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1. 대학 축제-45-
사기꾼은 나쁘다. 순진한 사람을 등쳐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기를 당하는 사람에게도 약간의 책임은 있다. 바로 욕심에 현혹되어 사리분간을 제대로 못한 죄다.
듣기에 너무 좋은 말은, 때론 독이 된다.
도훈은 너무 쉽게 모텔각을 재는 가온을 보며 의구심을 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성형빨이 있긴 한데, 저렇게 몸매 좋고 예쁜 여자가 만난지 한시간도 안돼서 모텔로 가자고 한다? 그리고 그런 행운이 우연히 나에게 벌어졌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물론 도훈은 잘생겼다.
키도 훤칠하고 몸매도 보디빌더 뺨치게 좋다.
하지만 단지 아무리 그런 남자라도 이렇게 쉽게 모텔각이 잡힐리가 없다.
차라리 이곳이 부킹을 전문으로 하는 나이트였거나, 혹은 술에 취한 골뱅이들이 넘치는 클럽이었다면 이해가 될 수 있다. 어차피 그곳엔 하룻밤 불장난을 즐기러 오는 여자들이 대부분이고, 호르몬의 영향으로 암내를 풀풀 풍기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시각. 장소는 호프집이라곤 하나, 식사도 주문되는 평범한 주점이었다.
도훈은 불신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상해. 아무리 나라도 정상적인 흐름이 아니야.’
[제가 봐도 수상합니다.]
‘그래서 내 결론은 둘 중 하나야.’
[뭔가요?]
‘저년이 미친년이거나.’
[정신이 이상한것 같진 않은데요?]
‘···그게 아니라면 나를 꼬드길만한 동기가 있다는 뜻이지. 남자라면 10에 아홉은 넘어가는 색계를 부릴만한 이유.’
[아까 차우현의 사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이건 가온의 독단적인 계획이 아니야. 분명 차우현이 나를 유혹하라고 시킨 걸거야.’
[아무리 유혹이라도 이렇게 대번에 본색을 드러낸다고요? 만난지 한 시간도 안돼서요?]
‘바로 그점이 가장 수상하다는 거야. 차우현이 나를 이곳에 붙잡아 둘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건···.’
도훈은 문득 가게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우현이 미나를 노리고 있구나!’
도훈이 벌떡 일어섰다. 어장관리 충돌 경보가 울리면 때맞춰 움직이려 했는데, 어쩌면 차우현의 계획은 단순한 수작 정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설마 성폭행을? 이런 미친 새끼가!’
“결정했어? 지금 나갈까?”
“···넌 나중에 보자. 내가 연락할테니 기다려.”
도훈은 가온을 무시하고 쏜살같이 가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난 데없는 상황에 가온은 미처 도훈을 붙잡지도 못했다.
“야, 야! 얘기하다 말고 어딜가, 갑자기!”
그러나 어느새 도훈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 가온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 미친. 뭐가 저렇게 빨라? 사람 새낀가?”
난데없이 혼자 남겨진 가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씨, 대표님이 꼭 붙들고 있으랬는데···. 어떡하지? 연락해 줘야 하나?”
사실 가온이 차우현에게 받은 명령은 무조건 한시간 동안 도훈을 붙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온은 도훈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그 핑계삼아 꼬셔보고 싶은 생각에 모텔로 데려가자는 황당한 계획을 세운것 뿐이었다.
결과적으론 모텔로 가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셈이라 가온은 갑자기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씨, 근데 뭐지? 내가 먼저 꼬시는데 안 넘어 온다고? 약을 너무 빨면 부작용으로 고환이 쪼그라든다던데 설마 고자 새끼였나?”
가온은 황당해하며 차우현에게 급히 문자를 날렸다.
* * *
“오, 오빠···. 이거 왜 문이 안 열리죠?”
미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불길한 상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반대편에선 차우현이 음흉한 표정을 숨기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문이 잠겼어?”
“네. 이게 갑자기 왜···.”
“저런. 큰일인데? 이게 밖에서 잠기면 안에선 못 여는데.”
말은 큰일이라면서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우현의 태연한 태도에 위기감을 느낀 미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헤, 헬스장에 직원들 아직 있지 않아요? 전화해서 문 좀 열어 달라고 하면···.”
우현이 곧바로 받아쳤다.
“이런. 아까 깜빡하고 핸드폰을 놓고 와버렸는데 말이야.”
“그럼 제가···.”
미나가 자기 핸드폰을 다급히 꺼내는데, 우현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미나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앗!”
“내가 걸게. 너 우리 피트니스 번호 모르잖아.”
“그, 그냥 제가 걸어도···”
미나는 부쩍 가까워진 우현이 부담스럽다는 듯 철문을 등지고 물러섰다. 그러자 우현이 갑자기 전화 거는 것을 관두고 미나를 향해 물었다.
“근데 너 왜 그렇게 겁먹고 있어?”
“제, 제가요?”
“아니 그렇잖아. 되게 섭섭하다? 내가 너 잡아 먹기라도 한대?”
