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8. 대학 축제-113-
"정말? 약속했다?"
"알았다니까. 근데 정말로 만나게만 해줄 거야. 그 뒤는 난 몰라."
"걱정마. 너에겐 피해 안 가게 할 테니까."
"흠."
"그냥 나를 이번에 알게 된 친한 동생이라고만 소개해주면 돼.
그럼 엘리사도 부담 없을 거 아니야."
"친한 동생?"
"이를테면 남사친 같은? 남사친 알지?"
"남사친이랑 섹스하는 사람이 어딨니?"
"있을 수도 있지."
도훈의 끈질긴 설득과 제니퍼의 양보로 흑누나 소개받기는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하지만 제니퍼는 여전히 도훈의 로망을 이루기가 쉽지 않은 일임을 강조했다.
"근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엘리사 남자친구는 만만치 않을 거야."
"그건 걱정말래두. 설마 군인이 민간인을 죽이기야 하려고?"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또 뭐 있어?"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괜찮아 편하게 말해."
제니퍼가 발기된 대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넌 혹시 너보다 큰 사람 아직 본 적 없지?"
"뭐가? 설마 이거?"
"응."
"당연히 남자들끼린 서로 꼴린 채 마주 볼 일이 없으니까. 무슨 게이도 아니고."
도훈은 문득 그 말을 하다 최근 영어회화 조모임에서 만난 또다른 대물을 떠올렸다. 생긴 것과 다르게 물건하나는 기가 막혔던 범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범우랑 2 vs 2 플레이 할 때 한 번 봤구나.'
[범우군이 간만에 대물이긴 했죠.]
'근데 제니퍼가 무슨 뜻으로 물어보는 걸까?'
의도를 파악 못 한 도훈이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제니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자들도 모이면 야한 이야기 많이 하잖아. 음담패륜이라고 하던가?"
"음담패설 말이야?"
"아아, 그렇지 음담패설. 한국어엔 뭐가 이렇게 한자가 많은지.
암튼, 여자들도 모여서 놀다 보면 그런 얘길 한단 말이야."
"근데?"
"엘리사가 한 번은 자기 남자친구 얘기를 해준 적이 있거든."
"그 주한미군."
"응. 아까 말했지만 키가 엄청 커. 도훈이 너보다 더."
"설마 2미터 넘어?"
"아니 그 정돈 아니고 190cm 정도? 근데 나도 예전에 잠깐 봤는데 몸이 엄청 컸어. 헤비급, 맞아 헤비급 선수 같달까?"
도훈은 엘리사의 남자친구라는 사람을 상상했다. 190cm의 거구에 헤비급에 육박하는 흑인 남성. 거기에 현역 군인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지자 굉장한 피지컬을 자랑하는 근육질의 전사가 연상되었다.
"근데 그게 왜?"
"음, 엘리사 말로는 다 크데."
"몸이?"
"손도 크고, 발도 크고, 음, 허리도 두껍고."
"잠깐. 설마 거기도?"
제니퍼가 민망한 듯 볼을 부풀리더니 긁적거렸다.
"으응. 장난 아니래."
"장난 아니야?"
"Like a 아나콘다?"
[아나콘다!]
'미친!'
도훈은 거대한 흑전사 밑에 달린 아나콘다를 상상하다 자기도 모르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물론 실제 아나콘다가 달려있기야 하겠냐만 얼마나 크면 저런 비유가 가능할까 하는 점 때문이었다.
도훈은 일단 부정했다.
"에이, 과장이겠지."
"과장 아니래."
"남자들이 얼마나 허풍이 센데? 이쑤시개를 보면 기둥이라도 우기는 게 남자들 종특이라니까?"
"엘리사가 본 걸 전해주는 거야. 스스로 떠벌인 게 아니라."
"음."
그렇다면 얘기가 달랐다.
자기 스스로 나 대물이네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보고 아나콘다라고 놀라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도훈은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물론 덩치가 있으니 작진 않겠지. 흑인들이 워낙에 또 거기가 유독 발달한 편이기도 하고. 근데 엘리사가 잘 몰라서 무작정 크다고 했을 수도 있지 않아?"
제니퍼는 계속된 도훈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도훈아. 엘리사가 평생 동안 흑인 남자친구를 더 많이 만났을 것 같아, 아니면 다른 인종을 만났을 것 같아?"
"아무래도 같은 인종이니까···. 흑형들을 더 만났겠지?"
"그런 남자친구들 사이에서도 지금 남자친구가 가장 독보적이라고 했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이렇게까지 말하면 정말인 거 같은데요?]
'인정하기 싫지만, 아나콘다는 사실인 걸로.'
[대체 얼마나 크길래 그런 별명을 붙였을까요?]
'진짜 뭐 30cm 넘고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 아나콘다라잖습니까.]
'어우, 씹. 상상도 안 가네.'
"암튼 그렇다 하더라고. 그래서 엘리사가 절대 호락호락 않을 거라고 말해주려는 거야."
한번 흑형에게 간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도훈은 세간에 회자되는 유명한 경구를 떠올렸다.
