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5. 대학 축제-60-
피지크 대회 남자부 예선이 시작되었다.
최근들어 헬스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면서, 대학생들도 몸매 관리를 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는지 참가자 숫자도 역대급이었다.
특히 타고난 피지컬이 중요한 파워리프팅이나 오랜 기간 단련해야 하는 보디빌딩 종목과 달리, 비교적 짧은 기간에 준비가 가능한 피지크 대회는 유독 참가자가 많은 편이었기 때문에 거의 100여명이 넘는 신청자가 몰렸다.
피지크 종목은 흔히 패션근육이라는 비아냥을 들을만큼, 근육의 크기나 발달정도 보다는 슬림한 체형을 선호했다. 때문에 6개 월 정도 헬스를 한 소위 헬린이들이 적당히 체지방만 빼서 출전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타고난 골격만 받쳐준다면 운동 기간에 비해 생각보다 성과가 좋은 것이다.
도훈은 예선 뒷번호를 배치받는 바람에 대기실에서 한참 기다려야했다. 출전을 앞둔 참가자들은 저마다 몸을 풀며 펌핑을 하는 중이었다.
"예선으로 몇 명 뽑는거야?"
"30명에서 끊는다던데?"
"와, 그럼 2/3는 탈락인 거잖아?"
"걱정마 너 정도면 충분하지."
도훈은 잠시 의자에 앉아 대기하면서 앞선 두 대학생의 대화를 들었다.
"하긴, 내 복근이 좀 예쁘긴 하지."
대학생 한명이 상의를 위로 들추며 복근을 과시했다. 생각없이 엿듣고 있던 도훈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뻔 했다.
'풉-. 저게 뭐야?'
[왜 그러십니까?]
'저딴걸 무슨 복근이라고. 그냥 살빼서 거죽이 드러난 거지.'
[그래도 나름 식스팩이 보이는데요?]
'에이, 저건 체지방율만 낮추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수준이야.
진짜 복근은 저런게 아니지.'
실제로 식스팩을 자랑한 대학생의 복근은, 간신히 라인만 잡혀 있을 정도였다. 반면 도훈의 복근은 워낙에 볼륨감이 있는 편이라 골이 깊이 패여 있었다.
'출전한 종목중에서 이번 종목 출전한 애들이 제일 허접한 것 같아. 경쟁자들 보니까 제대로 운동을 배운놈도 없어 보이네.'
[이번에도 무난히 합격하겠군요.]
'뭐 특별한 일만 없다면?'
[특별한 일이라면 응원하는 후배들이 혹시나 주인님에 대해 떠드는 것 말씀인가요?]
도훈은 사실 예선대회보다 그 부분을 걱정했다. 정음, 희주, 아영 그리고 경희까지 모두 그와 관계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희주와 아영은 완벽히는 모르지만, 도훈의 난잡한 여자관계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눈치였다.
'희주는 솔직히 걱정 안 돼. 나랑 섹파 사이라는 걸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아영이가 더 걱정이야.'
[아영양은 도통 속을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설마 다른 여자애들한테 이상한 말을 하진 않겠지. 했으면 진작 절친인 정음이에게 이실직고 했을 테니까.'
[저는 아영양이 정음양과 친한것도 이상합니다.]
'왜?'
[따지고보면 연적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정음양은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본인은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을텐데요.]
'혹시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둔다는 전략일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왜, 옛말에 그런 말이 있거든.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호오. 아영양이 꿍꿍이를 숨긴 채 정음양을 지근거리에 둔다는 뜻인가요? 일부러 친해져서?]
'일부러는 아닐지도. 그냥 둘이 죽이 잘 맞는것 같더라고. 생각해보면 정음이랑 아영이는 전혀 성향이 다르거든.'
[성향이 다른데 죽이 잘 맞는다고요?]
'잦이를 봊이에 넣을 수 있는 건 서로 전혀 다르게 생겼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지.'
[아니 주인님은 무슨 비유를 하셔도.]
도훈이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밖에 나갔다온 참가자 한명이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친구에게 말했다.
"야. 밖에 뭔일 난것 같던데?"
"뭔 일인데 그래?"
"유도복 입은 애들이 막 누굴 찾는다면서 뛰어다니더라고."
"유도부? 그 꼴통 새끼들 말이야? 그 새끼들 신분만 대학생이지 완전 양아치 집단이잖아."
"쉿-. 목소리 낮춰. 누가 듣겠다."
하지만 귀가 밝은 도훈은 이미 다 들은 상태였다.
[설마 아까 주인님이 기절시킨 곽동수 패거리 아닙니까?]
'그런것 같은데? 이 새끼 아까 덜 맞았군. 진짜 주먹으로 패버릴걸 그랬나?'
[그러지 마십시오. 누구 죽일 일 있습니까?]
'물론 농담이야.'
[근데 치사하게 패거리로 몰려 오다니 정말 운동부라는 이름이 아깝군요.]
