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496화 (1,451/2,000)

1479. 대학 축제-104-

창범은 곧장 인천에 파견을 나가있는 조대근에게 연락했다. 지부장 대리로서 어지간한 일은 혼자서 처리하려고 했지만, 미호의 이탈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뭔 일이냐? 전화를 다하고.

“대장. 큰 일 났어.”

-큰 일? 왜 또 누가 키보드에 컵라면 쏟았어? 걱정마. 이번엔 방수 되는 걸로 싹 다 교체했으니까 씻어서 말리면 문제 없을 거야.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큰 일 났다고.”

창범은 호들갑을 떨며 대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처음엔 건성으로 듣던 대근도 내용을 모두 듣고 나더니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미호가 정말 우리 지부를 떠난다고 했다고?

“그렇다니까? 게임하고 있는데 다짜고짜 나타나서는 내 뒤통수를 빡- 후리더라고.”

-근데 이 새끼는 가게 봐달랬더니 지가 게임 처 하고 있네. 똑바로 일 안할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어쭈? 아까부터 말이 짧다? 공과 사 구분 못하냐?

“아니 대장, 진짜로 심각했다니까···요?”

-흐음. 일단 이틀만 붙잡고 있어봐.

“이틀 뒤에 와요?”

-어. 이 쪽일은 거의 다 마무리 됐어. 내가 가서 직접 말해볼테니까 어디 떠나지만 못하게 설득하라고.

“이미 가게 떠났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미호를 설득해?”

-너 미호 어디 사는 줄 몰라?

“부평초처럼 떠도는 여자가 어디로 튈 줄 알고?”

-이 새끼 진짜 동료가 어디 사는 줄도 모르네? 미호도 집 있어 인마.

“엥? 집이 있었어?”

대근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야. 너 우리집 주소는 아냐?

“대장은···. 아파트 살지 않아?”

-와, 이 새끼 이거 진짜 심각한 놈이네. 미호네 집 주소 문자로 보낼테니까 이따가 찾아가봐. 설사 떠난다고 해도 집 정리하고 뭐하고 하려면 며칠 더 머무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가게는 어떻게 하고?”

-대충 상황들어보니까 건이 혼자 일 다하고 있는 것 같던데, 너 하나 없어도 문제 없겠다.

“그게 아니라 진짜 잠깐 접속만 한거라니까?”

-야야, 끊어봐. 여기 일 났다. 나중에 얘기해.

“대장! 대장?”

-미호네 집에 꼭 가봐!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창범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씨, 나보고 혼자서 어떻게 설득하라고.”

그때 대근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보내준다던 미호의 집 주소였다.

주소지를 확인한 창범은 미호의 집이 자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뭐야? 우리 동네 사는 거였어?’

지근거리에 살면서도 미호가 어디서 나타나서 사라지는지도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창범은 흡연실로 혼자 담배를 피우며 자책했다.

‘내가 미호한테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같은 동네에서 몇년을 살았는데, 어디서 사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으니.’

미호의 갑작스러운 이탈을 이해할 수 없었던 창범은, 혹시나 그런 무관심이 미호를 서운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긴 만날 때마다 남자 정기 빨아먹는 요괴라고 놀렸으니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미호의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미호가 남자를 잡아(?)먹는 것은 오로지 생존 때문이었다.

사람이 밥을 안먹으면 일주일도 안 돼 굶어 죽는 것처럼, 미호는 남자의 정기를 주기적으로 흡수해야 급속한 노화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애꿎은 민간인의 수명을 갉아먹는 행위에 대해 도저히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창범은 뼛속까지 PK단의 멤버였고 스스로를 음지에서 암약하는 히어로라는 자부심을 살고 있었다.

세상을 파괴하는 플레이어에 맞서는 얼굴없는 영웅처럼. 그런 PK단에 미호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객원이었으며, 어떻게 따지고 보면 그녀의 능력 때문에 부정을 눈감는 일종의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상부의 결정도 이상하단 말이야? 우리한테는 민간 인에게 털끝하나 못 대게 하면서 또 객원인 미호에게는 수명을 갉아먹을 수 있는 면죄부를 부여한 것도 그렇고.’

깊이 따지면 모든게 모순이었기 때문에 창범은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찌됐건 현재 자신들에게 미호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며, 양성소를 나온지 얼마 되지않는 건으로는 절대 대체할 수 없는 핵심 인재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건아.”

“네, 형,”

“나 잠깐 두 시간만 자리 비울 테니까 혼자서 가게 좀 보고 있어.”

“알겠습니다.”

건에게 가게를 통째로 맡긴 창범은 서둘러 미호의 집을 찾아 나섰다.

* * *

“하아-. 갑자기 담배 땡기네.”

