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6. 대학 축제-40-
* * *
사람은 고쳐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도 있고. 그만큼 사람의 성정은 쉽게 변하지 않고,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라는 게 있듯, 조소연은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시급 8000원을 받고 일하는 그녀가,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오피에서 잘나가는 에이스였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소연도 적응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일하고 고작 푼돈을 거머쥘때면, 쉽게(?)
돈 벌던 과거를 떠올린 적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과거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아무 남자에게나 웃음을 팔며 다리 벌리는 삶은 이제 사양하고 싶었다. 쉬운길을 알고 있음에도 힘든 길로 돌아가는 것은 배는 어려운 일이지만, 소연은 차근히 유혹을 극복해냈다.
무엇보다 도훈이라는 사내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어서였다. 창녀, 오피걸 그런 직업을 가지고선 도훈에게 당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아는 도훈도 결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 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고 싶었다. 그러면 언젠가 도훈이 자신을 바라봐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는 개뿔. 요새는 먼저 연락 안하면 연락도 없네.”
카운터에 앉아있던 소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가끔 보면 도훈은 기계가 아닌가 싶었다.
마치 특정한 내용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심심이’같은 채팅 프로그램 처럼.
“맨날 형식적인 대답만 하고···. 날 조금이라도 생각하긴 하는 건가?”
도훈이 답장을 안한적은 없었다. 하지만 먼저 연락을 한 적도 없었다. 더구나 만나자는 말을 하려고 하면 핑계를 대며 미루기 일쑤. 아무리 도훈을 흠모하는 소연이라도, 점점 지칠 수 밖에 없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지, 배꼽 마주친지가 언젠지도 모르겠네.”
쉽게 말해 소연은 욕구불만에 가득차 있었다.
실은 오피일을 하게 된 것도, 돈도 돈이지만 넘치는 성욕을 해소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만큼 소연은 색을 밝히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벌써 여러 달이 넘도록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수공방을 하고 있으니 슬슬 짜증이 치밀만도 했다.
“내가 뭐 자기 없으면 남자 못 만날 줄 아나?”
소연이 PC방에서 일하면서 받은 대시만도 벌써 여러차례였다.
그럴때마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둘러대거나,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적절히 거절했었다. 접근해 온 남자들이 도훈만큼 매력적이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기왕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상 일부종사는 아니더라도 과거처럼 함부로 몸을 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연의 불만이 팽배해지던 즈음, 불쑥 카운터로 혁준이 등장했다.
“저···.”
‘응? 국성대 다닌다는 학생이잖아?’
“네?”
“다음 주 뭐하세요?”
순진하게 생긴 혁준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표정으로 작업을 걸고 있었다. 혁준이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소연은 풋풋한 그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인지 알고서 저럴까나?’
“일하겠죠? 여기서.”
“저녁엔 퇴근하지 않으세요?”
“네, 그런데요?”
소연은 빤히 짐작되는 혁준의 태도에도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그가 어디까지 나오는 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음···. 혹시 저희 대학 축제 놀러 오지 않을래요?”
“축제요?”
“네. 다음주부터 월화수 3일간 축제기간이거든요.”
“아하, 그러시구나.”
“유명한 가수도 오고··· 또··· 암튼 재밌으실 거예요.”
서툰 혁준의 태도를 가만히 지켜보던 소연은 문득 장난기가 동했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말을 돌리고 물리쳤겠지만, 왠지 오늘따라 남자의 관심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설마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시는 거예요?”
“데, 데이트··· 음, 아니 그게 아니라···.”
“확실히 말을 해보세요. 혹시 제가 만만해요?”
“아, 아닙니다!”
혁준이 화들짝 놀라며 몸서리를 쳤다.
그런 혁준의 과격한 반응이 오히려 소연을 더욱 고무시켰다.
“근데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건데요?”
“저, 소, 소연씨··· 조, 좋아합니다.”
“네?”
“좋아합니다.”
“아니 지금···.”
설마 느닷없이 피시방 카운터 앞에서 고백을 받을 줄 몰랐던 소연은 본인이 되려 당황하고 말았다.
‘뭐야? 진짜로 작업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인가? 어떻게 이 타이밍에 저런 말을 하지?’
“소연씨도 저한테 관심있지 않으세요? 저한테 쪽지도 남겨두셨잖아요. 남자친구 없다고요.”
“아니 그건···. 제가 아까 장난을 쳐가지고 오해하실까봐···.”
