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9. 대학 축제-74-
* * *
소연은 간만에 얼큰하게 취했다.
원래 술은 좋아하지 않았다. 약했기 때문이다. 룸망주(?)로 주목받던 시절, 억지로 양주를 마셔보려 했지만 체질이 안맞아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TC부터 2차까지, 하룻밤에 수백은 벌 수 있다는 화류계로 진출하지 않았던 이유는 오직 그 때문이었다. 물론 그덕에 스무살 나이에 OP계에 이름 날리긴 했지만.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술이 달았다.
안주도 변변찮고, 좋은 술도 아니었지만 술맛이 꿀맛이었다.
축제 분위기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무뚝뚝하게 저만치서 걷고 있는 멀대같은 사내와 함께라서? 소연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조심해. 넘어질라."
굽높은 구두를 신고 비틀거리는 소연을, 어느새 다가온 창범이 부축했다. 그러다 손과 손이 마주치자 혼자 지레 놀라 거리를 벌렸다.
'귀여워♥'
소연은 창범의 행동이 귀엽게 보였다. 스킨십을 극도로 꺼리는 조심스러운 동작에서, 자신을 몹시 어려워하고 또 아껴주고 있다는 진심이 느껴졌다.
'나같은게 대체 뭐라고···.'
소연은 오피녀 출신.
쉽게 말해 창녀였다.
돈만 주면 누구라도 그녀를 주무를 수 있었다.
배불뚝이 아저씨든, 쉰내 나는 노인네든, 아니면 아직 수염도안난 풋내기든.
합당한 금액을 지불한 남자들에게, 소연은 얼마든지 자신의 몸을 허락했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자신의 몸뚱이는 멋대로 굴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많은 남자들이 자신을 그런식으로 대했지만, 창범은 전혀 달랐다. 그는 소연의 몸에 손가락 하나만 닿아도 움찔 놀라는 사내였다. 혹여 자신이 실수한 것은 아닌지, 소연이 기분 나쁘진 않는지 지레짐작하며 거리를 두었다.
소연은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외모가 아닌, 영혼까지 아껴주는 기분이랄까?
“오빠···, 나 더 못 걷겠는데."
“왜?"
“다리가 후들거려요. 취했나봐."
급기야 소연은 그대로 길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짧은 치마사이로 팬티가 훤히 보였다. 창범이 황급히 그녀를 일으켰다.
“뭐, 뭐하는 거야. 아무데나 앉으면 안 돼."
“왜 안돼?"
“여자는 엉덩이가 차면···."
“히힛."
“알았어. 업어줄테니까 얼른 일어나."
“진짜지?"
“나참, 말만한 처녀가···."
소연이 기쁜 표정으로 창범에게 업히며 말했다.
“나 처녀 아닌데?"
“······."
속삭이는 귓속말에 창범은 귀밑까지 달아올랐다. 소연은 마치 귀를 빨아 버릴 것처럼 창범에게 바짝 달라 붙었다. 창범은 뒤늦게 후회했다.
‘어흑, 미치겠네. 술을 계속 마시게 하는게 아니었는데···.’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처녀가 아니라 실망했어?"
“무슨 소리야? 시집 안가면 다 처녀지. 유부녀도 아니면서."
“흐응···. 그렇구나. 그럼 나 처녀할래!"
창범에게 업힌 소연이 그의 목덜미를 꼭 끌어 안았다. 창범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뭉툭하고 부드러운 유방의 감촉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미치겠구만. 쬐그만게 가슴만 커가지고···.’
발육이 좋은 소연을 감당하기엔, 창범의 내성은 너무 약했다.
이를 알아차렸는지 소연이 더욱 상체를 밀착시켰다. 당황하는 그의 모습이 더 보고 싶었다.
“업어줄거면 확실히 하라구. 나 지금 미끄러질것 같아."
“미, 미안."
소연의 몸이 주륵 내려가자 창범이 자기도 모르게 소연의 엉덩이를 받치며 위로 들어올렸다. 그덕에 소연의 가슴이 창범의 등판에서 더욱 세게 문질러졌고, 창범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창범은 소연이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는게 천만 다행이라고 여겼다.
“나 무거워?"
“그래."
“뭐가 무거워? 46kg밖에 안나가는 구만."
“그런 건 구체적으로 알고 싶지 않다고!"
“그럼 몸무게 말고 다른 거 알려줄까?"
소연이 계속 귓가에 대고 입김을 불어댔다.
“뭐, 뭘?"
“예를 들면 가슴 사이즈?"
“아오씨, 너 계속 장난치면 길바닥에 던져 버린다?"
“힝, 장난인데."
“너 솔직히 말해. 하나도 안 취했지?"
“아니야 취했어."
“꼴딱꼴딱 잘만 마시더만?"
“나 원래 술 잘 못 마셔."
“거짓말 마."
