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437화 (1,401/2,000)

1420. 대학 축제-44-

* * *

“혹시 연락처 줄 수 있어?”

시작되는 건가? 정보창에서 봤던 것처럼 가온이 곧바로 수작을 부려왔다. 애초에 대회를 보러온다는 건 순전히 핑계고, 이를 빌미로 나와 엮이려는 속셈일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우현의 음모를 되치기 위해선 알고도 적당히 넘어가주는 편이 유리했다.

“응, 여기.”

가온에게 핸드폰을 내밀자 미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실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은 질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미나에겐 미안했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었다.

“번호는 찍었고···. 잠시만? 이름도 저장해 줄게. 예전에 내가 썼던 폰이라.”

가온은 스스로 번호도 입력하고 연락처에 저장도 마쳤다.

“자.”

가온이 저장한 이름을 일부러 보여주었다.

나는 흠칫 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나가 보고 있기에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가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무슨 약자야?”

“응. 스페셜이란 뜻. 난 특별하니까. 히힛.”

농담처럼 웃어 넘기는 가온을 보니, 굉장히 약아빠진 성격으로 보였다.

[SP가 그 뜻이었나요?]

‘아니. 딱봐도 섹파 연상하라고 적은 거잖아. SP가온, 섹파 가온.’

[아···. 주인님에게 몰래 사인을 주는 거군요. 아무리 그래도 미나양이 앞에 뻔히 있는데 대담하게···.]

‘일단 가온은 내가 미나와 무슨 사이인지 정확히는 모를 거야.

일부러 나를 자극해 떠보려는 거겠지.’

[그렇군요.]

“맞다. 나 송 원장 만나면 줄 거 있었는데.”

“무슨 또 원장이에요. 평소처럼 불러요 듣기 민망하니까.”

“그래도 이제 같은 급인데 존칭으로 모셔야지. 나는 차관장. 너는 송원장.”

“뭔데요 근데?”

“왜 저번에 여성용 덤벨 있냐고 물어봤잖아.”

“아··· 네, 그쵸.”

“지난번에 새롭게 기구 세팅하면서 예전에 쓰던 걸 창고로 옮겨놨거든. 내가 미나 너 생각해서 1~2kg 짜리 덤벨 따로 챙겼어.”

“정말요? 안 그래도 몇세트 살까 했었는데. 가끔 근력 보강한다고 찾으시는 회원분들이 계셔서요.”

“뭘 또 사? 그것도 다 돈인데. 생각난 김에 챙겨줄게. 잠시 다녀오자.”

“네? 지금요?”

“응. 혹시 또 깜빡할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나 혼자 다녀올까?”

“아···. 그게···.”

미나는 갑자기 헬스장으로 돌아가자는 우현의 요구에 난처해했다. 우현을 따라 나서게 되면 호프집에 나와 가온을 단둘이 남겨놓는 셈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신경써서 챙겨 주겠다는 우현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곤란해 보였다.

“그러면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가까우니까 혼자서 다녀올게. 혹시 차키 있으면 나한테 주고. 트렁크에 실어 놓을 테니까.”

우현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미나도 결국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또 그래요. 나 생각해서 챙겨주는 건데. 그럼 같이 가요.”

“정말 혼자가도 괜찮은데···. 너희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와, 대표님 그렇게 살뜰하게 챙겨주시는 거 처음봐요. 제 보너스나 좀 챙겨주시지.”

“뭐래냐? 누가보면 악덕 고용주인줄 알겠네. 암튼 금방 다녀올게.”

“네.”

“도훈아,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미나는 가온이 걱정되는 듯 나에게 한번 더 당부했다.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어차피 짐 옮기는 거면 남자가 가는편이 수월할텐데.”

“뭐야, 난 그럼 여기서 혼자 밥먹고 있으라고? 친구도 없는 사람처럼? 힝, 너무한다 진짜.”

가온이 갑자기 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우현과 미나만 헬스장에 들르게 되었다. 모든 것이 우현의 철저한 계획이라는 걸 아는 나는 가소로움이 밀려왔다.

‘저 새끼 일부러 나를 가온이랑 단둘이 남긴거네.’

[것보단 미나양을 걱정하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차우현의 속마음을 봐선 분명 작당을 벌일텐데요.]

‘신경 쓰이긴 하지만 걱정할 정돈 아니야. 미나는 나 말고 다른 남자에겐 전혀 흥미를 못 느낄테니까.’

[아···.]

‘게다가 차우현이 강제로 응큼한 짓을 벌였다간 곧바로 어장관리 경보가 뜨겠지. 그쯤되면 저 새낀 나한테 죽는다고 봐야지.’

[그럼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일단 가온이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고.’

“근데 도훈이 너 진짜로 미나 언니랑 어떤 사이야?”

“응? 아까 말한것 같은데···. 누나가 트레이너할 적에 나한테 PT 알려줬다고.”

“단순한 친한 누나동생 사이라고? 전혀 안 그래 보이던데?”

“뭐?”

