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1. 대학 축제-56-
도훈은 코스프레를 시험할 겸 인계받은 아이템을 착용해 보았다.
상의는 당연히 노출이었고, 하의는 짧은 트렁크 반바지로 최대한 몸매를 드러냈다. 복장을 모두 갖추고 거울 앞에 선 도훈은 불만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무슨 걸뱅이 새끼도 아니고···.”
[네?]
‘이렇게 입으니까 노숙자같잖아. 장비가 너무 허름해서.’
[제가 볼 땐 엔틱함이 느껴지는군요. 일종의 구제 스타일이랄까?]
‘구제스타일이 아니고 거지스타일이겠지. 이건 좀 아닌듯. 그냥 코스프레 전문가한테 의뢰해서 돈 주고 하나 맞추는게 낫겠어.’
[당장 내일 저녁인데 시간이 촉박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촉박하면 인력을 갈아 넣으면 그만이야. 돈만 주면 안되는게 어딨어? 날새서라도 해서 갖다 바치겠지.’
[음, 물론 겉보기엔 다소 허름해 보일 순 있습니다만···.]
‘다소? 쓰다버린 라운드 쉴드, 허름하고 녹슨 창, 낡아빠진 붉은 망토가 다소냐? 거지 3종 세트지?’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방패를 한 번 두들겨 보시겠습니까?]
로시의 말에 도훈이 귀찮은 표정으로 원형 방패를 툭- 두들겼다.
우웅-
그런데 놀랍게도 금속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기를 다룰 수 있게된 도훈에게만 느껴지는 미세한 기운이었다.
‘이, 이게 뭐야?’
[고블린의 방패는 현재 시스템에선 존재하지 않는 금속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 그쪽에서는 비뷰라늄이라고 부른다더군요.]
‘비브라늄?’
[아뇨, 비뷰라늄입니다.]
‘암튼 그게 뭔데?’
[강철보다 10배 이상 단단하고, 마법적인 기운에 저항력을 갖춘 금속입니다. 물론 그런 면에선 미쓰랄이 훨씬 가볍고 성능도 좋긴 하지만, 비뷰라늄만으로도 지구상에 있는 어떤 방패보다 단단한 방패일 것입니다.]
‘뭐야? 그렇게 좋은 걸 왜 헐값에 파는데?’
[더 품질 좋은 무구가 많거든요. 그리고 비뷰라늄이 지구상에 없다 뿐이지, 해당 시스템에선 돌보다 흔한 금속이라서요. 오죽하면 고블린 종족이 제련할 정도겠습니까?]
‘오호라. 이건 생각 못 했네.’
[플레이어 마켓 역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따릅니다. 흔하게 보급되는 물건은 상대적으로 그 값어치가 떨어지고,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일지라도 희소가치가 생기면 거품이 끼는 현상이 발생하죠. 참고로, 마켓을 주로 이용하는 클래스 전사나 검사 직업계열은 워낙에 그 수가 많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한 중고제품의 시세 역시 저렴하게 형성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럴 수가!’
도훈은 곧바로 마켓의 독특한 특징을 깨달았다. 이제껏 지구에서 사용가능한 물품 위주로 구매하다보니 품목에 따른 물가 차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행성에선 다이아몬드가 돌취급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도훈은 이어 녹슨 창을 집어 들었다.
‘이것도 그럼 평범한 창이 아니겠네?’
[네. 현 시스템에서 가장 뛰어난 강도를 가졌다고 평가받는 다 마스쿠스강보다 5배이상의 절삭력을 가진 금속이 달려 있습니다.
녹슬긴 했지만 여전히 위협적이랄까요?]
‘말도 안돼. 이런 싸구려가 그렇게 엄청난 물건이었다니.’
[아시다시피 아이템이란 가격에 비례해서 성능이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해당 창보다 두배 정도 뛰어난 무기는 그 가격이 20배 이상 뛰니까요. 즉, 플레이어 레벨이 낮은 단계에서는 템빨의 영향보다 스킬이 더 효과적이고 반대로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른 플레이어들에겐 사소한 차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높은 성능의 무구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편이죠.]
‘충분히 이해했어. 한마디로 보급형은 값이 저렴해도 성능은 고만고만하다는 거잖아.’
[네. 게다가 주인님은 하자가 있는 물건을 중고로 구입하셨으니 정상가의 1/4 수준으로 구매하신 겁니다.]
‘그런거였군.’
도훈은 마지막으로 낡아빠진 망토를 살폈다. 분명 숨겨진 기능이 따로 있을 것이었다.
‘망토는 어떤 특징이 있지? 혹시 날아 다니나?’
[그건 아닙니다. 망토는 기본적으로 마법적인 힘을 차단하는 결계를 형성합니다. 해당 망토역시 기본적인 매직 이뮨을 가지고 있죠.]
‘호오. 그러니까 파이어볼 같은 마법을 망토를 통해 방어할 수 있다는 건가?’
[네. 상대의 마법력이 마법저항력을 이겨내지 않는다면요.]