점점 마각을 드러내는 우현을 보며 미나는 뭔가 심상치않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주마등처럼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차우현 존나 씹새끼야.
-왜 그래요? 언니 취했어? 갑자기 왜 없는 사람 욕을 하고 그래요.
-너 내가 저번에 한 번 말한 적 있지? 그 새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부류라고.
-근데 우현 오빠가 뭐 잘못했어요?
-완전 사이코새끼야. 그 새끼 여자 회원들 어떻게 꼬시는 지 모르지?
-어, 어떻게요?
-처음엔 존나 매너있는 척 하거든. PT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괜히 오해살만한 터치도 자제하면서.
-그쵸.
-나중엔 식단 관리도 해야 한다면서 매일 톡도 보내주거든. 회원님 오늘은 뭐 드셨냐, 그렇게 먹으면 칼로리가 얼마얼마니까 운동한 효과가 없다. 오늘은 헬스장 안나오시냐···.
-그, 그리고요?
-그럼 대개 여자들은 그 새끼한테 호감을 갖게 된단 말이야. 그리고 어느날 운동 끝난 뒤 마사지를 해주겠다고 따로 불러.
-마, 마사지요?
-뭉친 근육을 풀어주겠다면서, 스트레칭이 필요할것 같다고.
여자 회원은 당연히 우현이 지금까지 매너좋고 예의바르게 행동했으니까 순순히 따라간단 말이지.
-서, 설마···.
-맞아. 우현이 그 개새끼는 그렇게 여자를 꼬신다음에 강제로 해버려.
-가, 강제로요? 어떻게 그럼 신고를 안 당했죠?
-이 새끼가 존나 개새끼인게, 강제로 강간하다 시피 해놓고 사진이랑 영상이랑 다 남겨 놓는단 말이야.
-세상에!
-혹시나 경찰에 신고하면 신상 다 뿌려버릴 거라고. 그럼 앞으로 시집이나 갈 수 있겠냐면서.
-헉! 어, 언니 설마···.
-아니야. 난 당한 건 아니야. 우연히 그 새끼 폰을 보다가 알게 된 거야. 사진첩에 이제껏 만났던 여자들 강제로 강간한 사진이랑 영상, 그리고 협박한 깨톡을 봤거든.
-우현 오빠가 그런 사람인줄 몰랐어요. 지금이라도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신고해봐야 뭐···. 그 새끼한테 당한 여자들이 순순히 협조하겠어? 아니라고 발뺌하거나 잠적하겠지. 그리고 당사자도 아닌데 괜히 나서는 건 오지랖이 될 수 있어. 어쨌든 시작은 억지로 했지만 결국엔 사귀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우현이 그새끼도 그걸 아니까 계속 만나면서 가스라이팅한 거야. 자긴 연인관계라고 주장하려고.
-아···.
-어차피 너나 나나 인천 뜰건데 남의 일에 신경쓰지 말자. 그냥 너 조심하라고 해주는 말이야. 알았지?
그날 미나는 너무 술을 많이 마셨다. 친하게 지냈던 지혜가 떠나는 마지막 날이었고, 헤어짐이 아쉬워 여자들끼리 단 둘이 자취방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이후 일주일 뒤 미나도 그곳을 관두면서 4년 전 지혜가 해주었던 경고를 깡그리 잊고 살았던 것이었다.
‘마, 맞아. 지혜 언니가 분명 그런말을 했었는데···.’
“무, 무슨 소리예요? 오빠가 절 왜요? 얼른 문이나 열라고 하세요.”
하지만 우현은 여전히 손에 핸드폰만 쥐고 있을 뿐 딱히 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내가 너 예전부터 마음에 들어하긴 했어.”
“네?”
“왜, 그땐 다들 어렸었잖아. 내가 솔직히 말하면 약간 연상취향이었거든. 갓 스무살인 미나 너는 너무 어려보여서 눈에 안들어 오긴 했지.”
“그, 그런 말을 왜 갑자기···.”
“근데 나이들고 다시보니까 내가 연상 취향이 아니라 20대 중 후반을 좋아하는 것이더라고. 왜, 설익은 영계가 아니고 물 오른 여자들 말이야. 경험도 좀 있고.”
“오빠. 지금 그 발언 굉장히 듣기 거북하거든요?”
미나가 정색을 했지만 우현은 아랑곳않고 씩 웃어보일 뿐이었다.
“다시 만나니 우리 미나 한참 물이 올랐더라고?”
“오빠! 진짜!”
그때였다.
갑자기 우현의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부르르 울렸다.
“오빠 폰 두고 왔다면서요?”
미나가 따지자 우현이 신경질적으로 폰을 꺼내들었다.
“아씨, 뭐야? 왜 중요할 때 전화질이야? ···뭐? 아니 넌 그런 것도 하나 제대로···.”
우현은 김 빠진 표정으로 전화를 끊더니 미나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미안. 내 폰이 뒷주머니에 있는 줄 몰랐네?”
미나는 방금전까지 위협적으로 들이대던 우현이 별안간 태도를 바꾸자 어이가 없었다.
