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8. 대학 축제-103-
“암튼 니들이 못난 회장 모시느라 고생이 많다. 도훈이 이 새끼가 겉만 번지르르하지 실속이 없거든.”
성수가 도훈을 나무라자 연두가 곧바로 반박했다.
“아니에요. 회장님이 저희들 얼마나 생각해주시는데요. 도훈오빠 아니었으면, 이렇게 잘 되지 못 했을 거예요.”
농담으로 던진 말을 다큐로 받아들이자 성수만 뻘쭘해졌다.
“그, 그래? 그냥 한 말인데. 암튼 시원한 맥주랑 마른 안주 좀 부탁해.”
“넹. 서비스 팍팍 드릴게요!”
주문을 받은 연두가 떠나자 성수가 도훈을 향해 물었다.
“뭐냐? 애들 정신 교육 단단히 시켜놨네?”
“형 말대로 제가 겉만 번지르르 해서요. 여자 후배들이 잘 따르는듯.”
“이 새끼 아주 미남계로 학과 운영해 가는 구나. 좋은 전략이다.”
“그냥 해본 말이죠.”
“그나저나 연애 사업은 여전히 진척없고?”
“어련히 잘 되겠죠.”
성수는 늘 도훈이 솔로인게 마음에 걸렸다. 한 때 소개팅까지 주선한 전력이 있는 만큼 그가 좋은 여자를 만나길 바랐다.
“이 새끼 이거 혹시 내년 노리는 거 아니야?”
“내년이라뇨?”
“다음 학번 새내기 말이여. 내년에도 뉴페이스가 잔뜩 올테니까.”
“오, 그건 생각도 못했는데?”
“진짠가보네?”
“뭔 소리예요. 내가 무슨 여자 못 사귀어서 안달난 사람도 아니고.”
“하기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사귈 수 있는데 조급할 것도 없겠다만.”
“그 정돈 아니고요.”
“맥주 가져왔어요!”
그 새 주문을 받은 연두가 쟁반에 병맥주 두 병과 마른 안주를 들고왔다.
오징어와 쥐포, 땅콩이 섞인 안주는 다른 테이블에 나간것과 달리 산처럼 풍성하게 쌓여 있었다.
“오, 이렇게 안주를 많이 주면 적자나는 거 아니야?”
“전임 부회장님이라 특별히 서비스 팍팍 넣었어요.”
“고마운데. 연두 너도 같이 한 잔 할래?”
“말씀은 감사하지만 주문이 너무 밀려서요. 나중에 시간 날 때 올게요!”
연두는 특유의 발랄한 태도를 보이더니 도훈을 향해 몰래 윙크했다. 도훈은 혹시나 성수가 볼까봐 움찔 놀랐으나 다행히 성수는 안주에 군침이 도는지 오징어 다리를 씹고 있었다.
“야, 이거 맛있네.”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드시러 온 거 아니에요?”
“술 팔아주는 것도 돕는 거지 인마. 자 한잔 하자.”
“그래요.”
성수는 병맥주 마개를 숟가락으로 따더니 나머지 한병도 따 주었다.
“뭐해요? 왜 두개나 따요?”
“병맥은 나발이지 인마. 마시자.”
맥주병을 든 성수가 주둥이 부분을 부딪히며 말했다.
“치얼스!”
“어우, 이상한 프로그램 보더니 허세만 잔뜩 늘었네.”
도훈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함께 나발을 불었다.
“캬- 맥주맛 죽인다. 이게 축제지.”
“형은 축제도 몇번이나 해봤으면서 뭘 새삼스레.”
“말도 마 인마. 작년까지 나도 원없이 놀았지. 근데 3학년 되어서 도서관에 있는데 밖에서 음악소리 들리면 앉아서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 거의 고문이라니까?”
“이어플러그 끼면 되잖아요.”
“그게 아니지.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남들 다 밖에서 신나게 노는데 도서관에 처박혀서 책보고 있으면 그게 공부가 되겠냐. 안 그래도 어제까지 버티던 애들 시끄럽다고 다 사설 독서실로 피신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축제가 싫겠네요.”
