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3. 대학 축제-98-
"승현아. 잠깐 나 좀 보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지환이 절친인 승현을 찾았다.
"지금 바빠 인마. 애들이 일 손 달린다고 설거지 도와달란다."
"돕긴 시발, 그러니까 니가 다른 새끼 설거지나 하고 다니지."
"뭐래 미친 새끼가? 뒤지게 맞고 한 대 더 맞고 싶냐?"
"잔말 말고 잠깐만 와보라고."
지환은 승현을 주점 구석에 있는 임시 천막으로 데려갔다.
소주와 맥주가 궤짝으로 쌓여있는 일종의 보관 창고였다. 천막은 사방으로 가림막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면 밖에선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지환이 핸드폰의 플래시를 켜더니 천막에 달린 전구를 켰다. 리드선으로 연결해 임시로 천장에 달아놓은 백열등이 흐릿하게 내부를 밝혔다. 하지만 워낙에 어두웠기 때문에 음침하고 음험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소였다.
"어때? 죽이지? 아까 술 떨어져 왔다가 찾았다."
"뭘 죽여 새끼야? 바빠 죽겠는데 너부터 죽일까?"
"하-. 새끼, 일단 담배나 한 대 빨자."
지환이 승현에게 담배를 건넸다. 창고에 짱박혀 양아치처럼 담배를 나눠피던 중 지환이 승현에게 말했다.
"오늘 따라 정음이 졸라 맛있어 보이더라."
"여자가 음식이냐? 하여간 미친 새끼라니까?"
"아니 평소엔 엄청 수수하게 다니잖아. 아까 일부러 말걸면서 가까이서 봤는데 가슴도 졸라 크더라고. 다시봤다 진짜."
"자세히도 봤네 미친새끼."
승현이 혀를 끌끌 찼다.
승현도 같은 양아치긴 했지만, 지환처럼 여자를 밝히는 타입은 전혀 아니었다.
"암튼 말이야. 내가 작업 좀 하려는데 네 도움이 좀 필요하거든?"
"뭔 도움?"
"한 번 들어봐."
지환이 자신의 작전을 친구 승현에게 설명했다. 음침한 곳에서 작당모의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협잡꾼처럼 보였다.
"좀이따 니가 눈치봐서 술 떨어졌으니 술 좀 가져오라고 시키란 말이지."
"누구한테?"
"당연히 정음이지 새끼야."
"돌았냐? 그걸 여자애한테 왜 시켜? 남자 후배들 시키면 되지."
"아니, 새끼야. 그러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말만 하란 말이야.
어? 술 떨어졌네? 술이 어딨지? 정음아, 혹시 창고 어딨는지 줄 알아? 하고."
"너 지금 내 대사 리딩한 거냐?"
"어."
"씨발 존나 역겹네. 내가 언제 그딴식으로 말했는데?"
"일단 들어봐 새끼야. 그럼 정음이가 그럴 거 아니야. 선배, 제가 가져 올게요. 하고."
"미친놈이! 성대모사 말라고 븅신새끼야. 토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정음이가 그렇게 반응 안하면 어쩔건데?"
"정음이는 한다니까? 걔 운동을 오래 배워서 그런지 선배들한테 평소에 엄청 깍듯하잖아."
"그렇긴 하지. 볼때마다 꼬박꼬박 인사 잘 박더라? 다른 여자 애들은 가끔 쌩까는데."
"그니까 넌 정음이만 이쪽으로 보내주면 역할 끝이라고."
듣고있던 승현이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왜? 그럼 여기 매복해 있다가 덮치기라도 하게? 돌았구나 니가? 대학교 축제기간에 현행범으로 구속되고 싶냐? 빨간줄 그으면 교사도 못 되는 거 알지?"
"뭐래? 내가 왜 강간을 하는데?"
"그럼 여기로 왜 유인하는데?"
"그러니까 말 끊지 말고 계속 들어보라고."
지환이 자신의 작전을 이어서 설명했다.
"정음이가 천막에 와서 술을 꺼내려는데 마침 내가 천막에 따라 들어가는 거야."
"그래서?"
"그럼 정음이가 그럴거 아니야. 선배···."
"씨발놈이, 하지 말라니까!"
승현이 정말로 한 대 칠것처럼 주먹을 높이 들자 지환이 움찔놀라며 자중했다.
"암튼 그렇게 우연히 만난것처럼 꾸미는 거지."
"그게 다야?"
"당연히 아니지. 그때 내가 실수한 것처럼 다치는 거야."
"다쳐? 일부러?"
"당연히 연기지. 그럼 정음이가 놀라서···."
지환은 또 여자목소리를 내려다가 승현이 죽일듯 노려보자 생각을 바꿨다.
"암튼 나를 응급조치 해줄 거 아니야."
"너,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새끼야. 원래 이런 전형적인 전개가 잘 통하는 거라고. 암튼그렇게 말문을 트면서 슬슬 작업을 시작하는 거지."
"턱도 없는 계획이라는 데 500원 건다."
"이거 먹힌다니까 진짜?"
