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0. 대학 축제-65-
* * *
‘젠장. 이 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해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허무하게 포박된 거지?’
처음 미호에게 위협을 받을때만 해도 현실감이 별로 없었다. 몸속에 고이 쌓아 두었던 내공이 타들어가는 것에 대한 공포와 충격으로 그저 시키는 대로 발걸음을 놀렸을 뿐이다.
하지만 텅 빈 체육관 한가운데 밧줄에 꽁꽁 묶이고 나니 점점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객관화가 되었다.
첫째, 난 지금 PK단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완벽히 붙잡혀 있다는 것.
둘째, 강력한 마법사로 보이는 눈 앞의 계집애가 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이다.
결론은 난 독안에 갇힌 쥐였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일전에 거금을 들여 PK단 경보기 구입했잖아.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걸치고 있던 마법의 망토는 플레이어의 기운을 감춰주는 기능까지 있었고. 한데 어떻게 등 뒤를 잡힐 때까지 의식조차 못했던 걸까?’
붙잡힌 마당에 가장 억울한 부분은 그것이었다. 나는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자만하지도 않았다. 늘 경계했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포인트 벌이를 위해 나이트를 돌았던 것이 빌미가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날 골라냈다.
핀셋으로 콕 찝어낸 것처럼.
“말해봐. 마법 아이템까지 가지고 다니는 주제에, 플레이어가 아니라고?"
젊은 마법사가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든 일단 꺼내야 했다.
“바, 받은 겁니다."
“받았다고?"
마법사는 흥미가 돋은 듯 모자에 손가락을 끼워 허공에 빙글빙글 돌리며 되물었다.
“누구한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선물이라며 줬습니다."
“오호, 그러니까 이런 귀한 물건을 플레이어가 선물로 줬다는 거네?"
“플레이어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랬습니다. 저한테 요긴하게 쓸데가 있을거라면서요."
모자를 팽그르르 돌리던 그녀가 불쑥 허공위로 모자를 던졌다.
그러자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고있던 도깨비불이 갑자기 악마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입을 크게 벌려 모자를 집어 삼켜버렸다.
화르륵-!
불에 탄 모자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떨어졌다.
“이런, 미안해서 어쩐다? 귀한 선물을 실수로 태워 버렸지 뭐야?"
“괘, 괜찮···."
그때 도깨비불이 내 머리위로 낙하했다. 뜨거운 열기에 머리털이 후끈후끈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말했지. 허튼수작 부리면 확 태워버리겠다고."
“으으!"
놀라운 것은 똑같은 거리에서 불길을 마주하는데도 상대는 전혀 열기를 못 느낀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도깨비불이라는 것은 시전자에겐 조금의 해도 끼치지 않는 화염마법의 일종인 것 같다.
머리끝이 조금씩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잠시 후 도깨비불이 다시 멀어졌다. 상대가 다시 말했다.
“내가 너라면 차라리 솔직하게 불겠어. 혹시 알아? 대답이 마음에 들면 고통 없이 끝내줄지?"
“······."
[왜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을 치신 겁니까?]
‘상대에게 독심술이 있는지 확인차 던져 본 거야.’
[독심술이요?]
‘마음의 소리 같은 스킬 말이야. 다행히 그런 낌새는 안 보이는군. 속마음을 읽힌것 같진 않아서.’
[아니 그걸 왜 하필 이런 긴박한 상황에···.]
‘그래야 진짜 거짓말이 필요할 때 써먹을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솔직히 다 말하겠습니다."
“후후. 머리가 나쁜 타입은 아니라 다행이네. 저번에 어떤 놈은 손가락 10개가 다 잘릴 때까지 묵비권을 행사하더라고."
“······."
“그래서 아직 발가락도 10개 남았다고 알려주니까 그제서야 진솔해 졌거든."
[허,헉. 저 말이 사실일까요?]
‘낸들 알겠어? 사실이라면 정말 사이코가 따로 없지만.’
“국성대 플레이어. 네 능력은 뭐지?"
“저는···."
우선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야 똑바른 대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궁금한 점은 과연 PK단에게도 나의 상태창 스킬이 통하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로시, 시간 끌고 있을테니까 상태창으로 견적 좀 내봐.’
[시도해 보겠습니다.]
“저는 조금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뭔데?"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냥 말하면 돼. 플레이어 어디 한두번 보나."
[주, 주인님. 상태창이 뜹니다!]
‘당장 띄워!’
[네,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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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미호(비처녀, 일시 24세 2개월)
나이 : ??? #신수#군령자#술법사
호감도 : ??/100
개방성 : S
성감대 : 전신이 성감대
*애무 포인트 : 모든 애무를 좋아함.
성욕지수 : 매우 높음.
공략팁
*위 대상은 당신을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인외의 존재 구미호입니다.
