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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456화 (1,416/2,000)

1439. 대학 축제-64-

소연과 창범이 둘이서 체육과 주점으로 향한 사이 미호는 터벅터벅 축제 인파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창범에게 보란듯이 뻑큐를 날릴 때만 해도, 굉장히 쿨해 보였는데 막상 군중 속에 혼자 남게 되자 진한 외로움을 느끼는 미호였다. 안그래도 왜소한 그녀의 어깨가 더욱 좁아 보였다. 미호가 터벅터벅 걸으며 생각했다.

‘···잘 한 거야. 창범이도 언제까지 총각으로 지낼 순 없잖아?

알고보면 놈도 불쌍하다고.’

미호는 Pk단 멤버들이 구한말 애국지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대의를 위해 일신의 쾌락과 행복마저 모두 저당잡힌 인생. 목숨을 걸 정도로 일제치하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독립투사들처럼 말이다.

실제로 수백년을 살아온 미호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왔던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솔직히 플레이어니 PK단이니 알게 뭐람? 자기들끼리 박터지게 싸우는 동안, 애꿎은 청춘만 희생되는 거지.’

비록 PK단에서 용병으로 뛰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미호는 폐쇄적이고 교조적인 PK단의 운영방식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종교적 비밀 결사와도 유사한 이 조직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플레이어 사냥에 목매는 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PK단에 속해있는 것이 그녀의 생명유지에 도움이 되었고, 그녀 또한 자세한 내막을 깊이 파고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불만을 누르고 잠자코 지낼 뿐이었다.

‘아니지. 내가 잘 못 생각했나? 소연이는 은근히 여우같은 구석이 있던데 눈치없는 창범이랑 단둘이 놔둔다고 알아서 진도 뺄 수 있으려나? 그냥 같이가서 서포트를 하는 쪽이···.’

미호가 갈팡질팡하고 망설이는 데 갑자기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냄새였는데, 신수인 미호는 남들이 보고듣지 못하는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라? 뭐야 이건?’

미호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의 근원지로 향했다.

‘···설마 플레이어?’

미호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혹시나 자신이 착각했나 싶어 빠르게 플레이어 탐지기를 꺼내 확인했지만, 바늘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플레이어가 아닌가?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독특한 기운인데? 어떻게 일반인이 이런 기운을 풍길 수 있지?’

미호의 동공이 연한 황금빛으로 변하더니 주변의 사물이 적외선 카메라로 비춘것처럼 바뀌었다. 기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독특한 그녀의 술법이었다.

‘있다. 흔적이 남아있어!’

놀랍게도 강력한 기운이 눈 밭의 발자국처럼 희미하게 이어져 있었다. 이는 플레이어 탐지기로는 찾을 수 없는 그녀의 독보적인 능력이기도 했다.

간혹 일부 플레이어는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데, 인외의 존재인 구미호의 선천적인 감지능력으로 이를 간파해 내는 것이다.

‘···찾았다, 국성대 플레이어!’

늘 귀엽게만 웃던 미호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먹잇감을 찾아낸 야수의 웃음이었다.

* * *

도훈은 신비한 체험을 하는 중이었다.

어깨엔 망토를 두르고 한손엔 방패를 한 손은 창을. 평상시라면 정신병자로 신고받을 의상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데도 사람들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코스프레를 잘했다며 칭찬을 건네는 행인도 있을 정도였다.

“코스프레인가요? 와, 멋지다!"

“근육 짱짱맨!"

“스파르타!"

도훈은 마치 할로윈 파티에 나온 기분이었다.

‘신기하네. 축제라 그런가 이런 복장으로 다니는데 다들 일도 신경 안써.’

[오히려 다행이죠. 주인님이 혼자 튀지 않아서요.]

‘그러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정체불명의 모자는 계속 쓰고 다니실 작정입니까?]

‘어. 사람들이 날 못알아보니까 더 편한 걸. 아는 여자라도 만나면 괜히 불편하니까.’

“저기, 멋진 오빠. 저희랑 사진 한 번만 찍어 주심 안 돼요?"

도훈이 길을 걷고 있는데 천진해 보이는 여대생 두명이 사진촬영을 요청했다. 갑작스러운 사진 촬영 요청에 도훈이 난처해하는 사이, 벌써 한명은 셀카봉에 연결한 카메라를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 아니 저는···."

“이쪽 봐주세요."

“그게 아니라···."

“혹시 투구 좀 벗으주시면 안되나요? 얼굴이 전혀 안 보이는데? 네, 오빠?"

‘아 놔. 나를 길거리 이벤트하는 사람 정도로 착각한 모양인데?’

