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405화 (1,369/2,000)

1388. 대학 축제-13-

* * *

막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섹스 후 꿀잠을 자려던 나에게 깨톡이 날아왔다.

-미리 : 오빠, 혹시 자요?

'아이씨, 뭐야?'

누군가 봤더니 영어 회화 조모임에 속한 미리였다. 자칭 공대 여신이라고 설치는 어장관리녀 말이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채팅창을 누르고 말았기에 답장을 안할 수 없었다. 차라리 확인을 안 하고 모른척 했다면 잠들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었을 텐데.

-도훈 : 아니. 이제 자려고. 왜?

혹시나 조모임에 관련해서 논의할 사항이 있나 해서 답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미리는 그 뒤로 10분간 내 답장을 읽지도 않는 것이었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자려던 나는 점점 빡치기 시작했다.

'뭐야 이 또라이는? 지가 먼저 말 걸어넣고 읽지도 않네?'

이미 11시가 넘어가는 시각. 대학생들이 대체로 늦게 잠을 청한다지만,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 깨톡을 보내기엔 제법 야심한 시간이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예의가 없군요.]

'내 말이. 그리고 단톡방 놔두고 왜 갠톡을 한 건데?' 단톡방은 알림이 해제되어 연락이 와도 일부러 확인하지 않는 이상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톡이었기 때문에 소리에 잠을 깬 것이었다.

막 잠들려던 차에 방해를 받는 바람에 잠도 달아나고 말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점점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아씨, 열받네. 3연사 하고 꿀잠자기 직전이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간만에 푹 쉬시나 했더니.]

갑자기 잠을 방해한 미리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다시 깨톡을 확인해보니 숫자가 사라진걸 보니 깨톡을 확인하고도 여전히 답신이 안 오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미리의 의도를 파악했다.

'하-. 요게 날 간보고 있는데?'

[간보다뇨?]

'어장관리 중이라고.'

[주인님을요?]

'뻔하잖아. 난데없이 밤늦게 선톡을 해놓고, 답장 보내면 일부러 시간 끌면서 의도적으로 씹는 거.'

[대체 왜 그런짓을 합니까?]

'남자란 굉장히 단순한 동물이거든. 그냥 여자한테 연락이 오면 아무 근거도 없는데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보낸 게 아닐까 하고 고민한단 말이지.'

[호오.]

'그런데 답장이 바로 바로 티키타카해야 하는데, 상대쪽에서 질질 끈다? 그러면 오히려 남자가 먼저 말려드는 거야.'

[고의적인 지연전략이라는 거군요.]

'딱 그거지. 그냥 툭하고 던진 한 마디에 남자는 밤새 그 여자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야. 대체 왜 선톡을 했을까? 밤 늦은 시간에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건 무슨 의도일까? 이렇게 고민하게 만드는 거야.'

[와, 미리양이 제법 어장 좀 관리해 본 것 같군요.]

'하지만 나에겐 어림없지.'

보통의 반응이라면 이쯤에서 내가 다시 깨톡을 날렸어야 한다.

하지만 궁금함을 못 참고 다시 답장을 보내면 미리는 기다렸다는듯이 씹을 것이다.

'이런 건 그냥 무시하는 게 나아. 아마 내가 지금 다시 또 보내면 못 본척 쌩까고 잠들었다고 뻥칠 걸. 그리고 아마 내일 오전 쯤에 오빠 죄송해요 깜짝 잠들어 가지고. 라면서 다시 선톡을 보내는 거지.'

[전형적인 밀당 수법이군요.]

'이제껏 그런 식으로 남자를 농락했을 거야. 하여간 불여시 같은 년.'

[그러고 보면 정음양처럼 솔직하고 지고지순한 여자가 참 드물긴 합니다. 밀당같은 것도 전혀 없고요.]

'정음이는 사람 자체가 순수하잖아. 감정에 솔직하고, 가식 같은 것도 없고.'

[근데 왜 그러셨습니까?]

'뭐?'

[가슴을 키워주신다고 마법의 정액을 두 차례 가슴에 뿌리셨잖습니까.]

'응, 그게 왜?'

[그럼 마지막은 최소한 얼굴에 뿌려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음양이 주인님에게 헌신한 것이 있으니 그 보답으로 말입니다.]

'아아, 마지막?'

정음과의 3연전의 마무리는 질싸였다.

가슴에 한 번 더 뿌렸다간 혹시나 감당 못 할 만큼 커질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싸를 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희주양은 솔직히 얼싸 몇 번으로 연예인 뺨치게 바꿔주셨잖습니까? 실제로 길거리 캐스팅까지 되고요. 근데 왜 정음양에겐 아끼셨냐는 거죠.]

마법의 정액은 다양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몸에 바르면 몸매가 쭉쭉빵빵하게 변하고, 살이 찐 사람은 특정 부위에 다이어트 효과를 준다. 그리고 얼굴에 바르면, 피부가 박피를 한 것처럼 맑고 깨끗해지면 이목구비가 더욱 미형으로 바뀌는 성형의 효과가 있다. 마지막으로 질싸를 할 경우에는 나에 대한 중독효과와 더불어, 신진대사를 개선하고 혈행을 돕는 등 건강한 체질로 바꾸어 준다.