‘흐음, 어쨌든 보기보다 좋은 물건이라는 건 알겠어. 천상계 마켓의 불균형적인 수요 공급 때문에 가격에 비해서 훨씬 값어치가 있다는 것도. 근데 굳이 코스프레하는데 이게 필요한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남는군.’
[혹시나 하는 예방 차원입니다. 국성대에 PK단의 프락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으셔선 안됩니다.]
‘아···. 그 오타쿠 만화 동아리놈들?’
[네. 또 만에 하나 이번 축제에서 PK단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해당 아이템은 단순한 코스프레 용품이 아니라 훌륭한 방어 수단이 될테니까요.]
‘듣고보니 그럴듯한 의견이군.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했어. 정체불명의 모자로 얼굴까지 가리면 어장충돌도 방지할 수도 있고 말이야.’
[일석이조군요.]
도훈은 복장을 갖춘 뒤 모자를 썼다. 모자는 여러 형태로 변형이 가능했기 때문에, 투구의 형태를 떠올리자 금속제 물건으로 변신하여 얼굴 전체를 가렸다.
‘좋아. 이것으로 준비는 완벽히 끝낸 셈이군.’
[만반의 준비를 하셨어도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람들 이목을 너무 끌진 마시고요.]
‘알아서 적당히 할게. 그리고 PK단 접근 경보기가 있으니, 혹시 수틀리면 도망치면 그만이야.’
* * *
“야, 싹퉁머리.”
소연이 퇴근 후 야간타임을 봐주고 있던 창범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미호?”
“응.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이야?”
“하도 인격이 왔다갔다 하니까 확인차 물어보는 거지.”
“헤에. 누나 생각하면서 야한 상상하던건 아니고? 원하면 얼마든지 딸깜이 되어줄 순 있는데.”
미호가 붉게 칠한 입술을 혀로 쓱 핥았다. 순간 미호의 눈동자가 황동색으로 변하며 강력한 유혹의 시선이 느껴졌다. 구미호가 가진 매혹이라는 술법이었다. 하지만 정신조작 능력자인 창범에겐 결코 통하지 않는 기술이기도 했다.
“···제대로 돌았구나, 이 할망구가. 미쳤어?”
“역시나 안 통하네.”
미호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이런 목석같은 놈을 소연이가 무슨 수로 꼬셨을까나?”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야?”
“내일 가게 비우고 데이트 한다면서?”
“데, 데이트 아니라고! 그냥 축제 구경 가는 거라고.”
당황하는 창범을 보고 미호가 피식 웃었다.
“그게 데이트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무슨···.”
“흥분하지말고 흡연실로 따라와. 담배나 같이 빨게.”
미호는 자기 할 말만 남기고 흡연실로 들어갔다. 창범이 뒤따라 들어가더니 미호를 향해 계속 억울함을 주장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이건 데이트가 아니라···.”
“나 담배 한대만.”
“뭐?”
“내거 떨어졌어.”
“아이씨.”
창범은 씩씩거리면서도 담배 한개비를 건넸다. 담배를 입에 문미호가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불쑥 손끝에서 촛불과 같은 불길이 솟아났다.
“뭐하는 거야? 자꾸 쓸데없이 능력 개방할래?”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나는 너네 소속 직원이 아니라 객원이야.
그래서 너희처럼 능력을 쓰는데 제약을 받지 않지. 너도 붙여줄까?”
“됐어.”
창범은 스스로 라이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미호가 아쉬운 표정으로 손끝에 붙은 불을 꺼뜨렸다.
“업화 주문을 이정도 사이즈로 통제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지 모르나 보군.”
“관심없거든? 쓰거나 말거나.”
“흥, 하여간 누나한테 말 버릇은.”
“누나는 무슨 누나야? 할망구지.”
“또또 삐뚤어진다.”
“여긴 근데 왜 온 거야?”
“길가다가 들렀어. 대장도 없으니 혼자 구석자리서 야동 틀어 놓고 딸딸이 치고 있나 구경할까 하고.”
“아우씨, 진짜!”
“물론 농담이고. 내일 축제 때문에 온 거야. 나도 갈거라고 했잖아.”
“대신 PC방 좀 봐달라니까? 건이 혼자서 어떻게 감당하라고?”
“난 너처럼 데이트하러 가는 거 아니거든? 탐문하러 가는 거지.”
“···뭐?”
“일전에 기억나? 거기 대학에 플레이어 징후가 있다고 한 거.”
창범이 몇달 전 일을 떠올렸다.
“그때 탐문해보고 별거 없다고 했잖아. 미호 네가 직접 다녀와서.”
“그랬지. 근데 아무래도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더라고.”
“낌새라니?”
“최근들어 나이트 클럽에서 플레이어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어.”
“나이트?”
“그래. 내가 가끔 생기 흡수하러 들르잖아. 처음엔 내가 착각한 줄 알았는데, 탐지기로 조사해보니 미약한 흔적이 잡히더라고. 거의 못 알아차릴 정도로.”
“그러니까 미호 네 말은 플레이어로 추정되는 인물이 나이트를 다닌다는 거야? 피해자는?”
