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0. 대학 축제-75-
“무, 무슨 소리야 갑자기? 술김에 주정한 것 가지고?"
평소 거짓말에 능한 채원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받아쳤다.
일단 부인하고 본다는 전략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술김에 한 주정이라고?"
“그래!"
“너 정말 하나도 기억 못하는 거야?"
영철이 반격에 나서자 얼굴에 철판을 깐 채원도 순간 말문이 막 혔다. 단순 말실수라면 모를까, 혹시나 도훈의 이름을 언급했다면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내, 내가 뭐랬는데?"
“너 주정할 때 폰으로 영상 다 찍어놨거든?"
영상이라는 말에 채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술김에 나온 헛소리 쯤으로 대충 흘려 넘기려 했지만, 영상이 남아있으면 빼도박도 못할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다급해진 채 원이 적반하장으로 밀고 나갔다.
“오빤 그런것도 몰래 찍어요?"
“뭐?"
“완전 소름 돋네. 어떻게 영상을 다 찍을 생각을 했어요?"
“아니, 무슨···."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라고요! 몰카 같은 거나 찍는데 앞으로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믿고 만나겠냐고요!"
채원이 빽- 소리치는 통에 영철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한마디했다.
“말 다했냐? 이거 네가 직접 찍으라고 한 거거든?"
“제가요?"
“못 믿겠으면 직접 보든가!"
영철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촬영된 영상의 첫화면에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진짜로 찍으라고? 영상을?
-찍어, 확 그냥 증거로 남겨버릴라니까.
-채원아, 취한것 같은데 그만하자. 너 술깨고 나면 분명 후회할 거야.
-상관없다고오오오! 찍어. 내가 분명 찍으라고 했어?
영상속의 채원은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얼굴은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미친년처럼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쓰러지기 직전, 술이 만땅으로 차올랐을 때 찍은 영상이었다.
채원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미, 미쳤어. 내 입으로 정말 증거를 남기라고 했었잖아?’
영상을 멈춘 영철이 다시 물었다.
“이래도 날 몰카범 취급할래?"
“그, 그게···."
“사과해. 나 방금 엄청 기분 나빴으니까."
“···미안해 오빠."
채원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영철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핸드폰을 다시 들이밀었다.
“기왕 켰으니 끝까지 볼래?"
“아, 아니야."
채원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변명을 하고 오리발을 내밀어도, 빼도박도 못할 증거가 핸드폰에 담겨 있다. 채원은 자신이 술김에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망했다.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미쳤나봐 진짜. 술 처먹고 그걸 다 밝혀버렸으니···.’
채원은 영철과의 관계도 걱정이었지만, 도훈과의 비밀을 스스로 발설해버린 것이 너무나 뼈아팠다.
후배에게 사촌 동생이라고 속이고, 자기가 따먹은 여자를 소개한 도훈은 이제 완전히 매장당할 것이 뻔했다. 물론 그 결과 자신도 도훈의 원수가 될 것이고.
‘아아··· 이젠 도훈 오빠를 다신 못 보겠지?’
채원은 생각없던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이었고, 하필 그 장면은 영상으로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영철이 물었다.
“그래서 누군데? 네가 복수하고 싶다는 새끼가?"
“···어?"
“대체 누구냐고? 내가 진짜 쪽팔려서 이런 짓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아서 말이야. 누가 널 그렇게 맘 아프게 했어? 말해봐. 내가 지금이라도 가서 두들겨 패버릴테니까."
“오, 오빠···."
‘도훈 오빤 줄 모르는 거야?’ 채원은 순간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술김에 아무말이나 지껄이 느라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한것 같긴 한데, 천만 다행으로 상대가 누군지에 대해선 끝내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 남친이지? 아직 그 새끼를 못 잊어서 그래?"
“아니, 오빠 그게 아니라···."
채원이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이는데, 영철이 갑자기 채원 앞에 털썩 무릎 꿇었다.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에 채원은 진심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채원아. 나 진짜로 쪽팔리는데, 너 포기 못해."
“오, 오빠···."
“니가 아직 다른 사람 못 잊는 것도 알고, 그 사람 때문에 나한테 마음 못 주는 것도 아는데···. 나도 알고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야."
“······."
“그러니까 나한테도 한 번만, 진짜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될까?"
“오빠, 얼른 일어나. 지금 뭐하는 거야."
“채원아! 진짜 나 자존심 다 접고 너한테 사정하는 거야. 네가 허락해 줄때까지 이렇게 있을래."
영철이 완강히 버티자 채원이 겨드랑이에 팔을 껴 억지로 그를 일으켰다.
“아, 알겠다고. 그러니까 일어 나."
“정말이지?"
“그래."
잠시 소동을 벌인 두 사람은 다시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철은 그간 사귀면서 겉도는 느낌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채원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가공의 전남친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다.
