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6. 대학 축제-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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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이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다니는 동안 체육과 1학년 집행부들은 이번주 내내 분주하게 움직였다. 축제 주점이라는 것이 보기엔 쉬워보여도, 장사를 해본적이 없는 대학생들에겐 상당히 버거운 프로젝트였다.
1학년 과대 정음을 필두로 열정적인 집행부들은 스스로 시간과 노력을 희생해가며 하나씩 차근히 준비를 마쳤다.
정음이 집행부의 간판이라면, 실질적인 브레인은 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수석입학자답게 뛰어난 두뇌와 꼼꼼한 기획력으로 각각의 학생들의 특성에 맞춰 여러 일들을 해치워나갔다.
그리고 주점이 열리기 하루 전인 일요일 오후, 마침내 모든 준비가 완료될 수 있었다.
약속시간이 되어 도훈이 체육과 학과실에 입장했을 땐, 진즉부터 팔선녀를 위시한 1학년 남학생들 여럿이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라? 다들 벌써 와 있었어?”
정시에 왔음에도 지각을 한 것처럼 뻘쭘해준 도훈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었다. 나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서현이가 약속시간 공지를 30분 일찍 했지 뭐예요? 회장님보다 늦으면 안된다면서···.”
“이런, 나 때문에 괜히 기다렸구나.”
“아니에요. 그렇게 해도 늦는 애들은 늦더라고요.”
서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연과 연두 두 사람을 째려보았다.
“그리고 저희끼리 미리 체크할 것도 있기도 했고요.”
“그래. 니들이 고생이 많네.”
“일단 회장님은 거기 앉으세요.”
“응?”
체육과 학과실엔 나무 테이블이 중앙에 있었는데 좌우로 10명이 둘러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사이즈였다. 그곳은 정 가운데 지난해 교수 한 분이 퇴임하면서 기증하고 간 값비싼 중역의자 하나가 준비되어있었다.
“이렇게 까지 안 해도 되는데···.”
도훈은 자신을 극진히 챙기는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축제 준비를 1학년 집행부에게 모두 떠맡기다시피 해놓고, 그 간 개인적인 용무를 처리하고 다닌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주인님도 낯짝은 있으시군요.]
‘당연하지. 명색이 회장인데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꼴이니.’
“아니에요. 지금부터 전체 브리핑 하려고요. 그럼···.”
서현이 사인을 보내자 전등스위치 옆에 대기하고 있던 남학생한명이 조명을 껐다. 학과실에는 대낮임에도 커튼이 쳐져 있었기에 불을 끄자마자 컴컴해졌다.
“무슨···.”
도훈이 의아해 하는데 갑자기 테이블 중앙에 있던 조그만 기계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휴대용 빔프로젝터였다.
도훈이 앉은 자리 맞은편 쪽에 스크린이 설치되더니 빔프로젝터 위에 프리젠테이션이 떠올랐다.
섬세하게 신경쓴 표지 디자인에는 <체육과 일일주점 프로젝트>
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띄워졌다.
“와, 너희들 진짜···.”
이 모든 것이 서현의 작품이겠거니 생각한 도훈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일주일동안 축제 준비를 한 것도 모자라, 도훈을 위한 최종 브리핑까지 계획했던 것이다.
말끔한 블라우스를 입은 서현이 스크린 앞에 나서며 레이저 포인트에 불을 켰다.
“그럼, 체육과 일일주점에 관련해 최종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아영이 핸드폰을 조작하면서 화면을 슬라이딩했다.
“우선, 준비 상태입니다. 저희과 주점자리로 지정된 장소는···
.”
서현이 똑부러지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아마도 이전에 수십차례 예행연습을 거친 듯, 막힘없이 술술 설명이 이어졌다. 후배들의 극진한 예우로 중역(?) 의자에 앉게 된 도훈은 깊은 감명을 받으며 서현의 브리핑을 새겨 들었다.