“어쩔 수 없지 뭐. 대학이 임용고시생만을 위한 공간도 아니고.
난 그냥 이해했어. 나도 작년에 그렇게 떠들었으니까.”
성수가 작년 생각이 난다는듯 병나발을 불더니 테이블에 쾅-내려놓고 말했다.
“그때 너 군대 있을 때였지 아마? 초대가수로 걸그룹 왔는데 진짜 난장판이 난 거야. 가이드라인 쳐놨는데 거기 뚫고 들어가서 손한번 잡아보겠다고.”
“설마 형도 거기 낀건 아니죠?”
“당연히···.”
성수가 오징어를 입에 물며 대답했다.
“맨 선두에 섰지. 그때 무대 밑에서 아이돌이랑 잡은 손 일주일동안 안 씻었잖아.”
“와, 진짜 더럽게.”
“가문의 영광이랄까? 흐흐, 도훈이 넌 그런 기분 모를거야.”
“알고 싶지도 않고요.”
“맞다. 이번에는 초대가수 누구 온대? 아이돌은 없나?”
성수의 물음에 도훈도 순간 누군가가 떠올랐다.
“엇, 맞다 형. 1학기때 저희랑 만났던 아이돌 지망생 애들 기억나요?”
“당연하지.”
“걔들 데뷔했나봐요. 내일 초대가수로 온다는데요?”
“진짜? 대박!”
성수가 흥분했는지 들고있던 맥주병을 테이블에 쾅 내리쳤다.
“그러니까 그때 만났던 링링이니 린다니 그 애들 말이지?”
“네. 저도 포스터 보고 알았어요.”
“와, 진짜 그때가 좋았는데. 근데 걔들이 우리 기억이나 하려나? 군대 간 걔 누구냐, 걔 사촌동생이라서 잠깐 얼굴만 비춘 거잖아.”
성수는 그날의 모임에 대한 기억이 노래방에서 끝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그 이후 걸그룹의 모든 멤버들과 잠자리를 가졌기 때문에 누구보다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려나요?”
“암튼 신기하긴 하네. 사적으로 만났던 아이돌 지망생들이 데뷔해서 우리학교에 초대가수로 온다는 게.”
“그쵸?”
“구경이나 가볼란다. 도훈이 너도 갈래?”
“그래요. 봐서.”
[재회를 하시려고요?]
‘꼭 만난다기 보다는 먼 발치에서라도 한 번 보려고. 어쨌든 내가 아는 사람중에 진짜로 연예인이 된 거니까.’
[알기 뿐입니까? 그룹 전체를 홀라당 까드셨는데요.]
‘그거야 뭐. 어쩌다 보니. 암튼 걔들이랑 재밌었는데.’
성수와 함께 술을 마시며 추억을 얘기하다보니 시간이 금방금 방 지나갔다. 그때 마침 정음과 아영이 둘 사이를 지나가면서 성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앗, 부회장님 오셨어요?”
“이게 누구야? 와 정음이 많이 예뻐졌구나.”
성수는 정음을 보고 무척 반가워했다.
부회장 시절에도 학과 행사에 늘 협조적이었던 정음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음을 반긴 성수는 옆에 서 있는 아영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저런 후배도 있었지? 이름이 뭐였더라?’
아영은 1학기 때 학과행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당발인 성수도 이름을 단번에 떠올리지 못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성수의 난처함을 짐작한 아영이 자기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성수 선배님. 1학년 박아영입니다.”
“아 맞다맞다. 아영이. 여름 캠프때 봤었지?”
“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그래 못난 회장 모시느라 다들 수고 많아.”
“별 말씀을요. 그럼 저흰 일하러 가볼게요.”
“고생들해.”
정음과 아영은 인사만 나누고 사라졌다.
성수가 도훈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물었다.
“아영이라는 애 학과 활동 이제 열심히 하네?”
“네. 여름 캠프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나서더라고요.”
