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6. 대학 축제-91-
육정음.
명실상부한 체육교육과 에이스.
운동이면 운동, 외모면 외모.
무엇하나 빠지는데가 없는 멀티플레이어 스타일.
혹자들은 체육교육과가 아닌 사범대를 통틀어도 단연 톱이라는 발언을 조심스레 꺼내기도 한다. 그도 그럴것이, 이번 미스 국성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함으로서 졸업할 때까지 4년간 단대 퀸자격을 보증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언뜻 수수한 듯 보이면서도,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만으로 주변을 압도해버리는 모태 미녀. 그런 그녀에게도 한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안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데도 성적이 안나오는 청순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체육교 육과 입학 당시에도 실기 점수는 10년만에 나온 만점자였지만, 수능은 겨우 과락을 면한 덕에 문닫고 들어올 정도.
그리고 그녀의 청순한(?) 두뇌는 일상 생활에서 가끔 티가 났는 데, 전혀 맥락과 상관없이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혼자 말귀를 못 알아듣고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코스프레에서도 그랬다.
전날 아기 공룡 둘리로 분한 정음은, 동기들에게 핀잔을 받았다.
코스프레에 진정성이 없다느니, 1학년 과대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느니 하는 비판에 직면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다른 동기들은 다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자처하며, 호객행위에 일조하는데 반해 아기공룡 둘리는 선을 넘었던 것이다.
정음은 이를 뼈아프게 받아들였다.
특히 진정성이 없다는 말은, 학과 주점을 성공시키기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그녀에겐 참기 힘든 비판이었다.
이에 정음은 공룡 분장의 진정성에 대해 고민했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둘리 같은 애니 캐릭터가 아닌 진짜 티라노 공룡 복장을 어렵사리 구해온 것이었다.
사람이 들어가면 얼굴조차 안보이는 거대한 공룡은 키가 2m에 달하며, 눈이 가슴 부근에 조그맣게 뚫려 있어 전신을 가렸다. 심지어 굉장히 리얼하게 디자인이 되는 바람에 어둠속에서 잘못보면 놀라서 까무러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정음이 뒤뚱거리며 공룡 복장으로 등장하자 도훈이 맙소사를 연발하며 이마를 짚었다.
"뭐, 뭐야, 저 거대한 공룡 대가리는?"
"음, 정음인거 같은데요."
"어제는 그래도 귀여운 공룡이었는데 오늘은 너무 살벌한 거 아니야?"
도훈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했다.
분명 정음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주점을 망치기 위해 공룡을 입었을리 없지만, 사이즈로 보나, 외형으로 보나 손님들이 불편할 것은 자명했다. 심지어 꼬리까지 길게 뻗어 있어 몸을 옆으로 돌리면 반대편 테이블을 쓸어 담을 정도였다.
도훈은 서빙을 위해 단장을 마친 후배들에게 인사하며 정음에게 다가갔다.
"오, 오늘도 예쁜데? 날이 갈수록 분장 실력이 느는구나."
"화장 잘 받았죠?"
"매상 확실하게 땡겨야죠."
"그래, 그래. 아, 그리고 정음이 넌 잠깐 나좀 보자."
거대한 티라노가 고개를 아래로 끄덕였다.
그바람에 머리가 꺽이며 앞에 있던 아영의 정수리를 내리 찍고 말았다.
"앗!!"
"미안해, 아영아 나도 모르게!"
바람을 넣은 풍선 형태의 머리라 아플리는 없었지만, 정음은 자신의 실수에 몹시 당황하며 허둥댔다. 그러자 이번엔 긴 꼬리가 테이블의 의자들을 후려치며 넘어뜨렸다.
"아니 세팅 다 해놨는데!"
"정음아 진정해!"
다들 놀라서 정음을 말렸다.
"죄, 죄송해요."
공룡의 가슴팍 부근에서 정음의 풀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훈은 티라노의 발톱-정음의 손 부분이다.-을 붙잡고 넓은 공터로 이끌었다.
"일단 여기서 멀어지자."
도훈의 에스코트에 정음이 뒤뚱거리며 따라왔다.
뒷발의 형태가 사람보다 짧아 다리를 벌리기가 몹시 힘들어 보였다.
주점 옆 잔디밭으로 정음을 끌고 온 도훈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 안 더워?"
"더워요."
"숨 쉴 수는 있는 거지?"
"네. 앞에 숨구멍이 있어서···. 사실 힘들어요. 잘못 고른것 같아요."
"어휴, 잠깐 벗고 얘기할 수 있을까?"
"네? 아, 이게 일체형이라 벗기가 좀 곤란한데."
"알았어. 그럼 벗지 말고 내 말 들어봐."
정음도 눈치는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목소리에 자신이 없고 기어들어갔다.
"네, 오빠."
"의상 준비하느라 고생한 건 알겠는데, 서빙에는 좀 불편해 보인다."
"아니에요. 앞에 손 있어요."
정음이 티라노의 발톱을 꼼지락 거렸다.
하지만 손톱이 날카롭게 되어 있어, 접시 하나 들기도 힘들어 보이는 형태였다.