'내가 그랬잖아. 말이 유도부지 그냥 예비 조폭이나 마찬가지라고. 조폭들이 원래 그렇잖아. 실력으로 안되면 쪽수로 누르는 거.'
[주인님한테 숫자가 의미 없다는 걸 모르는 군요.]
'아무튼 이거 귀찮게 됐는 걸. 후배들도 보고 있는데, 설마 예선장에서 난동을 피우면 어떻게 하지?'
[곽동수가 주인님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무대에 오르는 순간 알아볼 겁니다.]
'이름은 모르겠지?'
[그렇지 않을까요? 통성명을 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얼굴을 바꿔볼까? 역용술로.'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반대로 후배들이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주인님의 얼굴이 바뀌었다고요.]
'젠장, 골치아프게 됐네. 그냥 지금이라도 나가서 싹 다 때려 눕혀 버려? 아직 시간도 넉넉한것 같은데.'
[괜히 일 키우지 마십시오.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인데 백주대낮에 캠퍼스 안에서 패싸움을 벌였다간 대번에 주목받을 겁니다. 언제 어디서 PK단의 끄나풀이 감시하고 있을 지 모르니까요.]
'젠장, 별것도 아닌일로 피곤하게 됐네.' 도훈이 어떻게하면 이목을 피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데 예선을 마치고 짐을 챙기러 온 누군가가 모자를 쓰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모자? 모자를 써도 되는 건가?'
그러고 보니 피지크대회 출전자 중에선 아예 청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도 드문드문 보였다. 하체 근육을 심사하지 않는 다는 규정 때문에 다른 종목에 비해 복장이 훨씬 자유로웠던 것이다.
'오호, 모자를 써도 되는 거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설마 정체 불명의 모자를 쓰시려고요?]
'그렇지. 그럼 놈들도 나를 못 알아 볼것 아니야.'
[하지만 후배들도 주인님에게 위화감을 가질겁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면 괜찮을 거야. 후배들 앞에서 나중에 벗으면 되니까.'
[그것도 방법이 될 순 있겠군요.]
'어차피 이번 예선은 그냥 서있기만 해도 합격할 것 같으니 모자쓰고 대충 나가는 것으로 하자.'
* * *
한편 관중석에 앉아있던 미호는 따분한 표정으로 무대에 오르는 참가자들을 하나씩 눈여겨 보는 중이었다.
'이번 조도 아닌데.'
벌써 많은 수가 예선을 마쳤지만, 플레이어 탐지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측정거리가 짧아서 그런가 싶어 일부러 앞자리까지 옮겼는데도 바늘은 요지부동이었다.
'혹시 이거 고장난 거 아니야?'
미호는 애꿎은 탐지기를 툭툭 건드렸다. 블랙마켓에서 구매하는 물품들은 대체로 품질이 좋지 못했다. 그곳은 일종의 암시장과 비슷했기 때문에 가품도 많았고, 진품이라 하더라도 하자가 있는 경우가 흔했다.
오죽하면 미호는 PK단이 이용하는 블랙마켓을 재활용수거장이라 부를 정도였다.
'아니면 내가 잘못 짚었는지도···. 파동의 시작점이 이 근처였다고, 플레이어 주제에 공개적으로 대회에 출전했을리가 없을지도.'
미호는 자신이 헛다리를 짚었다고 생각하고 일어서려고 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데 좌석 반대편에서 유도복을 입은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관람석은 영화관처럼 좌우로만 통로가 나 있었기 때문에 미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간에 끼고 말았다.
'아이참, 하필. 이 타이밍에.'
"그 새끼 꼭 찾아. 밖에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걸 보면 분명 여기 숨어 있을수도 있으니까."
미간 가운데가 퉁퉁 부은 험악한 덩치의 말에, 유도복을 입은 무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그때 객석 뒤에서 보고 있던 남학생 한명이 서있는 유도부를 향해 말했다.
"저기요. 늦게 왔으면 얼른 앉아요. 그쪽 때문에 무대가 안 보이잖아요."
남학생의 항의에 유도부 한 놈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뭐라고? 지금 나보고 말했냐?"
유도부는 대부분 곽동수처럼 덩치가 크고 험악하게 생겼기 때문에 말을 한 학생은 빠짝 쫄아 입을 다물었다. 기세가 등등해진 유도부가 말을 건 상대를 향해 비아냥 거렸다.
"좆도 안되는 새끼가 어디서 까불어? 뒤질라고?"
그 모습을 멀리 떨어진 쪽에서 우연히 지켜본 정음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운동을 배운 사람이 예의 없이 행동하는 것을 참지 못했는데, 유도복씩이나 입고와서 껄렁거리는 무리를 보자 욱하는 마음에 나서려고 했다.
"아니 저 사람이 진짜."
그때 아영이 정음의 팔목을 잡고 말렸다.
"하지마."
"왜? 괜히 늦게 와서 애먼 사람한테 시비걸잖아."
"그냥 하지마. 너까지 나서면 일이 커지니까."
다행히 유도부는 곧 자리에 앉았고, 항의를 한 사내도 금방 찌그러졌기 때문에 일이 더 커지진 않았다. 아영이 다시 정음을 설득했다.