“흑흑, 알고보니 군대에 여친이 있더라고. 그걸 감쪽같이 속이고 나랑 반년이나 사겼지 뭐야?"
“구, 군대라고?"
“간호장교래나 뭐래나. 2살 연상이었고."
“아···."
“내가 진짜 주위 사람들한테 다 소문내 버리고 자폭할까 했는 데, 너무 자존심 상해서 차마 그렇게는 못했거든. 근데 오늘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울컥했나봐. 오빠한테는 너무 미안."
“···그랬구나.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아니야. 괜히 오빠 속상했겠다."
채원은 특유의 능수능란한 거짓말로 영철을 속여 넘겼다. 다만 아까 영철이 보여준 과격한 패기에 살짝 감동하긴 했다.
‘···영철 오빠는 정말로 나한테 진심이었구나. 이러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는데.’
오로지 도훈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된 연애였지만, 오늘 영철의 태도를 보고 채원도 뼈아픈 깨달음을 얻었다.
도훈이 자신을 가지고 논것이 잘못이라면, 자신이 영철에게 하는 행동 또한 똑같은 상처를 주는 행동이라는 걸. 결국 채원은 자신이 당한 것을 영철에게 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영철 오빠는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일지도···.’
“오빠."
“응?"
“그동안 스킨십 못하게 해서 서운했어?"
“아, 아니야. 그런건."
“미안. 내가 아직 마음에 상처가 남아서 그랬어."
“네 이야기 듣고 나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내가 너무 조급했···."
그때였다.
채원이 갑자기 불쑥 고개를 내밀더니 영철의 입술에 키스한 것은.
“아앗."
“이건 그간 마음고생시킨 내 보답이야. 이 이상은 아직 안 돼?"
“채, 채원아···."
영철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 토하고 입가에 남은 토사물이 건더기처럼 목구멍으로 삼켜졌다.
* * *
[주인님. 어장이탈 경보입니다.]
‘응? 또? 소연이 무슨 일있나 진짜?’
[소연양이 아닙니다.]
‘그럼?’
[이번엔 채원양인데요?]
‘채원이? 영철이 여자친구?’
[네. 주인님이 분양하신 그···.]
‘허참. 하룻밤사이 두명이나 어장이탈 경보가 뜨다니. 마성의 매력에 문제가 생겼나?’
[어쩌실 생각입니까?]
‘음 잠시만 고민좀.’ 도훈은 현재 마성의 매력 패시브로 수많은 여자들의 호감도를 붙잡아둔 상태. 그러나 그동안 관계했던 여자들이 전리품처럼 한 명, 두명 쌓이다보니 현재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인원이 넘치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도훈이 로시에게 말했다.
‘됐어. 어차피 채원이는 버린 카드였는데, 안 떨어져 나가서 더 귀찮았거든. 다른 놈이 채간다면야 나야 땡큐지.’
[그 다른놈이 아마 영철군이 아닐까요?]
‘그렇겠지?’
[혹시 나중에 NTL각을 잡기 위한 큰그림은 아니시죠? 그럼 영철군이 몹시 슬퍼할 것 같은데요.]
‘미쳤냐?’
[오, 주인님이 사랑보다 의리를 선택하시다니!]
‘아니 의리고 나발이고, 채원이는 얼굴만 반반하지 완전 절벽이잖아. 솔직히 남줘도 하나도 안 아까운데.’
[아···.]
‘다만 소연이는 좀 아깝긴 해.’
[OP녀 말씀이시죠? 아까 어장이탈 경보가 뜬.]
‘응. 소연이는 내가 OP에서도 탈출시켜주고, 집까지 구해 줬는데 나중에도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응원해 줄까해서.’
[진정 응원한다면 소연양도 다른 사랑을 찾아갈 수 있도록 방생시켜주는 게 맞지 않을까요? 채원양처럼.]
‘그렇긴 한데, 소연이는 과거가 좀 걸리잖아.’
[과거요?]
‘대가리 총맞은 놈이 아니고서야 창녀 출신을 누가 좋아하겠어? 나중에라도 과거가 밝혀지면 소연이만 또 상처받을 거라고.’
[아···.]
‘그러니 완전히 과거 세탁할때까진 내가 보듬어 주려고. 다음에 시간나면 한 번 보러 가야지.’
“회장님. 회장님도 파전 한 번 드셔보실래요?"
도훈이 야외 테이블을 둘러보는데 후배 한명이 말을 걸어왔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1학년 남자 후배였다.
“어? 파전? 손님한테 나갈 거 아니야?"
“오늘 주문은 마감했거든요. 남는 재료 버리기 아까워서 크게 한 판 지졌어요."
“그래? 그럼 사양않고 먹어야지."
“네, 잠시만요. 제가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여기 빈테이블에 잠시 앉아계세요."
“어, 그래 고맙다."
테이블에 앉은 도훈은 불쑥 테이블 업자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아차. 돈 보내줘야 하는데. 오늘 안 보내면 분명 영철이나 서현이한테 연락할 거란 말이지?’