소연은 뭔가 사달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잔 밑에 붙인 쪽지 하나에 상대가 저렇게 일방적으로 감정을 품게 될 줄은, 본인 입장에선 상상도 못했던 경우였다.
‘어, 어떡하지? 장난이 심했나?’
소연은 순진한 혁준에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본의 아니게 그를 가지고 논 셈이 된 것이다.
“물론 당황스러우실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소연씨를 좀 더 알고 싶어요.”
“아···, 그게···.”
“저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안될까요? 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혁준은 급기야 매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추한 모습일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용기가 가상한 행동이었다. 소연은 자기가 한 짓이 있다보니 그가 성가시고 귀찮다기 보단, 오히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미안하지만 전혀 내 스타일은 아닌데···.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사귀지는 않아도.’
“혁준씨라고 하셨죠? 저기, 제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그러니까···.”
“한번만.”
“네?”
“저한테 한번만 기회를 주세요. 저 정말 여자한테 이런 적 처음입니다.”
소연은 말 안해도 충분히 그럴거라고 믿고 있었다.
“······.”
“그냥 저랑 밥 한번만 먹으면 안 될까요? 아, 아니면 그냥 차라도 한 잔. 그래도 진짜 아니다 싶으면 깨끗히 포기하겠습니다.”
“근데 제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모릅니다. 몰라서 더 궁금합니다. 소연씨를 알고 싶어요.”
혁준이 카운터 앞에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똥꼬쇼를 펼치고 있는데, 뒤에서 기다리던 초등학생이 끝내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누나 저 소세지 하나만···.”
“앗!”
주말에 PC방에 놀러온 초등학생은 혁준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자꾸 알바에게 치근덕 거리는 그가 못 마땅했던 모양이었다.
소연도 괜히 민망해하며 소시지를 꺼내 빠르게 건넸다. 초등학생은 혁준을 보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피시방에 와서···. 초딩들도 안 그러겠네.”
“······.”
초등학생에게 굴욕을 당한 혁준은, 창피함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그리고 나서야 이곳이 소연에게는 직장이며, 자신이 굉장히 경우 없는 사람처럼 일방적인 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혁준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쿵-!
카운터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정도로 허리를 접은 혁준이 부끄러움에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그때 소연이 혁준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밥은 별론데요.”
“···네?”
혁준이 고개를 돌리자 소연이 웃으며 말했다.
“밥 말고 술 사달라고요.”
“어, 엇!?”
혁준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소연이 데이트 신청을 받아준 것이었다.
“저, 정말이세요?”
“암튼, 다음주 축제기간 중 국성대에서 보자는 거죠? 알았어요.”
“가, 감사합니다!”
혁준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연거푸 숙이며 소연에게 감사를 표했다. 물론 소연은 혁준이 마음에 들어 받아준 것은 아니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용기를 낸 가상함에 자기도 모르게 감동한 것이었다.
‘그래, 뭐 술 한잔 하는 정도 가지고 뭘. 친구도 별로 없는데 친구만난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오빠랑 연락도 잘 안되는데.’
소연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엔 약간의 반발심리도 섞여 있었다.
잘나가던 오피 에이스에서, 동네 후진 PC방 알바로 전직까지 했지만 잘 만나주지 않는 그에게 괜히 심술이 난 것이었다.
‘내가 남자 만나면 어쩔건데? 나중에 일부러 사진 찍어서 보내버릴 줄 알아.’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온 혁준은 지나치게 상기된 표정이었다.
게임을 쉬고 있던 친구들은 혁준의 얼굴을 보더니 놀라서 물었다.
“왜 그래? 뭔 일 있있어?”
“양아치들이랑 시비라도 붙은 거야? 어디야? 어떤 새끼들이 감히 국성대 체교과를 건드려?”
혁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은 괜한 오해를 했다. 혁준은 겨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 됐다.”
“뭐가 돼 인마?”
“설마 로또 됐냐?”
“차근차근 말해봐, 울지 말고.”
“데이트 신청 했다고. 알바, 아니 소연씨한테.”
“헐!”
“돌았네?”
“진짜로 알바가 받아줬다고?”
다들 의외라는 표정으로 혁준을 쳐다보더니, 소연이 있는 카운터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마침 소연은 손님이 떠난 자리를 치우러 간 상태라 자리에 없었다.
“뻥치시네! 니가? 여기 알바를 꼬셨다고?”
“혁준아, 오늘 만우절 아니다.”
“적당히 해라, 공혁준!”
“진짜라니까?”
친구들이 믿지 않자 혁준이 억울해하며 항변했다.