"아니. 설사 정음이가 너를 응급조치 한다고 쳐. 존나 긍정적으로 행복회로 돌려서 니 뜻대로 다 된다고 치자고. 그걸로 어떻게 정음이를 꼬시겠다는 건데?"
"이 새끼가 뭘 모르네. 잘 들어봐. 원래 남녀의 만남은 계기가 가장 중요한 거야."
"계기?"
"정음이는 평소 나랑 접점이 거의 없잖아. 오다가다 가끔 인사만 나눌 뿐."
"당연히 그렇겠지. 너 1학기 때 나연인가 뭔가한테 까이고 학과 후배들한텐 일부러 얼씬도 안했잖아."
"까인게 아니라 내가 깠다고."
"지랄. 내가 옆에서 다 봤는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암튼 난 정음이한테 그저 그런 2학년선배 중 하나잖아. 지금까지 계기가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주점창고에서 우연히 내가 다치게 되면서, 그걸 또 우연히 정음이가 치료해 줬다? 그럼 거기서부터 둘만의 특별한 추억이 만들어지는 거지. 인연의 시작이랄까?"
"하-. 이 새끼 이런 대가리로 어떻게 여자를 꼬셨지? 그게 지금 먹힐거라고 보는 니 대가리가 레전드다 새끼야."
"이게 왜 안 되는데?"
승현이 조목조목 반박했다.
"잘 들어봐. 첫째, 니 말대로 되려면 정음이 너한테 첫눈에 반한다거나, 평소에 호감이 있어야 가능하겠지?"
"내가 어때서?"
"미친, 너 도끼병있냐?"
"왜? 나 정도면 충분히 먹히는 얼굴인데? 내가 지금껏 후린 여자가 열손가락 다 합쳐도 못 센다고."
"얼씨구."
승현은 객기를 부리는 지환을 타일렀다.
"야. 그런 대사도 도훈이 형 정도 와꾸를 가진 사람이 해야 어울리는 거야. 니까짓게 무슨."
지환은 도훈의 이름이 언급되자 또 다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만약 니가 꾸민 작전의 주인공이 도훈이형이었으면 그림이 그럴싸 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넌 아니지."
"나는 왜 안 되는데? 나도 어디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라고."
"맞어. 꿀릴 정도는 아니지. 내가 친구로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너 정도면 상위 10%는 될거야. 좀 후하게 쳐서."
"근데?"
"근데 하필 우리과에 상위 1%가 있다는 게 네 비극의 시작이지."
"하-. 씨발."
승현이 현실적으로 조언했다.
"마. 어차피 인생은 다 상대적인 거야. 니가 졸라 잘생겼어도, 니 바로 옆에 졸라졸라 잘생긴 사람이 앉으면 넌 오징어 되는 거라고."
"그러니까 도훈이 형 때문에 내가 안 먹힌다?"
"뼈아프지만, 그렇다고 봐야지."
지환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현실에 절망하기 보다 더욱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이었다.
"너 나 고등학교 때까지 육상 선수 했던거 알고 있지?"
"어. 단거리 스프린터."
"근데 내가 초등학교때 릴레이 선수 뽑으면 반대표에도 못 들었다는 거 말해줬냐?"
"진짜? 씨발 어케 했노?"
"내가 지는 걸 못 참거든. 그래서 비가오나 눈이오나 존나게 달린 거야. 그냥 이길 때까지 연습, 또 연습. 그렇게 고등학교 때 체전까지 입상한 거라니까?"
"이지환, 이 새끼 알고보니 독종이네."
"맞아. 내가 이도훈 그 새끼한테 꿀린다고 포기할 것 같아? 어림 없어. 더 꼬시고 싶어지네. 보여줄게 내가. 정음이 자빠뜨려서 따먹는 모습."
"하-. 진심인가 보네. 친구로서 응원은 해줄게."
"암튼 넌 도와만 줘. 내가 준비 마치면 신호 보낼테니까."
"알았어 새끼야. 부탁인데 삽질만 하지마라. 아, 그리고 담배한대만 더 줘봐."
"이 씹새끼는 담배를 나한테 맡겨놓고 다니나!"
* * *
지환이 주점 창고에서 작당모의를 하는 사이 도훈은 손교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손교수의 직계 제자들인 대학원생들은 대학 축제를 누구보다 즐기는 모습이었다.
"와, 나도 학부생 때 최대한 놀았어야 되는데! 그때 못 마신 술이 지금와서 당기네."
"지금도 놀잖아 넌."
"뭐래? 나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대화를 듣고 있던 손교수가 웃으면서 뼈를 때렸다.
"맞아. 무혁이가 열심히는 하지. 열심히만."
"아앗, 교수님!"
"역시 우리 손은주 교수님의 준엄한 평가는 날카롭기 이를데 없습니다."
"자자, 마시자!"
대학원생들이 서로 신이 나서 술을 마시는 사이 손은주 교수는 옆에 앉은 도훈에게 잔을 내밀었다.
"술 한 잔 따라줄래?"
"얼마든지요."
도훈은 맥주가 넘치도록 가득 따랐다.
