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9. 대학 축제-114-
"남녀 사이엔 친구가 안된다고 생각하세요?"
"그게 가능하려면 두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봐."
엘리사는 초면임에도 말을 거침없이 하는 편이었다. 도훈은 분명 외모에서 풍기는 매력이 자신감으로 승화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늘 호의를 받다보니, 스스로를 굉장히 고평가하게 되는 것이라고.
"첫째. 남자가 성욕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요?"
"둘째, 여자도 성욕이 없어야 한다."
"둘다요? 한쪽만 없어도 어차피 상관없지 않아요?"
"에이, 아니지. 한쪽이 욕구가 있으면 참기 어려워 지거든. 남녀 사이라는 게 조금만 계기가 생겨도 확 불붙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친구 사이가 깨지기 마련이라."
"그렇군요."
엘리사가 웃으며 물었다.
"너희는 그래서 절대 친구 사이가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왜요?"
"내가 아는 제니퍼는 절대 성욕이 없는 친구가 아니거든."
"으음."
"솔직히 말해봐. 둘이 무슨 사이야?"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군요. 초면임에도 거침없고.]
'자기딴에는 스스로 추측이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 같아. 그걸 확인해 보고 싶은 심리랄까?'
[똑똑한 사람이 제발에 걸려 넘어지는 셈이군요.'
'일단 모험을 걸어볼 필요가 있겠어.'
"음···. 제니퍼 누나 말이 맞았네요."
"뭐?"
"엘리사는 똑똑해서 금방 눈치 챌거라고 했거든요."
"호호, 제니퍼가 그렇게 말했어?"
엘리사는 친구가 자신을 똑똑하다고 평가했다는 말에 무척 기뻐하는 눈치였다.
[방금 그 말은 왜 꺼내신 겁니까?]
'내가 볼 땐 두 사람은 친한 친구이면서 동시에 라이벌의식을 가진 것 같아.'
[라이벌 의식요?]
'제니퍼도 처음에 엘리사를 소개시켜 주는 걸 마뜩치 않게 생각했잖아. 사정이야 있었지만 분명 그런 의도가 읽혔거든. 근데 엘리사를 보는 순간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고.'
[엘리사가 상당한 미인이긴 하죠.]
'맞아. 제니퍼와 쌍벽을 이룰만큼 매력이 넘쳐. 분명 두 사람은 서로 급이 비슷하다고 여길거야. 둘 다 남자한테 인기도 많을 거고.'
[그래서 친구이면서 라이벌이라고 표현하신 거군요.]
'그렇지. 사람인 이상 은연중에 경쟁심이 있을 수 밖에 없거든.
그래서 제니퍼가 자신을 똑똑하다고 평했다는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거지. 라이벌의 인정만큼 기쁜 건 없으니까.'
[호오.]
"네. 제가 사실대로 말해드릴테니 제니퍼에겐 절대 비밀 지켜주세요."
"좋아."
"저랑 제니퍼는 사귀는건 아닌데 솔직히 썸타는 사이긴 해요."
"썸? 아, 나 뭔 줄 알어."
썸은 영어긴 하지만 우리말화 된 일종의 콩글리시다. 하지만 한국 문화에 적응된 엘리사는 무리없이 뜻을 이해하는 듯 보였다.
"어쨌든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긴 한데, 또 남자친구라고 하긴 너무 이르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둘러댄 것 같아요."
"이해했어. 사귀진 않지만 호감을 가진 애매한 사이라는 거지?"
"네. 제대로 보셨어요."
"음, 근데 썸타는 사이면 어디까지 나간거야?"
"어디까지라뇨?"
엘리사가 커피를 홀짝 거리며 물었다.
머그잔에 닿는 흑인 특유의 두툼한 입술이 몹시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요새는 썸타면 키스정도는 우습지 않아?"
"아. 그건···."
"바로 부정하지 못하는 것 보니까 키스는 이미 한 것 같고."
도훈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거렸다.
