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435화 (1,399/2,000)

1418. 대학 축제-42-

* * *

화장실로 간 도훈은 용변을 보지않고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가 가끔 연기력이 필요할 때 애용하는 메소드 담배였다.

[주인님, 실전도 아니고 연습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마지막 연습이니까 실전처럼 해보려고. 대회 당일 갑자기 하려면 오히려 어색할 수 있으니까.’

[차우현을 의식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도훈은 정곡을 찔렸는 지 뜨끔했다.

‘물론 그것도 없진 않지. 어쨌든 미나 앞에서 기죽고 싶지 않거든.’

도훈은 과거에 미나가 우현과 무슨 사이였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한 때 같은 피트니스 클럽에서 트레이너로 근무했고, 지금도 이따금 연락을 주고 받을 만큼 막역한 사이라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여자에게 진정한 남사친이란 게이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도훈은 우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왜 남편들이 마누라가 동창회 가는 거 싫어하는 줄 알아?’

[아뇨?]

‘동창이랍시고 술먹고 어울리다보면 열에 아홉은 바람나기 십상이거든. 과거에 친했던 사이라면, 언제든 그 핑계로 다시 불붙을 수 있다는 뜻이야.’

[설마 유부남인 차우현이 송미나양에게 괜히 치근덕 거릴까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유부남이고 말고는 중요치 않지. 사내란 놈들은 기회만 되면 구멍에 꽂을 생각 뿐이니까.’

[모든 사내들이 다 주인님 같진 않을 겁니다.]

‘당연히 나같을 순 없지. 나는 마음 먹으면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고, 대부분은 마음만 먹고 그치거든. 어쨌든 우현이라는 놈의 콧대를 납짝하게 해줘야 직성이 풀리겠어. 진심으로 해보겠어.

’준비를 마친 도훈은 우현과 미나 앞에 섰다.

우현이 음악을 틀더니 시작을 알렸다.

도훈은 서서히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표정은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으며, 펌핑이 끝난 근육이 터질듯이 부풀어 있었다.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연기.

동작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환골탈태이후 천무지체의 몸을 갖게 된 도훈에게, 몸으로 하는 일보다 쉬운 일은 없었다.

손 끝, 발 끝 하나하나 미세한 근육이 정교하게 컨트롤 되었고, 불수의근마저 자유롭게 통제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헬스 트레이닝에 있어선 전문가 급인 미나나, 대회 출전 및 우승을 밥먹듯 했던 우현은 도훈이 펼치는 연기에 입을 다물 지 못했다.

‘저, 저게 정녕 초보의 실력이라고? 말도 안 돼!’

우현은 한때 현역이기도 했고, 최근까지도 많은 후배들을 지도 하는 코치의 입장이었다. 그런 그에게 도훈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가히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근육 하나하나가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수축과 이완, 들숨과 날숨의 호흡이 톱니처럼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심지어 처음 듣는 음악임에도 포인트를 딱딱 맞추는 동작의 리듬감이 느껴졌다.

‘···천재다. 이건 정말 역대급 재능이야!’

음악이 끝나며 도훈의 동작도 동시에 끝이나자 우현은 자기도 모르게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물개박수를 쳤다.

“브라보!”

“와, 도훈아. 너무 잘했어!”

미나도 도훈이 보여준 무대에 감동하긴 마찬가지였다. 비록 본인이 대회를 나가거나 한적은 없지만, 주변에서 많은 선수들을 지켜본 바, 도훈이 보여준 실력이 대단한 것이라는 건 충분히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혼신의 연기를 펼친 도훈은 스스로 생각해도 만족했는지 씩 웃었다.

“괜찮았나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지금 이 상태로 나가도 바로 우승하겠는데?”

우현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쪽 세계에도 재능의 편차는 있다지만, 그래도 투입된 시간과들인 노력이 어느 정도 정직하게 보상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에 비하면 도훈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라고 볼 수 있었다.

“과찬이세요.”

“아니야. 정말로 재능이 있다고. 전국급 대회에 나가도 충분히 우승할 수 있을 정도야.”

우현이 도훈을 극찬하자 미나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남자가 어디가서 인정을 받는 것이, 자신이 칭찬받는 것처럼 기뻤다.

“제가 그랬잖아요. 진짜 재능있는 동생이라고.”

“그렇네. 미나가 종목은 바꿨어도, 선수보는 눈은 여전하구나.”

“아니에요. 오빠가 오늘 열심히 가르쳐준 덕이죠. 정말 감사해요. 이 보답을 어찌해야 할지.”

“우리 사이에 별 말을 다 듣겠네. 미나 네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그래도요.”

“그럼 오늘 술이나 쏘든가?”

“술이요? 지금요?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술은 낮 술이 제맛이지. 가볍게 한 잔 어때?”

우현의 제안에 미나가 난처한 듯 도훈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함께 왔으니 끝까지 도훈과 함께해야 했는데, 도훈이 불편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도훈이 넌 어때? 괜찮겠어?”

