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6. 대학 축제-21-
* * *
아무래도 저녁으로 치킨을 시킨 게 화근이었다.
범우는 천성적으로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던지, 모텔에 오자마자 먼저 치킨을 주문했다. 여기에 가볍게 목만 축이자며 생맥 1리 터를 음료로 추가하자 순식간에 치맥 파티로 변질되고 말았다.
"아, 입가심만 해서 아쉬운데···.”
"안 돼. 슬슬 대본 짜야지. 벌써 1시간이나 지났다고.”
"한 캔씩만 더 마시면 어떨까요?”
"그래. 편의점 가서 사오면 되겠네.”
"안된다니까. 그러다 취하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계속 만류했지만, 이미 취기가 오른 셋은 살짝 흥분 상태였다. 신아가 굳이 편의점을 갈 필요가 없다는 듯 냉장고 문을 열었고, 거기에 맥주캔이 들어있는 걸 확인한 것이다.
"나갈 필요 없겠는데요?”
"어?”
"여기 술 있네요.”
신아는 자연스럽게 맥주캔을 꺼내더니 일행에게 한 캔씩 돌렸다. 신아는 나에게도 한 캔을 건내주었다.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오빠도 마셔요. 설마 맥주 먹고 취하는 건 아니죠?”
"아니···.”
설마하니 내가 술에 취할 리가 없다.
강화된 내공은 알코올 성분이 몸에 들어오자마자 태워버릴 수 있었다. 아마도 링거로 알코올을 직접 주입해도 문제 없을 것이다.
"정말로 괜찮겠어?”
"에이, 뭐 목만 축이는 건데요.”
다시 맥주캔이 따졌고, 건배가 이어졌다.
슬슬 오늘의 조모임을 모텔에서 잡은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요?]
'난들 이럴 줄 알았나. 범우 자식 믿었는데, 술 들어가자마자 확바뀌네.'
"야, 마셔마셔. 어차피 숙박으로 끊었다면서? 안되면 날 새서라도 하면 되지. 내일 토요일이잖아?”
"맞아요. 오늘 못 끝내면, 내일하면 되고, 내일 못 끝내도 일요일도 있잖아요.”
"우리 근데 진짜 조 잘 뭉친 것 같다.”
다들 말이 빨라졌다. 두 볼은 상기되고, 눈은 살짝 충혈되기 시작한다. 유일한 맨정신인 나로서는 슬슬 취하기 시작한 조원들 옆에 있는 게 곤욕스러웠다.
"오빠 혹시 차 가져와서 그래요? 한숨 자고 가면 되잖아요. 뭣하면 대리 부르던가. 제가 내줄게요.”
미리가 시건방지게 대리비를 내주겠단다.
살짝 맛탱이가 가기 시작한 미리를 보고 있자니 골머리가 아파왔다.
[근데 미리양은 왜 또 취할정도로 마시는 걸까요? 주인님과 단둘이 모텔에 남는게 목표가 아니었습니까?]
'모르지. 취하려는 게 계획인지도.'
[취하는게 계획이라고요?]
'아마도 적당히 파장될 때 나를 술마셨다는 핑계로 모텔에 혼자 놔두고 나가는 척 하겠지. 그리고 다시 물건을 놓고 갔다며 들어오는 거지.'
[아! 그리고 취한척···.]
'아마도 그런 속셈으로 보이는 군.'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확실히 나이 어린 티가 나는 게, 할 일이 있어서 모였으면 일을 끝내고 술을 마시면 그만인데 시작부터 술을 마시면서 일도 못 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러다 진짜 좆되겠는데, 혼자서라도 해야 하나?'
나는 술판을 벌이는 세사람을 뒤로 한 채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머지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결코 영어회화 과목에서 Fail을 받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묵묵히 일하는 나를 두고 나머지 세 사람은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근데 범우 오빠 모솔이죠?”
"설마? 여자친구 없어요?”
"모솔 맞어. 근데 어떻게 알았어?”
"꺄하하하. 이마에 써있잖아요. 모쏠아다!”