도훈도 익히 경험했지만 대물에 맛들인 여자는 소추에 두 번 다시 만족할 수 없다. 한번도 안해봤으면 모를까, 이미 그 맛을 본 여자라면 간에 기별이 안 가는 것이다.
지금 제니퍼의 말은 도훈의 것으로는 결코 엘리사를 충족시키지 못할 거라는 일종의 경고와도 같았다. 의도를 간파한 도훈은 순간 오기가 치솟았다.
'이런 젠장, 하필 겨우 만남을 성사시킨 흑마에게 아나콘다 남친이 있었다니!'
[첩첩산중이로군요. 이쯤되면 주인님도 포기하시는 게···.]
'내가? 포기를? 하-, 장난해? 내가 여자를 앞에 두고 물러선 적있어?'
[하지만 상대는 흑형입니다. 나이가 어려도 형이라고요.]
남자들 사이에선 국룰이 있다.
나이가 어려도 돈을 더 잘 벌면 형이다.
나이가 어려도 잦이가 더 크면···.
'닥쳐! 테크닉이 뭔지 똑똑히 보여주지!'
[그건 소추들의 흔한 자기 합리화라고···.]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도 몰라?'
[주인임이 작은 고추로 비유되는 날도 오는 군요.]
'아! 갑자기 존나 킹받네. 내가 이런 걸로 열등감 느낄 군번이야?'
[아시아 최강의 선수들도 서양인들 앞에 서면 초라해지는 법이 죠.]
'그만 놀리라고!'
제니퍼의 우려와 로시의 농담에 도훈은 완전히 빡이 돌았다.
이도훈으로 다시 태어나 단 한번도 느껴본적 없던 감정.
'열등감'이라는 것이 스멀스멀 피어오른 것이었다.
전생에 매일매일 느꼈던 바로 그 거지같던 감정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하잖아."
"······."
제니퍼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더 이상 말을 아꼈다.
도훈은 그런 태도가 더 열받았다.
"아니 지금."
띵동-
"어, 도훈아. 배달 왔나봐. 내가 나갈게."
제니퍼는 1층 출입구 문을 열어주기 위해 쪼르르 도망쳤다. 그리곤 옷을 입는다는 핑계로 안방으로 쏙 숨어버렸다. 결국 혼자 씩씩거리게 된 도훈은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졌다.
'두고 봐. 아나콘단지 아나바단지 아주 생각도 안 날만큼 볼 때를 보여줄테니.'
* * *
제니퍼의 집에서 식사를 마친 도훈은 오후에 엘리사와 잠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커피숍에서 잠깐 보기로 했는데, 도훈을 어떻게 소개할지가 고민이었다.
"나랑 같이 나가면 엘리사는 분명 내 남자친구라고 오해할 거야."
"남사친으로 하기로 했잖아."
"아니, 그렇게 둘러대도 속으로 썸타는 사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그건 너에게 너무 불리할걸."
제니퍼는 막상 엘리사를 만나게 되자 도훈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소개 시키는 방법을 고민했다. 속은 쓰리지만, 일단 그를 돕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하자. 나랑 엘리사가 먼저 만나서 차를 마시고 있을 게. 너는 우연히 거길 혼자 들른 척하고 합석하면 되잖아."
"오, 아이디어 좋은데."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야. 그 뒤는 네가 알아서 해."
"알았어."
"근데 반팔만 입고 다녀도 괜찮겠어? 낮이라도 밖이 좀 쌀쌀할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좋아. 그럼 나 먼저 커피숍에 가 있을 게. 10분 뒤에 들어와."
계획을 짠 도훈은 제니퍼를 먼저 들여보냈다.
주차장 구석에서 담배를 태우던 도훈은 어떻게 하면 흑누나 엘리사를 공략할지 고민했다.
'어차피 업적 해결이니까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겠지?'
[네. 별다른 제한은 없습니다.]
'좋아. 내가 어떻게든 따먹고 만다. 일단 내 잠바부터.'
인벤토리에서 잠바를 꺼낸 도훈은 원래의 복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따로 꾸미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그래도 첫인상이 좋아야겠지? 맨얼굴로 갈 순 없으니.'
도훈은 2층 남자 화장실로 달려가 외모를 손보기 시작했다.
각종 아이템 화장품으로 치장을 하자 잠시 후 멀끔한 훈남 대학생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좋아. 출격이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도훈은 커피숍에 들어가 우연히 지나가는 척 제니퍼가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엘리사는 도훈을 등지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테이블에 도착하기 전까지 확인할 수 없었다.
"어? 제니퍼 선생님 아니세요?"
도훈이 천연덕스럽게 제니퍼를 향해 인사했다.
제니퍼 역시 말을 맞춘 대로 연기했다.
"어머? 도훈 학생? 여긴 어쩐 일이야? 학교는?"
"오늘 축제 기간이잖아요. 혼자 까페에 공부하러 왔죠."
"도훈 학생은 정말 열심히구나. 아, 네 정신 좀 봐. 여긴 우리 학교 다니는 이도훈 학생."
제니퍼가 엘리사를 소개하자 그제서야 도훈도 엘리사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오우 씹! 고져스!'
