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 대학 축제-123-
도훈이 학과 후배들을 격려하고 다니는 사이, 연두와 나연은 둘이서 안주를 담을 접시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나연이 연두에게 말했다.
"왜 그랬어?"
"뭘?"
"아까 희주한테 말이야. 너답지 않게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거야?"
연두가 아까 일을 떠올리더니 후회막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몰라. 괜히 심술이 났나보지. 희주한테."
"희주랑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별로."
"근데 왜 심술이 나?"
나연은 시무룩해진 연두를 걱정하고 있었다. 늘 단짝으로 지내다보니 얼굴만 봐도 친구가 어떤 심정인지 알아채는 것이었다.
연두가 푸념하듯 말했다.
"너 1학기 때 기억나?"
"1학기 때?"
"어. 정음이가 새터 갔다 와서 막 포텐 터질 때 말이야."
"아아, 기억나지."
"그때 우리가 정음이 엄청 괴롭혔잖아. 일부러 따돌리고 시비걸고."
"그랬지. 생각해보니까 우리 참 못 됐었다 그치?"
나연이 키득거렸다.
"솔직히 나 처음 우리과 왔을때부터 나연이 네가 우리과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나연이 민망해했다.
"뭐래? 갑자기 웬 뚱딴지 같은 소리야?"
"진심이야. 그러니까 너한테 고백한 거잖아."
"참나. 여튼 근데 왜?"
"근데 갑자기 정음이가 급부상 하면서 너랑 나랑 둘 다 이인자로 밀려나 버렸잖아. 체육과 원톱은 정음이, 그리고 우리가 원투펀치라면서."
"그건 솔직히 좀 기분 나쁘더라. 그래서 괜한 심술에 정음이한테 못되게 굴었던 것 같아. 근데 같이 한 학기 지내면서 금방 또 친해졌잖아. 지내고 보니까 정음이 얘가 참 괜찮더라고."
"희주도 정음이의 경우랑 비슷해."
"비슷하다고?"
"희주 고년이 여름 방학 지나면서 갑자기 확 치고 올라와 버렸잖아. 이상한게, 성형을 한 것 같진 않은데, 어쩜 하루 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예뻐져 버렸으니까."
"본인 말로는 젖살이 빠졌다고 하던데?"
"젖에 살은 더 찐것 같더만 무슨?"
"뭐래 븅신이."
"암튼, 이제 다들 희주가 넘버 2라고 생각하고 있어."
"희주만 있니? 아영이도 있지."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가 어쩌다 쩌리 신세가 됐을까? 다른과 갔으면 이름 좀 날렸을 레벨인데."
결국엔 열등감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넘버 2에서 밀려나 이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게 되자 시쳇말로 열폭한 것이다. 정음이까진 인정했지만, 빻녀의 대명사, 체육교육과 팔선녀 중 가장 밑이라고 생각했던 희주에게 역전당한 것이 분했던 것이다. 그런 시기와 질투의 감정이 하필 오늘 폭발해 버린 것이고.
연두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 나연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것 때문이었구나? 희주한테 괜히 심술 부린게."
"맞아.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쌓아 놨던 감정이 폭발해 버렸나 봐. 난 내가 되게 쿨한 줄 알았거든? 근데 여전히 유치하고 철없는 중학생에서 하나도 안 자란것 같아."
"에이, 연두 네가 뭐가 아쉽다고 희주를 질투하니?"
나연의 위로에도 연두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쉽지. 몸매도 얼굴도. 희주는 더구나 남자애들한테 인기도 많잖아. 성격이 워낙에 화끈하니."
"희주는 희주고 너는 너지. 난 희주보다 연두 네가 더 좋은 걸?"
나연의 계속된 위로에 연두는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에휴, 너밖에 없다 나연아."
"나도 연두야."
"희주한테는 아까 한 번 더 사과했어. 말 심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잘했어. 희주도 이해해 줄 거야. 걘 쿨하잖아. 지금쯤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렸을 걸?"
"그렇다면 다행이고. 역시 나연이 너밖에 없는 것 같아."
"정말?"
"응. 이런 얘길 어디가서 누구한테 털어 놓겠어. 나만 찌질이로 볼텐데."
"연두 네가 뭐가 찌질하니?"
"그럼 나연아. 내가 좋아 도훈 오빠가 좋아?"
"으, 응?"
기습적인 질문에 나연이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의기 소침해진 연두의 비위를 맞춰주고 싶다가도, 막상 도훈 대신에 연두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연두는 머뭇거리는 나연을 보고 토라진 듯 말했다.
"뭐야? 역시 나보단 도훈 오빠였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됐어. 이미 머뭇머뭇 할 때 눈치 챘어. 실망이다 나연."
"아니야 연두야. 난 네가 더 좋아."
"엎드려 절받기 싫거든?"
나연이 억울해했다.
"근데 질문이 잘못됐어. 도훈 오빠는 남자고, 넌 여자잖아. 오빠는 이성으로서 좋고, 넌 친구로서 좋은 거지."
"그럼 질문을 바꿔볼게. 나랑 섹스하는 게 좋아, 오빠랑 하는 게 좋아?"