술에 취했을 때 가장 극적으로 변한 사람은 오신아였다.
애초에 변태라는 실체를 숨기고 가면을 쓰고 살아서 인지, 적당히 술이 들어가자 말도 많아지고 거침이 없어졌다.
"야, 그건 성희롱 아니냐?”
"뭘 또 빡빡하게 구실까? 성인끼리 그럴 수도 있죠.”
"아니 그래도···.”
"흐흐 신아 취했네, 취했어.”
"너도 얼굴 터질 것 같거든?”
"정말? 아아, 안 되는데. 보기 흉한데···.”
미리가 손바닥으로 두 볼을 감싸쥐면서 아양을 떨었다. 등 뒤에서 벌어지는 술판을 배경음악 삼아 나는 열심히 대본을 완성해갔다.
'이렇게 된 거 최후의 수단이다.'
[네?]
'외우지 않아도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본을 만들어 내야 겠어.'
[그게 가능합니까?]
'못할 건 없지. 편법이 통하느냐의 문제지만.'
"도훈 오빠. 오빠도 그만하고 와요. 나중에 같이 하면 되는데 왜 혼자서 그러고 있어요?”
"맞아요. 우리만 순 나쁜 사람 만들고.”
여자애들이 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묵묵히 스크립트를 완성해 나갔다.
'하필 걸려도 저런 무책임한 것들이랑 같은 조가 돼가지고는··
·.'
"아 진짜 너무하네.”
"범우 오빠, 오빠가 어떻게 좀 해봐요.”
"도훈아. 일단 마시고 하자. 혼자서 어쩌려고 그래.”
계속된 팀원들의 성화에 결국 나는 타이핑을 멈추고 일어서야 했다.
"···알았어. 딱 한 잔만 그럼.”
"히히. 오빠 최고!”
"도훈 오빠 혹시 술 못 마셔요?”
"진짜? 엄청 잘 마실 줄 알았는데.”
여자애들이 은근히 나를 자극했다. 맥주도 술이라고 얼큰하게 취한 모습으로 나를 도발하는 모습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아니. 맥주 정도야 뭐.”
"말로만 그러지 말고 한 번 보여줘요.”
"맞아 맞아. 도훈 오빠 술 마시는 거 보고 싶다.”
"야, 그러지 마. 술은 강요하면 안되는 거야.”
범우가 자제 시켰지만, 이미 맛탱이가 간 여자애들을 말릴 수가 없었다.
"요거 원샷하면 제가 소원 들어줄게요.”
신아가 갑자기 맥주 캔 하나를 내밀면서 제안했다.
500Ml 였기 때문에 나름 큰 사이즈였지만, 나에겐 어림 없는 수준이었다.
"진짜로? 뭐든지?”
"흐흐. 무슨 소원을 말하시려고 그러실까?”
"확실히 대답해. 이거 원샷하면 소원들어주기 맞지?”
"해봐요, 까짓 거.”
신아는 내가 무슨 소원을 말할지도 모르면서 당당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다 같이 모여있는 공개적인 자리이니만큼, 곤란한 소원을 말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설사 아주 심한 걸 시키더라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다 진짜?”
"도훈아 무리 마. 생맥병도 아니고 캔맥주는 한 번에 마시기 힘들어.”
나는 범우의 만류에도 맥주캔을 딴 다음 단숨에 고개를 꺾어 들이키기 시작했다. 현재의 내 몸 상태에선 500ml가 아닌 1리터라도 문제없었다.
꿀꺽꿀꺽꿀꺽-!
목젖이 요동치며 콸콸 술이 들어가자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
"꺼억-! 됐지? 다 비웠지?”
나는 일부러 빈 깡통을 손으로 우그러뜨리며 캔 안이 탈탈 비어 있음을 과시했다.
"우아! 도훈 오빠 술 짱 쎄다!”
"아니, 그렇게 잘 마시면서 왜 안 마셨어?”
"하아···. 소원 말해봐요. 들어줄게요.”
신아가 체념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은근히 뭔가를 기대하는 마음도 담겨있었다.