“물론 뭐 사귄다든가 그런 건 아니고, 일단 밥을 아니 술 같이 먹기로 했어.”
“복날도 지났는데 개소리 오지네.”
“혁준이 니가 무슨 수로?”
“말 같지 않은 소릴 하고 있어.”
“아오, 답답! 진짜로 내가 소연씨랑 같이 술 마시면 어쩔래?”
“그럼 내가 술 쏜다.”
“나도 안주값 댄다.”
“모텔비 지원 가능.”
“그럼 난··· 집에 쓰다 남은 콘돔 가져다 줄게.”
친구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혁준은 어차피 친구들이 믿든 안 믿든 소연과 약속을 잡은 것만으로 날듯이 기뻤다.
‘맘껏 부러워해라 자식들아. 나중에 진짜 내 여자친구로 소개시켜 줄테니!’
* * *
제니퍼와 헤어진 도훈은 지난 번 송미나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오늘이었지? 보디빌딩 포징 배우기로 한 날이.’
[네, 맞습니다. 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3번이나 무리를 했는데요.]
‘거뜬해. 예전 같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골골 댔겠지만, 나에겐 내공이 있잖아.’
물론 연속으로 3번이나 물을 뺀 후유증이 없을 순 없었다. 단내공의 증진으로 정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도훈은 금방 체력을 회복 시킬 수 있었다.
마침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미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야, 도훈아? 오늘 약속 잊지 않았지?
“어. 막 나가는 길이야. 어디로 가면 돼?”
도훈은 방금 막 모텔에서 나와놓고 집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뻥을 쳤다.
-톡으로 주소 보냈는데 못 봤나 보네. 그쪽으로 바로 오면 돼.
도훈이 스마트폰으로 깨톡을 열어 위치를 확인했다.
“어, 알겠어.”
-뭐하면 나랑 같이 갈래? 나도 나가는 길인데 데려다 줄게.
“아니야. 굳이 수고스럽게. 차 가져 가려고.”
-아···. 그래? 암튼 그럼 조심히 와.
미나가 다소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도훈도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미나 차를 얻어 탔다간, 나중엔 미나를 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일단 정력이 다시 회복될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도훈은 택시를 타고 대학으로 돌아가 자기차를 몰고 목적지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피트니스 클럽이었는데, 미나가 소개시켜 준 보디빌더가 운영하는 곳으로 보였다.
‘그나저나 PT트레이너라는 놈 미나랑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겠지?’
[미나양이 유부남이라지 않았던가요?]
‘유부남은 좆 안 달렸냐? 마누라 있는 놈들이 더 해.’
[주인님보다 더 한 사람은 저는 못 본것 같은데요.]
‘난 결혼 안 했잖아. 아니, 공식적으론 애인도 없고.’
[아무튼 너무 질투가 심한 것 같습니다, 주인님도.]
‘상대에 따라 다른 거야. 어제도 봤잖아. 공대 윤미리 같은 애들은 얼마든지 분양 가능해. 돌려 먹어도 일도 타격없다고. 하지만 미나는 절대 안 되지.’
[주인님을 끔찍이 생각하는 미나양이 그럴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연히 미나를 걱정하진 않지. 그 새끼가 딴 생각하고 있을까봐 신경 쓰일 뿐.’
[하여간 질투심도 대단하신 분.]
‘내건 절대 안 나눠 먹는 주의거든.’
로시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한 도훈이 차에서 내렸다. 마침 미나도 딱 맞게 도착했는지 도훈과 주차장에서 마주쳤다.
“도훈아!”
도훈을 먼저 발견한 미나가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왔다. 간만에 얼굴을 보아 반가운 것도 잠시 도훈은 미나의 복장이 갑자기 신경 쓰였다.
‘뭐지? 너무 붙는 옷을 입고 온 것 같은데?’
현직 필라테스 학원 원장인 미나는 몸매가 끝내주게 좋았다. 그 와중에 몸에 달라붙은 레깅즈까지 입고 오자 지나치게 도끼자국이 부각되고 있었다.
“누나, 근데 옷이···.”
“아, 막 수업 끝나고 오는 길이라. 요샌 뭐 외출복으로도 많이 입고 다니는 데 뭘.”
“그래도 좀···.”
“왜? 신경쓰이니? 갈아입고 올까?”
“아, 아냐.”
도훈은 괜히 속좁게 보이는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아꼈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오르면서 미나가 말했다.
“오늘 너 가르쳐주실 분은 피지크 대회에서 우승을 3번이나 하신 분이야. 자세 잡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