“하도 얼굴을 안 비쳐서 이름도 까먹었잖아. 근데 쟤도 되게 예쁜데?”
“왜요? 형 스타일이에요?”
“아니아니. 큰일날 소릴. 여자친구한테 맞아 죽어 인마. 그냥 예쁘다는 거지.”
성수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방금 등장한 두 사람이 체육교육과의 원투 펀치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다.
‘이번 년도 신입생은 참 복받았단 말이지. 정음이만 해도 대박인데 아영이란 애도 엄청 예쁘네.’
“하긴 형 성격에 여자친구 두고 바람피울리가 없죠. 상대가 아이돌이면 모를까.”
“야. 뭔소리야. 그건 진짜 노래방만 간 거잖아. 불순한 의도는 없었어.”
“누가 뭐래요? 형이 그때 하도 좋아했던 모습이 생각나서 그랬죠.”
“이 새끼가 진짜 누가 들으면 딱 오해하기 좋게 말하네. 분명히 말하지만 난 여자친구한테 충성한다.”
“네네.”
“하- 새끼 못 믿나 보네.”
“믿어요.”
도훈은 성수와 대화를 나누면서 몰래 시선을 돌렸다.
아영이 먼 발치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훔쳐보고 있었다. 그러다 도훈과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일하는 척 주문을 받으러 움직였다.
‘뭐지? 아영이 낌새가 이상한데.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나?’
[마음의 소리라도 들어보시든가요.]
‘···아니다. 맨날 그렇게 남의 마음 읽는 것도 피곤한 일이야.
다들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을 테니까. 공략할 때 아니면 되도록 주변 지인들한테 능력 안쓰려고.’
[정말요?]
‘맨날 남의 생각을 알아내려고 한다면 그것도 너무 피곤한 일이잖아. 만약 그런 능력자가 있으면 머리 터질듯.’
* * *
도훈이 말한 능력자는 오늘도 PC방 구석에 앉아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누가 내 얘기하나?”
귀가 간지러워진 창범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더니, 손끝에 귀지가 살짝 묻어나오자 후- 하고 바람에 날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호가 창범의 뒤통수를 후렸다.
뻑-!
“악! 뭐야? 기습인가?”
“기습같은 소리하네. 더럽게 그걸 어디다 터니? 키보드 안에다 들어가잖아.”
“뭐야? 난 또 누구라고? 왜 왔어? 오늘 회동도 아닌데.”
“그냥 심심해서.”
미호는 창범의 옆 자리에 앉더니 그의 게임을 지켜보았다.
“안 질리니, 넌?”
“그냥 시간 때우는 거야.”
“인생 참 지루하게 산다, 너도.”
“뭐래? 왜 괜히 나타나서 시비야? 일이나 돕든가.”
“사장 대행은 너잖아. 난 그냥 놀러온 거고.”
“하여간 말 한마디를 안 져요.”
창범이 다시 고개를 돌려 미호를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피부가 유난히 빛나고 혈색도 좋아보였다. 원래부터 미인이었기 때문에 창범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따라 엄청 예뻐 보이네. 하여간 남자 홀리는덴 도사지.’
“어제 정기 좀 잔뜩 빨았나봐?”
“응?”
“상대는 아주 피골이 상접했겠는데? 혈색이 왜케 좋은데?”
“그야 뭐···.”
미호는 뭔가를 말할까 하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차마 플레이어의 정기를 나누어 받았다고 자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훈에게 마인드 컨트롤 당한것도 있지만, 그에게 느끼는 복종심이 그녀를 억누르고 있었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뼈 삭겠는 그러다.”
“뭐래 동정 새끼가.”
“누, 누가 동정이래?”
창범이 화들짝 놀라며 반발했다.
“아니야? 어젯밤 소연이랑 재미 좀 봤어 그럼?”
“농담하지마. 아직 그런 사이 아니니까.”
“내가 일부러 빠져주기까지 했는데 진도도 못 나갔단 소리야?”
창범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뭐, 나갈만큼은 나갔지.”
“오, 정말? 드디어 총각 탈출?”
