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4. 대학 축제-69-
* * *
이따금 술자리 자체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있다.
술을 마시는 것보다, 사람들과 도란도란 둘러앉아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에 취한다고들 한다.
창범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웃기는 소리라고 치부해왔다.
알콜 중독자 소리는 듣기 싫은데, 술을 마시고픈 사람들이 핑계 삼아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축제의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 평소 짝사랑하던 소연과 단둘이 잔을 나누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기분이 얼큰해지며 잊고 지냈던 행복감이 밀려왔다.
대학생들의 어설픈 솜씨로 만든 안주와, 종이컵에 따라 마시는 밍밍한 맥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취객들은 삼삼오오 떠들고, 흥겹게 노래 부르며, 때론 감정에 복받쳐 울기도 했다. 축제를 반기듯 떠오른 보름달이 은은한 조명처럼 비칠 때, 얼굴이 발그레해진 소연이 긴 머리를 이마뒤로 쓸어 넘기는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아아···. 이게 소확행이로구나.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어.’
창범은 불우한 인생이었다.
일찍이 개화된 능력. 그것은 저주와 같았다. Pk단이 찾아왔을 때 선뜻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더 버텼다간 스스로 미치광이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남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게 굉장한 능력이라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창범에겐 아니었다. 좋은 생각, 따뜻한 마음, 넘치는 배려보다도 남을 헐뜯고, 시기하고, 음해하며, 때론 저주하는 소리로 가득찬 세상이었다.
앞에선 웃다가 뒤에선 비수를 꽂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창범은 삶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으련만, 알고나니 더욱 인간에 대한 불신만 깊어갔다. 듣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들리는 환청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러던 중 불쑥 PK단이 찾아왔고, 그는 미련없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힘을 통제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에게 주어진 능력이 결코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큰 힘에는 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면서.
양성소를 나온 창범의 인생은 그 후로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PK단의 삶은 중세의 수도승과 같았다. 늘 가난했고, 정신은 피폐했으며, 때론 목숨을 걸고 생면부지의 사람을 죽여야 할때도 있었다. 그것이 대의를 위한 길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PK단과 플레이어의 싸움은 일종의 종교전쟁과 흡사하다.
처음엔 교리의 차이로 논쟁을 벌이던 이들이 급기야 칼과 총을 들고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나중에 가면 어째서 이런 말도 안되는 살육전이 시작되었는지는 더이상 중요치 않았다. 과거부터 PK 단은 플레이어를 사냥했고, 반대로 플레이어도 PK단을 수없이 학살했다.
어느 한쪽이 말살되어야 끝나는 전쟁 속에서, 창범은 스스로가 조금씩 마모되는 걸 느꼈다. 과거의 고통이 불현듯 발현된 이능력 때문이었다면, 현재의 고통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에 갇혀버린 자신의 운명에서 비롯되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인생.
창범은 자신이 언젠가 플레이어의 칼에 맞아 길거리에서 객사할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바스러질 인생이라고.
그런 창범에게 눈 앞에 나타난 소연은 한 줄기 빛이었다.
창범은 모처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잔업을 마치고 PC방으로 출근하는 날이면,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단지 소연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 시덥지 않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말을 섞는 것만으로 너무나 행복했다.
소연이 종이컵에 든 맥주를 끝까지 들이켰다.
“캬-! 좋다. 오빠도 얼른 마셔요."
얼이 빠진채 소연을 보고 있던 창범은 소연을 따라 허겁지겁 잔을 비웠다.
술이 달았다. 한 번도 맛있다고 느껴본 적 없던 술이 오늘따라 너무 달콤했다.
“에이, 잘 마시는 구만? 술 싫어한다더니."
“싫어하는 건 아니고, 마실 기회가 없었던 거지."
“왜요? 공장 사람들하고 회식 안하나?"
“난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거 질색이야. 특히 퇴근하고선 더더욱."
“참나. 누가 히키코모리 아니랄까봐···. 오빠는 그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고칠 필요가 있어. 히끅!"
술이 되었는지 소연이 딸꾹질을 했다.
“창범 오빠는 개인주의야."
“···아니야."
창범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적어도 널 알고 나서는···.’
“근데 미호 언니 정말로 연락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괜히 걱정되는데···."
“지금쯤 집에 가지 않았을까? 아니면 남자라도 꼬셨거나."
“에이, 언니가 누굴 꼬셔요? 언니가 꽃인데."
“꽃이라니?"
“꽃은 가만히 있어도 꿀벌들이 알아서 몰려 온다고요. 히히."
소연은 신나보였다. 원래 술이 약한 것인지, 아니면 간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모르지만 기분이 상당히 업되어 있었다. 들뜬소연을 보자 창범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너도 꽃이야?"
