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449화 (1,413/2,000)

1432. 대학 축제-57-

많은 학생들이 기다리던 대학 축제의 날이 밝았다.

특히 올해 처음 캠퍼스에 발을 내딛은 새내기들에게는 생전 처음 맞는 행사였기 때문에 다들 들뜬 표정이었다.

사범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데, 오전부터 학떨목이란 벤치를 중심으로 수많은 학과에서 행사를 진행 중이었다.

미술교육과는 길가에 캔버스를 설치한 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으며, 음악교육과는 자신들의 특기를 살려 버스킹 공연을 했다.

체육과의 경우엔 저녁부터 열리는 주점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기 때문에 별도의 오전 행사가 없어 다른 과 행사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북적이는 인파 사이를 걷고 있던 정음과 아영은 국어교육과에서 운영하는 중고책 벼룩시장을 둘러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과도 열심히 준비했구나. 이걸 보니까 우리과도 주간 행사 진행할 걸 그랬나봐.”

정음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래된 서적을 뒤적이던 아영이 물었다.

“주간행사? 정음이 넌 뭐 하려고 했는데?”

“격파 이벤트 같은거?”

“격파?”

“왜, 기왓장 같은 거 몇 장 깨면 인형 선물 주는 거 있잖아. 했으면 재밌었을텐데.”

정음이 진심으로 아쉬워하자 아영이 풉- 하고 웃었다.

“너무 남자들만 좋아할 것 같은데?”

“왜? 여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나도 예전에 연습했는데 금방 하겠던데?”

“에이, 그건 정음이 너니까 하는 소리지. 격파하다가 혹시나 부상이라도 입으면 처치 곤란해질걸? 병원비 물어내라고 따지기라도 하면.”

정음은 미처 거기까진 생각 못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해맑게 웃었다.

“그렇구나. 역시 아영이 넌 머리가 좋아.”

“뭘 그 정도로. 그리고 우리과도 어차피 주점 운영하잖아. 그것만 해도 축제 기간 내내 정신없을 걸?”

“하긴 그래.”

“맞다. 정음이 너 오늘 무슨 대회 나간다지 않았니?”

“응. 피트니스 대회. 좀 있다 경희랑 희주 만나기로 했어.”

“재밌겠는데? 나도 응원갈 게.”

“아, 아니야. 오늘은 그냥 예선이라서 별 거 없을 거야.”

“예선은 가볍게 통과할 것처럼 말하네? 자신 있나봐?”

정음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 뭐. 자신이 있다기보다는.”

“하긴 정음이 넌 몸매도 좋으니까.”

“아니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겸손하기까지? 여름 캠프 때 다 봤거든?”

“뭐, 뭘. 그때 레시 가드 입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샤워할 때 말이야. 나 정말 그때 깜짝 놀랐는데.”

“미, 민망하게 그런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

정음은 아영의 칭찬에 몸둘바를 몰랐다.

아영은 정음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누구보다 예쁜 얼굴과 빼어난 몸매를 가지고도 결코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남을 무시한 적이 없었다.

가식적인 겸양이 아니라, 타고난 성격이 털털하고 진솔한 편이었다.

‘저러니까 도훈 오빠도 좋아하는 거겠지? 같은 여자인 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데, 남자들한테는 오죽할까.’

정음을 대하는 아영은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

여름 캠프 이후로 정음과 단짝이 된 아영. 그녀는 이제 누구보다 절친한 친구이자, 도훈을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이었다.

바람둥이인 도훈이 유독 정음에게 마음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영으로선 그 모순을 견디기 쉽지 않았다.

마치 전교1등만 없었으면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거라 믿는 전교2등처럼, 아영도 때론 정음이 없었더라면 도훈이 자신을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훈에 대한 애정만큼, 정음에 대한 우정도 깊었기 때문에 아영은 늘 복잡한 감정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눈치가 없는 정음이 도훈과 자신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도 그녀를 머리아프게 했다.

“···암튼, 슬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응. 이제 체육관으로 가면 될 것 같아.”

아영이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가려는데, 아까부터 그녀 주변을 서성이던 국어과 남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안 사시게요? 그거 되게 싸게 내놓은 건데.”

“죄송해요. 찾던 책이 아니라서.”

“그냥 가지셔도 돼요.”

“네?”

국어교육과 남학생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체, 체육교육과 1학년 학생 맞으시죠? 평소에 사범대 2관에서 오다가다 몇 번 뵌 것 같아서요. 그냥 제가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남학생들이 부끄러워하며 호의를 드러냈다. 검은 뿔테 안경에 체크무늬 남방이 무척 잘 어울리는 훈훈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정음과 깔깔거리던 아영은 곧바로 표정을 굳히더니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사양할게요.”

“아···. 제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호의를 거절당한 남학생이 쩔쩔매는데 아영이 매정하게 말했다.

“전 이유 없는 선물은 받지 않거든요. 그럼 이만.”