-구미호는 인간이 되기위해 수백년을 살아온 존재입니다.
-군령자 체질인 그녀는 몸 속에 서로다른 9개의 영혼을 품고 있습니다.
-각각의 영혼은 다양한 특기를 가지고 있으며, 해당 특성들은 그녀를 강한 술법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각종 주문과 주술에 통달했으며, 특히 화염마법에 능합니다.
-현재 PK단에 용병으로 소속되어 활동중입니다.
-9개의 서로 다른 영혼 덕에 강해진 그녀는, 이 때문에 9배나 빠르게 늙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남자의 정기를 흡수하여 고갈되는 생명력을 계속 보충해줘야 합니다.
-추천행동 : 그녀는 정기가 강한 남자를 필요로 합니다. 서로의 목적에 부합하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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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니었다고?’
[PK단도 아닙니다. 정확히는 용병으로 고용된 인외의 존재였습니다. 아! 그래서 감지기에 걸리지 않았던 거군요! 주인님을 찾아낸 것 또한 신수로서 가진 고유의 능력이었을테고요.]
‘젠장, 그러니 경계가 뚫렸지.’
[이제 어쩌실 겁니까?]
‘내용을 보니 잘하면 살아갈 희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해.’
[정말입니까?]
‘상대의 약점을 내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거든.’
“혹시··· 섹서라고 아십니까?"
“섹서? 그게 뭔데?"
“그러니까 섹스를 전문적으로···."
“뭐라고?"
미호가 처음으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기가막혔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푸하하하하! 진짜로 그런 클래스가 있다고? 나랑 장난하는 거 아니지?"
“저, 정말입니다. 과거에 카사노바가 저와 같은 클래스 였습니다."
“오호라. 이제 알겠네. 네놈이 느닷없이 성인 방송에 출연하고, 나이트를 싸돌아다녔던 이유에 대해서 말이야."
“그, 그렇습니다."
“일본에 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지?"
“이, 일본은 어떻게?"
“넌 몰랐겠지만, 몇달동안 계속 네 뒤를 쫓고 있었거든. 그러고 보니 일전에 국성대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아무튼 마침내 내 손에 잡혔구나."
“······."
“뭐 어쨌든 신기하네. 나도 너같은 클래스는 처음 만나보거든."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가 솔직하게 말해줬으니, 나도 솔직하게 말해줄게."
미호가 갑자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드라큘라처럼 뻐드렁니가 좌우로 드러났다.
“죽일거야."
“······."
“알고 있잖아. 플레이어와 PK단은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거. 그래서 너도 숨어 다녔던 거 아니야?"
[주, 주인님. 전혀 설득이 안될 것 같은데요?]
‘그럼 어떻게 해? 내공도 다 잃고 어차피 저항도 못하는데. 그냥 죽을순 없잖아. 뭐라도 시도는 해봐야지.’
“그, 그쪽은···."
“응?"
“PK단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고?"
미호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저한테 PK단 경보 아이템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한테 접근할 때까지 전혀 울리지 않은 것을 보면 PK단이 아닌것 같기도 해서···."
“호오, 똑똑한데? 맞아. 난 객원이야. 일종의 용병이라고 생각하면 돼."
“PK단도 아닌데 굳이 저를 죽일 이유가 있으신가요?"
그 말을 들은 미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의자에 포박된 나를 야릇한 눈길로 훑어보는 것이었다.
“···하긴 죽이긴 너무 아까운 얼굴이긴 해."
“사, 살려만 주시면 제가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싫은데?"
“아···."
“입 터는 거 보니까 어떻게든 나를 설득해서 빠져나갈 요량인가 본데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거든. 내가 겉은 어려보여도 속에는 수백년 묵은 능구렁이가 들어있단 말이지. 창범이 번호가 뭐였더라···."
미호가 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와 통화를 하려고 했다.
팀으로 함께 움직인다던 PK단의 동료인 모양이었다.
[주, 주인님 좆된것 같은데요? 이 와중에 동료까지 불러 모으면 절대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나도 안다고!’ 그러나 미호는 통화버튼을 누르기 직전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데이트 중인데 부르면 싫어하겠지? 아이씨, 대장도 파견간 마당에 알바하는 건이를 부를수도 없고···."
미호는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나에게 다시 물었다.
“근데 나 갑자기 궁금한게 생겼어."
“네? 마, 말씀하십시오."
동료를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겐 엄청난 기회였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섹서라는 클래스는 색공의 일종이라고 보면 되는 거야?"
“색공이라면···."
“그래서 마나를 그렇게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니야? 냄새가 진하게 나던데?"
[내공을 말하는 겁니다. 어쩌면 저 구미호는 주인님의 내공을 감지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주인님을 단박에 찾아낼 수 있었던 거죠.]