[솔직히 정음양의 몸은 더 할 나위 없이 튼튼하지 않습니까? 또한 절대 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정도로 호감도 또한 100을 찍고 있고요. 굳이 질싸를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얼싸로 희주양처럼 더 예쁘게 만들어 주시지 않고선요.]

'난 지금 그대로의 정음이 좋아.'

[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예쁘지만, 얼싸를 해주면 진짜 초절정 미녀로 바뀔수도 있겠지. 근데 난 지금의 오리지날 정음의 얼굴이 더 좋다고.'

[아….]

'이건 마치 성형에 찬성하는 남자들도 막상 자기 여자가 수술을 한다고 하면 거부감이 드는 것과 똑같은 거야. 내가 좋아한 정음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야. 더 예뻐지고, 더 인기 많아질 정음이가 아니고.'

[그럼 희주양에겐 왜 그러셨습니까?]

'희주는 좀 다르지. 원체 얼굴이 빻았었잖아. 걔는 미용 성형이 아니라 의학적인 차원이었다고.'

[허참, 주인님 마음을 알다고도 모르겠군요. 더 아끼기 때문에 덜 예쁘게 하다니요.]

'애초에 정음이는 얼굴만 보고 좋아한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자연미인이 지금도 희주랑 비견될 만큼 충분히 예쁘고.'

[그럼 역시 부족한 건 가슴이었나요?]

'음, 씨컵은 되야지 그래도 좋을 것 같아서.' 로시와 한참 떠들고 있는데 불쑥 미리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아, 죄송해요. 얼굴에 팩하느라 답장 온 줄 몰랐어요.

얼토당토 않은 변명에 어이가 없었다.

'이것 봐. 내가 재촉 안 하니까 지가 다시 보낸 거.'

[주인님의 밀당이 성공하셨군요.]

'밀당은 무슨. 먼저 연락하는 쪽이 원래 똥줄이 타는 게 정상이지. 어디서 감히 돼먹지 못한 어장관리를 나한테 하려고?'

이번에는 내가 깨톡을 읽고도 무시했다. 늘 자신에게 끌려다니던 남자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냥 쌩가고 자버려야지.'

[정말요? 아시겠지만 미리양은 다음 미션 후보자인데요? 호감도 관리를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여기서 미리에게 장단을 맞춰주면 어장에 들어있는 다른 놈들하고 똑같은 취급 받는 거야. 그러니 아예 무시해 버려야지.'

[호오, 차별화 전략인가요?]

'차별화는 무슨. 현실 파악 똑바로 하라는 거지. 지가 공대에서나 여신취급 받지 우리과 오면 저기 효민이 뒤에 말석에 처박힐와꾸밖에 안 되면서.'

나는 깨톡 알림을 해제한 뒤 다시 잠을 청했다.

어장관리녀를 어장에 넣기 위해선, 오히려 무시가 답이다.

* * *

아침에 일어난 도훈은 간만에 개운한 기분이었다.

"으아, 푹 잤다.”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며 폰을 확인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미리에게 깨톡이 몇 개 더 도착해 있었다.

-미리 : 오빠, 자요?

-미리 : 아…. 파티룸 예약 때문에 여쭤보려고 했는데. 내일 연락 주세요 그럼.

도훈은 미리의 톡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프로필이 어제와 다르게 바뀐 것을 확인한 것이다.

'사진 바꿨네.'

[사진이요?]

'응. 어젠 무슨 자연 배경 같은 거였거든. 지금은 자기 얼굴 사진이잖아.'

프로필 사진이 미리의 얼굴 사진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보정을 심하게 한 듯, 실제 얼굴보다 훨씬 예쁘게 나온 사진이었다.

[왜 저러는 걸까요?]

'자기 얼굴 까먹었을까봐 다시 보라는 거지. 내가 지금 공대 여신과 톡을 하고 있다는 걸 상기하라고.'

[풉-. 웃기네요. 미리양이 공대 여신이면, 주인님은 국성대 황태자 아닙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어디서 나를 멍청한 공대 찐따들이랑 도매금으로 엮으려고?' 도훈은 양치질을 하면서 성의 없이 답장을 날렸다.

-도훈 : OO

[이게 뭡니까?]

'뭐긴 뭐야. 이응이응. 알았다고.'

[너무 답신이 짧은 거 아닙니까?]

'상관없어. 열받으라고 일부러 보내는 거니까.' 일찍 일어나 아침부터 화장을 하던 미리는 깨톡 울림에 빙긋이 미소 지었다.

'후후. 도훈 오빠겠지? 분명 깜빡 잠들어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메시질 거야. 당연히 미안해 할 수 밖에. 내가 친히 선톡을 보내줬는데 감히 잠들어 버리다니.'

기쁜 마음으로 폰을 열어보던 미리는 'OO'라고 적힌 짧은 답장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뭐, 뭐야? 설마 지금 저게 다야?'

