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4. 대학 축제-48-
* * *
차우현에게 복수하지 않겠다고 신신당부를 받고 나온 도훈은, 미나와 헤어지자마자 곧바로 최번개를 섭외했다. 흥신소를 운영하는 최번개는 석산파의 방계 조직원으로 도훈과는 여러차례에 걸쳐 인연이 있었다.
-아앗, 형님 오랜만에 전화를 다주시고!
최번개는 신호가 연결되자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쩌면 사후 보상이 후한 도훈을 VIP로 저장해 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 사람 하나만 견적 따줘.”
-얼마든지 가능합죠. 저, 형님 외람되지만 한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뭔데?”
-그 사채왕 박회장 건 말씀인데요. 혹시 형님 작품은 아니시죠?
“···뭐?”
-아, 아닙니다. 최근에 박회장이 화재사고로 사망했는데, 업계에 별의별 헛소문이 돌아서요. 저번에 형님께서 박회장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신 것도 있고 해서···.
최번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정말로 도훈이 이번 일을 벌인 것이면, 혼자서 엄청난 조직을 박살낸 셈이니 절대 함부로 해선 안될 거물이라고 여긴 것과 동시에 흥신소 직원으로서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도훈도 그후의 과정이 궁금해 물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네 입으로 그랬잖아? 화재사고라고?”
-그, 그쵸?
“근데 대체 무슨 소문인데?”
-그게···. 전문 킬러의 소행이라는 말도 있고···. 조직 내부의 배신이라는 말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여러 말이 돌고 있거든요. 근거는 없이.
“내가 무슨 킬러도 아니고···. 그리고 석산파랑 척질 일 있어?
박회장을 직접 건드리게. 그냥 이리저리 얽힌 건 때문에 알아보던 중에 갑자기 박회장이 사망하는 바람에 나도 헛물만 켰다고.”
-그, 그렇군요. 아무튼 남은 조직은 그의 부하인 김씨라는 인물이 수습중이라고 합니다. 재산 대부분은 외동딸인 박지수에게 상속되었고요. 사채업은 접고 이제 부동산에만 집중한다나?
“뭐, 그야 내 알바 아니고.”
-전 혹시나 했습니다. 형님 솜씨인 줄 알고요. 하하!
도훈은 최번개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생각에 입단속을 시킬 필요를 느꼈다. 증거는 남기지 않았지만, 혹시나 여지를 남겨 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에 대해선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내 말, 무슨 말인 줄 알지?”
-다, 당연합죠. 저희 흥신소는 고객의 비밀유지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안 그러면 이런 일 오래하기 힘듭니다.
“좋아. 한 번 믿어보지.”
-근데 이번엔 어느 조직입니까?
“조직 아니고, 그냥 민간인이야.”
-미, 민간인요?
최번개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바로 전까지 상대했던 거대 사채업자 박회장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왜? 혹시 사람도 가려 받나?”
-아, 아닙니다. 실언했습니다. 근데 누굽니까?
“헬스클럽 운영하는 관장이야. 상호랑 이름 바로 알려줄게.”
-네, 말씀 하십쇼.
최번개가 도훈이 말하는 내용을 메모했다.
“하여간 20대 이후로 그 새끼랑 관계된 것 싹 다 털어와. 연인관계, 채무관계, 친구, 가족 뭐든지 간에.”
-스무살 이후 행적 모두요?
“왜? 그 정도 능력 안 돼?”
-아, 아닙니다. 못할 건 없습니다. 다만 시간이 제법 소요됩니다. 거물급에 대한 정보는 이전부터 쌓은 데이터베이스가 있지만, 상대가 민간인이라면 탐문해 들어가야할 요소가 많아서요. 한마디로 발품을 좀 팔아야 합니다.
“오케이. 일주일 주지.”
-이, 일주일이면···. 크흠.
최번개는 그것도 촉박한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착수금으로 천, 성공보수로 이천.”
-사, 삼천이요?
“왜? 부족해?”
-아, 아닙니다. 사실 좀 많습니다.
“그만큼 가용한 인력을 총동원하란 뜻이야. 시간만 엄수하라고. 알겠어?”
-알겠습니다. 대신 착수금은 괜찮습니다. 그간의 의리가 있는데 행님 신용 믿고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새끼, 말하는 게 마음에 든다. 성공보수 오천!”
-오, 오천! 너, 너무 많습니다 행님! 저야 주시면 좋지만, 솔직히 이건 업계 단가랑 안 맞습니다.
도훈은 지금 천억대 이상의 현금 부자였기 때문에 돈에 대해서라면 조금도 거리낄게 없었다. 막말로 일억을 줘도 그의 재산에는 거의 영향이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확실히 일처리 하란 소리지. 집 안 숟가락 갯수까지 싹싹 털어 오라고. 난 내 돈 먹고 돈 값 못하는 새끼는, 절대 가만 안두니까.”
-아, 알겠습니다, 행님.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래. 일주일 뒤 보자.”