"아니 내 말은 손이 없다는 게 아니라···, 암튼 아까도 봤지만 이런 복장으로 서빙하기는 곤란할 거야. 아깐 손님이 없어서 망정이지, 손님 있는 테이블을 꼬리로 날려버리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도훈은 정음의 마음을 헤아려 최대한 타이르듯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꼬리까지는 생각 못했어요."
도훈은 꼬리가 문제가 아니라 티라노 의상이 문제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정음이 상처입을까봐 꾹 참았다.
'어휴, 정음이도 참 애는 괜찮은데, 가끔 저렇게 엉뚱하단 말이야.'
[이해하십시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건 주인님도 마찬가지고요.]
'아니 난 엉뚱해서 더 좋은데?'
[네?]
'저런 백치미가 있으니까 괜히 더 지켜주고 싶잖아. 물가에 애내놓은 것처럼 사람을 긴장시킨달까?.'
[그런가요? 주인님 취향이 그렇다면야 뭐.]
"응. 내 생각인데 공룡 복장을 하긴 보단 그냥, 네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아."
"제 얼굴을요?"
"응. 정음이 넌 맨얼굴로 서빙해도 예쁠 걸?"
"아앗."
도훈보다 거대한 티라노가 갑자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도훈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야. 미스 국성 대회 2위 했다며? 늦었지만 축하해."
"아니에요. 오빠 경기 응원 못 가서 죄송해요."
"어차피 서로 대회 출전하고 있었잖아. 암튼, 정음이 넌 굳이 코스프레를 안해도 될 것 같아."
"그래도 남들 다 분장하고 하는데 맨 얼굴이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오빠도 어제 솔선수범해서 모범을 보이셨잖아요. 저도 1학년 과대인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정음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도훈이 결국 절충안을 냈다.
"좋아. 그럼 맨 얼굴로 살짝 화장만 고치자."
"화장이요?'
"응. 내가 방금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 캐릭터가 떠올랐거든?"
"아앗, 정말요?"
"일단 공룡 탈부터 벗고 와봐."
"네!"
정음이 다시 뒤뚱거리며 체육관으로 돌아갔다.
[근데 무슨 코스프레요?]
'있어봐. 화장을 좀 잘하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은데. 누가 좋을까?' 도훈은 평소 화장을 잘하고 다니는 후배를 떠올렸다.
'그래. 희주가 꾸미는 건 제법 잘하지.'
주점에 슬슬 손님들이 들어오자 체육과 학생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도훈은 따로 희주를 불렀다.
"희주야 잠깐만."
"네, 오빠?"
"좀 이따가 정음이 돌아오면 분장좀 해줄 수 있어?"
"제가요?"
희주는 영문을 몰라서 되물었다.
"응. 화장품은 가지고 있지?"
"그쵸."
"풀 메이크업도 가능해?"
"풀메는···. 몇가지 빼곤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럼 준비 좀 부탁해."
"네, 알겠어요."
잠시 후 정음이 주점으로 돌아왔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정음은, 훨씬 예뻐 보였다.
단순히 청바지에 흰티만 입고 있을 뿐인데도 모델같은 매력을 뿜어냈다.
'역시 얼굴이 깡패라니까?'
[희주양도 만만치 않은데요?]
'정음이 맨 얼굴로 비빈다는 게 대단한거지.'
[아. 그렇군요.]
'화장을 전혀 안해도 피부가 너무 맑고 깨끗한데다, 혈색도 좋으니 입술도 붉은 편이잖아. 속눈썹도 짙고. 그냥 타고난 미인이야.'
[게다가 주인님이 가슴까지 키워주셨으니 몸매도 더할나위 없이 좋아졌고요.]
'그건 인정.'
화장을 해주기 위해 준비를 마친 희주가 도훈에게 물었다.
"근데 무슨 분장을 하시려고요?"
"할리퀸 어때?"
"영화 조커에 나오는 할리퀸이요?"
"응. 양쪽 반반 화장하는 거."
"앗, 저보고 할리 퀸을 따라 하라고요?"
정음이 놀라서 물었다.
평생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던 그녀에겐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응. 잘 어울리지 않을까?"
"저는 잘 모르겠는데···."
정음이 망설이는데 희주가 턱을 받치고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오빠 말대로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분장만 잘 되면 정말 똑같겠어요."
"그치? 가능하겠어?"
"음, 인터넷의 사진 보고 하면 가능할 것 같아요. 근데 얼굴 화장만 해서는 느낌이 잘 안 살 것 같은데."
"의상 말이지? 그건 내가 구해볼게."
"지금요?"
"응. 희주 넌 화장만 해줘. 30분이면 되지?"
"네, 뭐 정음이 피부가 워낙에 좋아서 베이스도 필요 없겠네요.
지금 시작할게요."
자기를 빼고 진행되는 이야기에 정음이 당황하며 말했다.
"지, 진짜로 할리 퀸을 하라고요? 저보고?"
"응. 아까 그 티라노보단 훨 나을걸?"