[와, 서현양이 정말 준비를 철저히 했군요.]
‘완벽해. 흠잡을 데가 없는 기획력이야. 사전 준비부터, 역할 분담, 그리고 최종 점검까지. 똘똘한 줄은 알았지만, 일머리가 더 빼어난 타입이었군.’
[일머리라뇨?]
‘왜, 나 전생에 대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잖아. 거기도 국내외 유수의 석박사들을 모아놓은 곳이었거든.’
[그랬죠.]
‘근데 머리 똑똑한 거랑 일머리는 또 전혀 다르더라고. S대 출신이라고 우쭈쭈하던 놈은 맨날 상사한테 깨지고, 비록 지방대를 나왔지만 매사 성실하고 열심히 하던 녀석이 끝내 승진하고. 그때 깨달았거든. 머리가 좋아도 일을 이끌어가는 추진력은 전혀 다른 재능이라는 걸.’
[호오, 그랬군요.]
‘서현은 내가 볼때 교사가 아니라 대기업에 입사해야 할 인재야. 아까운 재능이군.’
[제가 봐도 대단합니다. 또래들을 가볍게 압도하는 수준이랄까요? 지금보니 브리핑도 엄청 깔끔하네요.]
‘포인트를 잘 짚고 있어. 자칫 지루하게 설명만 늘어놓는 프리 젠테이션도 엄청 많거든. 근데 설명은 간략히, 사진과 그림등을 이용해서 적절하게 축약하면서 스피드를 살렸어. 엄청 성장했는데?’
[그러고보니 1학기 때 조모임 할 적엔 발표엔 자신없다고 PPT만 만들지 않았던가요?]
‘그러니까. 한 학기 대학 수업 들으면서 혼자 저만큼 성장한 거야. 막상 해보니까 별거 아닌 걸 깨달은 거지. 아니면 그만큼 준비를 철저히 했던지.’
[대단하네요. 자주 못 보던 사이 정말로 능력있는 학생으로 발전했군요.]
‘서현이가 참 수고했어. 정음이는 열심히는 하는데 약간 맹한 구석이 있어서 일처리가 빠릿빠릿하지 못하거든. 아마도 서현이 거의 혼자서 다 감당했을 거야.’
[아낌없이 칭찬해 주셔야 겠네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여기까지가 현재까지 진척상황입니다. 혹시 궁금한 점 있으시면 질문해 주세요.”
깔끔하게 브리핑을 끝마친 서현을 향해 학생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우아! 최고다 박서현!”
“저건 또 언제 준비했대? 대단한데?”
“너무 완벽하셔서 질문할게 없습니다!”
학생들은 대 만족이었다. 단순히 주먹구구로 설명하는 것보다, 계획을 세운 진행자가 PPT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브리핑을 해주자 축제 당일의 상황이 모두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다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서현도 방긋 웃으며 도훈에게 물었다.
“회장님은 질문 없으세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어. 완벽히 이해가 된 것 같아.”
“감사합니다.”
“근데 개인적으로 궁금한게···.”
“네. 말씀하세요.”
“맥주 할인 쿠폰 말인데, 이건 총 몇장이 얼마나 뿌려진 거야?
이에 따른 홍보효과는?”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과거 직장생활을 할 때처럼 질문을 던졌다. 이는 부족한 점을 추궁하며 질책하는 게 아닌, 순수하게 궁금한 점을 해소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서현이 능숙하게 질문을 받았다.
“프린트해서 도장 찍어 나간 쿠폰이 모두 300장입니다. 홍보는 나연이랑 연두가 맡았는데···.”
서현이 자연스럽게 바통을 넘기자 연두가 일어나서 대답했다.
“1학년 동기들한테 한 사람당 10장씩, 그리고 2, 3학년 선배님들에게도 한 사람당 5장씩 할당했어요. 전부다 뿌려졌다고 한다면 300장의 쿠폰이 모두 소진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또 뭐 물어보셨더라? 아, 홍보효과는 음···.”
