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5. 대학 축제-110-
번호는 영어회화 강사 제니퍼의 것이었다.
도훈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통화 괜찮니? 혹시 아직 자고 있을까봐 일부러 문자 남겼는데.
새벽녘부터 깨어있던 도훈은 아직 오전 9시도 안 됐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일찍 일어나거든요.”
-보기보다 부지런하네. 아무튼 사정이 그렇게 됐어. 며칠전부터 약속했는데 갑자기 오늘 펑크를 냈지 뭐야?
“이유가 뭔데요?”
-이유라니?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서요?”
도훈이 따지듯 물었다.
-다른 게 아니고 그 친구가 학원에서 영어 강사하는데 갑자기 저녁에 보강이 잡혔다나봐. 강사 한명이 어제 새벽 응급실 실려 갔다나?
“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어쨌든 사정이 그렇게 됐어. 그보다는 유럽 친구들도 괜찮은데, 꼭 흑인이어야하는 이유라도 있어?
제니퍼의 물음에 도훈이 짧게 한마디 남겼다.
“흑마!”
-응?
“흑마가 필요하다고요.”
-흥마? 흥마가 뭐야?
제니퍼의 한국어가 유창한 편이지만, 흑마라는 단어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도훈은 자세히 설명하기 귀찮아 대충 얼버무렸다.
“···아무튼 제 로망 같은 거예요.”
-미안. 근데 본인이 안 된다는데 나로서도 어쩔 수 없잖아.
[주인님 이제 어떡하실 계획입니까?]
‘간만에 업적 대상자를 찾았는데, 여기서 쉽게 포기할 순 없지.
술자리가 안되면 일단 소개라도 받아야겠어. 다음이라도 노려보게.’
“혹시 그러면 낮에는 시간 될까요?”
-낮에?
“그 분 학원 강사하신다면서요? 낮에는 출근 안하시지 않아요?”
통상 학원은 학교 수업이 끝난 방과후 부터 시작이다. 특히 저녁에 보강까지 하는 학원이라면 필시 수험생을 대상으로 하는 입시학원이나 최소 고교생들이 다니는 학원이라고 판단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오후부터 수업이니까.
“어차피 누나도 축제기간이라 수업 쉬잖아요.”
-응.
“그러면 그 흑누님이랑 같이 점심 약속이라도 잡아줘요. 얼굴이라도 보게.”
도훈의 무리한 요구에 제니퍼도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한다고?
사실 제니퍼의 입장도 어느정도는 이해가 갔다.
그녀는 도훈과 강사 대 학생으로 인연을 맺었고, 조별과제 점검을 핑계로 나중엔 섹스까지 나눈 특별한 사이였다. 그런데 막상 도훈은 본인보다 자신의 친구, 그것도 꼭 흑인 여성과 만남을 주선해주길 요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섹파라도 지켜야할 선이 있는 법인데, 도훈은 대놓고 새끼치기를 바라니 당연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제 소원이라니까요?”
-···흠, 이건 친구를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소개시켜 주는 거랑 좀 다른 상황 같은데? 내가 너랑 잤다고, 내 친구들까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니니?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도훈이 뒤늦게 아차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제니퍼 화난 것 같은데?’
[누구라도 화나지 않을까요? 손은주 교수한테, 교수님 말고 교수님 친구 좀 따먹게 소개 시켜달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무리 손은주 교수라도 이해 못 해 줄걸요?]
‘그러니까 말이야. 제니퍼가 너무 쉽게 대줘서 얕잡아 본 듯.’
[큰일이군요. 감정이 상했으니 이제 주인님께 협조하지 않으려 들텐데요.]
“미, 미안해요. 저는 그런뜻이 아니고요···.”
-아니야, 됐어. 그냥 없던 일로 하자. 너는 나를 그런 목적으로 만났나 보네. 나 지금 굉장히 기분 나빠. 저녁에 주점도 안 갈테니까 그리 알아.
뚝-
“저기, 누나?”
[이미 끊겼습니다.]
“What the Fuck!”
도훈이 광분했다.
[버스 떠난 뒤 손 흔들어 봐야 말짱 헛수고인거 아시죠?]
‘비난 좀 자제해 줄래? 나도 지금 내가 실수한 거 알거든?’ 도훈은 스스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했다.
손은주 교수처럼 오랫동안 호감도를 쌓은 파트너에게도 하기 쉽지 않은 요구를, 고작 한번 배꼽을 맞춘 영어강사 제니퍼한테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안일한 판단이었다.
‘아씨, 내가 왜 그랬지? 대놓고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건데.’
[개방적인 외국 여성이라 가볍게 생각하신 것 아닐까요? 원나 잇이 쉽다는 것과, 자기 친구를 주인님께 바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같은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새벽부터 나연이랑 연두랑 셋이서 뒹굴다보니까 순간적으로 착각한것 같아. 쓰리섬이 그렇게 쉽게 되는 건 아닌데 말이야.’
