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0. 대학 축제-55-
* * *
서현과 헤어진 도훈은 집으로 돌아가 축제 스케줄을 정리했다.
체육과 주점도 주점이지만, 미스&미스터 선발대회까지 겹쳐 있으니 일정을 잘 조율해야 했다.
책상 앞에 앉은 도훈은, 자신이 이사와 처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헐. 주문만 해놓고 오늘 처음 앉아보네.’
[비싼 책상 주문하셔놓고 인테리어 용품으로 쓰시긴 했죠.]
도훈은 이사올 때 가전 및 가구를 싹 새롭게 구비했다. 책상도 그때 맞춘 것으로, 널찍한 원목 책상에 100만원을 호가하는 최고 급 의자까지 세트로 주문했다.
애초 이곳으로 이사 오게 된 계기가 원룸에 있던 책상을 실수(?
)로 부러뜨려서라는 걸 떠올리자 도훈은 어이가 없었다.
‘책상 핑계로 이사했는데, 한 번도 이용 안 했네. 나도 참···.’
[사실 주인님이 최근 들어 공부를 등한시 하긴 했죠.]
‘뭔 소리야? 어차피 집에서 공부한적도 거의 없는데.’
[도서관에도 발길을 끊으신지 꽤 되셨습니다만?]
‘바빴잖아. 여러모로. 게다가 2학기는 행사도 많고, 학회장 감투까지 쓰는 바람에 도통 시간이 나야 말이지.’
[그럼 이번 학기 단대 수석은 포기하시는 겁니까?]
‘아니? 당연히 타이틀 방어 해야지. 서현이에게 존경받는 선배가 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예습복습을 너무 게을리 하고 계신것 같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주인님이 1학기때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었죠.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요.]
‘알지. 그래서 이번에도 열심히 할 생각이야.’
[축제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중간고사라는 건 아십니까?]
‘그것도 알고 있어.’
[현실적으로 공부할 시간 자체가 부족해 보이는데요.]
‘나도 처음엔 좀 불안했거든. 근데 생각해보니까, 포인트를 사용하면 간단히 해결되겠더라고.’
[설마 치팅으로 천상계 아이템을 이용하시려는? 그건 주인님 소신에 위배되는데요?]
‘아닌데?’
[그럼요?]
‘시간과 정신의 방이 있잖아.’
[네?]
‘나에겐 시간을 무한대에 가깝게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설마 가상현실을!]
‘그렇지. 시험 전날 그곳에서 날새서 공부하면 1시간만 공부해도 100시간을 공부한 효과를 낼 수 있어.’
[이럴수가···. 가상현실을 개인 도서관으로 이용하실 생각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면 그게 더 효율적이지. 중간중간 예습복습하려면 시간도 많이 잡아 먹는데, 시험 전날 벼락치기로 가상공간에서 공부하면 연속으로 쭉 볼 수 있으니까.’
[벼락치기이되 벼락치기가 아닌 셈이군요.]
‘그래서 포인트만 열심히 모으면 되겠다는 뜻이야. 100포인트에 가상현실 한시간이니까 넉넉하게 만포인트 정도만 확보해 놓으면 충분할 것 같아. 이미 그 이상은 벌어놓기도 했고.’
[대단하십니다. 역시 주인님 창의력은···.]
‘어쨌든 그건 그거고. 남은 스케줄이나 정리해 보자고.’
도훈은 교정을 거닐다 우연히 총학생회로부터 받은 팜플릿을 꺼내들었다. <국성제>라고 커다랗게 적힌 글귀 밑에는 축제 기간과 각종 부대행사, 그리고 초청가수등의 정보가 적혀있었다.
[국성제가 축제 이름인가 보군요.]
‘응, 다음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간. 주점도 그래서 3일 내내 돌릴 예정이야.’
[후배들이 많이 바쁘겠는데요?]
‘뭐, 첫날은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으니 일찍부터 서둘러야 겠지. 하지만 하루 정도 적응되고 나면 해질 무렵쯤 준비해도 충분할 거야. 세팅만 끝나면 쭉 놔두면 되니까.’
[부대행사에 주인님이 출전하시는 미스&미스터 국성 콘테스트가 나와있습니다.]
‘내일이 예선이고, 화요일 오후가 본선이군. 아마 내일 지원자 상당수를 걸러내고 나면, 본선은 중앙 광장 무대위에서 진행되나 봐.’
[그때가 진짜군요.]
‘그렇지. 그나저나 올해 초청가수는 누가 오려나?’ 초청가수 공연은 3일간 내리 예정되어 있었다. 보통은 ‘국성 가요제’가 열리는 마지막 날이 하이라이트기 때문에 제일 몸값이 높은 가수를, 그 외의 날은 한물 간 옛 가수나 신인 가수 등을 올리는 게 정석이었다.
가수의 이름을 살피던 도훈은 우연히 둘째 날 오는 걸그룹을 확인하더니 움찔 놀라고 말았다.