통화를 끊은 도훈은 씨익 웃었다. 최번개가 돈을 밝히긴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돈값은 충분히 해내는 인물이었다.
[근데 오천은 너무 많으신 거 아닙니까? 무슨 사람 신상하나 터는데 오천씩이나···. 오백도 많아 보이는데요.]
‘꼭 그것뿐만은 아니고, 입막음하려는 의도도 있어.’
[네? 입막음이라뇨?]
‘최번개가 말은 저렇게 하지만, 분명 속으론 내가 박회장건에 대해 무관하지 않다 의심할 거란 말이지. 사건이 일어나기 전 박회장 호위무사들 신상까지 싹싹 털어갔으니까.’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게 돈으로 입막음이 가능할지···.]
‘가능해. 최번개는 돈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야. 그 말은 돈줄을 쥔 쪽에 충성한다는 뜻이지. 비밀을 실토해서 얻을 이득보다, 비밀을 지키는 게 더 돈이 된다고 판단되면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야. 게다가 놈이 무슨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군요. 쉽게 말해 돈으로 매수를 한 셈이군요.]
‘어차피 돈이야 차고 넘치잖아. 하룻밤에 1억을 태워도 아무렇지 않은 걸?’
[근데 주인님, 계속 현금을 가지고 계실 예정인가요?]
‘음, 그건 아니야. 천억이 넘는 돈이면 하루 이자만 해도 얼만데? 현금은 적당히 남기고 어디 짱박아 놔야지.’
[하지만 금액이 너무 크지 않을까요? 실명으로 투자했다간 분명 금융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갑작스레 생긴 자금출처를 증명할 방법도 없고요.]
‘그래서 말인데···.’ 도훈은 이전부터 생각했던 바를 말했다.
‘코인에 박으면 어떨까 싶어.’
[코, 코인이요?]
‘응. 코인은 자금추적을 받지 않잖아.’
[하지만 입금하는 과정에서는 거래내역이 걸리지 않을까요?]
‘우리나라라면 그렇지.’
[우리나라요?]
‘암호화폐는 거래내역이 남지 않아. 즉, 외국에서 환전해서 코인 지갑으로 전송하면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뜻이야.’
[아!]
‘그리고 오래전부터 코인을 했다고 우기면, 나이가 어려도 코인으로 대박 내는 게 불가능한 게 아니거든. 실제로 수백억씩 번 사람도 있으니까. 아직까진 세금을 내지도 않고.’
[그렇군요. 하지만 그런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너무나 큰 돈이고, 신뢰가 담보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마침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어.’
도훈은 곧바로 자신이 아는 최고의 자산관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의사이자, 주식 투자자인 안소영이었다.
“누나, 뭐해요?”
주말이라 쉬고 있었는지 소영이 나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뭐하긴. 집에서 뒹굴고 있지. 근데 무슨 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제가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요.”
-상의? 여자 문제? 난 애들 연애는 잘 모르는데. 그래도 뭐 원하면 상담은 가능해.
“아뇨. 투자관련입니다.”
-주식?
“아뇨. 코인이요.”
-코이인~? 도훈아, 그건 좀 말리고 싶다. 코인은 투자보다는 투기에 가까워. 물론 주식도 투기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코인은 고수들도 방향성을 예측하기 힘들어. 혹시나 주변에서 잘됐다는·
··.
도훈은 소영이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중간에 잘랐다.
“그런 얘기가 아니예요. 암튼 시간 되면 한 번 봬요.”
-시간이야 되지. 근데 어디서?
도훈은 괜히 소영의 집으로 가면 또 한 판 하게 될까봐 장소를 건전한 곳으로 잡았다.
“집 근처 커피숍 어때요?”
-응, 상관없어. 지금 나갈까?
* * *
평상복을 입고 나온 소영은 전혀 색다른 느낌이었다. 가운을 입고 있을 땐 지적이고 섹시한 느낌을 풍겼다면, 편한 옷을 걸친 그녀는 자기관리를 잘한 30대 초반의 아가씨 느낌이 났다.
“왔니?”
“안녕하세요.”
“커피는 시켜놨어. 아메리카노 좋아하지?”
“네.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집 올때마다 블랙만 먹길래.”
과연 소영은 기억력도 남다른 편이었다. 몇번 만나는 사이에 도훈의 커피 취향까지 완벽히 파악했다.
도훈은 소영을 만나자 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누나, 나 얼마나 믿어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왜? 너 혹시 사고쳤니?”
소영은 도훈이 뜬금없이 보자고 할때부터 뭔가 낌새를 챈 느낌이었다. 게다가 코인 투자니 뭐니 돈얘기를 꺼내는 것도 수상했다.
“사고는 아니고요.”
“누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나는 내 사람이라고 믿으면 절대 배신 안 하니까.”
소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훈은 그것이 진심인지 확인하기 위해 속마음을 떠보았다.
