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 대학 축제-117-
* * *
"수고했네. 대근이 자네 도움이 아니었으면 메두사 이놈, 절대 못 잡았을 거야."
"그러니까요. 간만에 난적이었습니다. 괴물이 따로 없더군요."
이번 플레이어 사냥을 유독 힘들었다.
문자 그대로 신출귀몰. 각종 아이템과 출중한 능력으로 무장한 플레이어는 PK단을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특히 '정지의 심안'불리는 놀라운 이능으로 5개 지부 에이스를 차출한 별동대를 크나큰 위기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코드 네임, 메두사.
신화에 나온 메두사처럼 마주 본 상대를 눈빛만으로 경직시켜버리는 괴물같은 플레이어였다.
"그나저나 자네 지부는 요새 별일 없지? 어제 전화 받고 나서부터는 표정이 영 안 좋은 것 같던데···."
인천 권역장의 물음에 대근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별일은요. 그냥 지나가는 해프닝이죠. 제 선에서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하긴. 뭐, 신력의 조대근이 이끄는 지부인데 별일이야 있을라고."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신력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겸손하긴. 자네 힘은 보면 볼수록 놀랍단 말이야. 정지의 심안을 이겨낼 정도라니. 감탄했네 정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인천 권역장은 격려의 의미로 대근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생이 많네. 서울 권역장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자네 같은 인재가 얼른얼른 승진해서 올라가야 할 텐데 말이야.
솔직히 대근이 자네가 지부장 정도로 머물 그릇은 아니지 않는가?"
"하하. 방금 얘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래. 네 이번 건에서 자네 활약은 상부에 잘 보고해 줌세. 조금만 더 고생하라고. 좋은 날이 있을테니까."
"이만 서울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리하게나. 나는 남은 단원들 삼겹살 회식이라도 시켜줘야겠네."
인천 건을 무사히 마무리한 대근은 서둘리 짐을 챙겨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출발할때는 그래도 스타렉스 차량으로 편하게 이동했는데, 다른 팀원보다 하루 일찍 지부에 복귀하는 바람에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되돌아가야하는 대근이었다.
그의 행색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군데둔데 페인트가 묻은 후줄근한 잠바에, 몇 년은 안 빤 것 같은 꾸깃꾸깃한 운동화까지. 만약 그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새벽부터 막노동을 뛴 후 소주 한 병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공사판 인부쯤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누구도 그를 지구를 지킨 영웅의 행색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옆자리에 서자, 젊은 아가씨 한 명이 황급히 코를 틀어막더니 옆 칸으로 피하기까지 했다.
대근은 머쓱해하며 제 옷에서 악취가 나는지 코를 킁킁거렸다.
'거참, 민망하구만. 잠복하느라 일주일 넘게 속옷도 제대로 못갈아입었으니 퀘퀘한 냄새가 안날수가 있나.'
별동대로 차출되었던 다른 지부 단원들이 오늘 하루 휴가를 받은 것과 달리, 대근이 급히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던 까닭은 미호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초조해진 대근이 지하철 입석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는지, 강화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손잡이가 뿌뜩- 하는 소리를 내더니 손아귀 안에서 으깨져 버렸다. 쇠파이프로 내려쳐도 꿈쩍없는 강도를 자랑하는 강화 플라스틱 손잡이였지만, 대근의 악력은 이를 훨씬 상회할 만큼 무시무시했던 것.
'이크. 또 사고 쳤구나.'
대근은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황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빈자리가 보이자 도망치듯 앉았다. 나중에 역무원이 발견하면 무슨 연유인지 황당해 할 것이라면서.
덜커덩- 덜커덩-
인천발 서울역 1호선은 대낮인데도 승객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대근의 옆 빈자리로는 누구도 앉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봐도 노가다꾼, 심하게 말하면 노숙자처럼 보이는 그 옆으로 어떤 사람도 앉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몸에선 악취까지 났으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대근은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졸라게 고독하구만.'
처음부터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플레이어를 사냥하며, 행성의 파멸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킨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람들의 냉대와 멸시 뿐이었다. 아무리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도 섭섭한 것이 당연지사. 하지만 대근은 스스로 짊어진 멍에라고 생각하며 고독을 즐겼다.
'누군 안 씻고 싶겠냐? 누군들 후줄근한 복장으로 만원 지하철에 타고 싶었겠냐고. 돈만 있었으면 나도 택시 타고, 아니 처음부터 자차로 갔겠지.'