'신아는 술이 약한 타입이네.'
[그러니까요. 가장 먼저 취한 것 같습니다. 평소랑 행동도 많이 달라졌고요.]
'저게 아마 본 모습일 거야.'
"분명 뭐든 들어 준댔다?”
"걱정마요. 무슨 짓을 시켜도 다 할테니까.”
신아의 적극적인 태도에, 오히려 지켜보던 미리와 범우가 당황했다. 처음엔 분명 웃자고 시작한 게임이었는데 갑자기 19금 분위기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빠, 적당히 해요. 알죠?”
"그래 도훈아. 그냥 게임인데 뭘.”
"아니. 분명 신아가 맥주 원샷하면 뭐든 소원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전 상관없다니까요?”
신아가 해볼테면 해보라는 듯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원체 가슴이 크기도 했지만, 평소엔 살짝 허리를 구부려 작게 보이려고 했다면 술에 취한 지금은 그냥 얼마든지 보라는 듯 과시하고 있었다.
'어휴, 진짜 벗으라면 벗겠네.'
[설마 그러시는 건 아니죠? 미리양이나 범우군은 아직 말짱합니다.]
"그럼 내 소원은···.”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직 안 딴 맥주캔을 찾았다.
"너도 원샷해라.”
"네, 네?”
"너도 원샷하라고.”
"아니···.”
"와, 심했다.”
"푸하하하! 오신아 당황한 것 좀 봐.”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 * *
"야, 나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
"나도 가자.”
한편 대근의 PC방에서 대회 준비를 하던 체육과 1학년 남학생들은 간만에 쉬는 시간을 가졌다. 게임도 연속으로 하면 정신적으로 피로가 쌓이기 때문에 30분간 개인 휴식을 갖기로 한 것이었다.
흡연실로 간 혁준은 담배를 꺼내 물면서 한탄했다.
"와,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할 건가 싶다.”
"왜? 현타오냐?”
"솔직히 그렇잖아. 게임 대회 우승이 뭐라고, 나잇살먹고 몇 시간째.”
"그렇다고 네가 희주나 정음이처럼 몸짱 대회 나갈 것도 아니잖아?”
"정음이도 나가?”
"어. 여자애들한테 들었는데 희주랑 경희랑 정음이 셋이서 나간다던데?”
"와, 희주는 알고 있었는데 정음이는 진짜 의외네.”
"뭘 의외야 인마. 전공 수업때 못 봤냐? 걔 남자들보다 운동 잘 하잖아. 몸도 엄청 좋을 걸?”
"정음인 얼굴은 예쁜데 운동은 무슨 괴물처럼 잘한단 말이지.”
"왜? 정음이한테 관심있냐?”
친구의 말에 혁준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야. 나도 국어를 배웠으니 주제를 알고, 수학을 익혀서 분수는 알거든? 못 오를 나무는 쳐다도 안 보는게 맞지.”
"흐흐. 혁준이 은근히 현실적이네. 하긴 그게 맞지. 태영이 봐라. 괜히 이리저리 쑤시고 다니다가 쪽팔려서 군대로 튄 거.”
"태영이는 눈도 높긴 했지만, 너무 문어발 식이었어. 자식이 주제도 모르고 아무나 다 한번씩 찔러보니까 진심이 느껴지지 않잖아. 나랑 통화할 때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라고?”
"여기 PC방 알바한테도 대시하려고 했단다. 군대만 안 갔으면.”
"미친놈. 크크.”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다 말고 힐끔 카운터에서 일하고 있는 소연을 쳐다보았다.
"근데 예쁘긴 오지게 예쁘네. 무슨 아이돌인줄 알았잖아.”
"사장 딸이 분명하다니까? 저 외모로 뭣하러 이런 싸구려 PC 방에서 알바하겠어?”
"옆에 저 아저씨가 그럼 사장님인가?”
"아닐걸? 태영이 말로는 머리 벗겨진 아저씨가 사장이랬는데.”
"그럼 저 사람은 뭐야? 알바라기엔 좀 나이가 많지 않아?”