‘뭐, 뭐야 갑자기?’
그 순간 누군가 철문을 미친듯이 두들겼다.
쾅쾅쾅!
“누나, 거기 있어?”
“도훈아!”
쾅쾅쾅!!
“누나 괜찮지?”
“어, 어. 나 별일···.”
우드득-
그때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문 손잡이가 강제로 뜯겨 나가며 도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쇠로 된 손잡이를 강제로 잡아 뜯는 모습에 우현이 기겁했다.
‘뭐, 뭐야? 미친놈인가? 저걸 어떻게···.’
도훈은 비교적 멀쩡한 미나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듯한 경신술로 빠르게 대응함으로써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막은듯 보였다.
“도, 도훈아 어떻게 된 거야?”
도훈은 미나와 우현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무거운 거 내가 들어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어?”
“이거 들면 되지?”
도훈이 덤벨이 든 박스를 번쩍 집어 들더니 어처구니 없어하는 우현을 향해 말했다.
“아, 죄송해요. 문고리가 고장난 것 같더라고요. 안 열려서 강제로 열었는데 저렇게 부숴져 버렸어요. 변상해 드릴게요.”
“아, 아니야. 어차피 고치려고 했는데 잘 됐어. 놔 둬.”
우현은 본능적으로 도훈의 차가운 눈빛에 겁을 집어 먹은 상태였다. 말은 차분하게 하지만 그 속엔 싸늘한 분노가 깔려 있었다.
“아니에요. 오늘은 날이 아닌것 같으니, 다음에 제가 꼭 다시 변상하러 올게요. 누나 가자.”
도훈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더니 미나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단 둘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미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응?”
“아, 아니야.”
“누나 별일 없는 거 맞지?”
미나는 도훈에게 어떻게 말할지 망설였다. 우현이 일부러 문을 걸어 잠드고 희롱에 가까운 발언을 쏟아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신체접촉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때맞춰 도훈이 도착하는 바람에 불미스러운 일도 없었다. 다만 우현의 의도는 분명하게 느낄수 있었다.
‘···그냥 말하지 말아야 겠어. 어차피 아무일도 없었는데 괜히 도훈이가 알면 걱정할 거야. 욱하는 성격에 우현이랑 한 판 붙으면 도훈이만 괜히 피곤해지니까. 그냥 저런 새끼는 내가 손절하면 그만이야.’
고민을 끝낸 미나가 별일 없었다는 듯 방긋 웃으며 도훈의 팔짱을 꼈다.
“응! 그래도 와줘서 고마워. 은근 무거웠는데.”
하지만 도훈은 이미 마음의 소리를 통해 미나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읽은 상태였다.
‘차우현 이 개새끼 봐라? 감히 내 여자를···.’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일단 오늘은 증거 불충분. 미나가 무사했으니 그걸로 됐어. 하지만 저런 새끼를 내가 그냥 놔두면 사람이 아니지. 내 신조 알지?’
[알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내 여자를 털끝만 건드려도 네 여자는 NTL하시는 살아있는 금태양 아니십니까?]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아무튼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저 새낀조만간 손봐준다. 진짜 오늘 미나 건드렸으면 그 자리에서 대가리 깨버렸다.’
[자중하십시오. 정당방위면 몰라도 살인은 신벌을 받게 됩니다.]
‘상관없어. 하여간 누구든 내 여자 건드리면 그날은 제삿날인 줄 알라고 해.’
“이만 집에 가요. 어차피 볼일도 다 본것 같은데.”
“가온이란 애는 어떻게 됐어?”
“몰라요. 혼자 알아서 밥먹고 있겠지.”
“치. 나 아까 좀 질투나던데? 너무 친하게 보여서.”
“아니야. 걔가 일방적으로 들이댄 거라니까. 누나도 다 봤으면서.”
미나는 긴장이 풀리자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도훈을 향해 농을 던졌다.
“흥. 그럼 나 없을 때 그렇게 어리고 예쁜애가 또 들이대면 어떻게 할 건데?”
“누나 없을때?”
“응. 아깐 솔직히 내 눈치 봤잖아. 아니야?”
“누나 없을 때 들이대면···. 음···.”
도훈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하자 미나가 정말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나 없을 때면 상관없어?”
“아니. 꼴리면 누나 먹으러 가야지.”
“뭐, 뭐라고?”
“난 미식가거든. 기왕이면 맛있는 거 먹어야지.”
“아, 아니 넌 무슨 그런 말을···.”
미나의 차 트렁크에 아령을 실은 도훈이 당황해 하는 미나에게 말했다.
“말 나온 김에 갈까?”
“어, 어딜?”
“어디긴 어디야. 꼴리면 가는 곳이지. 가자, 누나.”
“야, 야! 갑자기 그런 말하면···.”
미나가 얼굴을 붉혔다.
똑같은 음란한 말이라도 우현이 할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우현이 할 때는 몸이 뻣뻣하게 굳고 심장을 옥죄는 느낌이었다면, 도훈이 할 때는 몸이 나른해지고 땀구멍이 축축해졌다.
차에 오른 미나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