{큰일이네. 도훈이가 뭔가 곤란한 상황인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줘야겠다.}
소영의 속마음을 확인한 도훈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알았어요. 누나 믿고 그럼 말할게요.”
“그래, 말해봐.”
“저한테 큰 돈이 생겼어요.”
“그래?”
그때까지도 소영은 도훈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었다. 고작 20대에 불과한 도훈에게 큰 돈이라고 해봐야 억단위 정도일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꽤 커요.”
“로또 됐니?”
“그건 아니고···. 뭐 비슷해요. 아무튼 현금이에요.”
“그걸 코인에 투자하겠다고? 아까도 말했지만 도훈아, 코인은·
··.”
“아뇨. 투자가 아니에요. 그냥 보관하려는 거지.”
“보관?”
소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변동성이 큰 코인을 자금의 보관처로 이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검은 돈같은 불법 자금이 아닌 이상에야.
“도훈이 너 설마···.”
“돈의 출처는 궁금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위험한 돈도 아니고, 문제있는 돈도 아니에요.”
“알았어. 그래서 얼마나 되는데?”
이쯤되자 소영도 호기심을 보였다. 도훈은 손가락 다섯개를 펼치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숫자 ‘5’를 뜻하는 표현이었다.
“오억?”
“아뇨. 더 커요.”
“서, 설마 오십억이라고?”
소영도 단위가 커지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50억이면 지금 자신이 운용하는 자산규모에 맞먹을 수준이기 때문이다.
“음···. 동그라미가 한 개 더 붙어요.”
“오백억··· 도, 도훈아. 누나랑 장난치지 말고.”
“진짜로요.”
“아니 무슨···.”
오백억을 들고 있다는 소리에 소영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이 안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암튼, 국내에선 이 정도 금액을 바로 입금하기 힘들어서 외국계좌에서 지갑으로 송금하고 싶어요.”
“자, 잠깐만···. 내가 지금 약간 혼란스러운데···.”
소영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이제껏 평범한 대학생, 아니 그보다도 못한 고학생 정도로 알고 있던 도훈이 느닷없이 오백억 이야기를 꺼내는데 곧이곧대로 믿는 다는 게 더 이상했다.
도훈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계속 말을 이었다.
“하실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 돈을 네가 말한 방식으로 세탁해 달라는 거지?”
“네. 제가 직접 하기엔 여러가지로 번거로울 것 같아서요. 누나는 외국 주식이나 펀드도 손대시니까 방법을 알고 계실것 같아서요.”
소영이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진심인지 분간하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답했다.
“불가능한 건 아니야. 코인은 자금추적을 받지 않으니까. 규제가 덜한 거래소를 통해 계좌를 개설하고, 네 지갑으로 전송하는 건···. 음. 가능은 할 것 같아. 대신 수수료는 좀 들거야.”
“그래요?”
“일단 현금이라면 이중환전도 해야 하고, 500억 규모의 코인 이 움직이게 되면 시장이 요동칠거야. 분산으로 넣게 되면 계속 가치는 달라질 거고.”
“어쨌든 가능은 하다는 거죠?”
“응. 근데, 너 지금 하는 말 진심이지?”
도훈은 못 믿을 줄 알았다는 듯, 가지고 온 커다란 백팩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안에는 5만원권 현금이 100장씩 다발로 묶인 뭉텅이가 수십개 들어있었다.
“현금 1억이에요. 이건 누나에게 주는 착수금.”
“차, 착수금이라니?”
“500억을 세탁해 주는데 수수료로 1%는 드려야죠. 일이 끝나면 나머지 4억 현찰로 마저 드릴게요.”
실물을 보자 소영이 더욱 놀랐다. 물론 자산가인 소영에게 1억이 큰돈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가 주식으로 운용하는 금액은 그보다 훨씬 컸다.
그러나 현금 1억이 주는 시각적 효과는 그만큼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착수금으로 1억을 선뜻 주는 것을 보면, 도훈이 했던 500억 이야기가 허황된 소리가 아닐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너, 너···. 진심이구나?”
“네. 제가 누나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아무튼 문제 없는 돈이라는 것만 믿어 주세요. 나도 누나 믿고 오픈한 거니까.”
“아···. 잠시만··· 이건 좀 너무··· 내가 많이 혼란스러우니까 생각 좀 정리할 시간을 줘.”
소영은 한동안 혼자서 뭔가를 생각하더니 도훈에게 말했다.
“정말로 현금 500억을 모두 옮기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거야.
나도 연차를 내고 외국으로 직접 가야할지도 모르고.”
“상관없어요. 진행비가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아니. 지금 5억도 충분히 과해. 아무튼 한 달 정도는 잡아야 할 것 같아.”
“네, 알겠어요.”
도훈은 미련없이 현금 일억이 든 가방을 소영에게 건넸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시는 거죠?”
소영이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욕 넘치는 변태 여의사일때와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믿고 맡겨 주세요, 고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