‘그런 것이었군.’
“마, 맞습니다."
“호오. 그럼 너도 여자와 섹스를 하면 음기를 흡수하는 거야?"
“일종의···. 비슷합니다."
“나랑 닮은 구석이 있구나?"
미호는 점점 더 나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의도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나를 죽일거라고 했던 그녀가, 바로 죽일 생각까진 없다는 점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방금 전 굳이 핑계를 대면서 동료들을 불러모으는 걸 중단하지 않았을 테니까.
‘로시, 마음의 소리!’
[통할까요?]
‘상태창이 통한 걸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흐음. 바로 죽이긴 아까우니 정기를 좀 뽑아내야 겠는데···.
여기서 괜찮으려나?}
[주인님! 통합니다!]
‘오케이. 이제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아까 마나번 마법에 당했기 때문에 내공이 거의 바닥난 상태입니다. 마나가 없으면 주인님의 스킬도 중단됩니다.]
‘엎친데 덮친격이구만 젠장.’
그때 마음의 소리가 갑자기 사방에서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뭘 머뭇거려? 얼른 벗겨, 제법 맛있게 생겼는데.}
{맞아 미호. 아까 그 고추 작은 놈보단 훨씬 실해 보인다.}
{미호, 이번엔 내가 희생할 게. 너 혼자 고생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서 그래.}
{효령, 속보이는 짓 그만 하시지? 이번엔 내 차례라고.}
{다들 조용히 좀 해! 생각 중이니까!}
‘뭐, 뭐야? 갑자기 동시에 몇명의 소리가 들리는 건데?’
[군령자의 특성입니다. 미호의 몸 안에 있는 다른 8명의 영혼의 소리 같습니다.]
‘아까 정보창에서 읽은 내용이 사실이었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한 사람의 몸에 9개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구미호라서 그런 거야?’
[아닐겁니다. 군령자는 타고난 기질입니다. 가령 무당과 같은 존재 역시 타인의 영혼을 한두개쯤 수용할 수 있듯이요. 군령자는 그 그릇이 훨씬 넓은 경우입니다.]
‘구미호에 군령자의 특성이라니···. 꼬리 아홉개 달린 여우가 강력한 마법사가 된 이유가 저것이었군.’
“야 너."
“네?"
“이름이 뭐야?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며? 이름은 알고 죽여야지."
“도훈입니다. 이도훈."
“이도훈? 흔한 이름이네. 난 미호라고 해. 성은 따로 없고."
“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
“원래 사형을 시키더라도 단칼에 죽이는 게 자비를 배푸는 거라며."
“그렇습니까?"
“왜 조선시대 때 망나니들 보면 제발 한 방에 목을 쳐달라고 가족들이 사형 전날 거하게 대접까지 해줬거든. 아, 이건 내 눈으로 본 거니까 진짜야."
“······."
“그래서 나도 너한테 자비를 베풀기로 했어."
“제 목을 한방에 쳐주신다는 건가요?"
농담으로 던진 말에 미호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푸하하, 재밌는 아이구나? 이와중에 농담도 할 줄 알고. 죽이긴 너무 아깝다."
“그럼 살려주시면···."
“되지도 않는 소린 하지도 말고."
“그, 그럼···."
“내가 너를 딱히 여겨 복상사로 보내주기로 했어."
“보, 복상사요?"
“응. 갈때가더라도 천국은 맛 보게 해줄게. 죽어서도 잊지 못할만큼."
{잘했어 미호. 놈의 생명력을 몽땅 흡수하면 앞으로 반년은 양생 안해도 될 걸?}
{맞아. 게다가 혼자 플레이어를 해치우면 PK단 동료들도 좋아할 거고. 저 정도 플레이어쯤, 혼자서도 거뜬하잖아?}
{근데 상대를 너무 얕보는 건 아닐까? 그래도 명색이 플레이언데···.}
{풉-. 섹서라잖아. 기껏해야 오입질이나 할 줄 아는 기둥서방따위가 뭐라고?}
{기왕이면 돌아가서면 하자. 나 남자 맛 본지 오래 됐단 말이야.}
다시금 마음의 소리들이 머릿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지더니 잠시후 방송 송출이 중단된 라디오처럼 백색 소음만 들려왔다.
[주인님···. 내공이 모두 바닥나 버렸습니다. 마나번 마법이 정말 지독하군요.]
이젠 스킬도 무용지물이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저 구미호를 상대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면 알아서 벗지?"
“저, 두 팔이 묶여 있어서···."
그 말을 마치자마자 상반신을 칭칭 감고 있던 흰 밧줄이 백사로 변하더니 똬리를 풀고 물러났다. 뱀은 미호의 허벅지를 감고 올라 가더니 품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됐지? 내공이 완전히 타들어갔으니 포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