“진짜로. 술이 약해서 하고 싶은 일도 못 했거든."
“···응?"
창범은 당황했고, 소연은 아차했다.
술김에 하지 않아도 될 얘기를 꺼낸 것이다.
“······."
창범은 소연이 민망할까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선 술을 마셔야만 할 수 있는 젊은 여자의 일이란 무엇일까 끊임없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암튼, 오늘따라 술이 무지 달더라."
“좋은 술이었나 보지."
좋은 술이 아니라, 같이 술마신 사람이 좋았노라고 소연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창범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 확실히 결정되는 순간, 고백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창범에게 업혀 집으로 가는 동안 소연이 물었다.
“근데 오빠는 왜 여자친구가 없어?"
“눈이 높다는 생각은 안해봤냐?"
“눈곱만큼도 안 들던데?"
“너무하는구만."
“혹시 문제 있는 건 아니지?"
“무슨 문제?"
“그러니까 남자로서 결격사유라든가···."
“뭐라는 거야? 아무 문제 없거든?"
“봤어야 알지."
“뭐, 뭐래는 거야! 거길 왜 봐?"
“오빠, 그거 되게 중요한 거야. 아무리 사랑해도 문제있는 남자를 사랑해줄 여자는 없을 걸?"
“쪼그만게 진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쪼그맣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소연이 창범의 목덜미를 꼭 끌어 안으며 가슴을 문질렀다. 노골적인 스킨십에 창범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뭐, 뭐하는 거야 얘가!’
“정말로 쪼그매? 내가?"
“하, 하지마."
“왜? 오빠가 하도 못 믿으니까···."
“아, 알았다고. 안 쪼그매. 다 컸어. 그러니까 그만해."
“피-."
소연은 장난을 멈추고 창범을 꼬옥 끌어안았다.
“오빤 너무 순진한 거 같아."
“전혀."
“오빠 숫총각맞지?"
“아이씨 진짜! 못하는 말이 없어! 확 던질까?"
“흥, 던지지도 못할 거면서."
“아무튼 그런 질문은 예의가 아니라고."
“정말로 궁금할 수도 있잖아."
“노코멘트 하겠어."
“그럼 하나만 대답해줘."
“뭔데?"
“미호 언니랑은 진짜로 무슨 사이야?"
“나랑 미호?"
“응. 예전부터 둘 사이가 궁금했거든. 가끔보면 둘이 남매같이 투닥거리다가도 어쩔때 보면 연인같기도 하고. 여사친하고 애인 사이의 어디쯤인가?"
“전혀 그런 사이 아니야."
“아니야?"
“왜냐면 미호는···."
창범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마터면 PK단의 규율을 깨고 민간인인 소연에게 정체를 밝힐뻔 했다.
인간이 아니니까. 라는 대답을.
“미호 언니가 뭐?"
“그냥 가족같다고 해야 하나?"
“가족? 게임 같이 하던 사이였다면서? 어떻게 그런데 가족이 돼?"
“피를 나눈 혈맹이니까."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게임으로 둘러대긴 했지만, 그들은 정말로 수많은 전투를 함께 치렀다. 때론 죽을뻔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서로를 의지해가며 위기를 헤쳐나갔다. 그런 의미의 가족이었다.
“혈맹?"
“일종의 전우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사이지."
“아항."
“근데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미호 언니가 오빠 좋아하면 진지하게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았거든."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근데 대답 듣고 나니까 괜찮아 졌어."
창범은 소연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소연의 집에 도착했다.
“여기 맞지? 이만 내려. 팔 아파 죽겠어."
“오빤 꼭 잘해놓고 말로 점수를 깎더라? 좋게 내려주면 덧나?"
“진짜로 힘들었다고."
“됐어."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소연이 보니 창범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하게 맺혀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가볍다고 해도, 성인 여성을 업고 30여분을 넘게 걸어오는 게 쉬울리가 없었다. 창범은 PK단이긴 했지만, 신체적인 능력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바 없었다.
‘오빠를 너무 고생시켰나? 미안한데.’
“이제 들어가."
“오빠."
문 앞에 선 소연이 창범을 보고 물었다.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
“······."
“응?"
“장난치지 말고 얼른 가."
“쳇! 줘도 못 먹기는. 나도 흥이다, 흥!"
소연은 창범을 뒤로하고 원룸 건물로 쌩 들어가 버렸다. 창범은 건물 밑에서 담배를 태우며 소연의 집에 불이 들어오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한 후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창가 커튼 뒤에 숨어 창범이 돌아가는 모습을 훔쳐보던 소연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바보. 먹는다고 했으면 진짜로 줄뻔 했는데."
* * *
창범이 소연을 집까지 바래다준 시각, 이와 반대 방향으로 여자를 업고가는 한 사내가 있었다.
“으, 제발 등에다는 토하지 마라 채원아. 부탁이다."
“우욱- 욱!"