열심히 얼굴 화장에 공을 들이고 있던 미리는 아침부터 진심으로 빡이 쳤다.

'지금 나한테 이 따위로 했다 이거지? 하- 진짜.'

미리는 대학 입학 후 늘 공주대접을 받고 살아왔다. 신입생 OT 때부터 공대 오빠들이 여신이라고 떠받드는 바람에,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갔다.

그 와중에 나름 얼굴도 예뻤기 때문에 평범한 다른 여자 동기들보다 훨씬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1학년 내내 제 돈으로 점심을 한 번 사먹은 적도 없었고, 찻값을 낸적도 없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밥 사주는 셔틀과, 커피 사주는 셔틀이 그녀를 받들어 모셨다.

그뿐인가? 어려운 레포트가 있으면 자진해서 노예를 자청하는 공대 오빠들이 있었다. 시험을 볼 때면 5개년 족보를 정성스레 타이핑해서 정리해주는 선배도 있었다.

그녀가 대학을 다니면서 오로지 하는 일이라고는, 남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화장에 심하게 공을 들이는 것뿐이었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단점을 커버하고 한 듯 안한 듯 한 자연스러운 느낌을 내는 화장법을 익히기 위해 한학기를 연마했다. 그리곤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모두에게 친절한 듯 방긋방긋 웃어주기만 하면 남자들이 알아서 떠받들여 모시는 것이다.

하지만 도훈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는 마치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어젯밤의 대화도 다시 돌이켜 보니, 귀찮아서 마지 못해 대답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리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이! 나를 이런식으로 대접했다 이거야? 감히 나한테?'

물론 도훈이 상당히 잘생긴 했다. 한학년에 남자가 100명이 넘는다는 공대에서도, 도훈 정도의 외모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자신을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한 사람은 도훈이 처음이었다.

오기가 치민 미리는 꾹 화를 참고 정성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미리 : 오빠, 오늘 혹시 점심때 시간 되시면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영어회화 조모임 관련해서 상의드릴게 있어서요.

미리가 이토록 스스로를 낮추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도훈을 어장안에 넣겠다는 마음으로 꾹 참았다.

-도훈 : 별일 아니면 그냥 톡으로 얘기해.

!!??

도훈의 답장을 본 미리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토, 톡으로 얘기를 하라고? 내가 직접 보자고 했는데?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 아냐?”

미리는 순간 도훈이 자신을 다른 여자랑 착각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 조모임에 속한 오신아와 헛갈려서 성의 없이 대답하는 게 아니냐면서.

하지만 어제 새벽 가장 잘 나온 사진으로 프로필이 바뀌어 있었다. 설사 이름을 착각했다고 해도 사진을 봤으면 절대 이런 반응이 나올 수가 없었다.

"하- 존나 빡치네?”

미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어쨌든 화장을 끝까지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1학기 때 3학년 부잣집 선배가 사준 명품 가방과, 자신의 생일 날 동기가 사준 명품 구두를 일부러 꺼내 신었다.

'나를 우습게 만들었다 이거지? 내가 어떤 여잔 지 똑똑히 보여 주겠어.'

미리가 각오를 다지며 집을 나섰다.

* * *

오전 수업을 끝마친 도훈은 이어질 전공 수업 때문에 2학년 동기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오빠아. 저 미리예요.

"누구라고?”

-…그 영어 조모임, 윤미리요. 기억 안나세요?

생각해보니 단톡방을 만들 때 번호를 교환한 기억이 났다.

'아 맞다. 번호도 알려줬었구나.'

"어, 그래. 왜? 조모임 관련해서 상의할 거 있다더니.”

"도훈이형. 통화하고 오실 거예요? 뭘로 드실래요?”

"아무거나. 너랑 같은 거 시켜줘.”

"네, 형.”

2학년 동기들을 먼저 식당으로 들여보낸 도훈은 길거리에서 담배를 꼬나물며 귀찮은 표정으로 통화를 계속했다.

"미안. 애들하고 밥먹으러 와가지고.”

-아…. 식사 중이신가 보구나.

'알았으면 좀 끊어라.'

"응.”

-저 그럼 식사 끝나고 잠시 뵐 수 있을까요?

"그냥 통화로 하면 안되나?”

-…그, 그게… 암튼 직접 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 알았어 그럼. 학생 식당 근처 커피숍에서 보자. 30분뒤에.”

-네, 오빠. 그때 뵈요 그럼.

"응.”

툭 전화를 끊은 도훈은 남은 담배를 마저 피우며 실실 쪼갰다.

[근데 미리양이 왜 주인님한테 저렇게 적극적인 걸까요?]

'컬렉션인가 보지.'

[컬렉션이요?]

'어장 안에 몸 좋고 운동 잘하는 체대생 오빠 하나 넣고 싶은데, 내가 마음대로 안 따라주니까 똥줄이 타나보지. 이제껏 자신을 하찮게 여긴 남자를 만나본적 없을테니까.'

[호오.]

'잘됐네. 미션도 걸려있겠다, 어디 한번 본격적으로 공략 들어가 볼까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