‘어? 얘네들···.’
[헉, 그때 만나셨던 걸그룹 멤버 아닙니까?]
‘에이, 설마?’
걸그룹 명 자체가 생소했지만, 멤버로 표시된 이름이 너무나 익숙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훈은 구글링으로 멤버 사진을 확인하고는 충격에 빠졌다.
‘헉! 진짜로 걔네들이잖아?’
[세상에!]
‘걸프랜즈’라는 신생 그룹.
아마도 데뷔하면서 그룹명을 바꾼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속해있는 멤버는 과거 도훈이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미소, 린다, 제희, 링링···. 헐. 씨발 좆됐다.’
[최악이군요. 하필 국성대 축제에 초청가수로 올 줄이야.]
‘일단 최대한 피해다녀야겠네. 거기 멤버들 다 따먹고 튀었는데 축제에서 날 알아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몸 사리실 사람들이 더 늘었군요.]
‘더 늘다니?’
[왜 교대 다니는 하린양도 친구들과 함께 놀러 오기로 했잖습니까? 손은주 교수도 그렇고요. 아, 주인님이 직접 분양하신 영철군의 여자친구 채원양도 있군요.]
‘으악!’
도훈은 그제야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의 인연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더구나 캠퍼스 안이다 보니 팔선녀를 비롯하여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만났던 타과 학생들까지 사방에 포진된 상황. 만에 하나 도훈을 두고 쟁탈전이 벌어졌다간 온 몸이 108조각으로 찢길 판이었다.
‘아···. 내가 왜 그랬지? 아무 생각없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말았구나.’
[후회는 언제나 뒤늦은 법이죠.]
‘이게 지금 남일 보듯 촌평할 때야? 까딱하면 충돌경보가 사방에서 울릴판이라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도훈은 최악의 사태를 상상했다. 도훈이 그 간 스쳐간 여자들 중에는 섹파사이임을 인정하고 쿨하게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개중 일부는 먹튀를 당하거나 혹은 앙심을 품고 있기도 했다.
특히 현재 영철과 사귀고 있는 채원은 완벽히 손절을 당했음에도 굳이 자신을 보러 오겠다는 걸 보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안 되겠다. 주막은 그냥 포기다. 정음이랑 서현이에게 주막을 맡기고 잠적해야겠어.’
[회장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일을 벌였으면 책임을 져야죠. 다들 주인님만 바라보고 있을 텐데요.]
‘나더러 어쩌라고? 좃될게 뻔한데 휘발유통 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라는 거야, 지금?’
[그걸 왜 저한테 따지십니까? 다 주인님이 벌인 행동의 결과인데요.]
도훈은 애꿎은 로시에게 화냈다는 생각에 잠시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확실한 건 이번 축제를 핑계로 자신을 만나러 오는 여자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 그 중 일부는 도훈의 여성편력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흐음···. 개별로 만나는 것은 어떤식으로든 가능해. 적당히 둘러대면서 얼렁뚱땅 넘기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다른 여자랑 같이 있을 때 또 다른 여자들과 부딪히는 경우야.’
[어장충돌 말이군요.]
‘음···. 정 안되면 정체불명의 모자로 분장을··· 어? 잠깐만.’
도훈이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로시에게 물었다.
‘나 축제기간에 코스프레 하기로 했었지?’
[네. 스파르타 전사로요.]
‘혹시 그때 외형을 살짝 바꿀수도 있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얼굴에 수염 같은 걸 붙이고, 분장 빡세게 하면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냐는 거야.’
[오···. 시도해 볼만한 방법같긴 합니다.]
‘그 상태로 필요하면 원래 모습으로 변신해서 만나고, 숨을 때면 다시 스파르타로 변신하고 말이지.’
[그러면 충돌은 최소한으로 예방할 수 있겠군요. 얼굴을 못 알아보게 분장을 해도 코스프레 핑계를 대면 이해할 테고요.]
‘좋네. 코스프레 한다고 하길 정말 잘했어.’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도훈은,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곧바로 코스프레를 준비했다.
‘변장 아이템 중에 고대병사 복장도 있을까?’
[아쉽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변장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당장 동묘시장이라도 가서 사와야 하나?
창이랑 방패 모형도 필요한데.’
[아니면 아예 아이템을 직접 구매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이템으로?’
[네. 망토나 창, 방패 같은 아이템은 실제로 마켓에서 판매하는 상품이거든요.]
‘헐, 도검류는 불법 아니었어?’
[전혀요. 주인님이야 현 시스템 상에서 필요한 물품을 주문하시니 그렇지, 타차원의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무기나 방어구류를 주문하는데 마켓을 사용합니다. 당연히 도검류는 취급 품목이죠.]
‘그건 몰랐네. 근데 값이 비싸지 않을까? 아무래도 소모성 아이 템보다는 가격대가 많이 나갈것 같은데···.’
