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3. 대학 축제-58-
* * *
힘을 가진 사람이 힘을 숨기고 사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특히 덩치하나만 믿고 깝죽대는 놈들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결국 나는 로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덩치를 따라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서로 원터치 쪼개기로 합의한 거니까 나중에 딴 소리하기 없기다?”
문신 돼지의 말에 내가 웃으며 받아쳤다.
“너야말로.”
“이 새끼, 깡다구 하나는 인정해 줘야겠네.”
“굳이 네 인정이 필요하진 않는데?”
“뭐, 뭐라고?”
돼지가 열이 받는지 얼굴에 핏대를 세웠다. 하긴, 험악한 인상과 거구의 몸집에 문신까지 떡하니 드러내놓고 다니는 놈에게 나처럼 대놓고 받아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놈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잠시 흥분을 가라앉혔다.
“너 누구 빽 있냐?”
“가방은 좀 있는데.”
“말장난 치지 말고. 너 대체 누구 믿고 설치는 거야?”
“누굴 믿다니?”
“하- 새끼, 이거 완전 골 때리는 놈이네? 야, 나 국성대 유도부 곽동수라고 하거든?”
[갑자기 이름은 왜 말하는 걸까요? 게다가 학과까지 밝히면 본인이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아. 그거였네.’
[네?]
‘국성대 유도부 말이야. 이 새끼들 엄청 꼴통이라는 소문이 있거든.’
[정말요?]
‘내가 국성대는 잘몰라도 여기 유도부 이야기는 들어봤을 정도니···.’
동수의 말에 오래전에 들었던 풍문이 하나 떠올랐다.
국성대 유도부.
대부분 그렇듯 운동부 자격으로 들어온 학생들은 대입 성적과 무관한 경우가 많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특기생으로 선발하기 때문이다.
국성대의 경우엔 특히 태권도와 유도등 격기 종목에 유명한 선수를 많이 배출해온 대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국성대 유도부는 오래전 명성을 잃고, 현재는 조폭 양성소라고 불릴 정도로 껄렁껄렁한 학생들이 많이 진학하고 있었다.
특히 오래전 유도부 출신의 한 선배가 조직폭력배로 이름나면서 출신 대학 후배들을 스카웃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차피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까지 못 나가게 된 어쩡정한 선수들은 대부분 이른 나이에 선수 생명이 끝났기 때문에, 평생 배운 운동을 못된 짓에 활용하는 것이다.
이렇듯 조폭계에 먼저 자리 잡은 선배들이 즐비한 만큼 국성대 유도부하면 깡패 사관학교라고 불릴 만큼 질이 떨어지고 말았고, 최근에는 아예 처음부터 그쪽으로 진로를 잡고 국성대에 오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였다.
“곽동수?”
“그래. 이제 좀 알아보겠냐? 몰라서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 네놈 깡을 봐서 곱게 넘어가주지.”
“무릎을 꿇으라고?”
“이 새끼가 진짜! 소새끼도 아니고 왜 같은 말을 되새기는 거야? 나랑 장난하냐 지금?”
동수가 순식간에 덤벼들었다. 멱살을 잡는가 싶더니 반대발로 마당을 쓸 듯 발목을 걷어내는 ‘와사바리’라는 기술이었다.
시선을 위로 유도한 뒤 부지불식간에 하체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수법으로, 유도선수 출신들이 주로 쓰는 공격기술 중 하나였다.
제법 날카로운 공격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순식간에 놈의 손목을 풀어내며 한 걸음 물러서자 놈의 발이 뻔하게 빈 마당을 휩쓸고 지나갔다.
“뭐, 뭐야? 이걸 피해?”
“동수야.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 네놈 깡을 봐서 곱게 용서해줄 마음이 조금 있는데···.”
“이런 씨발놈이!”
열 받은 동수가 곰처럼 달려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겐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뿐이었다. 달려오는 놈을 횡이동으로 피하며 뒷발을 내밀어 발목을 걸자, 놈이 균형을 잃고 볼썽사납게 땅바닥에 처박혔다.
쿵-
“으억!”
“쯧쯧. 이쯤에서 그만하지? 예선도 가뿐히 통과한 기념으로 형이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이 개새끼가!”
동수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두 번의 공격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 이상, 놈도 머리가 있는지 쉽게 덤벼들지는 못했다.
“너 이 새끼, 운동 배웠냐?”
“배우긴 했지.”
“뭐여? 합기도? 태권도?”
“숨쉬기.”
“이, 이!!”
계속 약을 올리자 동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주인님, 적당히 하십시오. 괜히 소란을 피워 좋을 게 없습니다.]
‘알아. 아깐 진짜로 열 받아서 확 패줄까 했는데,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실력으로 재롱부리는 꼴을 보니 미안해서 못 때리겠다.’
“그만하자, 동수야.”
“아가리 싸물어! 좆만한 새끼가 나를 뭘로 보고!”