“아직까진 없어. 며칠 잠복도 해봤는데, 최근에는 또 발길을 끊은 것 같고.”
“이상하네. 무슨 능력자이길래 나이트를 쏘다니는 거지?”
“그것까진 아직 모르겠어.”
“근데 그거랑 국성대 축제랑 무슨 관곈데?”
미호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놈의 흔적이 발견된 곳을 지도에서 점으로 연결해 봤어. 그런데 그 중심지에 국성대가 나오더라고.”
“설마··· 우리랑 가까이 있다는 거야?”
“빙고! 문득 그때 PK단 제보가 떠오르는 거야. 일전에는 놓쳤지만 이번에는 혹시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창범이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다.
“그냥 괜히 나 훼방놓으려고 핑계대는 건 아니지?”
“물론 그것도 있지.”
“에이씨, 진짜.”
“아무튼 최근들어 놈의 흔적이 강해지고 있어. 어쩌면 내가 처음 국성대를 방문했을 때는 하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아!”
PK단은 플레이어를 추적할 수 있는 특수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단, 방해전파를 받거나 플레이어의 등급이 낮은 경우엔 발견되지 않는 특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최근들어 중수 이상으로 승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네? 그러다 미호 너에게 마침내 꼬리를 잡힌 거고?”
“현재까진 그게 내 추측이야.”
“흐음.”
창범의 표정이 모처럼 진지하게 변했다. 미호는 다중인격때문에 평소에도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결코 허튼소리를 내뱉은 적이 없었다.
특히 구미호라는 종특 때문에 탐지 장비만으로는 잡히지 않는 플레이어의 독특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인외의 존재임에도 PK단에 포섭된 이유기도 했다.
“근데 대장도 없는데 우리끼리 놈을 찾는 게 올바른 생각일까?”
“그게 어때서?”
“탱커가 없잖아. 난 정신조작 능력자고, 미호 넌 법술사고.”
“잘 모르나 본데, 내 본신의 신체능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
“대학 축제 현장에서 변신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로?”
“암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하면 건이도 있잖아. 염동술사.”
“건이는 PC방 봐야하잖아.”
“지금 그게 중요해?”
“대장에겐 중요할 걸.”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하고 있어?”
“아무튼 그게 아니라 상대가 만약 예상보다 뛰어난 능력자일경우 우리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땐 그냥 탐문만 하고 오면 되지. 굳이 이목도 많은 축제 한복판에서 전투를 벌일 순 없으니까.”
“흐음.”
창범은 고민에 빠졌다. 대근이 없는 상황에서 임시 지부장을 맡은 그에겐 쉽게 결정내리기 힘든 문제였다.
‘대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추적을 해보는 게 맞는 건가? 근데 소연이가 옆에 있는데 전투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소연은 평범한 민간인. PK단과 플레이어의 싸움이 벌어지면 그 여파가 엄청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현재의 멤버구성으론 상대의 공격을 막아낼 탱커가 부재했다.
“일단 대장에게 한 번 전화로 물어보고 결정하자. 우리끼리 논의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 것 같아.”
“쫄보 자식. 그 정도 결단력도 없는 거야?”
“도발하지말지? 능력이 부족해서 못 싸우는 게 아니잖아.”
“하여간 너희들도 참 꽉 막혔다니까? 뭔놈의 제약이 그렇게 많은지. 혹시 딸딸이 칠때도 상부에 허락맡고 치니?”
“에이씨, 진짜!”
“히히. 난 너 화낼때가 제일 귀엽더라?”
“아까부터 왜 그런 장난치는 건데? 발정기야?”
“으응, 약간은 그런것 같기도···.”
“뭐? 진짜?”
“알지? 나 반인반수인거. 동물은 인간처럼 발정을 조절하기 힘들어. 땡기면 막 그냥···.”
“워워. 가까이 오지마. 나 능력 개방한다.”
“질투나. 내가 그렇게 꼬셨는데 결국 선택한게 소연이야? 내가 소연이보다 뭐가 못해?”
“농담하지마. 할망구를 좋아할 남자는 아무도 없다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내 피부가 얼마나 탱탱한지 보여줘?”
미호가 갑자기 상의를 들추더니 배꼽을 노출했다. 잘록한 허리가 놀랍도록 섹시했다.
“미, 미친. 옷 안 내려?”
“후훗-. 귀엽긴. 그때 일본 출장 갔을 때 확 덮쳤어야 했는데.”
“그만 좀 해. 난 대장한테 전화하고 올테니까.”
창범이 나가려고 하자 미호가 그를 붙잡았다.
“야.”
“왜 또?”
“담배 한 대만 더 주고 가.”
“아이씨, 너 다 해.”
창범은 남은 담배갑을 그대로 미호에게 던지고는 도망치듯 흡연실을 빠져나갔다.
“쯧쯧. 사내놈이 저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내일 데이트도 보나마나네.”
미호는 혼자 담배를 꼬나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진짜 발정기인가···. 생기는 충분히 흡수했는데 어째 계속 남자가 당기지. 이러다 남의 대학 축제가서 사고 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