[이제 정말로 어떡하실 겁니까? 흑마 미션은 벌써 물 건너 간 것 같은데요.]
도훈은 스스로의 무리수로 자책골을 넣었다는 생각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일을 그르쳤다고 반성만 하고 있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안 되겠다. 제니퍼를 다시 만나봐야겠어.’
[만나서 어쩌시려고요?]
‘사과하고 다시 설득해봐야지.’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제니퍼야 영어회화수업 성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보시를 한 것으로 치면 그만인데요. 흑인 여성을 꼭 제니퍼를 통해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게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해서 그래.
이젠 업적이 문제가 아니라고.’
[아···. 주인님이 그렇게 양심적인 분인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비꼬지 말지? 나름 반성하는 중이니까.’
[죄송합니다. 근데 제니퍼가 어디 사는 줄 알고 만나시겠다는 겁니까?]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도훈은 간만에 최번개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행님, 간만에 전화를 다주시고!
목소리를 걸걸하게 바꾼 도훈이 조폭처럼 말했다.
“잘 살았냐? 다른건 아니고 주소 하나만 따주라.”
-주소요? 또 누굴 조지시···, 아이고 죄송합니다 행님. 아침이라 말이 헛나왔습니다요.
“됐고. 너 통신사 조회 가능하지?”
-통신사요?
“핸드폰 번호만 있으면 가입된 번호 개인 정보 빼낼 수 있겠냐고.”
-가능합니다 행님. 근데 해커한테 협조를 요청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요. 걔네들이 통상 오후부터 새벽까지 활동하는 애들이라.
“지금 당장 필요해. 10분 준다.”
-아, 아니 행님 그것이 아니라 해커들이 지금 잠을 자는 시간이라···.
“씨발, 얼마면 되는데? 잠이 확 깨게 입에다 돈 다발 쑤셔 박으면 될 거 아니야? 금액 신경쓰지 말고 제일 빨리 섭외되는 놈한테 연락해서 바로 알아봐. 딱 10분 준다.”
-네, 넵! 행님. 바로 섭외해 보겠습니다요.
최번개에게 제니퍼의 폰 번호를 남긴 도훈은 정말로 10분 동안 기다렸다. 잠시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10분도 되지 않아 최번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알아냈냐?”
-네, 행님. 가입자 이름이 근데 외국인이던데 맞나요?
“어. 맞어.”
-주소 문자로 보냈습니다요 행님. 저 그리고 금액이 좀 나왔는 데···.
“말만해. 바로 현금으로 보낼테니까. 아니 그것보단 그냥 한번에 1억 줄테니까 앞으로 일 시킬때마다 거기서 차감하든지. 괜찮지?”
1억이라는 소리에 최번개가 숨이 넘어가듯 비명을 질렀다.
-해, 행님! 천부당만부당이십니다요. 제가 어떻게 행님한테 선금을 받겠습니까요. 그냥 다음에 시간 되실때 주십쇼.
하지만 목소리가 은근히 떨리는게 본심은 전혀 다른것 같았다.
“지랄 말은. 됐고, 나 사람 부릴 때 돈 안 아끼는 거 알지? 대신, 내 돈 먹고 먹튀하면 그땐 누구든 그냥 조져버린다. 무슨 말인지 알아 먹었지?”
-네, 넵 행님! 제가 어떻게 행님을 배신하겄습니까요.
최번개는 여전히 지난 박회장의 사망건에 도훈이 깊에 연루되어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다만 그 사실을 함부로 발설했다간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서 입다물 뿐이었다.
“주소 확인했고, 지하철 로커에다 현금 1억 넣어둘 거야. 비번 알려 줄테니 나중에 알아서 찾아가.”
-해, 행님! 목숨 바쳐 모시겠습니다요!
“염병, 목숨은. 끊어 새끼야.”
도훈이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아니, 그래도 1억은 좀 심한 거 아닙니까?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미리 선불로 땡겨 주실 필요까진 없을 텐데요.]
‘보통은 그게 맞지. 돈을 먼저 받으면 사람이 절실함이 없어지거든.’
[그걸 아시는 분이 그러셨습니까?]
‘근데 최번개는 좀 달라.’
[뭐가 다르죠?]
‘놈은 진짜로 돈을 사랑하는 놈이라?’
[그래서 더 위험한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1억을 받고 나면, 나중엔 더 많이 받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충성을 더 할 거라는 말이야. 돈 욕심이 많아서 1억 가지곤 성에 안 찰 테니까.’
[아아.]
‘돈을 탐내는 최번개는 돈으로 길들이는게 베스트야. 입막음 효과도 있지. VIP고객인 나와 오래가기 위해서라도, 어디가서 내 얘기는 입도 뻥긋 안 할테니.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멍청이처럼은 안 보이거든.’
[역시 주인님은 사람의 욕망을 잘 간파하시는군요.]