“아, 아영아.”

민망해진 정음이 옆에서 말렸지만 아영은 귀찮다는 듯 돌아서서 가버렸다. 얼음공주라 불리던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혼자 남겨진 국어과 남학생은 머쓱해하며 중얼거렸다.

“와, 소문대로 장난없구나.”

아영을 쫓아간 정음이 그녀의 냉정한 태도를 나무랬다.

“왜 그랬어? 공짜로 준다는데 그냥 받아주지.”

“내가 왜 그걸 받니?”

“아니 그래도 저쪽에선 나름 호의를 보인 건데···.”

“정음아. 너도 남자들이 주는 거 무턱대고 받지 마.”

“왜?”

“선물을 받아주는 건 여지를 주는 것과 같아. 결국 좋아하지 않을 거라면, 처음부터 단호하게 거절하는 게 나아.”

“그냥 친하게 지내자는 뜻일 수도 있잖아.”

정음은 잘 이해를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영은 본래 정음의 성격이 그렇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남녀 사이에 그냥 친하게 지내는 건 없어. 결국 목적은 하나니까.’

다만 아영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데 불쑥 누군가 끼어들었다.

“엇, 육정음. 체육관 가는 길이지? 같이 가자. 아영이도 안녕.”

둘 사이에 끼어든 학생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희주였다.

그녀는 원체 쾌활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동기들과 별로 교류가 없는 아영과도 격의없이 지내는 편이었다.

“희주 왔네. 우리도 막 체육관으로 가려던 길이었어.”

“아영이 너도 대회 신청했어?”

“아니 난. 그냥 정음이 따라가는 거야.”

“그랬구나. 경희는 아까 도착했대.”

“벌써? 아직 30분 이상 남았을 텐데?”

“몰라. 몸 풀고 나간다나 어쩐다나?”

희주는 언제나처럼 생글거리는 표정이었다.

정음에 아영, 거기에 희주까지 합류해 셋이 나란히 캠퍼스를 거 닐자 길가던 남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최근 사범대 내에선 체육교육과 8선녀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3대장이라고 불리는 정음과 희주, 그리고 아영이 나란히 걷는 모습은 연예인이 등장한 것처럼 주변을 술렁이게 했다.

특히 사범대 최고미녀라는 평이 따르는 정음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발랄한 희주와 얼음처럼 차가운 도도녀 스타일의 아영은 각기 개성있는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호오에 따라 취향은 갈릴지언정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미녀 삼총사의 등장에 남학생들이 먼 발치에서 웅성거렸다.

“와, 체육과 미녀 3대장이다!”

“미녀 3대장?”

“큐티 섹시 양희주!”

“얼음 공주 박아영!”

“사범대 퀸 육정음!”

“완전 비주얼 깡패들이네. 소문대로 체육교육과는 올해 완전 풍년이구나.”

“우리 과는 완전 폭망인데 개부럽누.”

“야, 오늘 체육과 주점 연다는 데 꼭 가자. 1학년 여학생들이 코스프레 복장 입고 서빙한다더라.”

“코, 코스프레? 술 마시다 코피 터지는 거 아니냐?”

“뭔 생각을 하길래 코피까지 터져? 암튼, 체육과 전과 진지하게 고려중이다 나는.”

“너 피임기구 중에 피임률 높은 순서대로 뭐 있는 줄 아냐?”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질외싸, 피임약, 콘돔 순이거든. 근데 그것보다 더 높은 게 하나 있어.”

“뭔데?”

“니 면상.”

“야씹!”

* * *

도훈은 체육과 남학생 중에선 유일하게 미스터 국성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남들보다 일찍 예선 대회장에 도착한 상태였는데, 하필 전 종목을 출전하는 바람에 오전내내 강행군을 펼쳐야했다.

“30번, 이도훈 학생.”

“네.”

기다리던 파워리프팅 종목의 예선이 시작되었다. 인원이 많다 보니 동시에 5명씩 일렬로 서서 데드리프트 무게를 기준으로 본선 진출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몸매의 아름다움을 따지는 피지크, 근육의 발달 정도와 포징을 따지는 보디빌딩 종목과 달리 파워리프팅은 말 그대로 얼마나 힘이 센지를 겨루는 종목이었다.

따라서 다른 종목과 달리 참가자들의 피지컬부터가 압도적이었다. 평균 신장이 180 이상에 대부분 120킬로를 넘는 거구들이 즐비했다.

이 때문인지 도훈은 함께 예선을 치르는 5명 중 가장 덩치가 작았다.

몇몇 참가자들은 테스트를 시작하기 전부터 도훈의 호리호리한 몸을 보며 비아냥 거렸다.

“종목을 잘못 출전한 거 아니야?”

“피지크나 나갈 몸으로 감히 파워리프팅에 도전한다고?”