하지만 반쯤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엘리사는 한 술 더 떴다.
"설마 잤니?"
"흠흠."
"맞네. 했네, 했어."
"전 대답 안했어요."
"뭘 또 그렇게 부끄러워해? 설마 사귀지도 않는데 잔 것 때문에?"
"엘리사는 굉장히 직설적인 성격이네요."
"맞아. 난 앞뒤 재는 거 질색이거든. 그냥 툭까놓고 말하는 걸 좋아해."
"암튼, 아직은 사귀는 사이는 아니에요."
"후후. 궁금한데."
"뭐가요?"
"제니퍼랑 말이야. 좋았니?"
"크흡!"
도훈은 일부러 당황한 척 머금고 있던 커피를 도로 뱉고 말았다.
누가봐도 기습적인 질문에 허둥대는 모습이었지만, 사실은 철저한 연기였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타입이군.'
[엘리사가요?]
'내가 당혹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가잖아.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걸 통해 스스로의 통제력을 느낄때 만족하는 타입이야.'
[호오, 벌써 거기까지 파악하신 건가요?]
'그렇다면 철저하게 맞춰주지.'
"초면에 그런 질문은 좀···."
"왜? 초면이라서? 그럼 구면이면 말해줄 수 있다는 거야?"
"무슨 뜻이세요?"
엘리사가 갑자기 테이블에 팔꿈치를 붙이더니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과같은 커다란 젖가슴이 스스로의 팔에 눌리며 가슴골이 위로 쑥 올라오는 모습은,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말 그대로야. 제니퍼가 은근히 자기 얘길 잘 안하는 타입이거든. 그래서 궁금해. 남자랑 섹스할 때 어떤지 말이야."
"그, 그게 왜 궁금해요?"
"뭐? 일종의 호기심이라고 해두지, 일단은."
"음, 근데 제니퍼가 알게 되면···."
"우리 둘이 나중에 따로 만나는 걸 제니퍼가 알면 섭섭해 할까봐 그래?"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걱정마. 나도 곤란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몰래 만나면 되지. 폰 줘볼래?"
도훈은 망설이는 척 하다 폰을 건넸다.
엘리사가 빠르게 자기 폰 번호를 찍었다.
"내 번호야. 나중에 여기로 연락해."
"근데 엘리사 누난 남자친구 없으세요?"
"나? 왜? 있으면 안 보게?"
"그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요?"
[주인님이 그런 말을 하실 줄이야.]
'일부러 어리숙한 척 하는 거지. 엘리사가 좀 더 나를 휘두르는 것처럼 느끼라고.'
"풉-. 너 보기보다 엄청 순진하구나? 왜? 나랑 단둘이 만나서 뭐 하려고 했니?"
"아, 아뇨. 그건 아닌데···."
"남자친구 있어."
"아."
"대신 군인이야. 주한미군."
"주한미군요?"
"응. 훈련이 없을 땐 평일에도 외출외박 잘 나오는데, 요샌 바빠서 그런지 자주 못 나와."
"그렇구나."
"뭘 그렇게 쪼니? 그냥 따로 얼굴 한 번 보자는 건데. 설마 엉큼한 생각 하는 건 아니지?"
"아, 아니에요."
도훈은 일부러 얼굴을 붉혔다. 엘리사는 순진한척 하는 도훈을 골리는 게 재밌는지 계속 깔깔거렸다.
"맞나보네. 엉큼한 생각."
"정말로 아니에요."
"걱정 마.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난 다 이해하니까. 남자들은 10분에 한 번씩 야한 생각 한다며?"
"그, 그건···."
엘리사가 갑자기 손목 시계를 힐끔거렸다.
"벌써 10분 지났네? 했니?"
"아앗."
"풉-. 귀엽네. 제니퍼가 왜 마음에 들어했는지 알 것 같다."
[대단하군요. 아무것도 안하고 엘리사가 먼저 따로 보자는 약속을 잡게 하시다니.]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지. 일부러 그녀의 지배욕을 충족시켜줬는데. 무엇보다 두 사람이 은근히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어.'
