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3. 대학 축제-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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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에 50만원이 입금되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어떤 사람에겐 50만원이 큰돈일지 몰라도, 나에게 50만원은 다른 사람의 500원 정도의 가치도 없다. 간에 기별도 안가는 금액으로 사람을 서울에서 인천까지 오라가라하는 태도에 짜증이 치밀 정도였다.
'린다 이년이 나를 호구로 보는 건가?'
[네?]
'고작 현금 50으로 나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주인님이 돈으론 전혀 아쉬울 게 없는 분이긴 하죠. 하지만 평범한 대학생에게 50만원이면 한 달 용돈은 되지 않나요?]
'그렇겠지.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몸값을 제법 비싸게 쳐준 거구나.'
[네?]
'불법으로 오피 알바 뛰는 여대생들한테도 한 타임 50만원까진 안 줄 거 아니야? 그보다는 후하게 쳐준 셈이니까.'
[린다 양은 주인님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이쯤이면 나랑 석산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혀 모르는 게 아닐까 싶은데···.'
[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한테 뻔뻔하게 먼저 연락하고, 심지어 돈 50만원 가지고 사람을 인천까지 오라가라 할 수 있겠냐고.
자기 오빠가 보낸 조폭이 나한테 얻어터지고 심지어 지금은 나를 스카웃하려 하는 마당에 말이야.'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어쩌면 린다양은 주인님이 그때 조폭에게 혼쭐이 났다고 여기는 걸 수도 있겠네요.]
'그런 것 같아. 그러니 나를 이따위 싸구려 창남 취급하는 거 아니겠어? 푼 돈 좀 쥐어 주고 밤새 데리고 놀 콜맨 정도로.'
[와, 제가 다 열받습니다. 그때의 주인님과 지금의 주인님은 전혀 레벨이 다른 사람인데.]
레벨이 다르다는 로시의 말을 들으니 과거의 기억이 살짝 떠올랐다.
당시에는 린다나 제희 등등도 아이돌 지망생 신분이었고, 나는 그보다 더 보잘것 없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때 만난 아이돌 지망생들은 정식 가수로 데뷔하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사이 나 역시 비교도 안 되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한 때 편의점 주 허영자에게 스폰(?)을 받았었으며, 부잣집 고액 과외로 생활비를 벌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돈을 써도 평생 다 못 쓰고 죽을 것 같은 부자가 되었다.
또한 석산파의 행동대장 민수와 경합을 벌이기도 했던 싸움 실력은, 이제 손가락 하나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섹스 능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명기만 만나면 꼬리를 내리던 나는, 이제 동시에 여럿을 상대해도 끄떡없는 강철 정력의 사내가 되었다. 성욕만 받쳐 준다면 24시간도 박을 수 있다.
아, 이건 좀 오버인가?
'이 수모를 어떻게 돌려준다?'
[린다를 혼쭐 내주시죠.]
'근데 혼쭐 내준답시고 박아봐야 린다 좋은 일만 시키는 거잖아. 열받아서 확 따먹었는데 그게 린다가 원하는 거니까. 뭔가 불공정거래같은 느낌이랄까?'
[흐음, 그럼 그냥 안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약속을 펑크내는 거 죠. 어차피 다시 안 봐도 되는 사람들이니까요.]
'아니야. 그건 너무 소심한 방식의 복수야. 차라리 이건 어떨까?'
[어떻게 말입니까? 좋은 아이디어라도 생각나셨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나쁜 년 전략?'
[세상에서 제일 나쁜 년이요? 그게 대체 어떤년입니까?]
'그런 말이 있거든. 아무도 안 주는 년보다, 나 빼고 다 주는 년이 더 밉다고.'
[아! 설마!]
'그렇지. 린다만 쏙 빼놓고 나머지 셋만 존나게 따먹어버리는 거지.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저, 정말이지 주인님은 악독하군요.]