“솔직히 이 쪽 업계에선 그런 일 흔하잖아. 남자 트레이너가 마음에 드는 여자 회원 꼬시고, 여자 트레이너도 가르치는 회원이 마음에 들면 들이대기도 하고.”

“그, 그런거 아니야.”

“진짜로 아니라는 거지? 그럼 내가 너 꼬셔도 상관없다는 뜻맞지?”

“가, 가온아.”

둘만 남게되자 가온은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나왔다.

상상 이상의 전개라 속도를 맞추기 버거울 정도였다.

“왜? 나 별로야?”

“아니 그런 뜻은 아닌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우리 오늘 처음 만났잖아.”

“원래 첫눈에 반하는 게 진짜라잖아. 나 너 처음 볼때부터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일부러 옆자리에 앉은 거야.”

“아니 그래도···.”

“왜? 내가 이렇게 나오니까 갑자기 미나 언니한테 미안해져?”

“그, 그런거 아니라니까?”

“내가 그렇게 별론가? 나도 나름 인기 많은 편인데?”

가온은 불쑥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너 연상취향이야 그럼?”

“어?”

“나 원래 빠른년생이야. 대표님은 갑이라고 했지만, 실은 내가 너보다 한 살 누나야.”

“그, 그래.”

“흐음. 생긴건 여자 여럿 울리게 생겼는데 의외로 순진하네?”

“아니. 난 순진한게 아니라 너무 급작스럽다는 거지.”

“왜? 첨봐도 마음에 들면 원나잇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남녀사이가 불붙는데 시간이 중요하진 않은 것 같은데?”

[저렇게 대놓고 들이대는 여자라니···. 엄청 적극적인데요?]

‘온전히 진심은 아닐 거야. 아마도 차대표랑 사전에 말을 맞춘 것 같아. 자기가 미나를 데리고 잠시 빠지면, 그 사이에 나를 꼬셔놓으라고 말이야.’

[하지만 이미 주인님이 놈들의 속셈을 훤히 아는 이상 이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리 없잖습니까?]

‘때론 알고도 넘어가줘야 할 때가 있지. 우현이 그 새끼한테 빅엿을 먹이려면 적당히 받아주는 게 나을 것 같아.’

“흐음···.”

“넌 나 별로야, 도훈아?”

“꼭 그렇다는 건 아니야.”

“됐네 그럼. 뭐 긴 말 필요 있어?”

“어?”

“나가자.”

“어딜?”

“어디긴. 나 너랑 가고 싶은 곳 있어.”

“자, 잠깐만. 갑자기 둘이서 어딜 간다는 거야? 미나 누나랑 대표님은?”

“어른들은 어른들의 사정이 있겠지. 네가 왜 그걸 신경쓰니?

아무사이도 아니라면서.”

상상이상으로 빠른 진도에 도훈도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걸 먹었다간 탈날 것 같은데···.’

* * *

“이쪽이야. 안 쓰는 비품들 정리해둔 창고.”

“네.”

우현의 안내를 받아 미나가 헬스장 창고로 따라 들어갔다. 창고는 헬스장이 있는 곳과 같은 층에 있었는데, 별도로 떨어져 있어서 평소엔 전혀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우현이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켜자 내부에 철제 프레임으로 짜놓은 선반이 좌우 벽면에 설치되어 있었고, 다양한 비품들이 놓여 있었다.

“와, 이렇게나 물건이 많아요? 여기 있는 물건만 가지고도 헬스장 하나 더 내겠는데요?”

“우리 미나가 못 보던 사이에 립서비스가 늘었네? 그 정돈 아니야. 그냥 쓰다가 새로운 기기 들이면서 처치곤란한 것들을 쌓아 둔 거야. 혹시나 나중에 피트니스 확장하게 되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그나저나 아령을 어디에 챙겨 놨더라? 어, 저 위에 있는 것 같아.”

우현이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은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었다.

“저기 들어있다고요? 왜 저렇게 높은 곳에 쌓아놨어요?”

“무게가 가벼운 것들이라 그냥 모아서 챙겨둔 것 같아. 나머진 더 무거워서 위로 올리기 뭐하거든. 아무래도 밟고 오를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우현이 두리번 거리더니 받침대로 쓸만한 물건을 하나 가져왔다.

“이거 밟고 올라가서 꺼내오면 되겠다.”

그러나 가져온 받침대는 건장한 우현이 오르기에는 조금 부실해 보였다.

“위험할 것 같은데···.”

“아님 미나 네가 꺼내볼래?”

“제가요?”

“응. 내가 밑에서 받쳐줄게. 네 무게는 충분히 버티지 않을까?”

미나가 생각해도 그게 나아 보였다.

“알았어요.”

미나가 받침대 위에 오르자 우현이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미나의 허벅지를 받쳐주었다.

“괜찮지? 기분 나쁘면 얼른 말하라고. 신고당하기 싫으니까.”

“뭐래요, 진짜.”

미나는 실없는 농담을 하는 우현을 나무라며 조심스럽게 박스를 끄집어 냈다. 하지만 가벼운 여성용 아령이라도 몇개씩 쌓여 있으니 생각보다 무게가 제법 나갔다. 생각보다 힘이 든 미나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자세가 기우뚱해졌다.