급하게 차출된 까닭도 있지만, 대근이 자기 차로 이동하지 않은 이유는 얼마 전 계기판에 뜬 엔진 점검 체크등 때문이었다. 벌써 15년을 함께한 대근의 애마는-심지어 처음 살때도 중고였다.-최근 들어 엔진이 툭하면 꺼지는 등 심각한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 차를 살 돈이 없었던 대근은 꾸역꾸역 차를 수리해 가면서 연명했는데, 그 차를 가지곤 도저히 인천까지 갈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 출동 중 고속 도로에서 비명횡사를 할 순 없으니.
'젠장. 나중에 돈 벌면 차부터 바꿔야지. 플레이어 잡으로 나가는 것보다 지부장 차에 타는 게 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 좀 심하잖아?'
똥차 좀 제발 바꾸라며 투덜거리던 창범을 떠올리며 대근이 혼자 피식 웃었다.
'근데 권역장이 되면 뭐 다를라고?'
아까 헤어진 인천 권역장은 우리나라에 단 15명 밖에 없는 권역장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50대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심지어 '경차'를 타고 다녔다. 그를 보면 애초에 PK단 활동을 하면서 부유해지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일지도 몰랐다.
PK단원 활동은 순수 명예직에 가까웠다.
일종의 투잡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생계 형 영웅이었다.
플레이어를 때려잡는다 한들 상부에서 별다른 보상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 사냥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다른 직업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메꿔야 하는 것이다.
물론 상부에서 이따금 지부 활동비를 내려주긴 했다. 그러나 이를 지부 인원으로 쪼개면, 대근 자신이 나중에나 받게 될 국민연금 수령액보다도 적었다. 말 그대로 생색내기용일 뿐.
이처럼 평소 가난을 친구처럼 끼고 살던 대근이었지만, 사냥을 막 끝낸 직후라서인지 유난히 허탈감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환장할 놈의 PK단 같으니. 미호가 그만두려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가. 각종 제약에 얽매여 능력도 제대로 못 쓰니까.'
대근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구한 말 일제 폭압에 항거했던 독립투사같다고 여겼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때론 목숨도 내놓았지만 국권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의 모든 걸 내던졌던 애국지사들 말이다.
그중에서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을 국권의 회복을 위해 모두 바친 사람도 있었고,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가정을 팽개친 가장 때문에 평생을 가난에 시달린 이름 모를 가족도 있었다. 일부는 역사에 기록되어 이름 석자라도 알려졌지만, 대부분은 무명씨라는 이름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돈을 바라지도 않았다.
명예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단지 구국의 열망 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걸 던졌다.
PK단도 이와같았다.
부와 명예는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일이므로 묵묵히 할 뿐이다.
플레이어의 난동을 방치한다면, 엔트로피의 급격한 증가로 지구라는 행성이 소멸할 수 있으니까.
미호 생각에 대근이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여전히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서울로 향하는 대근이 마음이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미호 없이는 안 되는데···.'
대근은 자기 지부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창범은 놀라운 정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물리력은 평범한 일반인보다 못했다. 새롭게 투입된 염동력자 건은 나이에 비해 빼어난 실력자지만 아직 실전 경험은 미숙하다. 게다가 은근히 잘난 체까지 심해 자칫 까다로운 상대와 붙었다간 실력발휘도 못해보고 제압당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빼어난 신병도 숙련된 베테랑만 못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번 메두사같은 괴물이 서울 지부에 등장했다면 화력을 담당한 미호 없이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 불보듯 뻔했다.
어쩌면 인천 서부 지부처럼 별동대가 파견 올 때까지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일전에 말살당한 제주지부 사태가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PK단은 플레이어를 사냥한다.
하지만 잘 성장한 플레이어에겐 반대로 PK단이 사냥당한다.
대근이 볼 때 둘의 관계는 결코 일방적인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더 강한 놈이 더 약한 놈을 죽이는 생존 투쟁일 뿐.
미호와 통화가 안 되자 대근은 이번엔 창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었으나 깡깡-거리는 기계음 때문에 한동안 귀가 먹먹할 정도로 소음이 심했다.
-대장이야?
"아우, 너네 공장은 뭐 이렇게 시끄럽냐. 귀청 떨어지겠다 인마."
-그래서 맨날 귀마개 하잖 수. 무슨 일이래, 대낮부터? 내일 온 다면서요?
"서울 가는 길이야. 일찍 끝났어. 정확히는 나 혼자 하루 먼저 해산했지만."
-그래요? 죽지 않고 다시 보니 괜히 반갑네. 아, 네 반장님. 잠시 통화 좀 하고···.