‘근데 어쩌다 제니퍼에겐 실수했을까? 이럴때가 아니다. 바로 움직여야 겠다.’ 최번개가 보내 준 주소는 제법 먼 거리였다. 차를 타고 가도 괜찮았지만, 도보로 이동하는게 제니퍼에게 불쌍한 모습을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도훈은 굳이 지하철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길에 로커를 발견한 도훈은 허공에서 현금 1억을 뽑아내는 묘기를 선보이며 최번개에게 전해줄 돈을 채워놓았다. 그리곤 문자로 로커의 위치와 비번을 알리며 다음에도 잘 부탁한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지하철을 타고가는 내내 도훈은 제니퍼의 마음을 어떻게 다시 돌려놓을지 고민했다.
‘제니퍼가 나에게 실망하긴 했지만 이대로 손절하진 못할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느꼈거든. 그 여자는 섹스를 너무 좋아해. 한국와서 나만한 상대를 만난적도 없을뿐더러 앞으로 찾기도 쉽지 않을 거란 걸 잘 알테니까.’
[하지만 한입으로 두말하겠습니까? 본인이 뱉은 말이 있는데요.]
‘여자는 입이 두 개라 가끔 딴 소리도 해.’
[그런 여성 차별적인!]
‘농담이고. 근데 니가 왜 발끈해? 여자도 아니면서.’
[······.]
‘아무튼 아직은 애증이 남아있는 상태일거야. 쉽게 말해서 이건 경우는 다르지만 일종의 애정싸움 같은 거야. 심하게 싸우고 투닥거리다가도 섹스 한 방이면 풀어지는 뭐 그런.’
[정말이지 섹스가 만병통치약이군요.]
‘대물이 전가의 보도라고 해야겠지.’ 역에 도착한 도훈은 곧바로 제니퍼의 거주지로 찾아갔다.
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오피스텔이었다.
‘역세권 오피스텔에 사는군.’
[그래도 나름 한국에서 오래 활동한 영어강사니까요.]
‘음, 집에 있어야 할 텐데.’
오피스텔은 외부인이 출입하지 못하게 출입구가 비밀번호로 되어 있었다. 만능열쇠도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 도훈은 한참동안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잠시 후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문을 열자 도훈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902호랬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동안에도 어떻게 하면 제니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생각했다.
‘아까 화가 나서 끊긴 했지만, 막상 얼굴 보면 쉽게 내치진 못할 거야.’
도훈은 일부러 입고 온 외투를 인벤토리에 넣고 반 팔만 입었다. 10월이 넘은 시점이라 반팔로 돌아다니기엔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왜 갑자기 외투를 넣으십니까?]
‘밖에서 춥게 떨고 있는 모습을 봐야 제니퍼가 불쌍하게 여길까 싶어서. 문전박대당하면 제아무리 나라도 힘들거든.’
[캬, 역시 주인님은 간사하기가 이를 데 없군요.]
‘칭찬으로 듣겠어.’ 902호 앞에선 도훈이 일부러 닭살을 만들어 오들오들 떨면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안에서 소리가 나더니 스피커에서 제니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도훈 학생?”
“누나. 문 좀 열어주세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제니퍼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한 번도 집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기에 도훈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너무 추워서 그런데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될까요?”
도훈은 최대한 오들오들 떨면서 불쌍한 연기를 했다.
[가증스러울 정돕니다.]
‘이 정도는 메소드 담배 없이도 가능하단 말이지.’
“······.”
제니퍼는 대답도 않고 한참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도훈은 지금도 제니퍼가 카메라로 자신을 보고 있을 것 같아 오들오들 몸을 떨면서 불쌍한 연기를 했다.
덜컥-.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제니퍼가 나왔다.
“날도 쌀쌀한데 반 팔만 입고 다니면 어떡하니?”
“그, 그게 무작정 누나 만나러 지하철 타러 나왔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반팔 차림이더라고요.”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는데?”
“드,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하-. 진짜. 못 살겠다.”
제니퍼가 문을 열어주자 도훈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 혼자 사는 오피스텔치곤 제법 큰 투룸 형태의 집이었다.
내부는 단출할 정도로 깔끔했는데, 심플함을 추구하는 이케아 가구들이 노르딕 풍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아, 이게 누나 집이구나. 좋은데 사시네요.”
카디건을 걸치고 있던 금발의 제니퍼가 팔짱을 낀 채 도훈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 사는 줄은 어떻게 알고 왔어?”
“저, 그게 실은 저희 삼촌이 국성대학교 교직원이시거든요.”
“삼촌?”
“네. 제가 강사 선생님께 소포 붙일 게 있다고 집주소 좀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 원래는 안 되는 건데, 급하게 과제 제출용 시디를 보내야 한다고요.”
“참나-. 뭘 그렇게까지.”
“이렇게 안하면 누나가 나 안 만나줄까봐요.”
도훈이 갑자기 제니퍼 앞에 무릎 꿇었다.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