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1. 대학 축제-86-
* * *
수지와 뜨거운 회포를 마무리한 도훈은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후-. 대낮부터 너무 힘을 뺐네."
정력이 늘었다 한들 성욕까지 비례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도훈은 살짝 지친 상태였다. 섹스 후 밀려오는 현타와 탈력감 때문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한 도훈은 시트를 젖히고 잠시 눈을 감았다.
'시간도 남았는데 잠깐 눈 좀 붙이다 갈까?'
[아까 무리하셨나 보군요.]
'체력은 멀쩡한데 정신력이 소진된 거 같아. 이후 일정 생각하면 한 번쯤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때 같아서.'
[숙면의 알약이라도 써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숙면의 알약?'
[네. 1시간만 자더라도 피로를 말끔하게 풀어주는 아이템입니다. 남용하면 후유증이 큰 편이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그래. 그게 좋겠다.'
도훈은 마켓에서 숙면의 알약을 구매해 복용했다.
곧 잠이 밀려오기 시작하면서 온 몸이 나른해졌다.
'로시, 이거 수면유도 효과도 있는 거였어?'
[네.]
'갑자기 눈꺼풀이 엄청 무거워지는.'
도훈은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대략 한 시간 후.
번쩍 눈을 뜬 도훈은 온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차량 시트에 앉아 선잠을 잔 셈인데, 푹신한 침대에서 8시간은 푹 잔 것 마냥 피로가 말끔하게 풀려있었다.
"오, 이거 효과 대박인데? 자주 애용해야 겠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남용하면 몸에 타격을 줍니다. 쌓인 피로는 언젠가 이자가 붙어돌아 오거든요.]
'그건 좀 아쉽군. 담배 한 대 피우고 정신좀 차려볼까?'
도훈이 차안에서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꺼내물었다. 라이터에 불을 붙이려는데,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약속이 예정되어 있던 하린이었다.
-오빠! 저예요, 하린이! 약속 잊지 않으셨죠?
교대생 하린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어, 하린아. 서울왔어?"
-네. 친구들하고 같이 왔어요.
-안녕하세요!
-그 훈남 오빠? 우아 목소리도 멋있당!
수화기 주변으로 다른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린은 축제구경을 핑계로 지방교대에서 서울로 친구들과 함께 올라온 것이었다.
"지금 어딘데?"
-지하철 타고 가는 길이에요. 국성대앞 역에서 내리면 되죠?
"어. 3번 출구로 올라와서 계속 오다보면 학교 정문 보일거야."
-네, 오빠. 30분 뒤에 봐요!
통화를 마친 도훈은 담배를 비벼끄며 생각에 잠겼다.
'하린이가 저번에 교대생 친구들 소개팅 시켜 달라고 했던가?'
[네, 과후배들하고 쪽수 맞춰서 놀고 싶다고 했었죠. 그것도 단체미팅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도훈은 일전에 후배들에게 소개팅 얘기를 꺼낸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 번 그 후배들을 부르실 예정인가요?]
'응. 미리 언질을 해놓길 다행이군.'
도훈은 급하게 하린에게 깨톡을 날렸다.
-도훈 : 근데 너희 총 몇명이라고 했지?
-하린 : 저 포함해서 4명요.
그렇다면 하린을 제외하고도 모두 3명의 남자들이 필요한 상황.
도훈은 게임 대회에 나간다던 후배들 중 한명의 이름을 떠올렸다.
'걔 이름이 혁준이었나?'
도훈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혁준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혁준이냐?"
-앗, 회장님. 어쩐일이세요? 오늘 주점 6시에 여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 근데 주점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니라."
-아. 죄송해요. 8강까지 올랐는데 결국 떨어져 버렸어요.
혁준은 도훈이 게임 대회 때문에 전화한 것으로 오해하고 먼저 이실직고 했다.
도훈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지만, 일단 후배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래. 고생 많았다. 8강이 어디야? 그 정도면 충분히 훌륭하지."
-태영이만 있었어도 해볼만 했을 것 같은데, 그게 제일 아쉽더라고요.
"암튼 잘했어. 축하의 의미로 형이 술 한잔 사주고 싶은데 시간 되냐?"
-지금요? 아, 네. 애들 지금 집으로 잠깐 쉬러 갔는데 부르면 10분 튀어 올거예요.
"잠깐만 혁준아."
-네?
"혹시 같이 대회나간 애들 중에서 여자친구 없는 애들 몇명이야?"
-저희요? 어, 승길이랑 지훈이는 여자친구 있으니까 저까지 모두 셋이요.
"셋이라고?"
'아다리 딱맞네.'
도훈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혁준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약간의 양념을 쳐서.
"혁준아. 저번에 형이 교대생들 소개팅 시켜준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어, 엇! 네, 네!