마침 생각이 난 도훈은 인터넷 뱅킹을 통해 테이블 업자의 계좌로 송금을 마쳤다. 생각보다 큰 금액이었으나, 돈이라면 넘치게 많은 도훈에겐 별 의미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도훈이 테이블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빈 의자로 여학생 두명이 다가와 앉았다. 원더우먼 복장의 강경희와, 디바로 분장한 이효민이었다.
“앗, 회장님!"
“어디갔다가 오신거예요? 하루종일 안 보이시던데?"
“어, 그게 좀 사정이 있어서···."
“오늘 진짜로 바빴다고요. 저 부츠안이 땀으로···."
“저도요. 서빙하느라 팔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효민과 경희는 도훈을 보자마자 달라붙어 재잘거렸다. 효민은 게임속 캐릭터로 분장해 깜찍한 모습이었고, 경희는 워낙에 건강한 타입이었기 때문에 원더우먼 복장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특히 과감히 드러낸 커다란 가슴 볼륨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어후, 경희는 왜 저렇게 부담스러운 코스프레를···.’
“미안. 실은 나도 아까 코스프레 했는데 옷이 너무 작아서 터져 버렸지 뭐야."
“정말요?"
“그래서요?"
“급하게 수선해보려다가 도저히 안되겠길래 집에 가서 다시 갈아입고 왔어."
“아항, 그래서 옷이 바뀌었구나."
“오빠 정말 난감했겠다. 오늘 입은 복장이라면 바지 밖에 없었잖아요."
“그, 그렇지."
그때 파전이 도착했다. 파전을 나른 남학생은 도훈과 오순도순앉아있는 여자 동기들을 보고 한마디 했다.
“와, 누구는 지금까지 서빙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쉬고 있네?"
“야. 우리도 한번도 못 앉고 계속 날랐거든?"
“좀 봐주라. 다리 아파 죽겠단 말이야."
“쳇. 회장님 방금 지진거니까 맛있게 드세요."
“그래, 고맙다."
도훈은 접시에 놓인 파전을 젓가락으로 찢더니 효민과 경희에게도 권했다.
“너희들도 먹을래?"
“주시면 땡큐죠."
“역시 후배 챙겨주는 사람은 회장님 뿐이라니까?"
다들 신이나서 먹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코스프레한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자리로 모여들었다.
“엇? 경희 너 일 안하고 거기서 뭐해?"
“아앗, 치사하게 니들끼리만!"
나연과 연두가 잽싸게 끼어들었고, 뒤이어 희주와 아영도 합류했다. 각종 코스프레로 변신한 8선녀가 한 데 모이자 도훈은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캬, 옷이 날개라더니 예쁘게 입혀놓으니까 미모가 빛을 발하는 구만.’
[누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이중에서?’
도훈은 한 명씩 후배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다들 저마다 장점을 살려 개성을 뽐내긴 했지만, 도훈은 엘사로 변신한 아영이 가장 잘 어울려 보였다.
‘이중에서라면 역시 얼음공주 아영이가···.’
[그럼 아영양이 오늘의 은총을 받게 되겠군요.]
‘아니 그런 뜻은 아닌데···.’
파전을 먹는다는 핑계로 몰려든 팔선녀들은 젓가락을 꺼내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다들 일만 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허겁지겁 정신이 없어 보였다.
‘갑자기 미안해지네. 엄청 배고팠나봐.’
[하긴 주인님은 후배들에게 맡겨놓고 다른 곳에 계셨으니까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좋게 끝나서 망정이지 오늘 진짜 십년 감수 했다고.’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너희들 먹는 모습보니 안되겠다. 오늘 장사 접자."
“엥? 정말요?"
“아직 손님 남았는데···."
“어. 서현이한테는 더 손님 받지 말라고 말했어. 남은 손님만 마무리하고, 다들 고생했으니 우리끼리도 한 잔 해야지."
“정말요?"
“꺄아!"
“회장님 최고!"
“우선 빈 테이블부터 정리하고 마감들어가자. 나도 같이 도울게."
주점 마감을 선언한 도훈은 스스로 빈 테이블을 접기 시작했다.
하나둘 테이블이 걷히는 모습에, 남은 손님들도 눈치가 보였는지 슬슬 일어났다.
마침내 모든 손님이 나가고 주점 정리가 끝나자 도훈은 필요한 테이블만 펼쳐 후배들을 불러모았다.
“첫날이라 오늘은 조금 일찍 마감쳤어. 내일은 오늘보다 늦게 끝날거야. 다들 고생했다는 의미로 오늘은 내가 쏠게."
“꺄아아아아!"
“와아아아!"
“내 이름으로 달아놓고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라고!"
“회장님의 이름으로!"
“이도훈! 이도훈!"
그렇게 주점 뒤풀이겸 술자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