'린다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그 오빠라는 놈도 확 그냥 두들겨 패버려?'
[자중 하십시오. 지금 주인님이 패면, 그 사람 죽습니다.]
'암튼, 린다만큼은 가만 안 둘 작정이야. 감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다니.'
[주인님이 그럼 코털인가요?]
'뭔 소리야? 내가 사자라니까.'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던 나는 문득 저녁 일정과 린다의 초대가 겹친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근데 이거 좀 복잡해졌는데?'
[네? 왜 그러십니까?]
'오늘 주점 끝나고 후배들하고 뒤풀이하기로 했잖아. 새벽까지.
'[아차!]
'아무리 일찍 끝나도 새벽 2시는 넘을텐데, 그 시간에 인천을 어떻게 넘어가냐는 거지.'
[그것도 문제군요.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다. 방법이 없진 않네.'
[어떤 방법 말입니까?]
'마법의 문고리.'
[하지만 마법의 문고리는 주인님이 직접 가본 곳으로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인천은 예전에 가본 적 있는데?'
[아이템을 귀속시킨 이후의 방문 장소여야 합니다. 그 전에 인천에 가본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요.]
'흐음.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차라리 지금 시간이 남으시면 인천을 미리 찍고 오는 방법도 있습니다.]
'인천을 미리 찍고 온다고?'
[포탈을 열어 두는 거죠. 여기가 출발이 아니라 도착점으로요.]
로시의 말은 이랬다.
어차피 새벽에 뒤풀이 끝나고 넘어가면 늦는다.
그렇다면 미리 출발해서 인천에 도착해 문고리를 열라는 뜻이었다. 결국 한 번은 직접 가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순서만 바꾸는 셈.
'그러면 되겠네! 좋은 생각이다.'
어차피 할 일도 딱히 없던 나는 곧바로 대학에서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지하철로 싸게 가는 방법도 있지만, 린다가 준 50만원을 남김없이 탕진할 생각이었다.
"기사님, 인천요."
"인천이요? 인천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는 뜻밖의 장거리 운전에 횡재수를 맞은 것처럼 목소리가 들떴다. 나는 린다가 메시지에 남긴 호텔 이름을 댔다.
"파라다이스 호텔요."
"인천 부두 쪽 말씀이시죠?"
"네."
기사가 미터기를 꺾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 시간에 서울에서 인천까지면 최소 4~5만원은 나올 것이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퍼주면 그만이다.
[그나저나 아이돌도 할 짓이 못 되는군요.]
'왜?'
[오늘 저녁까지 공연 뛰고 내일은 해병대 위문 공연을 가야 한다니 말입니다. 몸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겠는데요?]
'흐흐 원래 전성기가 짧은 직업들은 할 수 있을 때 바짝 땡기는 게 최선이야. 그리고 행사가 생각보다 수입이 짭짤할 걸?'
[하지만 군부대 위문 공연이라면 다른 행사보다 페이가 작지 않습니까? 군대도 국가의 녹을 받는 공무원 조직인데요.]
'그건 맞지. 하지만 군부대는 돈만 보고 가는 게 아니거든.'
[돈이 아니면요? 설마 남자들 보러 가는 건 아닐테고.]
'그게 아니라, 왜 저번에 군부대 위문공연 직캠 영상 터지고 순위 역주행한 그룹 있었잖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원래 군대가 다른 곳과 달리 여자 아이돌 그룹을 엄청 좋아하거든. 밖에선 듣보잡 취급받던 쩌리 그룹도, 군대에 가기만 하면 반응이 폭발적이란 말씀이야. 군통령이라 불릴 정도라고.'
[호오.]
'그래서 요새 신인 아이돌들은 무조건 군대는 찍고 간다고 봐야 해. 군인이라고 천년만년 군 생활만 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밖에 나오면 민간인이니까. 그때 자기 부대로 위문공연 와준 가수를 어떻게 배신하겠어?'
[그런 의도가 숨어 있었군요.]