“안돼 제발, 금방 택시 잡아줄게!"
“오빠···. 나 진짜로 죽을 거 같다고."
“아니 그러게 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벌컥벌컥 마셔, 마시길?"
“몰라. 그냥 마시다 보니··· 우욱-!"
채원이 계속 토하려고 하자 안되겠다 싶었는지 영철이 길 가 벤치에 그녀를 앉혔다.
“이럴거면 그냥 시원하게 토해 버리자. 엎드려 등 두들겨 줄게."
“우에엑!"
채원은 계속 힘들어하더니 결국 잔디밭 구석에 모두 게워내고 말았다. 시큼한 위산 냄새를 참으며 영철이 채원의 등을 토닥였다.
“어후, 진짜 술도 못 마시는게 어쩌려고···. 좀 괜찮아?"
“자꾸 말시키지 마 또 올라올··· 우욱!"
채원이 결국 한 번 더 쏟아냈다. 아무리 여자친구라도 토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영철은 곤욕스러웠다.
‘오늘은 정말 되는 일이 없구나. 길거리에서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람.’
채원이 진정된 기미를 보이자 다시 벤치에 앉힌 영철이 말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편의점 가서 입 헹굴 생수 좀 사가지고 올게."
“괜찮아."
“뭐가 괜찮아? 먹은 것 다 토해놓고."
“가지마. 혼자 있기 무섭단 말이야."
“아니···."
손목을 끌어잡고 버티는 통에 영철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상의로 여자친구의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채원이 영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너 진짜로 술 마시면 안되겠다."
“······."
“그렇게 무턱대고 마시다 쓰러지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어."
“누가 날 업어가?"
“누구긴. 응큼한 놈들이겠지."
“오빠같은?"
“무, 무슨 소리야?"
“됐어. 내가 오빨 모를 줄 알고?"
“아니거든?"
영철이 억울해 펄쩍 뛰었다.
본래 바람둥이였던 영철은 과거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도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려던 그는, 우연히 도훈의 사촌동생이라는 채원과 만나게 되었다. 몸매가 좀 빈약하긴 했지만 얼굴을 상당히 예쁜 여자애였다.
그러나 영철은 채원과 사귀고서 벌써 한달째 금욕생활 중이었다. 사귄 첫날 자취방까지 데려갔던, 그래서 개방적 일 줄 알았던 채원이 알고보니 그곳에 금테를 두른 여자였던 것.
어르고 달래도 주지않는 채원때문에 영철은 원치 않는 금욕(?)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응큼하다고 하니 당연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흥, 틈만 나면 스킨십 하려고 했으면서, 아니긴?"
“그게 뭐? 사귀는 사이에 그 정도도 못 해주냐?"
억하심정에 영철이 폭발했다.
참고, 참아왔는데 채원의 태도가 너무 서운했던 것이다.
“내가 무슨 얼마나 큰 걸 바랬다고?"
“······."
갑작스러운 영철의 폭발에 채원도 할말을 잃었다. 따지고보면 영철의 서운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마음에도 없는 그를 사귀게 된 것도 도훈을 골탕먹이려는 자신의 그릇된 욕망 때문이었던 것.
‘내가 영철오빠한테 너무 심했나?’
“···알았어. 방금 전 그 말은 취소."
“됐어. 엎드려 절받는 것도 한 두번이지."
영철은 완전히 감정이 상한 듯 채원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솔직히 나 지친다. 너 나 좋아하기는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나도 눈치라는 게 있거든? 내가 먼저 고백해서 사귄 거잖아."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네가 나한테 마음을 줄 줄 알았어. 근데 아무리 봐도···. 아니야. 됐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
채원이 당황했다. 영철은 뭔가 작정한 느낌이었다. 예감이 불안했다.
“모르겠어, 그냥. 넌 날 조금도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서."
“내가? 오빠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하지만 이건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태도는 아닌것 같아."
“오빠 설마 내가···. 내가 오빠 스킨십 안받아줬다고 그러는 거야? 와, 진짜 너무하네. 여자친구 지켜줄 생각은 못할 망정, 이런식으로 삐진다고?"
채원이 공세로 전환해 쏘아붙였지만, 영철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해?"
“아니라고?"
“너 아까 취했을 때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내가 뭐라고 했는데?"
채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주점에서 거의 기절할 만큼 마셨을 때. 인사불성 상태에서 혼자 주절거린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물론 뭐라고 말했는지는 가물가물했다.
“···복수할 거라고. 다 까발려 버릴 거라고."
“내, 내가 그랬다고?"
“그래."
채원은 점점 몸이 떨려왔다. 도훈이 나타나기만 기다리다 술에 취해버렸고, 주정을 하는 사이 해선 안 될 말을 남자친구 앞에서 지껄인 모양이었다.
영철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말했다.
“너 솔직히 말해봐.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지? 대체 나랑 왜 사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