“네. 가볍게 한 잔 정도는.”

“잘 됐네. 그럼 나 잠깐 마무리만 하고 올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우현이 먼저 퇴근을 준비하러 움직였다.

“정말 대단했어. 잘할 거라곤 믿었는데, 상상했던 그 이상이야.”

“트레이너님이 잘 가르쳐 준 덕이죠.”

“아니야. 오빠도 방금 그랬잖아. 가진 재능이 엄청난 것 같다고. 근데 확실히 좀 놀랍긴 하다.”

“뭐가요?”

“내가 너 처음 봤을 때만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미나는 도훈이 전역하고 처음 헬스장을 등록했을부터 지켜봤다. 당시에도 몸매는 준수한 편이었지만, 기초부터 동작을 하나하나 가르쳤던 미나의 입장에선 지금 도훈의 성장이 경이적이라고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요새 홈트레이닝을 꾸준히 하고 있어서 그런 가봐요.”

“홈트레이닝? 정말 그것만 가지고 이렇게 몸을 만들 수 있다고?”

미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실제 홈 트레이닝은 거의 맨몸 운동 위주기 때문에 대근육을 발달시키는데는 한계가 자명했다.

“아, 저 이사한 거 모르시는 구나.”

도훈은 자신이 몇 달 전 집을 옮겼고, 새롭게 이사한 집에 상당한 수준의 개인용 헬스장이 구비되어있다고 밝혔다.

“운이 좋았어요. 남이 만들어놓은 개인PT룸을 혼자서 다 쓸 수 있었거든요.”

“그랬구나. 어쩐지 몸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미나가 아직 땀을 흘리는 도훈의 몸을 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체지방을 바닥까지 떨어뜨린 몸이라 그런지 피부 군데군데 핏줄이 돋아난 모습이 야성적인 느낌을 주었다.

미나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멋있어. 반할 수밖에 없는 남자야. 나에겐 너무 과분한···.’

그때 차우현이 다시 돌아왔다. 패인 나시를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자 제법 말끔한 인상이었다. 확실히 피지크 종목 선수라 그런지 보디빌더처럼 우락부락한 몸이 아니라서 옷태가 살아 있었다.

“도훈 학생이라고 했지? 나보다 동생이니까 말 편히 할게. 지금 나갈 건데 안 씻어도 되겠어?”

“네. 가볍게 땀만 닦을게요.”

“그래. 그럼 바로 가자. 요 근처 괜찮은 호프집 있어.”

세 사람은 아직 해도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낮술을 하러 갔다.

신체 건장한 남녀 세명이 자리를 잡자 테이블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도훈과 우현은 다들 한덩치 했기 때문에 나란히 앉을 수 없어 마주보고 앉았고, 미나가 둘 중 한사람 옆에 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나는 도훈 옆에 앉으려다 문득 생각을 바꿨다.

‘도훈이 옆에 앉으면 우현 오빠가 남자친구라고 오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도훈이가 불편할테니까···.’

나름 고민한 미나는 우현 옆에 자릴 잡았다.

도훈은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 살짝 열이 받았다.

‘아 놔, 엄청 신경 쓰이네.’

[너무 의식하는 거 아닙니까? 상대는 그럴 마음도 없어 보이는데요.]

‘둘이 자꾸 친한 척하니까 그렇지.’

“도훈이는 대회 직전이니까 괜히 무리하지 말고.”

“괜찮습니다.”

“아니야. 지금 몸 상태 최상으로 맞춰놨는데 괜히 술마셔서 대회 망치면 억울하잖아.”

우현의 조언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보디빌더들은 시즌과 비시즌이 확연하게 나뉘는데, 대회를 앞 둔 시점에서는 식단을 엄격하게 통제하며 자기관리를 하는 편이었다.

물론 이는 식단으로 몸을 만들지 않은 도훈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얘기였다. 그는 단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체지방률 1% 이하의 몸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환골탈태로 체질이 완벽하게 탈바꿈했기 때문이었다.

“···뭐, 알아서 조절할게요.”

“그래.”

“오빠. 근데 무진오빠랑 요새도 연락해요?”

“무진이? 응. 계절 바뀔 때마다 한 번씩은 볼 걸?”

“정말요?”

“무진이 요새도 가끔 보면 네 얘기하더라. 아직도 못 잊은 거 아닐까?”

“뭐래요 진짜? 그때가 대체 언제적 얘긴데.”

우현과 미나가 옛추억을 가지고 얘기하는 통에 도훈은 쉽사리 껴들 수 없었다.

“맞다. 지혜 올해 결혼할 수도 있겠던데?”

“정말요? 벌써요?”

“응. 남자 하나 제대로 물었잖아.”

“무슨 소리예요 그게, 지혜가 그런애도 아니고.”

“농담이야. 암튼 지혜가 PT하다가 만난 손님이랑 우연히 썸을 타서 사귀게 됐는데, 그 손님이 하필 잘나가는 벤쳐사업가였다지 뭐야?”

“벤처 사업요?”

