하자 크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다, 도훈아!"

'손 안 흔들어도 다 보인다고 곰탱씨.' 성수는 워낙에 등빨이 좋았기 때문에 멀리서 봐도 눈에 잘 띄었다. 원형 극장의 아래층으로 빠르게 뛰어가자 성수가 나를 반겼다.

"와썹?"

"응? 브로는 왜 안 해요?"

"아니 그냥 왔냐고 물은 건데. 왔어?"

"아 놔, 진짜 이 형을 어떡하지?"

"새끼야. 일단 앉아. 자리부터 잡아야 해. 한 자리 맡아놨다고 얼마나 눈치를 주던지."

"누가 눈치를 줘요?"

"누구긴 인마. 저기 극성팬들."

성수의 말대로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벌써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 폰을 만지작 대고 있는 사내들이 보였다. 그런데 나이대가 도저히 대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저분은 혹시 교수님 아니에요?"

"쉿-. 들린다. 일단 앉아봐."

성수는 나를 자리에 앉히더니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잘은 모르겠는데 우리 학교 학생들 아닌 거 같아."

"아니라고요?"

"어. 말 그대로 축제에서 공연한다니까 시간내서 쫓아온 팬들이야. 네가 교수님이라고 부른 사람은 아마 나이 지긋한 직장인일거고."

"헐!"

엄청난 충격이다.

이제 오후 5시 조금 넘은 시간인데 중년 남성이 걸그룹 공연을 보기 위해 직장도 팽개치고 나왔다는 소리였다.

"아니 무슨 40대는 되어보이는 구만. 일찍 결혼했으면 딸 같은 나이 아니에요?"

"짜식아. 사랑 앞에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야."

"그래도 저건 아니지."

"네가 이해하라. 오죽하면 그렇겠냐."

[주인님도 원래 40대 잖습니까?]

'액면은 20대잖아 지금은.'

[어쨌든요. 저분은 그냥 순수한 팬심이지만, 주인님은 아예 걸 그룹 멤버들을 실제로 따먹지 않으셨나요? 주인님이 누굴 비난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팩트로 때리지 마. 아프다.'

"근데 오늘 나오는 그룹이 이렇게 인기가 많았어요? 대학 축제공연에 우리 대학 사람도 아니면서 2시간 일찍 와서 자리를 잡을 만큼?"

"어? 너 몰랐냐?"

"네.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야 인마. 그래도 안면도 익힌 사인데 관심좀 갖지. 요새 얘들 엄청 뜨잖아. 조만간 대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실시간 음원차트벌써 10위권을 넘보고 있는데."

"그 정도라고요?"

"어. 비주얼 깡패라는 소문이 있어."

"저희가 실제로 봤을 땐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요?"

"그때야 지망생 때였고. 지금은 카메라 마사지 좀 받으니까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일걸? 실제 데뷔 전에 얼굴도 적당히 고치니까. 아, 내가 사진 보여줄까?"

성수가 사진첩에 담긴 걸그룹 멤버들의 프로필을 보여주었다.

손가락을 옆으로 넘길 때마다 얼굴이 바뀌었는데, 제희, 링링, 린다, 미소까지 모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땐 어설픈 연예인 삘 나는 민간인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정말로 아이돌이었다.

"헐!"

"대박이지? 완전 다르지?"

"얘들 언제 이렇게 예뻐졌어요? 아깐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실제로 영상통화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응? 아까? 뭔소리야?"

성수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렸다.

"아뇨. 저도 실은 잠깐 검색해봤거든요."

"새끼. 아닌 척 하더니 관심 존나 많네. 암튼 이건 프로필 사진이니까 어느 정도 보정도 들어갔을 거야. 근데 조금씩은 손댄것 같기도 해. 눈하고 코가 살짝 달라진 듯?"

"그래 보이네요."

물론 원판이 뛰어난 것은 인정이다.