"오늘 시간 돼냐?"
-다, 당연히 돼죠.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죠!
"짜식. 엄청 좋아하네."
-우앗, 형 저희 그럼 과팅하는 거예요?
"과팅이라기엔 좀 거창하고, 뭐 그냥 동갑들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나중에 잘 될수도 있고."
-혀, 형! 바로 갈게요! 애들한테도 연락할게요.
"잠깐만. 근데 우리과 주점에서 놀기엔 눈치보이지 않겠냐? 동기들 다 서빙하고 안주만들고 있을텐데 너희 셋만 빠져서 교대 여학생들이랑 술마시고 있으면. 나도 입장이 곤란하고."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어떻게 하죠?
도훈이 머릴 굴렸다.
오겠다는 하린을 막을 순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하린의 존재를 팔선녀 앞에 드러내자니 분란의 소지가 다분했다.
그렇다면 굳이 체육교육과 주점이 아닌 다른 주점을 이용하면 될 일.
"다른 과 가서 먹을까?"
-다른과요?
"어. 애들 눈치보는 것보단 그게 낫잖아."
-저희 근데 6시에 주점 오픈하면 일하러 가야 하는데요.
"괜찮아. 대회 나가서 피곤하다고 좀 늦게 합류한다고 하면되지. 그 정돈 충분히 이해해 줄 거야. 오늘은 3학년 선배들도 들르기로 했으니 일손도 부족하진 않을 거고."
-그렇구나. 저희 그럼 회장님만 믿으면 되죠?
"어. 애들한테 전해서 30분 뒤에 내가 오라는 곳으로 오면 돼.
내가 먼저 자리잡아 놓을게."
-형, 아니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혁준은 도훈에게 감동했는지 울먹이기까지 했다. 실은 어제 PC방 알바 조소연에게 까이고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도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야. 근데 나도 애들 상태는 잘 몰라. 그냥 과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친구 하나 만든다고 생각해."
-네, 회장님!
통화를 마친 도훈은 차에서 내려 정문으로 천천히 걸었다.
이틀 째를 맞이하는 축제는 오늘이 더 성황이었다. 캠퍼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튀어나온 것처럼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흐음. 그나저나 주점을 어디로 가지? 사범대 근처는 위험할 것 같은데.'
주점은 단대별로 위치가 배정되어 있었다. 도훈은 사범대에서 최대한 먼 곳을 떠올렸고, 정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공대 쪽을 선택했다.
'그래 공대 주점으로 가면 되겠다.'
정문에 먼저 도착한 도훈은 하린을 기다렸다. 잠시 후 멀리서부터 친구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오고있는 하린이 보였다. 도훈은 안력을 돋워 친구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음, 친구들도 나쁘진 않은데? 한명은 좀 아니지만 나머지 두명은 봐줄만 한데.'
일찌감치 견적을 낸 도훈은 하린을 마중나갔다.
"하린아, 여기!"
"오빠!"
하린이 마중을 나온 도훈을 격하게 반겼다. 그러나 친구들 눈치를 보았는지 차마 껴안진 못하고 도훈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청했다.
"오빠, 여긴 저희과 동기들이요. 인사해. 저번에 말한 과외선생님 오빠."
"안녕하세요! 하린이랑 과 동기예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와, 사진보다 훨씬 잘생기셨어요."
"체육교육과라고 그런지 키가 엄청 크시네요."
도훈은 하린의 친구들과 한명 한명 눈을 맞춘 뒤 캠퍼스 안으로 안내했다.
"학교 구경부터 시켜줄까요?"
"오빠, 저희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출발해서."
"아, 그래? 그럼 바로 그냥 주점으로 갈래?"
"오빠네 학과 주점 하신다고 했었죠?"
"아, 근데 우리과는 아직 준비중이라 다른 곳으로 가야할 것 같아."
"저흰 어디든 좋아요."
하린과 학과동기라는 친구들은 다들 성격이 좋아보였다.
'교대생이라고 콧대 높을 줄 알았는데, 꼭 그런것 같진 않네.'
[근데 교대생이 왜요? 사범대랑 다를게 있습니까?]
'둘 다 선생이 되는 전공이긴 하지. 근데 내가 알기론 교대애들은 임용 경쟁률이 낮아서 사범대보다 선생 되기가 엄청 쉽거든.'
[아. 그렇군요.]
'사범대는 임용시험 치면 열에 한두명 붙을까 말까잖아. 근데 교대애들은 전국 평균이 2대 1도 안되는 걸로 알고 있어. 인기 지역만 아니면 대부분 합격한달까?'
[상당한 차이군요.]
'그래서 하린이도 재수해서까지 교대 간 거잖아. 아무튼 그 이유때문인지 자기들끼린 '예비교사'라고 부른다더라고.'