“···예? 무슨 뜻이에요?"
“여기 오게 된 것도 어떤 대학생이 데이트 신청해서 그런 거라며?"
“흠···. 데이트 신청까진 아니고. 쿠폰 준 성의를 생각한 거죠.
술이나 팔아주려고 왔지."
“근데 걔는 이쪽으로 얼씬도 안하던데?"
창범은 아까부터 소연에게 대시했던 혁준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혁준은 창범과 단둘이 주점을 찾은 소연의 의도를, 명백한 거절로 받아들인 것인지 일부러 이쪽을 외면하고 있었다.
“뭐야. 그런거나 보고 있었어요?"
“아니, 그냥 신경 쓰여서."
“오빠가 그걸 왜 신경 쓰는데? 설마 질투하는 거?"
“······."
“잉? 대답을 안하니까 진짜로 이상하잖아요!"
이번엔 소연이 당황했다. 창범은 이제껏 이성보다는 늘 편한 오빠처럼 그녀를 대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분위기가 미묘했다.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사람처럼, 조금만 더 취했다간 뭔가 폭탄 같은 선언을 할 것처럼. 눈치가 빠른 소연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 아직은 안되는데···.’
소연이 다급히 말했다.
“오빠. 나 만나는 사람 있는 거 알죠?"
“거짓말."
“에에? 진짜로 있는데?"
“너 우리 가게 온지 두달 넘었는데 데이트 하러 가는 꼴은 한번도 못 봤는데?"
“···그, 그건."
소연은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도훈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한 번 만나기로했던 약속마저, 도훈이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었다.
계속되는 거절에 소연도 조금씩 도훈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도훈보단, 늘 자신의 곁에 있어준 창범에게 점점 마음이 끌렸다..
‘···안 돼. 아직 확신할 수 없어. 잘못하면 중간에서 창범오빠만 우습게 될 거야.’
소연은 여전히 도훈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창범의 고백을 받아주는 건 일종의 기만처럼 느껴졌다.
“소연아 난 있지···."
“창범 오빠."
“응?"
“나부터 말할게요."
소연은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창범에게 고백했다.
“나 있잖아. 별로 좋은 사람 아니에요."
“······."
“오빠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러울지도 몰라."
“······."
“쪽팔려서 자세히 말은 못하겠는데, 오빠도 그걸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런건 상관없어.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창범은 이제껏 한 번도 소연의 속마음을 들춰본적이 없었다. 다만 막연하게 사연이 있을 거란 건 짐작하던 바였다.
‘사람을 죽이고 다녔던 나보다 어두운 과거란 없어. 그건 진심이야.’
창범의 진심어린 눈빛에 소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창범이 훨씬 근사한 남자일지도.
“한가지 더 있어요."
“뭔데?"
“맞아요. 나 지금 사귀는 사람은 없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
창범은 조금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저렇게 예쁜 소연이, 짝사랑하는 사내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했지만, 창범은 묵묵히 소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는 일은 형편없지만, 그래도 나름 좋은 사람이에요. 나를 절망에서 구해준 은인이니까."
“···응."
“그 사람은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오빠 말대로 만나주지도 않고 연락도 뜸하거든요. 근데 나···."
소연이 눈시울을 붉혔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었다.
“···나, 아직 그 사람 못 잊었어요."
“후-."
창범이 말없이 보름달을 바라 보았다.
고백이 쉽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정작 소연에게 그런 소릴 들으니 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허탈감이 밀려왔다.
방금전까지 모든게 아름답게 보이던 풍경이, 이제는 모든 게 덧없고 쓸쓸해졌다. 옆에서 지껄이는 술주정도, 아무렇게나 내지르는 고성방가도, 서럽게 질질 짜대는 울음소리까지.
창범은 미치게 술이 마려웠다.
“···네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창범이 빈 잔에 소주를 콸콸 들이 부었다.
텅 빈 속을 알코올이라도 때려부어야 공허함이 가실 것 같았다.
잔이 넘칠 정도로 술을 자작하는 창범을, 소연이 제지했다.
“오, 오빠!"
“그냥 마시고 싶어서 그래."
“제 얘기는 끝까지 들어 보셔야죠!"
“···?"
창범에게 희망의 빛이 보였다.
“암튼, 그래서, 그런 이유로, 당장은 안 돼요. 그치만!"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술기운 때문인지 소연도 혀가 꼬였다.
“조만간 저도 그 사람 만나서 입장 정리 할 거예요."
“······."
“나도 언제까지 속앓이만 하고 싶지 않아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 쓸쓸하단 말이에요."
“소연아."
“그니까 염치없지만."