“거참, 운동을 우습게 아는 모양이군.”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파워리프터들은 몸매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타종목 선수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것이 3대 500도 못 치는 빈약한 몸으로 근육이 어떻느니, 남성미가 저쩧느니 떠드는게 못 마땅했던 것이다. 진정한 남성은, 결국 힘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덩치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도훈은 주변의 비아냥을 귓등으로 듣고 흘리고 있었다.

‘풍선 같은 몸뚱이로 재잘재잘 입만 놀리는 구만.’

“자, 공지한대로 예선 통과 컷은 데드 200kg입니다. 그럼 26번 선수부터 차례로 시작하겠습니다.“데드리프트 200kg는 운동을 꽤 했다는 사람들도 버거워하는 무게였다. 맨 처음 도전자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바벨을 뽑아올렸다.

“으으!”

“통과.”

역도 선수 출신의 심판이 자세의 완성도를 평가하며 합격과 불합격을 현장에서 알려왔다. 대략 합격률은 절반이 안되는 비율이었고, 도훈의 바로 앞에서 하던 사내도 봉을 잡고 낑낑거리더니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은 30번 이도훈 학생 차례입니다.”

“넵.”

상대적으로 가장 덩치가 작은 도훈에게 다른 참가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도훈의 체격으로 파워리프팅에 나온 것 자체가 의문이었던 것이다.

“예선 통과도 힘들어 보이는데?”

“저런 비리비리한 몸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다들 도훈의 실패를 예상했지만, 바벨 앞에서 자세를 잡은 도훈은 오히려 너무 쉽게 들어올리면 의심을 받을 것이 걱정이었다.

‘이건 뭐 한 손으로도 가능해 보이는데···. 그래도 최대한 힘을 숨겨야겠지?’

현재 도훈에게 필요한 것은 연기력이었다.

최대한 힘든 척 합격을 해야 의심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에 초크를 바른 도훈은 일부러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바벨봉을 잡았다. 하지만 잡는 순간 이것이 아령처럼 가볍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게 무슨···.’

“으으읏!“

도훈은 혼신의 연기력을 펼쳐 바벨을 뽑아냈다. 일부러 이마에 핏발이 서도록 숨을 참고 얼굴에 혈류를 올려보냈다.

“오오, 든다.“

“꽤 하잖아?“

“경력이 상당한 거 아니야?“

도훈은 겨우 든 것처럼 팔을 부들부들 떨며 자세를 잡았다. 판정을 맡은 심사위원이 “합격”이라는 통보를 내자 도훈이 쿵 하고 바닥에 바벨을 떨어뜨렸다.

“후웁-.”

“예선에서 합격을 받으신 분은 주최측에서 본선에 대한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참가자분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가볍게 파워리프팅 예선을 통과한 도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뭐, 오히려 식은 죽 먹기군. 포징도 필요없고 단순히 힘만 쓰면 되는 종목이잖아?’

[지금의 주인님에겐 그렇겠지요. 그래도 너무 위화감이 들지 않도록 계속 신경쓰시기 바랍니다. 체격에 비해 너무 많이 무게를 치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럴려고.’

“흥, 약쟁이 새끼같으니.“

도훈이 예선을 끝내고 나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시비를 걸어왔다. 도훈은 처음에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고 지나가다가 한번더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이래서 내추럴하면 손해라니까? 비쩍마른 새끼가 약빨고 와서 예선 통과하는 꼴이라니.”

“지금 저 들으라고 한 소립니까?”

도훈이 표정을 굳히며 받아치자 시비를 건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 들이댔다.

“그럼 너 말고 여기 약쟁이가 또 누가 있냐?”

“뭐라고?”

“이러니까 아마추어 대회가 질이 떨어진다는 거야. 저런 놈들은 사전에 도핑테스트로 걸러내야 할 것 아니야?”

듣고 있던 도훈은 점점 열이 받았다.

딱보니 아쉽게 예선에 본인이 떨어지자 도훈이 합격하는 모습을 보고 작정하고 시비를 거는 모습이었다.

덩치는 거의 도훈의 두배는 되어보였고, 팔에 문신도 하고 있는 모습이 굉장히 성격이 더러워 보였다.

도훈은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민간인을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참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상대는 도훈이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는 줄 알고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다.

“저 봐, 약빨고 본선간 게 부끄러우니까 제대로 대꾸도 못 하는거. 너 다음에는 약빨고 대회 처 나가지 마라. 개쪽 당하기 싫으면.”

무시하고 지나치던 도훈은 마지막 말에 결국 분노를 참지 못했다.

“···개쪽?”

[주인님, 참으십시오. 무슨 저런 쓰레기를 일일이 상대하려고 그러십니까?]

‘참으려고 했는데 선 넘잖아. 좆같은 돼지새끼가 문신까지 해서 위화감이나 조성하고 뒤질라고. 지가 예선 탈락해놓고 애꿎은 나한테 화풀이야?’

“왜? 꼽냐? 함 뜨까? 너 같은 약쟁이 새끼는 참교육 당해 봐야 정신 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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