[음, 보통이라면 그렇지만 소품용도라면 폐급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폐급이라니?’
[경매장을 잘 찾아 보시면 재활용품이나 중고품도 취급합니다.
무구류의 경우 업그레이드를 하고 나면 기존에 쓰던 물건들을 헐값에 넘겨 포인트로 바꾸는 경우도 흔하거든요.]
‘오, 그럼 지금 예산으로도 구입 가능하다고?’
[아마도 녹슨 창이나 찢어진 망토, 흠집난 방패 정도는 구입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장 가보자.’
[넵. 경매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 * *
간만에 경매장에 들른 도훈은 속칭 <무기고>라고 불리는 장소로 이동했다. 가상 경매장은 물품의 종류에 따라 독특한 특징이 있었는데, 가령 일전에 백보신권을 구매했던 곳은 고서점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무기고는 이와달리 거대한 회랑의 벽면에 각종 무기들이 끝없이 진열된 형태였다. 도훈은 마치 중세시대의 성을 방문한 듯한 디테일에 새삼 놀랐다.
“대단하네. 회랑이 어디서 끝나는지도 모르겠어.”
“실질적으로 무제한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등록된 물품의 가짓수가 많거든요.”
가상현실에서 깜찍한 요정으로 변신한 로시가 도훈의 머리 주변을 맴돌며 말했다.
“그럼 하나하나 다 둘러보면서 찾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진 않습니다. 이곳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가상 그래픽으로 구현된 공간이니까요. 주인님이 원하는 물품을 찾으시면 회랑이 스스로 움직일 겁니다.”
“그럼 방패부터 보자.”
“방패 창고로 이동하겠습니다. 살짝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로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좌우의 벽면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에스컬레이터가 반대로 설치된 것처럼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달려가자 도훈은 순간적으로 어지러움을 느꼈다.
“우욱, 뭐야 이건.”
도훈이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건 벽면의 이동 속도였다.
KTX보다 10배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잔상만 남기고 휙휙배경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관성의 법칙마저 무시하는 것처럼 배경이 딱 멈추었다.
“도착했습니다.”
“어우씨, 토할 뻔 했네.”
도훈은 겨우 균형감을 회복하더니 회랑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중세 성처럼 보이는 회색의 벽면에 다양한 형태의 방패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사각형, 육각형, 라운드형··· 각종 문양과 오색찬란한 도장이 칠해진 방패들은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어떤 것은 은은하게 푸른색의 오라를 품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오한이 돋을 것 같은 한기가 밀려왔다.
“여기 있는 건 엄청 비싸보이는데?”
“최고급 아이템을 전시한 곳입니다. 폐급은 저 끝에 있습니다.”
“말을 해도 폐급이 뭐야. 중고품이라고 해줘.”
“그게 그거죠.”
한참 안으로 들어가자 점점 방패의 품질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정말로 방패 창고의 끝에 왔을 때는 나무등으로 만든 싸구려 방패가 눈에 띄었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것도 있고, 심지어 화살이 몇발 박힌 것도 있었다. 도훈은 가격대를 살펴보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폐급도 이렇게 비싸면 견적이 안나오겠는데?”
“일부 훼손이 있더라도 여전히 기능을 발휘하는 아이템이라 그렇습니다. 얼마나 싼 걸 원하시는 건가요?”
“음···. 2000포인트 내외로는 없으려나?”
“음, 그정도 까지 낮추신다면···.”
다시 배경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커다랗고 둥근 형태의 방패가 나타났다. 겉면은 구리처럼 황동색을 띄고 있었으며, 군데군데 상처가 난 것이 상당히 오랜 세월을 구른 물건처럼 보였다.
“이게 딱이네. 이건 얼마야?”
“1500포인트입니다. 설명을 띄워드리겠습니다.”
-쓰다버린 라운드 쉴드.
고블린 전사로부터 얻은 전리품입니다. 무겁고 부실합니다.
“쓰다버린 거라고?”
“이름은 중요치 않습니다. 가격이 중요하죠.”
“무겁고 부실하다잖아.”
“그럼 1500포인트로 살 수 있는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래도 인간 장인이 만든 것보단 내구성은 좋은 편입니다.”
“아씨···. 진짜 포인트 없는게 죄네.”
도훈이 벽에 걸린 방패를 들어 왼손에 착용해 보았다.
묵직함이 느껴졌으나 근력이 강화된 그에게는 크게 무리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 뭐, 어차피 코스프레용으로 쓰는 거 대충 고르자.”
이어서 무기창고로 이동한 도훈은 <허름하고 녹슨 창>을 2000포인트에 구매한 뒤 마지막으로 <낡아빠진 붉은 망토>를 1300포인트에 구매했다.
쇼핑을 마치고 다시 현실로 복귀한 도훈은 잠시 후 경매장에서 낙찰된 물건을 인계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