연두는 그부분까지는 미처 준비를 못했는지 대답을 머뭇거렸다. 다시 서현이 설명했다.
“만약 쿠폰만 먹고 간다고 했을때는 맥주 한병 원가만큼이니까 2000원씩 손해입니다. 전부 사용될리는 없지만, 300장을 모두 가정하면 60만원이 순적자가 발생합니다.”
“호오.”
“하지만 맥주만 먹는 손님은 없을테니 안주 하나씩만 시켜도 바로 손해를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술을 더 추가하거나 안주를 더 시키면 그때부턴 순익이 남게되고?”
“네, 맞습니다. 아마도 절반 이상은 회수될 것 같습니다.”
도훈은 머릿속으로 개괄적인 그림을 그렸다.
모든 과정은 순조로웠고, 장사를 한번도 안해본 대학생들의 계획치고는 완벽에 가까운 준비였다.
“훌륭하네. 정말 수고했다 얘들아.”
“아니에요, 선배. 학과에 도움이 되었으면 충분합니다.”
“내가 딱히 해줄 건 없고···. 지금쯤 올때가 됐는데···.”
도훈이 슬쩍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그는 인기 많은 상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직장생활로 다져진 노하우였다.
‘말은 적게, 지갑은 넉넉히.’
[네?]
‘밑에 사람들이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면, 회장의 역할은 격려와 응원으로 충분하다는 거지.’
때맞춰 도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음료랑 도넛 시키셨죠? 1층 도착했습니다.
“아, 넵.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금방 내려갈게요.”
통화를 마친 도훈이 고생한 1학년 후배들을 향해 말했다.
“다과로 즐길 간식 좀 시켰어.”
“아앗! 회장님!”
“오빠, 꺄아!”
“역시 우리 회장님이시라니까!”
“형님, 제가 금방 다녀올게요.”
“아니야. 같이 가자.”
도훈은 1학년 후배들과 함께 배달된 간식을 받으러 내려갔다.
혹시 몰라 넉넉하게 시켰기 때문에 6개들이 커피 트레이만 4개, 도넛이 가득 든 박스만 3개였다.
음식을 받은 도훈은 내려온 김에 후배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나 잠깐 담배 한대만 피울게.”
“네. 혹시 회장님 저도···.”
“어. 그래. 편히 피워.”
1학년 남자 후배들에겐 도훈이라는 존재가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에 맞담배도 겨우 허락을 맡는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여자후배들에겐 단순히 잘생긴 학회장 오빠이지만, 남자들에게 도훈은 그야말로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체육을 전공한 남자들 특성상, 자연스럽게 운동 실력에 따라 서 열이 나뉘는데 도훈은 그중에서도 최상위 포식자에 속했다.
특히 여름 캠프에서 보여준 발군의 배구실력과, 전임 부회장이었던 떡대 박성수를 한판으로 넘겨버린 씨름등, 엄청난 이력을 써내려 오고 있는 체육교육과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소문은 번지면서 점점 와전되기 마련이라, 1학기 때 세운 비공인 100m 기록이 국내 신기록이란 말이 돌 정도였다. 그 뿐인가? 운동도 천재지만, 지난 학기 단대 수석을 차지할 정도의 빼어난 성적으로 주변을 압도했다.
그 와중에 몸도 좋고 성격도 좋고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같은 남자로서 감히 견줄수도 없는 위치였던 것이다.
도훈은 문득 후배들이 자신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근데 1학년 남학생들도 무슨 게임 대회 출전한다지 않았어?”
“아, 네 회장님. 맞습니다.”
“야, 무슨 회장님이야.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호칭을 깍듯이 하던 남자 후배는 도훈의 허락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형. 아마 대회 나가는 애들 지금도 연습중일거예요.”
옆에 있던 다른 후배도 거들었다.