[라이벌이라서요?]
'응. 라이벌의 썸남을 뺏는것 만큼 신나는 일이 어딨겠어? 심지어 남자친구도 아니니 부담감도 덜하고.'
[두 사람의 경쟁에 주인님이 재물이 되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나야 상관없지. 모로가든 흑마만 올라탈수 있으면.'
[그녀의 남자친구가 신경 쓰이진 않으십니까?]
'어쩌겠어? 딱보니 내가 아니어도 몰래 남자 꽤나 만났겠구만.'
그때 통화를 끝냈는지 제니퍼가 돌아왔다.
실제로 통화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제니퍼는 자리에 오자마자 푸념했다.
"어휴, 무슨 쓸데없는 얘기를 그렇게 길게 하던지. 많이 기다렸지?"
"아니야. 도훈이랑 재밌게 얘기하고 있었어."
"무슨 얘기? 설마 나 없다고 뒤에서 흉본 건 아니지?"
"어머, 들켰니?"
엘리사가 농담으로 무마했다.
하지만 은근슬쩍 테이블에 위에 놓인 내 휴대폰을 보면서 윙크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은근히 영악한 구석이 있는데.'
[어쨌든 다음 약속을 잡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렇지. 제니퍼는 섭섭해 하겠지만 어쩌겠어. 다음에 또 한번 이차선 개통시켜주는 걸로 퉁 쳐야지.'
[근데 엘리사가 과연 다음에 다시 볼 때 주인님께 기회를 줄 까요? 그냥 가지고 노는 걸수도 있을텐데요.]
'여자랑 단둘이 있는데 못 따먹으면 내가 병신이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빠뜨릴테니 걱정은 붙들어 매시고.'
도훈은 10여분 정도 더 머물다가 먼저 물러났다.
"그럼 두분 재밌게 노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벌써 가게? 공부하러 왔다지 않았어?"
"네. 그러려고 했는데 갑자기 친구한테 깨톡와서 잠깐 보자네요."
"그렇구나. 그래, 만나서 즐거웠어 도훈아."
엘리사가 갑자기 악수를 청했다.
도훈이 어색하게 손을 맞잡는데 엘리사가 씽긋 웃더니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살살 긁었다.
'윽, 뭐야 이건.'
[이거 사인 아닙니까?]
'맞어. 정말 대놓고 사람 가지고 노는 스타일이네.'
도훈은 티내지 않고 손을 빼며 제니퍼에게 인사했다.
"선생님. 그럼 먼저 가볼게요. 커피는 잘 마셨어요."
"응, 그래. 멀리 안나갈게."
도훈이 커피숍을 나선 뒤 대학으로 다시 향하는데 제니퍼에게 문자가 날아왔다.
-제니퍼 : 어떻게 됐어? 엘리사는 나한테 아무일도 없었다는데 진짜야?
'엘리사가 의리는 있네.'
[비밀을 지킨다더니 진짜인가 보군요.]
-도훈 : 말도 마. 슬쩍 찔러봤는데 나한테 주한미군 남자친구 이야기만하더라고.
-제니퍼 : 정말?
-도훈 : 내가 나이도 어리고 남친보다 덩치도 작으니까 남자로 안 보였나봐.
-제니퍼 : 음, 너무 실망하지마. 어쨌든 난 원하는 대로 다 해준거다?
-도훈 : 응, 오늘 일은 잊지 않을게.
그 사이 엘리사에게도 깨톡이 날아왔다.
-엘리사 : 나 아무말도 안했다?
-도훈 : 방금 제니퍼한테 연락 받았어요.
-엘리사 : 응, 눈치 보니까 너한테 문자 한것 같더라.
-도훈 : 근데 정말 저랑 따로 보실 거예요?
-엘리사 : 왜? 다시 생각하니까 양심에 좀 찔려?
-도훈 : 아뇨. 그건 아닌데.