[의상을 보면 충분히 오해할만 합니다.]

‘귀찮게 됐네.’

도훈은 사진촬영을 요청한 여학생들이 쉽게 물러날것 같지 않자, 후딱 사진을 찍어주고 보낼 요량으로 투구를 벗었다. 그 순간 도훈을 보던 여학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변했다.

“헉! 대박!"

“아니, 이렇게 잘생기신 분이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세요?"

“네?"

“아니에요! 멋있다고요. 자 그럼 이쪽보고!"

찰칵-!

여학생들은 도훈이 마음에 드는지 구도를 여러번 바꾸어 셀카를 찍었다.

“고맙습니다!"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네네, 감사합니다. 체육교육과 주점에 들러주시면 더 많은 코스프레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도훈은 내친김에 주점 홍보까지 곁들이며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성가신 여대생을 보내고 겨우 한숨 돌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톡톡 어깨를 두들겼다.

“저기요."

“네? 아, 제가 가볼 곳이 있어서 촬영은 더 이상···."

그때였다. 무엇인가 날카로운 물건이 갑자기 도훈의 등 뒤를 쿡찌르는 것이 아닌가? 감각이 예리한 도훈은 그것이 일종의 단검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전혀 손도 쓰지 못한 채 무방비로 당했다는 점이었다.

“애꿎은 시민들 앞에서 피보기 싫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따라 오시지."

“···누, 누구··· 강도?"

도훈이 슬쩍 뒤를 돌아보는데,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여학생이 빤히 고개를 들더니 대답했다.

“살면서 나처럼 예쁜 강도 본적있어?"

[주, 주인님!]

‘눈빛이···.’

도훈은 미호와 마주치는 순간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단박에 알수 있었다. 특히 세로로 가늘게 찢어진 황금색의 동공은, 고양잇과 동물에게서나 볼 수 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단어가 입속을 맴돌았다.

‘Pk단!’

[어, 어째서 경보기가 울리지 않은 거죠?]

‘그건 모르겠고, 저 여자 내가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도훈은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지녔다. 더욱이 반탄강기를 활용해 일정량의 충격을 흡수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 만약 단검에 살짝 상처를 입더라도 곧바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만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훈이 막 마음을 먹기 직전 미호의 단검이 등 뒤를 쿡찔러왔다. 화끈한 작열통이 느껴지는 걸 보니 단검 끝에 살짝 찔린 것 같았다.

“윽!"

“허튼 생각 안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칼엔 마나 번(Mana Burn)마법이 걸려 있거든. 잠시후면 스킬도 완전히 봉인 될걸?"

“제, 제가 뭘 했다고 이러세요? 좋게 말로···."

“나참, 구차하게 자꾸 왜 그러실까?"

미호는 단검 끝에 바짝 힘을 주며 또박또박 발음했다.

“···플레이어씨?"

“······."

“내가 여기서 너를 즉결처분 않는 것도 다행으로 알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피를 보게 하긴 싫거든. 소란을 피우기도 싫고.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오시지?"

[주, 주인님! 큰 일입니다! 마나번 마법의 영향으로 내공이 급속도로 감소하는 중입니다.]

‘···나도 느끼고 있다고, 젠장.’

칼 끝에 찔린 상처는 얼마 깊지 않았지만, 몸속의 마나를 모조리 태워버리는 마법의 영향으로 내공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정갈하게 갈무리되었던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인님,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PK단 경보기가 안 울린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상대는 주인님을 정확히 알고 찾은 것 같으니까요.]

“어,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죠?"

“으슥한 곳으로 가보자고. 난 이 학교 지리를 잘 모르니 안내해. 뒤따라 갈테니까."

미호는 여전히 도훈의 등 뒤에 마법검을 들이민 채였다. 그러나 나풀거리는 망토덕에 칼끝은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 그럼 체육관으로···."

체육관은 체육교육과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도훈은 이번 주점운영을 위해 탈의실을 개방해 놓은 것을 떠올렸다.

“허튼 수작은 부리지 않는게 좋을 거야. 혹시 또 알아? 말 잘들으면 누나가 예뻐해 줄지. 호호!"

도훈은 누나라고 주장하는 미호의 생김새에 의문을 가졌다.

‘끽해야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데 누나는 무슨···. 설마 생김새보다 동안인 건가?’

도훈은 체육관으로 향하는 도중에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내공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모든게 꼬여버렸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의 경계를 뚫고 단숨에 접근할 정도의 실력자. 어설픈 저항을 시도했다가 더욱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몰랐다.

미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국성대 플레이어, 그동안 용케 잘도 숨어 다녔더군."

“······."