"혹시 여자 알바생 남자친군가?”
"남자친구라고?”
"여자친구 알바하는데 놀러왔나 보지.”
"근데 둘이 사귄다기엔 나이차가 좀 나보이는데?”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어. 서로 좋으면 사귀는 거지.”
"여자애가 너무 아까워서 그렇지. 끽해야 우리 또래로 보이는데.”
"뭐하면 니가 찔러 보든지?”
"뭐?”
"맘에 들어서 그러는 거 아냐? 못 먹는 감이면 찔러라도 봐야지.”
"내가 태영이냐? 됐다.”
"어이고, 혁준아. 주제와 분수를 아는 우리 혁준이. 롤만 잘하지 연애는 영 젬병이구나.”
"아니, 무슨 오늘 처음봤는데 찌르고 말고야. 좀 친해지면 모를까.”
"친해져 인마 그럼.”
친구의 말에 혁준이 귀가 솔깃했는지 물었다.
"어떻게?”
"어차피 3일간 계속 출근도장 찍을 거 아냐. 단골로 인식되면 인사도 나눌거고. 그때 슬쩍 물어보는 거지. 혹시 남자친구 있으시냐고.”
"으아악! 어떻게 그런 걸 대놓고 물어봐? 그럼 내가 관심있다는 거 다 알텐데.”
"못할 건 뭐야? 내가 보여줘?”
"하지 마라. 쪽팔려서 PC방 옮기기 싫으니까. 여기 싸고 좋구만.”
"암튼, 찔러나 봐. 직접 물어보기 그러면 은근슬쩍 축제에 초대해 보든지.”
"축제에 초대한다니?”
"우리과 주점 열잖아.”
"아아!”
"서현이가 맥주 쿠폰 뿌리라고 준 거 알지?”
"나 가지고 있어.”
혁준이 주섬주섬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는 명함판처럼 생긴 맥주 쿠폰이 들어있었는데, 1학년 총무인 서현이 판촉활동의 일환으로 아이디어를 내 만든 것이었다.
-체육과 맥주 쿠폰, 1테이블 당 1병 공짜.-
서현은 이를 체육과 학생들에게 전부 3매씩 할당량을 주고 뿌리라고 시켰다. 맥주 한 병을 서비스로 주더라도 추가로 주문을 받으면 무조건 남길 수 있다는 계산에서 였다.
"이게 근데 먹힐까? 그리고 우리학교 학생이 아닐수도 있잖아.”
"야. 무슨 대학 축제에 자기 학교 애들만 오는 줄 알어. 나도 저번에 덕성여대 축제 놀러 갔었어 인마.”
"넌 여자친구가 거기 다니잖아.”
"아무튼. 상관없다고. 공짜로 준다는 데 싫다는 사람 있겠어?
혹시라도 아냐? 초대에 응해서 오게 되면 너랑 같이 술마시고 친해질지.”
혁준은 친구의 조언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연과 단둘이 축제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화기애애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상상하자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진짜 줄까?”
"주라니까? 근데 너무 생각없이 주지 말고 뭔가 명분을 만들어.”
"명분이라니?”
"그냥 뭐, 서비스가 좋았다느니 고맙다느니 하는 식으로 생각 난 김에 놀러 오라고 건네주라고. 관심있는 척 하지 말고.”
"아아, 판촉활동처럼 하라는 말이지?”
"어. 그냥 주면 누가봐도 호감있는 거 티내는 거잖아. 괜히 안받으면 나중에 민망해지니까 슬쩍 홍보하는 식으로 줘보란 말이야.”
"역시, 여자 친구 사겨본 놈은 다르구나.”
"자식아. 형이 괜히 여친이 끊이지 않는 줄 아냐? 나 고등학교 때도 있었어.”
"누가보면 도훈이형 급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그 형은 절대 아니고.”
"암튼 조언 고맙다. 내일이나 모레쯤 슬쩍 찔러봐야 겠다.”
혁준이 담배를 비벼끄며 생각했다.
카운터에선 여전히 소연과 창범이 계속 깔깔거리며 떠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