연두가 집요하게 캐물었다.
8선녀 중 유일하게 바이섹슈얼인 그녀는 도훈과 나연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즉, 여자대 여자로서 도훈을 사이에 두고 나연을 질투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나연을 두고 도훈과 경쟁하는 것 같은 독특한 포지션이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 도훈에 대한 감정 또한 점점 커지는 바람에, 자신이 나연을 더 좋아하는지 도훈을 더 좋아하는지도 헛갈렸다.
방금 나연에게 했던 물음은 어떻게 보면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도 같았다. 양자택일을 한다면 과연 누구를 고를 것인가 하는.
나연이 난처했는지 연두에게 되물었다.
"너부터 대답해 그럼."
"뭐야. 질문을 질문으로 받는 건 회피지."
"아니. 직면이지."
"뭐?"
"나 다 봤거든."
"뭘 봐?"
"어제 내가 씻으러 갔을 때 너랑 오빠랑 둘이서 몰래 한 거."
"아!"
연두가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 올랐다.
"너무 좋아하더라. 난 네가 그렇게 헐떡거리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잖아."
"뭐, 뭐야. 왜 훔쳐보고 그래?"
"내가 보려고 봤니? 대놓고 나 따돌리고 둘이서 하던데 뭘."
이번엔 연두가 반박했다.
"나연이 너도 했잖아."
"응?"
"나연이 너도 오빠랑 둘이서만 했잖아. 나도 다 들었어."
"그때 자는척 하고 있었구나?"
"······,"
"솔직히 말하면, 섹스는 확실히 남자랑 하는 게 훨씬 좋긴 해."
"인정."
"안으로 들어오는 게 다르잖아. 특히 도훈 오빠는···. 어우야, 진짜. 묵직하게 찔러 주는데."
"하지마. 누가 듣겠어."
"듣긴 누가들어? 여기 우리 둘 밖에 없는데."
"그래도."
나연과 연두는 도훈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의기투합했다.
"나연아. 적어도 우리끼린 싸우지 말자."
"으, 응."
"오빠가지고 서로 질투하면 그건 너무 괴로울 것 같아."
"맞아. 함께 가지면 되잖아. 굳이 나눌 필요가 있을까?"
"키키. 비록 쩌리로 밀려났지만 그래도 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상관없어."
연두의 말에 나연이 의문을 제기했다.
이제껏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게 의아할 정도로 근원적인 의문이었다.
"근데 연두야."
"응?"
"도훈 오빠가 과연 우리만 건드렸을까?"
"뭐라고?"
"아니 생각해보니까 뭔가 수상하지 않아? 우리과에는 너랑 나를 쩌리로 보이게 할만큼 예쁜 애들이 많잖아. 정음이도 희주도 아영이도. 아니 막말로 8명 다 어디가서 빠지진 않잖아. 다 매력 있고."
"그렇지. 오늘 샤워하면서 보는데, 몸매가 다들···,"
"내 생각엔 오빠가 우리만 따먹진 않았을 것 같아."
"듣고보니 그렇네. 설마 그럼 다른 애들도?"
얘길 하다보니 갑자기 두 사람은 누가 도훈과 잤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정음인 백퍼 했을 듯."
"정음이? 에이, 아니야. 걔는 진짜로 순진하다고."
"사람이 순진한거랑은 별개의 문제지. 은근 백치미 같은 게 있는데, 또 그런 애들이 몰래 부뚜막에 올라가더라고."
"난 아닌거 같은데. 희주면 모를까."
"희주는 빼박이지. 도훈 오빠한테 먼저 들이댔을 듯."
"아영이는 어떻게 생각해?"
"아영이는 그런 거 안 좋아할 것 같지 않아? 남자애들하고 말도 거의 안하던데. 생긴건 예쁘장 한데, 별로 남자한테 관심 없을듯."
"근데 좀 수상한 점이 있긴 해."
"뭔데?"
"아영이 원래 과생활 거의 안했잖아. 1학기때는."
"그렇지."
"근데 여름 캠프 이후로 갑자기 학과 생활 엄청 열심히 하고 있거든. 뭔가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
"듣고보니 그렇네. 학회장이 된 오빠의 비밀 애인이라면."
"대체 몇명이나 있는 거지?"
생각하면 할수록 모두가 수상해보였다.
이제껏 자신들만 도훈을 독차지 하고 있다고 믿은 게 얼마나 나이브한 생각이었는지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에이, 근데 우리 너무 나간것 같다."
"왜? 가능성은 충분히 있잖아."
"하지만 그게 가능하려면 도훈오빠는 정력왕이어야 할 걸."
"엥?"
"생각해봐. 무슨 의자왕도 아니고 우리과 여덟명을 돌아가면서 매일 따먹는다고? 하루 한 명씩 해도 일주일 내내 안 쉬고 돌려야 하는데?"
"혹시 그래서 우린 1+1인거 아니야? 일주일 로테이션 돌리려면?"
"억!?"
말하다보니 딱 맞아떨어지는 공교로운 상황에 나연과 연두가 서로를 쳐다보며 입을 틀어 막았다.