"질 나쁜 애들이야. 그냥 무시해버려."
"으으."
정음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도훈이 참가한 대회에 누를 끼칠까봐 한 수 접었다. 결과적으론 잠깐 시비가 붙은 것 말고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괜한 오지랖처럼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음이는 정말 못 말리겠다니까. 저런 무서운 애들한테 뭘 어쩌려고.'
아영은 정음의 진짜 싸움 실력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그녀가 정의감에 나섰다고 생각했다.
'그치만, 저런 모습 때문에 같은 여자가 봐도 매력적이란 말이야.'
경희나 희주도 아영과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곧장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도훈 오빠는 언제쯤 하는 걸까?"
"지금 박씨니까 한참 남았을 것 같은데."
"예선이 이름 순이었어?"
"아마도 그런것 같아. 참가자가 많아서 이름순으로 끊은것 같아."
"오빠 어떻게 할지 진짜 기대된다. 그치?"
소요가 일단락되자 미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나가는 길을 막고있는 유도부에게 양해를 구하며 객석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잠시만요, 좀 나갈게요."
팔짱을 끼고 다리를 쩍 벌려 앉아 있던 동수는 미호가 양해를 구하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호가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저기, 저 나가야되는데···."
"존나 귀찮게구네. 반대편으로 나가면 되잖아?"
동수가 뻔뻔하게 소리치자 미호의 동공이 갑자기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 안돼. 세나. 지금은 아니야.'
-미호 너는 성격이 물러서 문제야. 저런 버릇없는 새끼는 혼 좀 나봐야 해.
'내가 알아서 할게.'
"아, 알겠어요."
미호가 반대편 통로로 나가려는데 동수가 불쑥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꽤 귀엽잖아? 내 무릎에 올라타고 나가는 건 어때? 얼마든지 빌려줄 용의가 있는데."
"이 손···."
미호의 눈빛이 완전히 돌변했다.
갑자기 혀로 윗입술을 핥더니 동수의 귓가에 바짝 붙어서 속삭이는 것이었다.
"···기왕 올라탈거면 같이 밖으로 나가는건 어때요, 오빠?"
"어쭈? 나랑 한 번 놀아보자고?"
눈빛이 붉게 변한 미호가 윙크를 날리자 동수가 갑자기 뭔가에 홀린 것처럼 헤벌쭉 웃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방금 처음 본 미호가 자신이 마음에 들어한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으흐흐,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암캐년이었구만? 기분도 꿀꿀했는데 잘 됐다.'
동수는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던 후배들에게 말했다.
"야, 비켜. 나 잠깐 바람좀 쐬고 올테니까."
"선배님 그럼 그 새끼는 어떻게···. 저희는 얼굴도 모르는데."
"딱 보면 알거야. 얼굴이 기생오라비같이 잘 생긴놈만 찾아."
"네, 넵."
동수는 갑자기 도훈을 찾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마치 뭔가에 현혹된 것처럼 목표를 상실한 느낌이었다.
동수가 먼저 나서고 미호가 그 뒤를 따랐다. 체육관을 나온 동수가 미호에게 물었다.
"밝은데서 보니까 더 예쁜데? 너 이름이 뭐야?"
"나? 세나."
"흐흐. 몇학년인데?"
"나이가 중요해?"
"어쭈. 나 3학년인데 바로 말 놓는것 봐라?"
"놓으면 안 돼?"
동수는 세나로 분한 미호의 눈을 마주치자 부쩍 성욕이 끓어올랐다. 아무 근거는 없지만, 세나가 자신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흐흐, 자세히 보니 존나 꼴리게 생겼잖아? 어디서 이런 애가 튀어나왔지? 잘하면 꽁씹하는 거 아냐?'
그의 바지춤이 씰룩거리며 온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한테 함부로 말 놓는 여자는 애인말고는 없었는데?"
"까짓거 하면 되지. 애인."
"야, 너 진짜 쿨하구나. 나쁜 남자 좋아하지?"
"좋아 죽지."
"크크. 그럴것 같더라. 너같은 애들을 내가 좀 알지. 문신한 남자만 보면 벌렁벌렁하는 애들."
동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세나를 덮칠 것처럼 어깨동무하고 있었다.
"오빠. 여기선 좀 그렇고 조용한데로 장소를 옮길까?"
"조용한 곳? 흐흐. 축제기간이라 유도부 체육관이 비어있긴 한데, 괜찮아?"
"좋지 나야. 사람 없는 곳이면."
"여기서 멀지 않아. 걸어가자."
동수는 당장이라도 떡각이 잡힌 사람처럼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미호의 매혹에 완전히 사로잡힌 결과였다. 자신을 기절시키고 간 도훈을 찾겠다는 생각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린 후였다.
-세나. 지금 뭐하는 거야?
'뭐긴. 양기가 충만해 보이길래 간만에 포식좀 하겠다는 거지.
넌 떡이나 보고 구경이나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