평범한 얼굴로는 아이돌은커녕 지망생도 될 수 없는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이제와 보니 우리과에 있는 몇몇도 얼굴을 조금만 손대고 보정하면 아이돌이 되기에 충분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정음이나 아영이, 희주 정도만 돼도 아이돌 충분히 쌈싸먹지 않을까?'

[연두양과 나연양은요?]

'음, 쩌리 정도는 가능할듯?'

[쩌리라니요. 말씀이 심하시네요. 사람보고 쩌리가 뭡니까?]

'아니, 센터급은 약간 무리라는 소리지.'

"근데 진짜 여기서 두 시간씩이나 죽치고 기다리자고요? 고작 몇 걸음 앞에서 보자고?"

"인마. 콘서트에서도 몇 미터 차이로 십수만원씩 가격이 벌어지는 게 이 바닥이야. 가까이서 보려면 그 정도 희생은 치러야지."

"그래도 이건 너무 시간 낭비 같은데요. 형이 그냥 자리 맡아주시면 안 돼요?"

"안 돼. 방금도 한 자리 더 차지했다가 옆에서 싸움 날 뻔했어."

"진짜요? 소지품 같은 거 올려놓으면 되잖아요."

"그런 게 안 통한다니까? 소지품만 있으면 바로 치워버린다고.

이 바닥이 어떤 바닥인 줄 알고."

성수는 덩치에 맞지 않게 유독 걸그룹이라면 환장했다.

나처럼 정말 따먹기 위해서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대체 무슨 심리인지 모르겠다.

'진짜로 특이하단 말이야? 저 덩치에 아이돌 빠돌이라니.'

[사람마다 좋아하는 건 다르니까요.]

'몰라. 따먹지도 못할 여자에 미련을 갖는건 좀 웃긴다고 봐.'

[주인님은 지극히 현실주의자고요.]

'그나저나 성수랑 같이 보기로 약속을 했으니 영락없이 여기 붙잡혀야 겠네. 대체 여기서 뭘 한담?'

난처한 상황이었다.

1분 1초도 아까운 마당에 사내새끼들 우글거리는 무대 앞자리에 2시간 넘게 죽치고 있어야 했다.

이제와서 싫다고 돌아간다면 성수가 몹시 실망할 것이다.

'젠장. 꼼짝없이 갇혔네.'

[차라리 한숨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녁을 위해 체력을 비축해 놓는게 좋지 않을까요?]

'맞네. 난 어디서든 꿀잠 잘 수 있지?'

[수면제 아이템만 있으면요.]

'그거 근데 마약 성분 있는 거 아니지?'

[마약성분이라뇨?]

'전생에 내시경 찍을 때 맞은 프로포폴 주사 같은 느낌이었거든. 자고 일어나니까 너무 개운한 게.'

[성분은 다르지만, 원리는 비슷할 겁니다. 중독성은 없으니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알았어.'

나는 수면제를 몰래 먹은 뒤 성수에게 피곤해서 앉아서 잔다고 전했다. 성수가 피식 웃었다.

"이런 데서 잠이 오겠냐? ···얼레? 진짜 자네?"

* * *

대근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호의 집은 예전에도 몇 번 와봤지만, 어딘가 기괴한 느낌이 있었다.

일단 가구가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냉장고나 요리를 위한 장비도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팔기 위해 내놓은 집처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과 거실은 어딘지 모르게 으슬으슬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창가마다 암막커튼이 설치되어있어 늘 어두컴컴한 것이 마치 귀신 소굴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미호,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문 앞에서 대근을 맞이한 미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프다고?"

"···좀 컨디션이 안 좋네."

"이런, 감기라도 걸린 거야? 아, 구미호는 감기 안 걸리나?"

"밖에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으, 응."

대근이 머쓱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가려다 문득 자신의 신발과 옷이 너무 더럽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 미안. 인천에서 출장 끝나고 바로 오느라."

"상관없어."

"바, 발이라도 좀 씻을 수 있을까?"

"응."

대근은 신발을 벗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갔다.

문을 열어본 대근은 기겁하며 소릴 질렀다.

"으, 으악!"

욕조 안이 핏물로 가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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