“어디 저렴한 PC방 한군데 눌러 앉아서 주말 내내 연습중이라고 하더라고요.”
“다들 열심이구나.”
“네. 저희과의 명예를 걸고 나가니까요. 태영이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군대를 가버렸으니···.”
도훈은 간만에 태영의 소식을 듣자 궁금해서 물었다.
“태영이는 어떻게 지낸대?”
“지지난주에 자대배치는 끝났고요, 아마 철원인가? 거기로 옮겼다고 들었어요.”
“철원! 어우, 춥겠는데.”
“그래도 일과 시간 이후엔 폰 사용이 돼서 가끔 동기들 모인 채 팅으로 자주 연락와요.”
“여자애들이 지겹다고 그만 하라는데도 맨날 군대썰만 늘어놓고 있더라고요.”
“그랬구나. 잘 지내야 할텐데. 언제 100일 휴가 나오면 한 번 연락하라고 해. 형이 밥 한번 쏜다고. 1학년 남자들도 따로 뭉쳐야지.”
“불러주시면 저희야 영광이죠, 회장님.”
“늘 감사합니다.”
커피 트레이를 손에 쥔 후배 하나가 양손 번쩍 들어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도훈이 흐뭇하게 웃었다.
‘쉽지?’
[네?]
‘대학생들이란 말이야, 참으로 소박하고 순진해서 이렇게 가끔 밥사주고 간식만 사줘도 충성을 다하니까 말이야.’
[돈이 많으신 주인님으로선 정말 손쉬운 방법이긴 하네요. 물론 평소 좋은 평판을 유지하셔서 그런것도 있겠지만요.]
‘그러게. 아무튼 후배들이 정말로 고생 많이했네. 준비하느라 벅찼을 텐데.’
“올라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넵!”
1학년 집행부 및 일부 남학생들은 도훈이 배달시킨 커피와 도넛을 나눠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간 주점을 준비하느라 알게모르게 고생을 많이 했는지, 간식 타임 내내 누가 더 고생했는지를 두고 하소연을 펼쳤다.
축제를 준비하며 보다 끈끈해진 집행부를 보며 도훈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마유미를 이어 학회장을 물려받을 때만 해도 걱정이 앞섰는데, 집행부를 맡은 후배들이 어느 학번들보다 열심히 자신을 따라주었기 때문이었다.
‘난 참 운이 좋은 것 같아. 좋은 후배들을 만났어.’
[다 주인님 공덕이죠. 8선녀 중에 주인님의 성은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영철군은 여자친구까지 소개시켜 주셨고요.]
‘소개라고 하니까 좀 민망하네. 일종의 분양인데.’
[어쨌든요.]
‘그나저나 축제 시작되면 많이 바쁠것 같으니 서현이를 따로 불러 치하해 줘야 할 것 같은데···. 따로 볼 핑계를 만들어야 겠군.’
도훈이 도넛을 한 입 베어 물더니, 대수롭지 않게 서현에게 물었다.
“맞다. 아까 예산 내역 정리한 거 빠르게 지나쳐서 그런데 다시 볼 수 있을까?”
“아, 오빠 핸드폰으로 보내드릴까요?”
“응.”
서현에게 사진 파일을 받은 도훈은 곧바로 답장했다.
-도훈 : 니가 제일 고생 많았다.
앞에서 할 수 있는 얘기를 굳이 따로 폰으로 전송한 것에 눈치를 챈 서현이 남 모르게 답장했다.
-서현 : 1학년 전체가 합심해서 한 일이에요. 저는 그냥 시키기만 했는데요.
-도훈 : 아니야. 딱 보면 알겠던데. 여기서 누가 제일 고생했는지. 그래서 말인데, 회의 끝나고 잠시 따로 시간 좀 낼수 있어?
톡을 받은 서현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나 이내 다른 여자애들의 눈치를 살피고는 짧게 답장을 남겼다.
-서현 : 회장님, 원하시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