손은주 교수가 은근한 목소리로 도훈에게 속삭였다.
"오늘따라 사랑이 넘치네?"
"교수님께서 늘 예쁘게 봐주셔서요."
"학과애들 바쁜 것 같은데 계속 붙잡고 있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저 때문에 들르신 손님인데 제가 직접 대접해야죠."
'대접'이라는 말에 손은주 교수의 손이 은근슬쩍 도훈의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어두웠고, 다들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에 두사람의 은밀한 동작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대접이라···. 괜히 기대되게 만드는 단어네."
은주의 손이 바지위로 대물을 쓰다듬는데도 도훈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았다.
"뭐랄까, 일종의 호스트니까요."
"···호스트?"
은주가 대물을 와락 움켜쥐었다.
빳빳해진 대물이 바지 안에서 은주의 손에 꽉 잡혔다.
"초대한 사람이 남자면 호스트, 여자면 호스티스 아니에요?"
"응, 그런 뜻으로 호스트? 난 또 이상한 곳 생각했네."
"왜요? 교수님 가보셨나보네?"
은주가 대물을 놓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난 그런데 안 다녀."
"농담이었어요."
은주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정말로 평생 한 번도 안 가봤어."
도훈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했나봐요."
[손은주 교수가 왜 저렇게 정색하는 거죠?]
'내가 실수한 것 같아.'
[누가봐도 농담이지 않았습니까?]
'그게 아니라 은주가 나이가 제법 많잖아.'
[30대 중반이니 적은 나이는 아니긴 하죠.]
'게다가 현재 골드미스고.'
[노처녀라는 말이 새롭게 바뀌었군요.]
'암튼, 대체로 호빠 다니는 여자들 중에선 은근 전문직 미혼들이 제법 있거든. 사회적으로 평판이 높고 잘나가는 바람에 아무 남자나 쉽게 만날 수 없는 신분에 있는 사람들.'
[손은주 교수가 딱 그런 케이스군요.]
'그래서 농담처럼 던진 말에 자존심을 다쳤나봐. 마치 자기를 호빠나 다니는 여자처럼 취급했다고.'
[확실히 주인님이 실수하신 것 같네요.]
'괜히 미안해 지네. 자격지심이라고 해도 그런건 건드리면 안되는 건데.'
은주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평소 늘 자상하고, 사려깊은 인텔리 여성이었지만 이번에는 사춘기 소녀처럼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도훈이 너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니?"
"아니에요. 제가 조금 과했어요. 장난친다는게."
"나는···. 아니야. 내가 할 말은 아니구나."
도훈을 바라보는 은주의 심정이 복잡해졌다.
호빠를 다녀봤냐는 말에 발끈하긴 했지만, 사실 은주도 조카뻘인 도훈과 섹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심 마음에 걸리긴 했던 것이다.
'하긴 도훈이 입장에선 그럴수도 있겠구나. 나이만 먹고 영계만 밝히는 여자라고. 내가 주책이지.'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조금씩 가지고 있었는데, 하필 도훈이 운영하는 축제 주점에 와서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도훈의 여자 후배들을 보자 은주의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진 것이었다.
'어쩌면 도훈이는 나 때문에 자기 나이대 여자들하고 못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지. 다 내 욕심같아.'
술까지 들어가자 감정이 센티해진 손교수는 도훈이 가득 따라 준 술을 말없이 벌컥벌컥 마셨다. 그녀를 후딱 치우려고 했던 도훈의 입장에선 난감할 따름이었다. 토라진 여자를 위로하는 건, 초인으로 변한 지금의 그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이거 야단났네. 괜히 말실수 했다가.'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농담을 던집니까, 던지기를.]
'이럴 줄 알았나? 평소보다 예민하다는 걸 고려했어야 했는데.'
도훈은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은주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교수님. 제가 너무 생각없이 말했나봐요. 정말로 죄송해요."
"아니야, 도훈아. 그냥, 그것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복잡해서.
미안해."
"왜 교수님이 저한테 미안해요?"
"그냥···.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욕심이라뇨?"
술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은주가 도훈을 응시했다.
"젊은 너를, 나이 든 내가 탐하는게 과욕인가 싶어."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도훈이 전혀 상관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도 그럴것이 손교수는 전혀 모르겠지만, 사실 도훈은 그녀보다 연상이었던 것이다.
'내 실제 나이로 따지면 은주 정도 나이면 주절먹인데.'
[하지만 은주양은 주인님과 자신을 띠동갑으로 인식하고 있을 테니까요.]
'전혀 안 그렇다는 걸 알려줘야겠다.'
"교수님. 아까도 말했잖아요. 저 연상취향이라고."
"연상도 정도가 있어야지. 나는 거의 띠동갑이잖아."
"더 좋죠 그럼."
"응?"
"제가 약간 그쪽 취향이거든요."
"무슨 취향?"
"혹시 밀프라고 아시려나?"
"밀크?"
"아니 밀프요."
"그게 뭔데?"
대학원생들은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고 있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도훈은 만에 하나라는 마음에 은주의 귀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mom, I'd like to Fuck."
(엄마, 나 섹스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