{하나 사면 되지?}

{난 반대야. 폐 망가진다고. 혼자 쓰는 몸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

{지금도 충분히 오래 살았어. 얼마나 더 살려고 그래?}

{미호도 언젠간 인간이 되어야 할 것 아니야? 폐병 가진 인간이 될 순 없잖아.}

담배 한대를 피우려고 하는데도 내부의 영혼들이 서로 옥신각신 떠들어댔다.

안 그래도 골치가 아픈 미호는 오늘따라 영혼들의 주절거림에 진절머리가 났다.

“다들 좀 닥쳐줄래? 혼자 생각좀 하고 싶으니까.”

{······.}

{내가 뭐랬어 아까부터 심각해 보이더라니까.}

{세나 네가 제일 떠들었어.}

“그래 세나, 너.”

집으로 돌아가던 미호는 그네에 혼자 걸터 앉았다.

마을 아이들을 위해 근린시설 한 켠에 설치된 놀이터였다.

삐그덕- 삐그덕-

기름칠이 덜 된 그네는 앞뒤로 움직일때마다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잘 한 결정이겠지?”

{대답을 원하는 거라면, 난 반대.}

{난 찬성. 이대로 PK단에 붙어 있어봐야 놈에게 이용당할 뿐이야.}

{차라리 놈을 부술까? 내래 저격총 하나만 구해 달라우. 간만에 능력발휘 해볼참이니.}

{오, 이랑 오랜만에 직접 나서는 거야?}

영혼들이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또 다시 머리가 아파왔지만, 미호는 그냥 참기로 했다. 군령자로서 어쩔 수 없는 숙명같은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못 죽여. 개가 주인을 물 수 없듯이.”

{미호 말이 맞아. 놈이 미호에게 악독한 사술을 걸었어. 지금은 떨어져 있어서 괜찮지만, 미호는 그 변강쇠 플레이어 앞에만 서면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다고.}

{그러니까 내가 해주겠다는 거 아니야. 미호는 몰라도 우리는 금제랑 상관없으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우리는 일종의 기생수야. 영혼도 육신의 통제를 받아. 미호가 강하게 거부하는 것은, 우리도 억지로 할 수 없어. 몸이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

{젠장. 완전히 코가 꿰어버렸네.}

{그러니 이게 최선이라니까? 놈은 분명 미호를 이용해 지부를 박살내려고 할 거야. 그 전에 미호가 떠나주는 게 그나마 남은 동료를 위하는 거야.}

{하지만 놈이 약속했잖아.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자신도 먼저 나서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집에 감금시켜놓고 멋대로 강간한 놈인데.}

{음, 근데 난 좋았는데?}

{미친 기생년. 넌 남자 좆만 보면 환장해서 그렇지.}

{어쭈? 한 번 해보자는 거야?}

“그만해.”

미호가 다시 영혼들을 자제시켰다.

그녀의 내면이 번민하듯, 영혼들은 서로 입장을 나뉘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도훈의 금제를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지부에서 스스로 멀어지자는 쪽과, 어차피 PK단에 척진것도 없는데 도훈을 돕고 그의 정기를 나누어 받자는 입장이었다. 하루 내내 고민하던 미호는 결국 전자의 입장을 취했으나, 막상 창범에게 결심을 말하고 나서도 후회가 남아 혼자 망설이는 것이었다.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야. 요나 말처럼 난 주인을 물 수 없어.

그렇다고 동료를 적에게 팔아 넘길수도 없으니 이게 최선이야.”

{그럼 왜 후회해? 저질렀으면 이제 결정된 거 아니야?}

{미호라도 지금 멤버들과 헤어지는 건 당연히 싫겠지. 가족같은 존재였으니까.}

{창범이 그 싸가지가? 난 볼 때마다 밥맛이던데.}

{대근이 아저씨는 괜찮아. 유부남만 아니었으면 미호가 대시했을지도?}

{어우, 대머리는 쫌.}

{다들 뭔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미호는 심각한데.}

{우리도 심각해. 지금 미호는 정기를 꾸준히 공급해 줄 수 있는 양질의 공급처를 손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어째서?}

{PK단에서 탈회한 미호에게, 놈이 정기를 나눠 줄 이유는 전혀 없을테니까.}

{가만? 그럼 미호는 지금 동료들을 선택하고,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거야?}

{이건 좀 아닌것 같은데.}

{그래. 언제까지 새로운 남자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떠돌순 없다고.}

{게다가 심지어 잘해. 감히 내가 말하는데, 조선 팔도에 그런 사내는 단연코 없었어.}

{기생은 좀 빠지라니까?}

{밑에 깔려서 울고불고 헐떡이던건 누구시더라? 아하, 양반댁처녀가 아니신가?}

{이게 확 죽을라고?}

“쫌! 그만 하라니까? 나도 지금 머리 터질 것 같으니까.”

