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9. 대학 축제-53-
* * *
섹스가 끝나고 서현이 나에게 물었다.
“오빤 내가 교사보다 교육행정직에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응?”
“아니···. 아까 오빠가 차에서 해준 말이 생각나서요.”
서현은 제법 진지한 표정이었다.
“음, 물론 교사를 해도 잘 하겠지만, 체육 교사보다는 그쪽이 너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가···.”
서현은 사실 체육교육과 학생 치곤 운동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보다 조금 나은 정도랄까? 태권도 국대까지 준비했던 정음이나 현역 대학 테니스 선수인 경희에 비하면 실기 능력은 한참 부족했다.
실은 예전부터 생각한 것인데, 서현이 어째서 우리과에 왔는지 의문이었다. 입시 성적으로만 봐선 국영수같은 주지 교과로 갔어도 충분히 합격할 점수였으니까.
“실은 공부가 너무 싫었어요.”
서현이 간만에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때부터 영재반에 들어간 것과 중고등학교 때 내신으로 날렸던 과거 이야기였다.
“수능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수학 문제를 풀고 있을 때였나? 그날따라 너무 제가 한심해 보이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건 이게 아닌데···. 왜 하고 싶지 않은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수험생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다들 재밌어서 하는 건 아닐 거야.”
“생각대로 수능은 괜찮게 봤어요. 부모님은 여자 직업으론 선생만한게 없다면서 사범대를 가라고 하더라고요. 임용 합격률이 높은 국어나 영어, 수학 쪽으로 지원해 보라고.”
“그런데 왜 우리과로 온 거야?”
“수능 공부를 하면서 너무너무 질렸거든요. 졸업하고는 두 번 다시 책을 안 보고 싶어서 수능 끝나는 날 동네 놀이터에서 교과서랑 참고서를 다 불태워 버렸어요.”
“저런.”
“하지만 부모님께선 사범대에 가지 않으면 저를 집에서 쫓아내신다고 엄포를 놓으시더라고요. 학원보내고 과외도 시켜가면서 열심히 공부시켜 놨더니, 이제와서 딴 소리냐면서. 그래서 절충한 게 저희과예요.”
“아···.”
“사범대긴 하지만, 적어도 국영수는 다신 안해도 될 것 같아서요. 쫓겨나지 않기 위해 나름의 타협안을 제시한거요.”
“그랬구나. 어쩐지···.”
“사실 지금도 미래를 생각하면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뿌옇게만 보여요.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르겠고, 체육교육과를 온 게 잘 한 선택이었나도 싶고.”
모처럼 진지해진 서현에게 인생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
“네 고민은 어쩌면 당연한 거야.”
“정말요?”
“물론이지. 학창시절 12년 동안 공부만 해오던 사람이, 스무살이 되었다고 갑자기 평생의 직업을 고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게 정상이지.”
“아···.”
“어떤 사람은 일찍 자기 갈 길을 찾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더 늦게 길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어. 예전에 책에서 읽은 글귀에 이런 게 적혀있더라고.”
“뭔데요?”
“목표를 알기 전까지 한 걸음도 나아간게 아니다.”
“아···.”
“서현이 너는 지금 목표를 찾는 과정이야. 그러니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얼마든지 고민해도 돼. 결국 살다보면 어떻게든 먹고 살게 되있더라고.”
“오빠는 무슨···. 인생 2회차 같은 말을 하세요?”
순간 뜨끔했지만, 어쨌든 내 조언을 들은 서현은 조금은 얼굴 표정이 밝아보였다.
“오빠 참 신기한 거 알아요?”
“뭐?”
“어쩔때보면 여자만 밝히는 바람둥이 같다가도, 또 이럴 때는 너무 어른스럽고 진지한 사람 같아요. 정말로 인생 2회차는 아니죠?”
“그냥 책을 많이 읽어서 그래. 군대에서.”
“그렇구나. 아무튼 고마워요. 오빠 덕분에 머릿속이 명쾌해진 것 같아요.”
“정말?”
“네. 제가 원하는 걸 정했거든요.”
“벌써?”
“이제부턴 오빠가 원하는 사람이 될게요.”
“으잉? 난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저도 교사가 안 맞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어요. 특히 체육교 사 쪽은 더더욱요. 근데 오빠 말 들어보니까, 어쩌면 제 적성이 그쪽으로 더 어울릴것 같기도 해요.”
“분명 잘 할 거야. 장담할 수 있어.”
“도전해 볼게요. 교육 행정직.”
“임용보다 어려울 수도 있는 건 알고 있지?”
“당연하죠. 그래도 제가 만약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오빠에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으음···. 교사보다야 더 대단하긴 하겠지. 20대에 5급 공무원이면.”
[진심이십니까? 서현양은 정말로 도전할 각온데요?]
‘서현이가 잘되면 본인에게도 좋은 일이지.’