소연이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나 그때까지만 기다려줄래요, 오빠?"
* * *
[주인님. 긴박한 상황인 건 알지만, 한가지 보고 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아이씨, 한창 중요한 타이밍에··· 뭔데?’
[음, 소연양에게 어장 이탈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어장 이탈이라니?’
[그게···. 지난 번 어장관리 2.0으로 업데이트 되면서 추가된 기능인데, 어장에서 빠져나가려는 대상에 대해 경고 알람이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 근데 소연이가 누구더라?’
[아니! 그때 그 김변 잡으려고···.]
‘아아! 그 오피걸?’ 도훈은 겨우 소연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하도 만나는 여자가 많다보니 자주 못 본 사람의 이름을 까먹은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관계했던 여자 이름도 바로 기억 못하십니까?]
‘미안, 빡대가리라 어쩔 수 없다고.’
[핑곕니다. 주인님 아이큐는 이제 세자리수가 넘으니까요.]
‘아무튼 소연이가 왜 어장 이탈을···. 설마 어떤 놈이 강제로?’
[아닙니다. 섹슈얼한 이슈였다면 어장 침투 경보가 떴을 겁니다. 이는 소연양의 호감도가 자연스럽게 하락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래? 마성의 지배자 효과 때문에 호감도 하락이 어렵지 않나?’
[그 부분은 저도 의문입니다. 주인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요.]
‘무슨 방법이 있는데?’
[자신을 아껴주는 진정한 사랑을 찾은 경우죠. 사랑은 섹스보다 강렬한 감정이거든요.]
‘흐음. 굉장히 거슬리는 말이군. 그러니까 소연이가 나보다 다른 남자랑 섹스하는 걸 택했다는 거야, 지금?’
[아니 주인님은 무슨 사람과의 관계를 섹스로만 판단하십니까?]
‘아니 그거야 내가 대물 플레이어니까. 일단 알겠어. 이탈 경보라는 것은 어쨌든 당장은 이탈은 아니라는 뜻이지?’
[넵.]
‘우선 눈앞의 구미호부터 처리하고, 나중에 생각해보자. 당장은 소연이 챙길 여유가 없으니.’
도훈은 소연의 일을 잊고 다시 미호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미호는 도훈의 명령에 따라 꼼짝도 않고 체육관 바닥에 누워있었다.
‘근데 춥지도 않나? 맨 바닥이라 등이 시려울 것 같은데···.’
도훈이 미호를 막 덮치려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
“도훈이형! 도훈이형 혹시 여기 있어요?"
‘이, 이 목소리는?’ 체육관 입구에서 자신을 찾는 소리에 도훈이 화들짝 놀랐다.
평소라면 예민한 감각이 발동해 사람이 접근하기도 전에 알아챘을 텐데, 내공이 바닥난 지금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뒤늦게 인지한 것이었다.
[영철군입니다!]
‘아, 아니 저새끼가 왜 여길!’ 도훈은 혼비백산하여 재빨리 바닥에 널부러진 옷가지를 챙겼다. 동시에 미호에게 명령했다.
“일어나서 탈의실로 튀어!"
“···네, 주인님."
도훈과 미호는 옷가지만 간신히 챙겨 탈의실로 도망쳤다. 이윽고 체육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영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응? 분명 누군가 있는것 같았는데···. 탈의실인가?"
탈의실로 대피한 도훈은 막다른 길에 몰리고 말았다.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가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조, 좆됐다!’
하필 미호가 정체불명의 모자까지 태워버렸기 때문에 모습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했다. 더욱이 내공까지 바닥난 상황이라 눈깜짝할 새 영철을 기절시키기도 난망한 일이었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탈의실로 가까워졌다.
하필 남자 탈의실에 숨은 도훈은 자신의 선택을 원망했다.
‘젠장. 여자 탈의실로 튀었어야 시간을 버는 건데!’
미호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도훈의 명령에 따라 서 있었다. 그러나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고 나신으로 있는 미호와, 마찬가지로 발가벗은 자신의 모습에 도훈은 심장이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치, 침착하자.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방법이···.’
도훈은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로시, 마법의 문고리!]
‘네, 넵! 당장 전송시키겠습니다!’ 저벅저벅.
“도훈이형?"
영철은 이제 문 앞까지 당도한 상태였다.
로시로부터 마법의 문고리를 전송받은 도훈은, 탈의실 입구에 문고리를 설치 한 뒤 영철이 문을 여는 순간 미호와 함께 뛰어들었다.
“응?"
‘분명 인기척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영철은 아무도 없는 남자 탈의실을 확인하고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난데없이 비명을 지르더니 불꺼진 체육관을 미친듯이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