'아마 공연 약속을 잡기도 어려웠을 거야. 요샌 위문공연가서 한 번 떠보려고 다들 극성이니까.' 기사님이 튼 라디오를 들으며 가고 있는데 문득 코인 소식이 들려왔다.
-비트코인이 연일 상한가를 갱신 중입니다. 연말에는 1억 간다는 소문이 뜨거운데 지금 이 자리에 전문가 한분을 초빙해 말씀들어보겠습니다.
-네, 코인이라는 게 말이죠···
라디오를 듣던 기사가 내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운전한지 20분만에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손님도 혹시 코인 같은 거 하시나요?"
"저요?"
"네 요새 젊은 사람들 저거 많이 한다던데."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기사님이 존댓말까지 붙이는 모습이 굉장히 매너가 좋아 보여 대답했다.
"그냥 조금 넣어둔 정도에요."
"그러시군요. 참, 세상이 많이 변했네요. 실물도 없는 것에 그렇게 사람들이 투자를 해대니."
그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안소영에게 맡긴 돈이 떠올랐다.
'안소영 쪽은 어떻게 되고 있으려나?'
[한번 연락해 보시죠? 그래도 500억이나 맡기셨는데 너무 무사태평이신 것 아닙니까?]
'설마 현직 의사가 돈 떼먹고 야반도주라도 했을라고.'
[의사라도 500억이면 그럴법 한데요.]
'안소영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생각난 김에 연락 한번 해봐야겠다.'
나는 곧바로 깨톡으로 안소영에게 연락했다.
예전에는 외국 나가면 국제전화 아니면 답이 없었는데 이제는 와이파이만 연결되면 세계 어디서든 바로 소통이 되니 정말로 세상이 많이 변하긴 한 것 같다.
-도훈 : 잘 지내지?
-안소영 : 텔레파시 통했나봐.
의외로 답장이 바로 왔다.
마치 같은 동네에 사는 것처럼.
-도훈 : 무슨 소리야?
-안소영 : 안 그래도 진척 상황 보고 하려고 했거든.
-도훈 : 오호, 나는 연락 없길래 돈 떼먹고 도망쳤나 싶었지.
-안소영 : 내가? 풉-. 나를 그렇게 못 믿어?
-도훈 : 아니. 못 믿었으면 그렇게 큰 돈을 맡겼겠어?
-안소영 : 사람을 못 믿으면 쓰질 말고.
-도훈 : 썼으면 믿어라. 그래서 믿고 있어.
-안소영 : 역시 대화가 잘 통하네. 일단 현금을 달러로 모두 환전해서 비밀 계좌로 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어. 사이즈가 커서 그런지 시간이 엄청 걸리더라고.
-도훈 : 오, 그럼 이제 남은 절차는?
-안소영 : 코인 거래소에 계좌 만들고 승인 기다리는 중인데, 이쪽에선 외국인이다보니 인증절차가 좀 까다로운 가봐.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승인 떨어질 것 같아.
-도훈 : 역시 믿고 맡기길 잘했네.
-안소영 : 도훈이 네가 벌면 나도 돈 버는 건데 당연히 잘해야지. 암튼 승인되면 바로 코인 매입 시작할 건데 생각해 둔 것이라도 있어?
-도훈 : 생각이라니?
-안소영 :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거 말이야.
물로 나는 코인에 대해선 잘 몰랐다.
사실 귀동냥을 잠깐 듣기만 했지 어떤 코인이 유망한지에 대해선 무지렁이 수준이었다.
-도훈 : 그냥 누나가 잘 아니까 알아서 해줘.
-안소영 : 나는 주식 전문가일 뿐 코인에 대해선 잘 몰라. 솔직히 코인이라는 게 주식처럼 대차대조표를 두고 기업 분석 같은 걸 할 수 없기 때문에 완전히 깜깜이 수준이야.