"정음아 기다리고 있어봐. 의상이랑 소품 구해올게."
도훈은 희주에게 정음을 맡기고 사라졌다.
물론 직접 물건을 구하러갈 생각은 없었다. 그에겐 만능 변장세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시. 할리 퀸에 어울리는 복장으로 준비할 수 있지?'
[네. 가능은 합니다. 근데 주인님 아이템을 정음양에게 입히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지. 어차피 돌려받으면 되니까.'
[네, 찾아 보겠습니다.]
'그럼 난 야구 방망이만 하나 구해오면 되겠다.'
도훈은 체육 비품이 쌓여있는 체육교육과 창고를 떠올렸다.
그곳은 한 때 희주와 밀회를 즐기던 곳이기도 했다. 평소엔 늘 자물쇠로 잠겨 있지만, 도훈의 입장에선 잠긴 문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도훈이 사범대 건물에 있는 체육교육과 창고로 걸어가는데 멀리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아, 정말 여기 괜찮은 거 맞아? 나 불안한데.
-걱정 말라니까? 축제기간에 누가 여길 오겠어?
도훈은 발달된 청각으로 멀리서부터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창고에 다가가기도 전에 발걸음을 멈춰섰다.
'어라? 누구지?'
[주인님과 같은 부류인가 봅니다.]
'저긴 우리과 창고잖아? 그럼 우리과 애들이란 소린데?'
도훈은 놀라기보다 궁금했다.
누가 체육과 창고에서 스릴넘치는 밀회를 즐기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심심한데 몰래 구경이나 해볼까?'
도훈은 발소리를 완전히 죽인 채 살금살금 걸었다.
경신법을 응용한 보법이었기 때문에 쥐죽은 듯 조용했다.
어느새 창고 앞에 도착한 도훈은 문틈 사이의 좁은 구멍에 눈을 가까이 댔다.
비좁은 시야로 두 남녀가 보였다. 여자는 뜀틀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는데, 시야가 좁아서 그런지 허리 아래부터 다리만 보였다. 그리고 여자를 눕힌 채 열심히 박음질을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도훈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엉? 쟤는, 우리과 2학년 이잖아?'
그는 일전에 도훈과 실기시간에 100m 달리기를 겨루었던 2학년이었다.
[아, 기억납니다. 육상 선출이라고 주인님에게 덤볐다가 큰 코다쳤던 그 친구군요. 이름이 이지환이던가?]
'어 맞어. 그것도 있지만 학기 초에 나연이 따먹으려고 수작걸던 놈이잖아.'
[맞습니다. 그 일로 상담해주시다가 나연양하고 친해지셨죠.]
'하, 새끼 저거 아직도 그 버릇 못고쳤네.'
도훈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하반신만 나오는 터라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신음을 들으며 목소리를 추정해보고 싶었지만, 전혀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흐앙, 항! 하아앙!"
여자는 복도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 정도로 크게 신음을 토해냈다.
도훈은 남의 섹스를 훔쳐보기는 오랜만이라 숨죽인 채로 지켜보았다.
지환이 허리를 세게 흔들며 소리쳤다.
"으읏, 흐읏! 씨발, 존나 쪼이네 씨발년!"
"하악, 하악! 오빠 욕해줘, 오빠아!!"
"씨발년아, 이 창녀 같은 년!"
"하악, 오빠!"
"정액받이 같은 년, 개 갈보 같은, 흐윽!"
열심히 허리를 흔들던 지환이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떨더니 벼락을 맞은 것처럼 멈춰섰다. 도훈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저런 답니까? 왜 하다 마는 거죠?]
'찍 샀네. 하여간 조루 새끼.'
[네? 고작 저 정도로요?]
'어. 혼자 욕하는 중에 흥분해버렸나봐. 절정에서 더 끌어줘야 하는데 그대로 싸질러 버렸어.'
[저런.]
도훈의 말처럼 의도치 않은 타이밍에 사정이었는지 지환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미, 미안. 못 참아 버렸네."
"하, 진짜 오빠는. 쌀 것 같으면 멈추라니까 또."
"미안해. 너가 너무 쪼여가지고."
"됐어 진짜."
곧 여자가 물티슈로 밑을 닦더니 옷을 갈아입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문틈 사이라 확실하진 않았지만, 도훈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우리과 학생은 아닌것 같은데?'
[다른과 여자친구인가 보군요. 예전에도 타과의 여친을 사귀고 있다지 않았습니까?]
도훈이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지환의 파트너가 팬티를 입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찍 싸면 여자친구한테 구박받지 않아?"
'오잉? 여자친구가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였다니까."
"참나. 그놈의 컨디션은 언제 쯤 올라오려는지."
"그리고 어차피 나 걔랑은 헤어질거야."
"정말? 왜? 또 딴 여자에게 꽂혔어?"
"응."
"누군데?"
"궁금해?"
"나야 뭐 섹파니까 오빠가 누굴 사귀든 상관없어."
"우리과 후배야."
"후배?"
"응. 이번 축제 기간에 한 번 작업 좀 쳐보려고."
지환의 발언에 도훈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