“응. IT 계열인데 어플 개발로 대박이 났다나? 예전에 한 번 만났는데, 글쎄 차가 BMW로 바뀌어서 물어보니까 남자친구가 사줬다더라고. 이제 식 올리면 팔자 피는 거지. 우리 중에선 지혜가 가장 성공했어.”

도훈이 잠자코 듣고 있는데 우현이 자꾸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너도···. 뭐 너도 요새 나름 잘나가지만, 원래 여자는 남자 하나만 잘 물어도 지혜처럼 인생 확 피는 거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됐어요. 별 소리를 다 듣겠네.”

미나는 우현이 원래 그런 성격인지 알았지만, 도훈 앞에서 저런 소리를 들으니 몹시 난처했다. 아무래도 대학생인 도훈의 입장에선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라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훈이가 기분 나쁘지 않으면 좋겠는데···.’

미나는 도훈이 부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땐 편의점 알바를 하던 대학생이었고,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최근에 만난 것도 사이판 여행 때였는데, 그때도 학생인 도훈이 부담될까봐 비행기 티켓을 대신 사주느니 마느니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였었다.

미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현이 계속 눈치없게 얘기했다.

“아니야. 내가 막상 결혼해 보니 그런게 되게 중요하더라고. 어차피 연애는 즐기자고 하는 거고, 결혼은 현실이잖아.”

“됐어요. 오랜만에 봤더니 오빠도 완전 아재 다 됐네.”

도훈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남자의 능력에 대해 설파하는 차우현의 말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확 재산공개 해버릴 수도 없고.’

[주인님이 얼마나 부자인지도 모르고 멋대로 떠드는 군요.]

‘상상이나 가겠어? 고작 대학생에 불과한 내가 수백억대 재산을 가진 현금 부자라는 사실이 말이야. 고작 자기 명의로 피트니 스클럽 하나 차린 걸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주제에 진짜 눈 뜨고 못 봐주겠군.’

“암튼 난 남자는 능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얼굴 잘생기고 몸 좋은 건 다 한때라니까?”

어째 타깃이 자꾸 도훈에게 맞춰진 느낌이었다.

미나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도훈을 변호하듯 항변했다.

“그래도 사랑이 제일 중요하죠. 돈만 보고 어떻게 남자를 만나요?”

“에이, 미나는 아직도 철이 덜 들었구만. 생각이 어려.”

“됐어요. 쓸데없는 소리말고 술이나 마시자고요.”

세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다가 우현이 갑자기 전화를 받으러 간다며 일어섰다.

“나 잠깐만 통화 좀 하고 올게. 트레이너한테 연락왔어.”

“그래요.”

우현이 밖으로 나가자 미나가 도훈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 아까 혹시 기분 나빴던 거 아니지? 오빠가 이상한 사람은 아닌데, 옛날부터 되게 현실적이었거든.”

“별로요. 뭐 딱히 틀린말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너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닐거야.”

“상관없는데 난···. 근데 둘이 진짜로 무슨 사이에요?”

“누구? 나랑 우현오빠? 말했잖아. 그냥 옛날에 같은 피트니스에서 일했던 동료라고.”

“엄청 친해보이던데?”

“응. 그때 막 일을 시작했을 때기도 하고, 사람들이 다들 괜찮았거든. 우현 오빠랑 무진 오빠. 그리고 지혜까지 넷이서 자주 뭉쳐 다녔어.”

“들어보니까 무진이란 사람이랑 뭔가 있었나 봐요?”

“아, 아니야. 괜히 오빠가 오해하게 얘길 꺼내가지고···.”

“그럼 뭔데요?”

“무진 오빠라고···. 그때 날 일방적으로 좋아했거든. 근데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깔끔하게 거절했었어.”

“그렇구나.”

계속되는 도훈의 추궁에 미나가 갑자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도훈이 너 설마 질투해?”

“내가 왜요?”

“이상하잖아. 내가 분명 아무 사이도 아니랬는데···. 꼬치꼬치 묻고.”

“그냥 물어본 거예요.”

“아닌데. 풉-. 그러니까 더 귀엽잖아?”

“아니라고요.”

“도훈아. 전혀 신경 안써도 돼.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알았어요.”

[주인님, 찌질하게 자꾸 왜 그러십니까?]

‘몰라. 괜히 신경 쓰이잖아.’

[거참 질투의 화신도 아니고···. 미나양은 어차피 주인님 밖에 모르는 걸 잘 아시는 분이.]

‘미나는 누가봐도 매력있는 여자야. 사내라면 다들 껄떡거리고 싶을 걸? 하여간 누가 내 여자 건드리기만 해봐. 그땐 확 그냥 다 조져 버릴테니까.’

도훈이 속으로 씩씩 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통화를 마친 우현이 다시 돌아오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우리 헬스장 직원 하나가 아직 식사를 안했다는 데 여기 잠깐 합석시켜도 괜찮을까? 주말까지 나와서 일시키는데 밥도 못 먹여서 너무 미안해가지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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