“어어, 그러다 넘어지겠어.”

“잠시만요 거의 다 꺼냈어요.”

우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미나의 엉덩이를 받쳐주었다.

“미안해. 이게 더 안정적일것 같아서.”

미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우현이 설마 의도를 가지고 그랬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낑낑거리며 박스를 끌어냈다.

“됐어요.”

“됐어?”

“밑으로 내릴테니까 받아주세요.”

“어. 내려.”

미나가 간신히 박스를 내리자 우현이 밑에서 받아냈다.

박스 안에는 여성용 아령 스무개 정도가 들어있어서 20kg를 훌쩍 넘는 무게였다.

“됐다. 내려와.”

“네.”

미나가 받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하자 우현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안 넘어지게 조심하고.”

“고, 고마워요.”

미나는 일련의 스킨십들이 살짝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의성이 다분했다고 따지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설마···. 오빠는 이제 유부남이고, 나랑 과거에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지혜 언니랑 뭔가 있으면 있었지.’

과거 네 사람이 어울릴 때 우현은 미나가 아닌 지혜와 썸싱이 있었다. 지혜도 미나 못지 않은 미인이었고, 당시만 해도 설익었던 미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현 오빠가 지혜 언니랑 안 좋게 끝났던 것 같기도···.’

과거를 떠올리던 미나는 지혜가 오래전에 해준 말을 떠올렸다.

-너, 차우현 조심해라.

-네? 우현 오빠요?

-저 새끼 겉으로는 매너 좋은 척 가식 떠는데 실제론 진짜 음흉한 새끼거든.

-언니, 우현 오빠랑 뭔 일 있었어요?

-어휴, 쪽팔려서 어디가서 말하기도 싫어. 아무튼 절대 우현이 저 자식이랑은 엮이지마. 알았지?

‘맞네. 그때 언니가 그런 말을 했었는데···.’

그 뒤론 다들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좋은 기억만 남고 추억이 미화되었지만, 분명 지혜는 우현과 틀어진 채로 끝이 났었다.

‘흐음. 확실히 여자들한테 하는 행동이 조금 볼썽사나웠던 것 같기도···.’

우현은 당시에도 여성회원들을 꼬시는 걸로 유명했다.

PT를 받으러 온 회원 중에 예쁜 여자만 있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끝내 사귀곤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공들여 사귀어놓고 막상 한달을 넘기지 못한 적이 더 많았다. 그리고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전에 또 다른 여자로 갈아타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조심해야 겠어. 오빠가 비록 결혼했다고 해도 사람 버릇 금방 바뀌는 거 아니니까.’

미나가 우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데 우현이 지나가는 말처럼 뜬금없는 소릴 했다.

“미나 너는 되도록 결혼 늦게 해라.”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야 뭐 이미 간 몸이라서 하는 얘긴데, 결혼하고 나니까 총각시절이 훨씬 좋았던 것 같아.”

“아깐 잘 지내고 있다면서요?”

“그거랑은 또 별개지.”

“네?”

우현이 슬슬 분위기를 잡았다.

“부부 사이라는 게 말이야. 일정 시점을 넘어서면 연인이라기보단 친구같아 지거든.”

“친구요?”

“응. 진짜 친구. 옆에서 벗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친구. 트림을 하든 방귀를 뀌든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사이가 된다고.”

“에이, 그래도 사랑하시죠? 언니?”

미나가 대화 주제에 불편함을 느끼는지 계속 화제를 돌리려 했으나 우현은 끈질기게 본인의 의도대로 대화를 이끌었다.

“사랑···. 그래뭐, 섹스리스도 사랑은 할 수 있지.”

“오, 오빠. 무슨 그런 말을···.”

“왜? 너나 나나 이제 다 성인인데.”

“아니 부부 사이의 내밀한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하시냐는 거죠.

별로 궁금하지도 않는데.”

미나가 계속 철벽을 치며 방어했지만 우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말이야. 막상 결혼하면 하루에 다섯번도 할 것 같았거든? 맨날 붙어있으니까···. 물론 처음에는 진짜 그랬는데, 시간 지나니까 와이프가 벗고 옆에 누워도 미동도 없는 거 있지? 그래도 내가 어디가서 빠지는 정력도 아닌데 말이야.”

미나는 계속 우현의 얘기를 듣고 있다간 귀가 썩을 것 같았다.

‘이래서 지혜 언니가 우현 오빠 조심하라고 했구나. 다 같이 있을 때랑 단 둘이 있을때랑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역겹고 토할 것 같아.’

미나는 밀폐된 창고에 단 둘이 있으면 안 될것 같은 생각에 아령이 든 박스를 챙겨들고 곧바로 입구로 향했다.

“일단 나가요. 이거 얼른 차에 싣고 돌아가봐야지 않을까요?”

“그래.”

의외로 우현은 순순히 미나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미나가 창고 문을 열려고 하자, 밖에서 잠긴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미나가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 보았지만 철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오, 오빠···. 이거 왜 문이 안 열리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