[하지만 도전하려는 이유가, 주인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는 이유가 마음에 걸립니다.]
‘동기야 어찌됐건 결과만 좋으면 되는 일이야. 최소한 그 도전이 서현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거참···. 주인님도 안그런것 같으면서 8선녀 한명 한명을 알뜰하게 챙기시는 군요.]
‘난 나와 인연을 맺은 여자들이, 단순한 섹스파트너로 즐기고 끝나기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중에 서로 헤어지더라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테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먹고 버린 여자분들이 더 많지 않습니까?]
‘만났던 모든 여자들의 인생을 다 책임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거야.’
[주인님 생각이 그러시다면요.]
옆에 나란히 누워있던 서현이 도훈의 입술에 쪽- 키스했다.
“고마워요. 오빠같은 사람이 제 옆에 있다는 건 정말로 큰 행운이예요.”
“나야말로. 너처럼 똘똘한 후배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서현에 대한 보상은 깔끔하게 끝이 났다.
아마도 그녀는 앞으로도 나를 위해 충성을 다하게 될 것이다.
* * *
주말이라 그런지 PC방엔 손님이 북적거렸다.
저녁즈음하여 어슬렁거리며 등장한 창범은 카운터를 보고 있는 소연에게 물었다.
“쟤들 아직도 안 갔어?”
“누구요?”
“무슨 대회 나간다던 대학생들. 주말 내내 아주 죽치고 사는데?”
“저희야 매상 올리고 좋죠, 뭐.”
소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데 창범이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간만에 또래 남자애들 보니까 기분이가 좋아?”
“뭐래요? 오빠 설마 질투하는 거?”
소연이 대번에 핵심을 찌르자 창범이 답변을 회피하며 얼버무렸다.
“무,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라 어제 담배 피우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흡연실에서 니 얘기 하더라고.”
“뭐라고요?”
“그냥 뭐···. 여자 알바생이 예쁘니, 대시를 해보라느니···.”
“풉-. 질투하는 거 맞네. 다른 남자가 저한테 찝쩍거리면 혹시 막 화나고 그래요?”
소연은 평소에도 어리버리한 창범을 자주 골렸기 때문에 이번에도 장난스럽게 물었다. 예전보다 많이 친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소연은 창범을 그냥 편한 삼촌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진심을 들키자 창범이 버럭 화를 냈다.
“뭐, 뭐래! 그냥 질 나쁜 애들 같아서 조심하라고 경고해주는 거지.”
“나쁜 애들 같진 않던데? 애들 엄청 착하더라고요. 주문할때도 되게 공손하고. 양아치같은 애들 아니였어요.”
“어쭈. 그새 친해졌냐?”
“음···. 실은···.”
소연이 카운터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더니 창범을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창범이 귓속말을 듣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데 소연의 얼굴에서 나는 화장품 향기가 훅하고 코를 찔렀다.
“실은 어제 저기 있는 남학생 중 하나가요···.”
소연이 귓가 바로 옆에서 귓속말로 속삭이는데 창범은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낯이 부끄럽고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글쎄, 저보고 국성대 축제 주점하는데 놀러오라는 거 있죠?”
“뭐?”
“쉿-. 목소리 낮춰요. 일부러 몰래 말하고 있는데.”
“그래서? 뭐라고 했어?”
“그냥 뭐···. 심심하던차에 잘 됐다 싶어서 가겠다고 했어요.
다른 대학 축제도 은근히 재밌거든요. 초대 가수도 구경할 겸.”
“음···.”
소연의 말을 들은 창범의 표정이 심란했다.
가지 말라고 말릴수도 없고, 그냥 보내자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근데···. 누군지도 모르면서 술자리에 따라 간다고?”
“아니, 그게 아니고 자기네 과에서 주점을 한다고 놀러 오라는 거예요.”
“주점? 학생들이 학교에서 술도 팔아?”
“왜 그래요, 촌스럽게? 오빠 대학 안 나왔어요?”
“···어.”
창범은 고졸이었다.
소연도 실언했다고 여겼는지 바로 사과했다.
“아, 미안요. 몰랐어요.”
“상관없어.”
“그러니까 대학에서 축제를 열면 막 초대가수도 부르고 이런저런 행사도 하잖아요. 저 학생들이 다니는 학과에서 주점을 열기로 했다는 거예요.”
“아···. 그냥 술집을 가면 되는 거 아냐?”
“에이, 또 그게 아니죠. 일단 술값도 싸고, 뭔가 낭만이 있잖아요. 야외 잔디밭에서 테이블 펼쳐놓고 막걸리에 파전, 캬.”
“···술 먹고 싶으면 그냥 나한테 사달라고 하지.”
창범이 혼자 구시렁거렸다. 창범이 삐친것 같자 소연도 미안했는지 말했다.
“그럼 오빠도 내일 같이 갈래요?”
“응?”
“대학 축제 말이에요.”