-엘리사 : 놀라지나 마.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도훈 : 네? 그게 무슨···.
-엘리사 : 에구, 제니퍼가 눈치준다. 그럼 다음에 또 연락할게.
두 사람과 각기 톡을 나눈 도훈은 피식 웃었다.
[엘리사가 정말 따로 연락할까요?]
'백퍼센트 할 걸? 이미 친구 골탕먹이는데 재미를 붙인 것 같은데.'
[여자들이란 정말 알 수가 없군요. 친구를 바로 앞에 두고 친구의 썸남에게 몰래 문자라니.]
'그게 더 스릴있거든. 즐길 줄 아는 여자라서 다행이야.'
[어쨌든 흑마업적의 첫단추를 성공적으로 꿰신걸 감축드립니다.]
도훈은 기쁜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대학으로 향했다. 아직 주막을 개시할 시간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날이니 만큼 혼자 축제를 둘러볼 예정이었다.
대학 정문에 내린 도훈은 혼자 시끌벅적한 캠퍼스를 거닐었다.
축제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대학생들이 모두 튀어나왔는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중앙광장을 지나던 도훈은 벽면에 붙은 공연 포스터를 보고 생각했다.
'맞다. 오늘이 그 걸그룹 공연오는 날이지?'
[네. 예전에 주인님과 소개팅했던 아이돌 지망생들요.]
'그래도 데뷔 성공했다니 다행이네. 성수형이 구경온다고 했는데 연락이나 해볼까?'
도훈은 성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 브라더.
"그 이상한 인사는 안하면 안되요?"
-왜 전화했어?
"어제 그건 뭐예요? 서현이한테 봉투 주고 가셨다면서요?"
-금일봉? 선배들끼리 십시일반으로 걷은 거야. 자식, 감동해서 전화했구나?
"뭘 또 감동까지? 암튼 고마워요."
-선배가 그정도는 해야지. 너도 내년에 3학년 되면 꼭 해라.
"알았어요. 암튼 오늘 저녁 초청가수 공연 올 거예요?"
-당연히 가야지. 너도 보러 가게?
"그냥 구경이나 하려고요. 그래도 한 번 만났던 애들인데 가수데뷔했다니 신기해서요."
-그래. 같이 가자. 근데 우리 못 알아 볼 수도 있어.
"정말요?"
-원래 뜨기 전에는 팬 한명한명이 소중하다가도 막상 뜨고나면 누군지 기억도 못하는 게 아이돌이거든. 괜히 김칫국 마시다 너무 실망하지 말고.
"형 스스로한테 하는 얘기예요?"
-새꺄. 너도 걔들이랑 재밌게 놀았잖아. 누구였지? 린다였나?
"몰라요. 이름도 잘 기억안나요."
-암튼 그때 참 재밌었는데 말이야.
"암튼 형 학교 오시면 연락해요. 혼자 가기 뻘쭘하니까."
-그래.
성수와 통화를 마친 도훈은 문득 중앙 광장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에 이끌렸다.
누군가 버스킹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제법 노래를 잘하는 지인파들이 빙 둘러 구경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긴 도훈은 먼 발치서 기타를 치고 있는 한 여대생을 보게 되었다.
딱 봐도 상당한 미인으로 보였는데, 그녀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구경하던 인파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몸매만 좋은줄 알았는데 노래도 엄청 잘하네. 쟤가 사회체육과 퀸이라고 불리는 한송이지?"
"한송이?"
"왜, 이번에 여자부 피트니스 대회에서 우승한 애 말이야. 몰라?"
"헐! 진짜?"
"들어보니까 통기타 동아리 활동도 한다더라고."
"와, 못하는 게 없네."
"엄친딸이라니까 진짜?"
구경꾼들의 말을 엿듣던 도훈은 한송이라고 불린 여학생이 정음을 누르고 피트니스 대회에 우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급격한 관심을 보였다
'뭐야? 쟤 였어?'
다른 사람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도훈은 멀리서도 한송이를 똑똑히 관찰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