창범은 통화하던 중간에 관리자라도 만났는지 굽신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창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저 씨발놈은 지는 방금 담배 피우고 와놓고 통화 좀 한다고 존나 눈치 주네.
"자식아. 뒤에서 남 욕하는 버릇 내가 고치라고 했지?"
-하여간 꼰대. 대장 없는 동안 맨날 대장 뒷담화 깠는데?
"너 오늘 돌아가서 보자."
-농담이지 대장.
"야. 미호 집은 가봤어?
-미호 집? 안 갔는데?
"아니 이틀만 더 생각해보라고 내가 전하랬잖아! 집 주소까지 알려주고! 왜 안 갔어?"
대근이 흥분해 소리쳤다.
미호는 지부에 있어 필수적인 존재였다. 창범이 이번 일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아씨, 귀 따가워. 집에 안 찾아갔댔지 누가 전달을 안 했댔수?
했어. 가는 길에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나서 거기서.
"아, 그래? 진작 그렇게 말하지. 야 근데 너 또 말이 짧다?"
-제가요?
"이 새끼가 또 모른 척하네. 근데 왜 미호 전화 안 받는데?"
-전화 안 받아?"
"어. 아침부터 꺼져있던데."
-흐음, 분명 알겠다고 했는데···. 그냥 꺼놨겠죠.
"꺼놔? 왜?"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여자들 변덕 같은 거겠지. 여자들은 남자보다 훨씬 복잡한 동물이라고. 아참, 미호는 정말로 동물이잖아?
"헛소리 그만하고. 설마 잠적한 건 아니겠지? 미호가 작정하고 숨으면 서울 전 지부가 뒤져도 찾기 힘든 거 알지?"
-에이. 그래도 대장이 그렇게 사정까지 했는데 미호가 그럴라고. 둘이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몰라 인마. 어제는 바빠서 못 들었는데 대체 미호가 왜 그만둔다는데?"
-나도 그건 모르겠어요. 그냥 그만둘 수 있으니 그만둔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뭐랬더라?
"그냥 하는 소리아냐? 진짜 이유는 뭔데? 둘러대는 핑계 말고 진짜 이유."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넌 알 수 있잖아?"
창범에겐 특별한 초능력이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의 마음이든 읽을 수 있는.
심지어 마인드 컨트롤을 이용하면 타인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까지 가능했다.
-에이, 대장. 제가 대장 속마음 훤히 들여다보면 기분 좋겠어?
"인마. 평소엔 자제해도 그럴 때 써야 할 거 아니야. 미호가 진짜 우리팀에서 이탈이라도 하면 그건 중대 사건이라고. 너는 빠져도 상관없는데 미호는 안돼!"
-와씨, 또 섭섭하게 말하네. 나도 확 빠져?
"죽을래?"
-암튼 난 몰라. 대장 설득해도 안 되면 그땐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게요. 근데 미호는 안에 영혼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생각을 읽다가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몰라요. 동시에 9명을 들여야 봐야 하는 거니까.
"알았다. 내가 오늘 직접 만나보고 도저히 설득 안 되면 너한테 부탁 좀 하마. 대체 왜 그러는 건 줄은 알아야지 우리도 맞춰서 대처를 하지. 월급을 올려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올려줄 월급은 있고?
"집 보증금 빼서라도 말이야."
-적당히 좀 해요. 그럴 돈 있으면 중고차부터 바꾸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씨, 작업반장 새끼 통화 오래한다고 또 눈치주네. 이만 들어가 볼게요.
"어."
-아, 맞다 대장.
"응?"
-무사 귀환 축하드려요. 살아서 다시 보니 반갑네.
마지막 창범의 말에 대근이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번 파견이 생각보다 위험한 임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짜식. 말은 거지같이 해도 의리는 있구만.'
물론 마지막 말을 덧붙이기 전까지.
-이번에 대장 나가리 됐으면 내가 임시 때고 지부장 먹는 건데 말이유.
"야! 너 이새끼 가서 보자!"
서울역까지 무사히 도착한 대근은 환승 열차로 갈아타 겨우 미호의 집 앞으로 도착했다. 어젯밤 전투로 온 몸이 상처투성이에 피곤함이 밀려왔지만, 당장 미호를 만나는 게 급선무였다.
미호는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출입구가 철문으로 단단히 닫혀 있었다. 전화를 계속 안 받자 대근도 하는 수 없이 초인종을 누르려고 했다.
그때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 철문이 덜컹 열렸다.
미호가 안에서 문을 열어 준 것이었다.
"얼레? 집에 있었네?"
대근이 미호를 만나러 집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