한 번도 흑인 여성을 보고 예쁘다고 느낀 적 없던 도훈은 엘리 사의 미모에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엘리사는 흑인과 백인의 혼혈처럼 보였는데, 피부가 짙은 갈색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흑인 특유의 매끄럽고 탄력적인 피부와 전형적인 슬랜더 몸매는 섹시미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제니퍼 네 제자라고? 안녕."
"안녕하세요."
"제자는 맞는데 나이 차가 얼마 안나서 그냥 누나 동생 하기로 했어. 도훈아, 이쪽은 내 친구 엘리사."
두 사람을 소개시킨 제니퍼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도훈에게 말했다.
"시간 있으면 잠깐 앉았다 갈래? 내가 음료 시켜줄게."
"엇, 정말요? 그럼 저야 땡큐죠."
도훈이 제니퍼의 옆에 앉았다. 그 사이 엘리사는 도훈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제법 귀여운데? 제니퍼랑은 무슨 사이지?'
엘리사는 도훈의 외모에 호감을 느낀 듯 방긋 웃었다.
미남은 국가와 인종에 상관없이 통하는 것이 진리였다.
"대학생이면 몇 살이야?"
"네, 저는 스물셋이에요. 제니퍼 선생님 친구분이면 저보다 누나겠네요."
"그렇구나. 누나는 부담스러우니까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도 돼."
"네."
엘리사 역시 제니퍼와 마찬가지로 한국말이 능숙했다.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더니, 한국어도 곧잘 하는 것 같았다.
'제니퍼가 왜 엘리사를 나에게 소개시켜주길 꺼렸는지 알 것 같아.'
[생각외로 엄청 미인인데요?]
'그러게. 흑인 미녀는 정말 간만인데.'
[완전한 흑인도 아닌 것 같습니다. 혼혈이 꽤 많이 이루어졌달까요?]
'그러니까 머리도 곱슬도 아닌 듯. 근데 혼혈이라고 업적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상관없습니다. 혼혈도 흑마는 흑마니까요.]
"근데 공부 열심히 하나보다. 축제 기간인데 커피숍까지 와서 공부한다는 걸 보니."
"도훈이가 원래 뭐든 열심히 하거든."
제니퍼는 엘리사가 도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속상했지만, 도훈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태연하게 연기했다.
"아, 맞다. 나 잠깐 교무처에 전화 좀 하고 와야 하는데 잠시만 둘이서 얘기하고 있을래?"
"여기서 하지?"
"다음 학기 수업 관련된 부분이라 조용한 곳에서 통화해야 할것 같아서. 잠깐만 나갔다 올게."
"응 그래."
"금방 올게."
제니퍼는 도훈을 향해 씽긋 웃어 보였다. 자신은 할만큼 했다는 사인이었다. 이제부터의 일은 도훈이 알아서 하라는.
제니퍼가 나가자 엘리사가 도훈을 향해 물었다.
"근데 둘이 무슨 사이야?"
"네? 아까 말씀드렸는데요."
엘리사가 다리를 꼬더니 도발적으로 웃었다.
입이 큼직해서 웃는 모습이 시원시원하게 느껴졌다.
"에이, 내 친구를 내가 모를까 봐? 제니퍼는 학생들하고 그리 친하게 지내진 않거든. 뭔가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을 것 같은데?"
엘리사는 굉장히 영민하고 눈치가 빠른 타입으로 보였다.
잠깐의 눈빛 교환과 대화만으로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짐작한 것이었다.
[눈치가 빠른 편이군요.]
'눈치가 없는 것보단 낫지.'
[왜요?]
'바람도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 피우는 거니까.' 도훈의 지론은 그랬다.
파트너 몰래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대부분 영악할 정도로 두뇌회전이 빨라야 한다고.
'로시. 잴 것 없이 마음의 소리 바로.'
[넵.]
{뭐지? 사귀는 사이면 남자친구라고 소개시켰을텐데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그것도 학생하고? 말도 안돼지.}
'엘리사는 제니퍼가 자길 속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째서 친구 말을 믿지 않을 걸까요?]
'믿지 않는 건지 믿기 싫은 건지 모르지.'
"그냥 과제 때문에 선생님한테 이것저것 묻다가 친해졌어요.
지금은 그냥 누나동생으로 지내기로했고요. 일종의 남사친 같은 거죠."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을 수 있나?"
엘리사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도훈은 곧바로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진의를 확인했다.
{백퍼 썸타는 거네. 둘이 벌써 했을까? 제니퍼 남자친구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확 뺏어 버리게.}
엘리사의 속마음을 들은 도훈은 순간 움찔 놀랐다.
예상과 다르게 엘리사의 바람기가 상당했던 것이다.
'뭐, 뭐지? 오히려 사귀는 사이였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이상하군요. 제니퍼양과는 다르게 엘리사는 제니퍼를 친구로 여기지 않는 것 같은데요?]
'아니야. 친구는 맞을거야. 근데 뭔가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있겠지. 암튼 자기 패를 다 까보였으니 나도 호응해 줘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