“아, 아니 근데···. 그 학생한테 데이트 신청 받은 거 아니었어?”
“뭐래요? 그게 무슨 데이트 신청이야. 그냥 자기네 주점하는데 술 팔아달라고 홍보한 거지.”
소연은 물론 혁준이 단순히 그런 의도로 부른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창범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솔직히 혁준의 용기가 가상해서 가겠다고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뭐···. 창범 오빠랑 같이 가면 알아서 거절의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술이나 많이 팔아주면 되지.’
“근데···. 우리 둘 다 빠지면 가게는 어떻게 하고? 너네 사장도 인천으로 장기 출장갔잖아.”
“야간 알바한테 좀만 일찍 봐달라고 부탁해보려고요.”
“건이?”
“네. 아니 솔직히 부탁도 아니죠. 사장님 빠진 시간을 오빠가 자원봉사로 메꾸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현재 대근은 인천지부의 협조요청으로 한동안 자릴 비운 상태.
임시로 지부장 대리를 맡고 있는 창범으로서는, 대근이 부재중인 상황에서 소연과 대학 축제에 놀러가도 될지 굉장히 망설여졌다.
‘아씨, 설마 하루 사이에 무슨 사건이 터질라고···. 미호도 있는데.’
그러나 모처럼 소연과 단 둘이 데이트할 기회를 거절하면 너무나 후회될 것 같았다. 심지어 자신이 축제에 같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소연의 성격상 자신에게 대시한 그 학생과 술을 마실게 뻔했기 때문이다.
‘안 돼. 그 꼴은 차마 볼 수가 없지.’
“가, 갈게.”
“엇? 정말요?”
“뭐, 나도 대학이란 곳 구경좀 해보자.”
“히히, 신난다. 혼자 가야 되면 갈지 말지 망설였는데. 그럼 아까 약속 지켜요?”
소연이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면서 말했다.
“무슨 약속?”
“술먹고 싶으면 사달라고 하라면서요? 내가 못 들은 줄 알았어요?”
“아, 아니 그건··· 아 놔, 진짜.”
“히히 공짜술 나이스!”
소연이 싱글벙글 웃더니 자리를 정리하러 갔다.
창범은 소연에게 속은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동시에 그녀와 간만에 단 둘이 데이트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미호한테 미리 연락해 놔야겠다.”
창범은 흡연실로 가 곧바로 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싹퉁머리?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걸걸했다.
“···두나? 혹시 미호 바꿔줄 수 있어?”
-간만에 몸 차지했는데 니가 뭔데 바꿔달래?
“아니 중요한 얘기가···.”
-근데 이 자식이 나를 언제봤다고 반말을··· 으, 으으! 안된다고! 으으으!
갑자기 혼자서 괴상한 소리를 내뱉던 미호가 잠시 후 목소리를 바꾸어 통화를 이었다.
-무슨 일인데, 창범? 플레이어 떴어?
“미호?”
-어. 나야. 할 말있어서 전화했다며?
“대관절 내가 누구랑 통화하는 지 모르겠네. 다른 인격은 재워 놓을 순 없는 거야?”
-잔말 말고 할 말이나 해. 나도 겨우 몸 차지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창범이 사정을 설명하자 미호가 흥미로운 듯 물었다.
-뭐야? 니들 그럼 데이트야?
“아, 아니 데이트가 아니라···. 그냥 대학 축제 구경간다고.”
-그게 데이트지. 와, 우리 창범이 많이 컸네? 여자 알바생도 꼬시고? 걔가 그렇게 좋아?
“자꾸 헛소리 할래?”
-흠, 아무튼 지부장이 부재중이니 나보고 대타를 서라는 거지?
“그래도 한 명은 자릴 지켜야지.”
-왜? 건이 있잖아. 염동술사.
“아직 초보야. 상황 터지면 대처 안 돼.”
-무슨 상황이 터져. 대장 출장가고도 보름 째 조용하구만.
“상급기관에서 불시 연락 올 수도 있단 말이야.”
-걱정도 팔자네. 쫄지마 이 사람아. 잠깐 자리비운다고 뭔 일나겠어? 이 생활 하루 이틀 하나···. 쯧쯧.
“와 줄 거야 말 거야?”
-갈게.
“정말?”
-아니 너네 데이트 방해하러.
“뭐, 뭐라는 거야?”
-나도 싱싱한 대학생들 보자. 요새 클럽 수질이 안 좋아져서 영계 맛 좀 보고 싶다고.
“이 할망구가 미쳤나!”
-뭐래? 그럼 너희들은 콧바람 쐬고 난 답답한 PC방이나 지키라고? 장난해?
“아씨, 괜히 연락했네. 됐어. 오지마.”
-간다니까? 국성대라고? 주점은 어디라고?
“몰라!”
뚝-
창범은 전화를 끊고 담배를 연거푸 몰아 피웠다.
“아씨, 미호한테 연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