-도훈 : 흠, 그런거면 그냥 아무거나 사도 되지 않아?
-안소영 : 그러다 쪽박차면? 코인은 하룻밤에 100%도 오르지만 하룻밤에 마이너스 90%까지 우습게 간다고. 괜히 잘못 들어갔다가 원금 다 까먹고 나 원망하게?
-도훈 : 내가 누나를 믿고 맡겼는데 왜 원망하겠어?
-안소영 : 하-, 원래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른 법이랬어. 주식은 특히 더 그래. 펀드 매니저만 믿겠다고 해놓고 정작 원금 반토막 나면 칼들고 찾아가는게 사람 심리라니까?
암튼 난 네가 골라준 걸로 살 거야. 온전히 내가 책임질 순 없으니까.
소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무려 500억이다.
5000만원도 5억도 아닌, 500억.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하루에 수십억이 타버릴 수도 있는데 남의 돈이라도 그 정도면 하루하루 피가 마를 것이다.
즉, 소영의 말은 종목은 돈 주인이 골라야 그나마 자신이 면피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로시, 코인에 대해 아는 바 있나?'
[어떤 걸 말씀이십니까?]
'어떤 코인이 유망하다던가···.'
[내일 주식 가격은 신도 못 맞춘다고 하죠. 코인은 더 합니다.]
'신이 모르는 것도 있어?'
[그만큼 예측 불가능하다는 비유입니다. 신께선 모르시는 게 없습니다.]
'그럼 종목 좀 추천해달라고 해봐.'
[신께요?]
'그건 좀 그런가?'
도훈이 고민하고 있는데 아까 그 라디오에서 전문가 부른 사람이 종목을 추천했다.
-이제는 코인도 웹 2.0을 넘어 NTF로 넘어가는 추셉니다.
-NTF가 뭔가요?
-대체 불가 토큰이라는 건데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긴 복잡하고, 아무튼 앞으로는 NTF가 대세가 될 겁니다.
-그럼 전문가분 께서 추천하는 코인이라도?
-종목 추천은 조심스러우니 NTF 기반으로 만들어진 코인이 어떤 게 있는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도훈은 뭔가 계시를 받은 것처럼 귀를 쫑긋 세워 종목 이름을 적었다.
'오오, 이거 뭔가 느낌 좋은데?'
[설마 지금 500억을 저기에 넣으시겠다고요?]
'전문가가 전망 좋대잖아.'
[그렇다고 맹신하시면 곤란하죠. 투자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니. 생각해보면 신기하잖아. 우연히 이 시간에 인천가는 택시를 탔고, 기사님이 코인 관련 라디오 채널을 틀었는데, 안소영이 종목을 고르라고 하는 시점에 딱 코인 추천이 뜬 거야. 이런 우연이 어딨겠어?'
[우연이 기대기엔 너무 근거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 폭락하면 어쩌시려고요?]
'흐흐. 코인이 오르고 내리는데 이유는 있고?'
[네?]
'결정했어. 인생은 어차피 도박이야.'
나는 안소영에게 방금 적은 종목을 보냈다.
-도훈 : 각 다섯 종목에 100억씩.
-안소영 : 진심이야? 지금 이거 상장된지 한달도 안된 종목들이 대부분인데?
-도훈 : 묻고 더블로 갈까?
-안소영 : 아니아니. 잠깐만 환전 과정에서 수수료가 좀 많이 들었어. 현재 달러화를 한화로 환산하면 대충 470억 정도야. 이걸 전부 분산해서 넣으라고?
-도훈 : 응.
-안소영 : 진짜로 후회안 할 자신있어? 그래도 안전하게 비트코인 같은데 넣어두는게.
-도훈 : 아니야. 넣을게. 부탁해.
-안소영 : 휴- 난 모르겠다. 마름은 전주가 시키는대로 해야지.
나중에 매입 끝나면 연락할게. 일주일 쯤 걸릴 거야.
-도훈 :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