“뭐로 보긴? 아가리 파이터로 보고 있지. 이렇게 센척하면서 데드 200kg를 못 쳐서 나를 약쟁이로 몰았어?”
“이 새끼가 진짜!”
결국 화가 폭발한 동수가 죽자고 달려들었다. 말로 설득이 안될 것 같으니 결국 힘을 개방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 성가시게하네, 진짜.”
내공을 실은 평범한 주먹.
카운터펀치와 비슷하게 타이밍을 맞춰 놈의 미간을 향해 찔렀다.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놈은 자신이 무엇을 맞았는 지도 모를 것이다.
[주인님, 그거 맞으면 사람 죽습니다!]
로시의 우려대로 시비 좀 걸었다고 사람을 죽일 순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 주먹을 펼치며 딱밤을 날렸다.
빡!
그러나 나의 딱밤은 그 자체로 뇌를 흔드는 펀치와 흡사한 파워였다. 동수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딱밤을 얻어맞고는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반대편으로 나가떨어졌다.
“뭐야? 기절했어?”
동수는 실신한 듯 완전히 뻗어버렸다.
‘죽진 않았지?’
[휴-. 힘 조절을 잘 하셔서 단순 기절로 보입니다.]
‘다행이네.’
[근데 왜 그러셨습니까? 그냥 무시해도 되는 잔챙이였는데요.]
‘어지간해야 참지. 자기 예선 떨어졌다고 나를 약쟁이로 모는데 내가 왜 참아야해?’
[사실이 아니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꼭 나한테 시비 걸었다고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럼요?]
‘만만해 보인다고 다짜고짜 시비 거는 성격이면, 나 말고도 다른 피해자가 있었을테니 이를 응징해 준 거지. 운동 배웠다는 놈이 껄렁껄렁···. 깡패새끼도 아니고.’
[흐음. 주인님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됐어. 나중에 깨어나면 이마가 팅팅 부어서 한 동안 밖에 쏘다니지도 못하겠지. 함부로 까불면 큰 코 다친다는 걸 배웠으니 앞으론 좀 자중하겠지.’
나는 바닥에 쓰러진 동수를 내버려두고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갔다.
* * *
“···응?”
캠퍼스를 거닐던 예쁘장한 여대생이 전기에 감전된 듯 발걸음을 멈춰 섰다. 코스프레를 한 것처럼 이마에는 여우 귀를 닮은 머리띠를 했는데, 하얗게 탈색한 머리색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오호라, 이것 봐라?”
중앙 분수대 주변에서 솜사탕을 사먹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체육관 방향을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야릇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여대생은, 다름 아닌 미호였다.
‘방금 분명 기의 파동이 느껴진 것 같은데?’
미호는 수백년 묵은 구미호로서 신통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여러 인격을 가진 영혼을 한 몸에 담는 ‘군령자’로서의 능력도 있었고, 술법이라 불리는 다양한 주문술에도 능했다.
그밖에도 남성의 양기를 뺏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양생술과 더불어 미세한 내공의 파동을 감지하는 감각도 갖추고 있었다.
이른 오전부터 국성대 축제에 방문한 그녀는 뜬금없이 퍼지는 파동에 플레이어의 존재를 확신했다.
‘있다. 분명히 이곳 대학에 내공을 다룰 수 있는 플레이어가 숨어 있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인 방향은 잡은 것 같았다.
미호가 쾌재를 부르며 체육관쪽으로 향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붙잡았다.
“저기요! 저희 애랑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래요?”
“네?”
“의상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 구미호 분장 맞으시죠?”
“아니 갑자기 무슨···.”
난데없는 사진 요청에 당황한 미호가 주변을 둘러보자 다양한 복장으로 코스프레를 한 일단의 무리가 중앙 분수대 주변에 이리 저리 포진해 있었다.
높이 걸린 현수막에는 ‘코스튬 동호회와 함께 사진찍어요!’라는 문구가 보였다. 사정을 파악한 미호가 당황해하면서 말했다.
“아, 저 어머님 저는 동호회 사람이 아니라요···.”
“으앙, 찍어줘요! 누나랑 찍고 싶단 말이야앙!”
미호가 정중히 거절하려는데, 갑자기 4~5살로 보이는 남자애가 바닥에 주저앉더니 떼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난처해 하면서 다시 한번 미호에게 부탁했다.
“학생, 한 번만 부탁해요. 동호회에서 사진 5장 모아오면 로봇 장난감을 준다고 해가지고···. 어떻게 안 될까요? 내가 부탁드릴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미호는 길바닥에서 울고 있는 어린애를 보고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정문 입구 좌판에서 산 동물귀 머리띠 때문에 비롯된 오해였지만, 이제와서 무슨 변명을 해도 안 통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미호는 평소 남자들에게 센척한 것에 비해 어린아이에게는 마음이 매우 약한 편이었다.