“뭐야? 진짜로 우리 동네 살았네?”

그때였다.

미호의 집으로 향하던 창범이 우연히 놀이터에 앉아있던 미호를 발견한 것은.

미호가 움찔 놀라며 훽 창범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야? 나 미행했어?”

“워워. 오해 말라고. 대장이 집주소 알려줘서 찾아가던 길이니까.”

“대장이?”

“잠깐 옆에 앉아도 돼?”

창범이 빈 그네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앉든지 말든지 네 맘이지.”

“허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하실까 누님.”

“······.”

창범은 그네에 앉더니 한동안 말을 아꼈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던 중 미호가 창범에게 말했다.

“담배있으면 좀 줘봐.”

“넵! 바로 대령요!”

창범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양손 공손히 담배를 건넸다.

“불은 됐어.”

미호가 손끝을 심지처럼 불꽃을 일으켰다.

창범도 나란히 담배를 입에 물고는 맞담배를 폈다.

“하필 돛대까지 떨어졌지 뭐야.”

“어, 말만해. 담배는 내가 언제든 사다가 바칠테니까.”

“설마 나 설득하러 온 거야?”

창범이 과장된 손짓으로 손사레를 쳤다.

“아니아니. 난 누님 결정을 언제까지나 존중한다니까. 대장의 전언을 전하려고 온 거야.”

“뭔데?”

“내일 모래면 인천에서 돌아올테니까 그때까지만 결정을 보류하면 안되겠냐고.”

“······.”

“솔직히 미호 누나가 어떤 계기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절대 쉬운 결정은 아니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별을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도 납득할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 우리 사이가 한두해도 아니고, 그 정도 자격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무, 물론 내가 아니라 대장 말이야.”

“···쳇. 소연이 앞에선 병신 같더니 말은 잘하네.”

“그거 칭찬이지? 고마워.”

“혹시나해서 하는 말인데, 만에 하나라도 내 머릿속을 들여다 볼 생각이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야.”

“내가 왜 그렇겠어? 난 동료에게 능력을 쓰지 않는다고.”

“······.”

{조심해. 창범에게 발각되면 그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거기에 놀아난 미호 너까지 위험해져. PK단 지부에서 절대 가만두지 않을테니까.}

{그냥 여기서 창범이를···.}

{그거 아니지.}

{못 됐다 진짜.}

{양심 어디?}

“암튼 몇 년을 같은 동네 사는데도 몰랐다니. 거참, 나도 참 둔감하지.”

“이제와서 친한척이야?”

“그게 아니라 변명하는 거야. 사실 내가 좀 남들한테 관심이 없는 편이라.”

“알아.”

“능력이 처음 발휘되었을 때 다른 사람 생각을 너무 많이 알게 되다 보니까 역겹고 토할 것 같더라고. 나중에 통제하게 되었을때도 다른 사람에겐 완전히 관심을 끊고 살았어.”

“그 얘기를 나한테 왜 하는 건데?”

“그냥, 있잖아. 우리같은 일을 하다보면 솔직히 회의감이 많이 드는게 사실이잖아. 직업도 변변찮지.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지. 순전히 사명감으로 버텨야 하는데 우리가 무슨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도 아니고.”

{종간나 애미나이가 누구 앞에서 헛나발을 불고 있어?}

{참으라우 동무.}

{니들 시트콤 찍니?}

“그러다 보니 조금씩 내가 마모되는 느낌이 들더라.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기분. 그냥 소모품처럼 쓰다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

어쩌면 미호 누나도 나랑 비슷한 마음이 아닌가 싶어서.”

“······.”

“누나만 그런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누나 옆에는 우리가 항상 있을테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할말 전했으면 가.”

“이틀 정도는 고민해 볼거지? 응? 대장 얼굴이라도 보고 얘기 하자고.”

“알아들었으니까 가라고.”

“오케이, 오케이. 그럼 밤길 조심하시고. 아차, 남자가 조심해야지?”

“이게 확 그냥!”

“헤헷.”

창범이 장난스럽게 혀를 낼름 내밀더니 도망쳤다.

미호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

너무나 좋은 동료들이었다.

그래서 떠나야 하는 상황이 몹시 서글펐다.

{창범이 말대로 이틀만 결정을 보류해 보는 건 어때?}

{대장에게 작별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조대근씨랑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아니면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해봐. 난 떠나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 대물 플레이어랑 딜을 해보는 방법도 있고.}

{딜이라니?}

{PK단이 꼭 미호가 소속된 지부만 있는 건 아니잖아? 다른 놈들의 정보를 물어다주는 조건으로 동료를 보호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놈도 섯불리 움직일 상황은 아닌것 같으니.}

영혼들이 서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미호는 발끝으로 그네를 밀며 그 뒤로도 혼자 놀이터에 긴 시간을 고민했다. 하지만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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