“누가 결혼한대?”
“누나, 음료수좀 드시면서 하세요.”
그때 멀리서 야간 알바를 보던 건이 아메리카노 잔을 날렸다.
문자 그대로 공중으로 잔을 던졌는데, 놀랍게도 잔은 안보이는 실에 매달린 것처럼 두둥실 떠오르더니 미호의 손에 착 감겼다.
주변에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능력과시였다.
“고마워.”
“야. 너 함부로 쓰지 말라니까.”
창범이 건을 나무랬지만, 건은 시큰둥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혼자서 카운터 보고 청소까지 하려니 너무 바빠서요, 형.”
“아니 저 자식이.”
건은 자기 할말만 마치고 다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창범이 미호에게 건의 뒷담화를 했다.
“첨 왔을 땐 말도 잘듣고 싹싹하더니만, 요새 기어오른단 말이지.”
“막내 말이야?”
“봤잖아 방금도. 규율상 능력발휘 함부로 못하게 되어 있는데 자꾸 시도때도 없이 저러는 거.”
“냅 둬. 위에서 허락 받았다잖아. 필요할 땐 허락없이 써도 된다고. 그리고 능력을 안 쓰면 계속 말을 더듬는데, 알바도 힘들고.”
“네가 자꾸 오냐오냐 하니까 저렇다니까? 혼 낼땐 같이 혼내야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미호가 되물었다. 갑자기 진지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창범도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니 업계 선배로서···.”
“난 PK에 적을 두고 있긴 하지만, 너랑은 달라. 능력 통제 또한 받지 않고.”
“와, 섭섭하게 말을 또 그렇게하시나.”
“아니. 창범이 너나 대장처럼 직접 건이한테 뭐라고 하기는 곤란한 입장이라고. 직속도 아닌데.”
“직속이 어딨어?”
“없다고 할 순 없지.”
미호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기 때문에 창범도 더 이상 뭐라 할말이 없었다.
‘왜 저리지? 오늘 생리하나? 아니 근데 여우도 생리를 하는 동물인가?’
창범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미호가 말했다.
“안 그래도 대장 오면 말하려고 했는데, 나 당분간 객원에서 빠져야 할 까봐.”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뭐. 건이 없을때도 괜찮았잖아. 이제 염동술사도 보강 됐는데 여기 내가 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자, 잠깐만. 왜그래 미호? 무슨 일 있어?”
“별로.”
미호는 정을 떼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창범은 마치 자기가 뭔가를 섭섭하게 해서 그런것처럼 갑자기 사과했다.
“미안. 내가 말이 심했지? 난 그냥 너랑 친하게 지내려고···.
섭섭한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다 고칠게.”
“그런거 아닌데.”
“그, 근데 왜 갑자기 떠나겠다는 건데?”
“너무 한 지역에 얽매여있었나 싶어서.”
“잠깐만. 그게 이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 않아? 곧 대장 돌아오는데 대장 얼굴 보면서 얘기하자. 난 임시 지부장이라 아무 권한도 없다고.”
창범은 아예 애원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미호는 이미 결심을 마친 표정이었다.
“PK단에 합류하면서 말했었어. 플레이어를 사냥하는 대신 남자의 정기를 흡수하겠다고. 다만 내가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되는 것도 계약의 일부였지.”
“아니 갑자기 그런식으로 나오면···. 요새 좀 피곤해서 그런것 같은데 내가 대장한테 말해서 휴가좀 달라고 해볼게. 응? 미호야.
아니 미호누나.”
“암튼 난 할 말 다 끝났으니 가볼게.”
“아니 잠깐만, 미호! 내말 좀 들어보라니까.”
미호가 질척거리는 창범을 뿌리쳤다. 그녀의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함부로 내 몸에 손 대지마. 다른 인격이 튀어나오면 나도 통제가 안될것 같거든.”
“아···.”
미호가 피시방을 나서자 창범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야단났네. 대장이 사고만 치지 말랬는데, 이건 뭐 핵폭탄이 떨어져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