“하지만 꼬리가 길면 다 밟히는 법이지. 나이트란 나이트는 다 쑤시고 다녔더만?"

“?!"

도훈은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이트라는 말에 눈빛이 흔들리고 말았다. 미호가 낌새를 채고 실실 웃었다.

“왜? 우리가 언제까지 모를 줄 알았어? 너 맞지? 그때 그 야동에 등장했던 변태 플레이어."

“······."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참고로 난 다른 PK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플레이어를 색출하거든."

“······."

도훈은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인정이라도 하는 날에는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고. 근데 설마하니 국성대에 떡하니 쏘다니고 있을 줄이야.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불꺼진 체육관 앞에 도착했다. 미호는 체육관을 보고 말했다.

“뭐야? 불이 꺼져 있잖아? 장난해 지금 나랑?"

“무,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 그럼 열고 들어가."

탈의실 사용을 위해 체육관 바깥 출입문은 개방된 상태였다. 도훈이 몸으로 밀고 들어가자 문이 열렸다. 미호는 그때까지도 도훈의 뒤에 바짝 밀착해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체육관 중앙으로 이동해."

도훈은 불꺼진 체육관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농구 및 배구경기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된 다목적 체육관은 조명이 모두 꺼져 무척 어두웠으나, 창밖으로 들어오는 불빛 덕에 간신히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자, 그럼···."

미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가 싶더니 허공에 내던졌다. 흰색의 밧줄로 보이던 그것은 갑자기 살아있는 백사로 변신하더니 도훈의 몸에 똬리를 틀며 꽁꽁 옭아매기 시작했다.

“허, 헉!"

“놀라지마. 저항하지 않으면 안 무니까."

백사는 몸을 칭칭 늘려가며 도훈의 상반신 전체를 순식간에 포박했다.

‘모,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고 있어.’

[아아···. 역시 마법의 밧줄입니다. 마법과 스킬을 차단하는 술법이 담겨 있군요.]

‘긴박한 상황에 스피드 왜건처럼 설명하지 말라고!’

“으윽! 파, 팔이···."

“엄살 피우지마."

온 몸이 꽁꽁 묶인 도훈은 들고 있던 무기를 모두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코스프레의 목적도 있지만, 만약을 위해 준비했던 무기가 허무하게 무력화되는 순간이었다.

“돌아서. 그 잘난 얼굴이나 보자."

미호가 강제로 도훈의 투구를 벗겼다. 놀랍게도 언제나 변환된 형태를 유지하던 투구가 미호의 손에 잡히자 원래의 평범한 모자로 돌아가고 말았다.

“호오, 마법 아이템이었네? 그나저나 어두워서 뭐가 보여야 말이지."

미호가 손으로 독특한 수인을 맺자 갑자기 허공에 두개의 푸른 불덩이가 생겨났다.

화르륵-!

허공에 생성된 불덩이는 마치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서로 대칭을 이뤄 돌기 시작했다. 도훈은 미호가 보여주는 놀라운 마법 실력에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도깨비불이야. 평소엔 뜨겁진 않지만 조심하라고. 나쁜 아이들은 얼굴을 홀랑 태워버릴 수···."

도깨비 불을 띄운 미호는 그제야 도훈의 생김새를 살피더니 갑자기 할말을 잃고 말았다.

“뭐야? 너 왜 이렇게 잘 생겼어?"

“예, 예?"

“아씨, 뭐야 진짜.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왜 숨기고 다니는 거야?"

도훈은 오락가락 바뀌는 미호의 변덕에 적응할 수 없었다.

등뒤에서 서슴없이 칼찌검을 하는 잔혹함으로 봐선 인정사정없는 플레이어 킬러 같다가도, 깜찍한 생김새와 말투는 영락없는 20대 미소녀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 뭐지? 미친년인가?’

[조심하십시요. 정상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미호는 내친김에 망토를 들춰 도훈의 몸매까지 확인했다.

“헐! 대박! 몸 좀 봐. 개 쌔끈해!"

“···저, 저기···."

“응?"

“아까부터 제가 군소리 없이 따라오긴 했지만, 혹시 오해가 있으신건 아닌지···."

“오해? 무슨 오해?"

“저는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응?"

미호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벽에 기대 세워진 접이식 의자를 들고왔다. 그리고는 도훈의 등 뒤에 펴주며 명령했다.

“앉아봐. 어디 한번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게."

도훈은 어차피 저항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몸에 똬리를 틀고 있던 백사는 다시 보니 어느새 평범한 하얀 밧줄로 변해 있었다.

‘···상대는 마법사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잘못하면 오늘이 제 삿날이 될수도 있겠어.’

도훈이 최대한 잔머리를 굴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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