[주인님도 따지고 보면 예비교사 아닙니까?]
'그래도 그 말을 사범대생이 하는 거랑 교대생이 하는 거랑 어감이 다르다는 거지.'
[이해했습니다.]
"와, 캠퍼스 엄청크다!"
"크다고?"
"네. 교대는 진짜 엄청 작거든요."
"그래서 저희들끼리는 교대 고등학교라고 불러요."
"진짜? 학생수가 몇명인데 그렇게 작아?"
"한 학년에 400명 안될걸요?"
"그럼 캠퍼스 정원이 1600명도 안된다고?"
"네."
종합대인 국성대는 한 학번이 4000명이 넘었다.
대학원생까지 합치면 거의 2만명 내외다 보니 확실히 교대와는 규모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다.
"교대가 작긴 작구나. 그래도 나중에 선생님되기는 쉽잖아."
"그러면 뭐해요. 남자도 몇명 없는데."
"남자가 없어?"
하린이 설명했다.
"교대는 입학할 때 남성할당제 받는 거 아세요?"
"남성할당제라면."
"입학 성적이 여자가 더 높아도 70%까지만 뽑고, 나머지 30%는 무조건 남자를 뽑거든요."
"아, 그래서 할당제라고."
"네. 한 학년에 남자가 30% 밖에 안돼요 그래서."
"와, 진짜?"
'대박인데? 교대가 여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였구나.'
[부러우십니까?]
'당연하지. 남자 한명당 여자 두명이면 기본 스리섬 쌉가능아니냐? 그래도 여자가 남네. 와우.'
[역시 주인님은 생각하시는게 그런 쪽이군요.]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제 친구들은 다 아직 모솔이에요. 히히."
"야, 박하린! 그 얘기는 왜 하는데?"
"진짜 못 됐다 하린이 언니."
하린의 발언에 친구들이 집단으로 반발했다. 도훈이 알기로는 하린은 공식적인 남자친구가 있는 상태였다.
'맞네. 하린이는 남자친구 사귄다고 했던가?'
[네. 근데 그 남자친구 조금 이상하다고 했던것 같습니다.]
'나중에 한 번 따로 물어봐야지 그건,'
"하린이가 언니야?"
"네. 하린언니 재수했잖아요."
"저희 중에선 제일 나이 많아요."
희한하게도 하린의 동기들은 하린을 언니라고 부르면서도 말을 편하게 했다. 그 이유를 하린이 설명했다.
"호칭만 언니라고 하고 말 놓고 지내기로 했어요. 그게 편해서."
"아하."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사이 어느새 공대에 도착한 도훈은 잔디밭을 둘러보며 일찍 문을 연 주점을 찾았다. 확실히 공대는 단과대 자체가 사범대보다 훨씬 커서 그런지 주점도 많은 편이었고, 규모도 상당했다.
도훈은 기계공학과라는 글씨가 박힌 천막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장 먼저 영업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서오십쇼! 기공과 주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입구에 서 있던 덩치 좋은 남학생이 도훈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도훈이 슬쩍 둘러보니 서빙을 하는 사람도, 간이 주방에서 안주를 만드는 사람도 죄다 남학생 뿐이었다.
'여긴 진정한 남초의 학과구나.'
"편하신데 앉으시면 됩니다."
"총 8명인데 테이블 두개 붙여 주실래요?"
"아, 일행이 더 있으신가 보군요. 얘들아, 3,4번 테이블 좀 붙여드려."
도훈이 자세히 보니 안내를 맡은 학생의 티셔츠에 한글로 '공대장'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공대장이 뭡니까? 공과대 학생회장 같은 뜻인가요?]
'그냥 게임 용어 같은데.'
[게임 용어요?]
'몰라. 남자들끼리만 모여있다보니 맨날 게임만 하나보지. 암튼혁준이부터 불러야겠다.' 도훈은 하린에게 주문을 맡긴 뒤 혁준에게 바로 연락을 취했다.
"어, 여기 공대 기공과 주점이거든? 정문에서 왼쪽으로 쭉 오다보면 있어. 미리 와 있으니까 애들 데리고 얼른 와."
-네, 회장님!
"야야. 너 여기와서 회장님 어쩌고 부르지 말고 형이라고 해.
괜히 분위기 어색하니까."
-네, 회장, 아니 형.
"다른 애들도.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하라고 해. 체육과 군기 빡세다고 오해하겠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혁준아."
-네?
"애들 생각보다 물 좋다야."
-헉, 진짜요? 저희가 그럼 꿀리는 거 아니에요?
"쫄지마. 사내새끼가 해보기도 전에 쫄아가지고는. 암튼 언능튀어와라. 여자를 기다리게 하는 게 아니다."
-네, 형! 바로 튀어 갈게요!
통화를 마친 도훈이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