“그, 그럼 한 장만 빨리.”
“고마워요, 학생!”
우는 아이를 달래 함께 사진을 찍고 나자 이번엔 다른 사람이 또 미호에게 부탁했다.
“저기, 저희 애랑도 같이 사진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아니 그게···.”
“설마 사람 가려서 찍어주시는 건가요?”
“아···. 알겠습니다.”
미호는 점점 기의 파동이 흩어지는 걸 느끼며 속으로 탄식했다.
기의 파동은 최초의 진원지에서 멀리 퍼져나가는 특성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희미해져 나중에는 종적을 찾기 어려웠다.
‘아, 이게 무슨 일이람?’
미호는 난감해하면서도 부모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특히 한명과 찍어주고나자 2차, 3차로 몰려드는 요구를 거절하기가 더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미호가 마지막까지 사진을 다 찍어주었을 땐, 이미 기의 파동은 완전히 흩어져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미호가 이마에 머리끈을 잡아 빼며 탄식했다.
“아흐씨, 추적할 수 있었는데. 이건 왜 사가지고.”
그 순간 미호의 머리색이 검은색으로 순식간에 변했다.
‘눈에 띄는 복장을 했다간 추적하는데 불리할 수 있겠어. 일단 저쪽 방향인 것 같으니 천천히 탐문해보자.’
다시 평범한 여대생으로 변신한 미호가 체육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쨌든 확실한 건 국성대에 플레이어로 추정되는 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간만에 사냥이 시작되겠군.’
미호가 씨익- 입술을 말아 올렸다.
* * *
파워리프팅 종목 예선을 마친 도훈은 여학생 대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지는 피지크 종목과 보디빌딩이 한 시간 가량 남아있었기 때문에 후배들도 구경할 겸 잠시 짬을 낸 것이었다.
‘로시, 정체불명의 모자 좀.’
등 뒤로 손을 내민 도훈은 허공에서 불쑥 야구모자 하나를 꺼내더니 깊숙이 눌러썼다.
[아니, 왜 정체를 숨기십니까?]
‘얼굴 드러내놓고 응원해봐야 괜히 부담줄 것 같아서 그래.’
[아하.]
구석에 자릴 잡은 도훈은 주변을 살피다가 앞줄에 앉은 아영을 발견했다.
‘아영이도 이번 대회 신청했던가?’
[그게 아니라 다른 학생들 응원차 따라온 것 같은데요?]
‘아하.’
“육정음 파이팅!”
아영이 큰소리로 정음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아영의 시선을 따라 가보니, 무대 정면에 5명의 여학생들이 가운을 입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중 가운데 정음이 서 있었다.
‘호오. 마침 정음이가 예선 시작하나 보구나.’
도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여자 피트니스 종목 예선을 관람했다. 곧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진행했다.
“이어서 여성부 3조 예선 시작합니다. 예선은 자유포즈로 결정 되니 만큼, 호명되는 분께서는 가운을 벗고 바로 포즈를 취해주시면 됩니다. 심사는 한국보디빌딩 협회 협회장이시자, 죽동 로터리 클럽 상임이사를 맡고 계신 국성대 사회체육학과 김철순 명예교수님께서 봐주시겠습니다, 박수!”
쓸데없이 긴 호칭에 박수를 유도하는 사회자를 보며 도훈이 지루한 듯 하품을 내쉬었다.
‘뭔 말이 저렇게 많담. 그냥 바로 포즈만 보면 되겠구만.’
[여성부 예선은 주인님이 했던 것보다 애매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술성 평가도 있으니까요.]
‘그런가?’
“자, 그럼 11번 차민희 선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맨 왼쪽의 선수가 가운을 훌렁 벗더니 포징을 시작했다. 나름 준비를 한 것인지 목 위로는 허연데 반해 몸은 새까맣게 태닝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비키니에 가까울 만큼 몸에 딱 붙는 조그만 수영복을 입고 있었는데, 도훈이 보기에도 살짝 민망할 정도였다.
‘아아, 저래서 가운을 입고 대기했던 거구나. 사람도 많은데 엄청 쪽팔리겠는데.’
[근데, 저 의상대로면 육정음양도 비키니를 입었다는 걸까요?]
‘오잉?’
도훈은 문득 자신이 정음의 알몸은 많이 봤지만, 비키니는 처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심지어 해변으로 갔던 체육과 여름캠프에서도 끝까지 래시가드를 고집하던 그녀였다.
‘정음이가 비키니라고?’
어느덧 두 번째 선수의 차례까지 끝나고 정음의 차례가 되었다.
“이번에는 13번 육정음 선수입니다. 시작하세요.”
도훈이 숨어서 지켜보는 가운데 정음이 천천히 가운을 벗기 시작했다. 구경하던 다른 관객들도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만큼 정음의 드러난 외모는 예선에 참가한 다른 선수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몸매까지 어떨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