"미, 미친. 국성대 야스킹이야 뭐야···. 무서워."
"그래. 야스킹 왔다."
그때 도훈이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등장했다.
* * *
미안한 마음에 후배들을 돌아가며 격려하는데 주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도훈 오빠가 과연 우리만 건드렸을까?>
워낙에 발달한 청각에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속삭임을 굳이 일일이 찾아 듣진 않지만, 내 이름이 떡하고 등장하자 검색 키워드에 걸린 것처럼 귀를 쫑긋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저런, 연두양과 나연양이 주인님을 의심하고 있는데요?]
'그러네. 저걸 이제 깨달았단 말이야?'
[모를 수도 있죠. 보통 사람들은 섹파를 동시에 여럿 둔다고 생각 못 할테니까요. 특히나 한 과 안에서면.]
'흐음. 아영이나 서현이는 그나마 입이 무거워서 괜찮았는데, 쟤들은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현재 8선녀 중에서 몇몇은 나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따로 문제가 된 적이 없을만큼 이제껏 침묵을 지켜왔다.
[소문이 나기 전에 차단해야 합니다.]
'그러게. 연두랑 나연이 떠들기 시작하면 학과 사람들 모두 아는 건 시간 문제야.' 나는 서둘러 두 사람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래, 야스킹 왔다."
"허헉!"
"오, 오빠? 언제 오셨어요?"
두 사람은 뒷담화를 하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나는 두 사람을 동시에 어깨동무하며 끌어 안았다.
"우연히 지나가는데 내 이름이 들리지 뭐야. 근데 야스킹은 대체 뭔데?"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냥 저희들끼리 농담한 거예요."
연두와 나연은 황급히 둘러댔지만, 거짓말이 익숙지 않은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농담이 아니던데? 너희들 혹시 나 의심하는 거 아니지?"
"저희가 왜요?"
"저흰 오빠 밖에 몰라요."
"흐음. 진짜?"
나연이 갑자기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왼쪽 뺨에 키스했다.
"아잉, 아시면서."
"뭐야, 나연이 너. 나도 할래."
반대편에선 연두가 오른쪽 뺨에 키스했다.
"얼렁뚱땅 입술로 때우네? 마치 흉보다 들킨 사람처럼?"
"에이, 오빠가 오해한 거라니까요."
"맞아요. 칭찬이었어요 칭찬."
"무슨 칭찬?"
"오빠가 정력왕이라는."
"풉-."
애써 둘러대긴 했지만, 이 부분은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괜히 학과에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간 여러모로 피곤해질 테니까.
"자, 두 사람 얘기 잘 들어."
"네. 오빠."
"말씀하세요."
"내 상식으로는 말이야···."
만약을 위해 한 번 더 두 사람의 입을 봉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상식개변을 통해 우리 셋의 관계가 절대로 외부에 발설돼선 안된다는 점과 더불어, 괜히 서로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간 앞으로 이런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내가 난봉꾼이라는 게 밝혀지면, 그간 몰래 즐겼던 관계도 끝장날 수 있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상식개변이 끝나자 두 사람은 비밀을 꼭 지키겠다며 다짐했다.
"저희야 오빠만 있으면 돼요."
"맞아요. 어제 너무 좋았어요. 오늘도 기대해도 되는 거죠?"
"오늘은 무리야."
"왜요?"
"마감하고 뒤풀이 하기로 하신 거 아니었어요?"
"뒤풀이는 할 건데, 누구 말대로 야스킹이 아니라서 정력이 후 달려."
"에이, 오빠가 무슨."
"정말로요?"
"생각해봐. 너흰 둘이고 나는 하난데, 어떻게 감당하겠어. 어제 진빠진 이후로 잦이도 안 선다니까?"
"말도 안돼."
연두는 집적 바지춤을 뒤적이더니 잦이를 덮석 잡았다.
"이래도 안 꼴려요?"
나는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꼴림을 강제 중단했다.
내공을 이용해 잦이를 강력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반대 역시 성립했기 때문이다.
"봤지? 지금 이 상태라니까?"
"아아, 오빠 어제 무리 하셨구나."
"너흰 둘이고 나는 혼자니까."
"힝, 우리 때문에 오빠만 고생이네요."
"알면 처신 잘하라고. 너희 둘을 상대하느라 등골이 휘어질 지경이니."
"알겠어요."
"명심할 게요."
"암튼 오늘도 고생해. 그나저나 둘 다 오늘 엄청 예쁘다. 화장잘 먹었네."
"히! 고마워요 오빠."
"우린 오빠 밖에 없어요."
"응, 수고."
연두와 나연을 단도리하고 주방에서 나오는데, 할리 퀸 복장을 한 정음과 마주쳤다. 정음은 나를 보자마자 환히 웃다가도,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해 고개만 꾸벅 숙였다.
"선배님 오셨어요?"
"응. 근데 난 선배보다 오빠소리가 더 듣기 좋던데."
정음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네, 오빠. ···누가 들을까봐서요."
정음은 확실히 나를 배려하는게 온 몸으로 느껴진다.
나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축제기간 너무 소홀히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