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5. 대학 축제-10-
"전 찬성요."
"나도 도훈이 의견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근데 혹시 오빠네 과도 축제 준비 따로 해요?"
모임에 대한 의견을 대해 묻는데 미리가 느닷없이 도훈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쟤는 또 왜 저래?'
[역시 무임승차녀라 조모임 따위는 관심 없고 주인님한테 꼬리 칠 기회만 엿보는 것 같은데요?]
'하여간 불여시 같은 년.'
[불여시는 좀 과하지 않나요? 그래도 주인님한테 나름 관심을 보이는 건데요.]
'그게 아니라 날로 먹는다는 소리야. 불여시가 사람 생간을 날로 빼먹듯이.'
[아하.]
"음? 물론 주막을 열긴 하는데, 이번 주에 조모임을 하자는 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고."
"오, 주막요? 제 친구들하고 놀러 가도 돼요?"
미리가 조모임과는 상관없는 질문을 계속 던지자, 경영대 재학생인 범우가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그건 나중에 개인적으로 묻고 일단 약속부터 정하자. 다들 이번 주 언제 시간 돼?"
"쳇, 내가 뭐라고 했다고···."
미리는 중간에 말을 끊은 범우를 흘겨보며 혼자서 구시렁거렸다.
"주말에는 다들 바쁘실 테니까 주중에 해요."
"주중 언제?"
"저는 오늘도 괜찮아요."
범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오늘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힘들어. 내일은 어때?"
"내일은 제가 안 돼요. 가족 모임요."
"사람이 많으니 시간 맞추기가 영 어렵네."
대화가 중구난방으로 흩어지자 도훈이 중재를 시도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일단 이번 주 각자 안되는 날을 알려 줘. 그날을 빼면 더 날짜 잡기 쉬울 것 같으니까."
"그거 괜찮네요."
"오빠는 뭐 약속 없어요?"
미리는 여전히 모임에는 관심 없다는 투로 도훈을 향해 물었다.
도훈은 자꾸 대화의 흐름을 끊은 미리가 피곤했지만, 그녀가 공략대상이라는 걸 상기하고 꾹 참았다.
'하여간 어장관리 미션만 끝나봐라.'
"따로 약속 없는데?"
"에에? 진짜요? 여자친구분이랑 데이트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 헤에."
너무나 뻔한 수작에 도훈은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
'호구조사 훅 들어오네.'
[네?]
'저건 내 스케줄을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여자친구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라는 거지.'
[아하, 역시 어장 관리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요.]
"없는데. 여자친구."
"정말요? 와, 당연히 있는 줄 알았는데."
"뭐야? 왜 도훈이는 묻고 나는 안 물어보는데? 난 딱봐도 없게 생겼냐?"
범우가 듣고 있다가 어이가 없었는지 물었다.
"···오빠는 뭐. 암튼 알겠어요."
미리는 여전히 범우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놓고 하는 무시에 범우가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접이 익숙한 듯 크게 문제 삼진 않았다.
[도가 좀 지나치군요, 미리양은.]
'공대에서 여신 대접받고 살다 보니 남자를 고르는 처지에만 익숙한 거지.'
[고르는 처지요?]
'남초 특성상 여자가 무조건 갑의 위치란 말이지. 들이대는 남학생 중에서 자기 취향에 따라 맞춤형 어장을 구성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 미리에게 범우 같이 평범한 외모가 눈에 들어 올리가 없지.'
[와, 인성 진짜. 저런 안하무인은 오랜만에 봅니다.]
'내버려 둬. 나도 사실 꼴 보기 싫은데 공략 대상이라 참는 거니까.' 다들 안되는 날을 뽑자 금요일이 마침 비었다.
"이번주에 끝내려면 금요일밖에 없네.”
"근데 우리 하루만에 끝낼 수 있을까? 조모임 과제가 정확히 뭐였지?"
"일상 회화 상황극이요. 무조건 4명 이상 대화에 참여하는."
"스크립트만 잘 짜면 되겠다. 외우는 거야 나중에 혼자서 가능하니까."
"그래요. 그리고 금요일이니까 뭐하면 그냥 날 밤 새서라도 그날 끝낸다는 각오로 하면 되죠."
미리가 사전 예고라도 하듯 선언했다.
"날을 새다니? 도서관 세미나실은 저녁 10시면 마감일텐데?"
"세미나실 말고요. 어차피 역할극으로 진행할 거면 대사도 쳐야하니까 도서관에선 민폐잖아요."
"그럼 어디서 하자고? 너네 집 비어?"
"집은 좀 그렇고···. 파티 룸이라도 하나 잡는 건 어때요?"
"파티룸이 뭐야?"
순진한 범석이 눈을 껌뻑거렸다. 태어나서 생전 처음 듣는 단어 같았다. 그러자 조용히 듣고만 있던 오신아가 간만에 입을 열었다.
"···모텔?"
"어. 잘 아네? 혹시 가봤어?
"아니. 난 그런데 안 가는데?"
신아가 당황했는지 자기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저렇게 말하면 빼박 다닌다는 얘기밖에 더 되나?'
[그러게요. 신아양도 표정을 잘 못 숨기는군요.]
'허구헌날 랜덤 채팅으로 남자 꼬시는 데 모텔이라면 뻔질나게 드나들었겠지. 괜히 지가 찔려서 저러는 거야.'
오신아의 비밀스러운 취미는 랜덤채팅으로 익명의 남자와 만나는 일이었다. 도훈도 한번 그녀에게 접근한 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몰래 찔러봤는데 별 반응이 없었지?'
[후에 다시 대화를 걸었어야 했는데 주인님이 바쁘셔서 그냥 넘기고 말았죠. 그리고 흐지부지 되었고요.]
'하긴. 나 말고도 대화하는 사람이 한 둘이었겠어? 그때 계속 꼬셨으면 이미 공략했을 텐데.'
도훈은 영어 회화 조모임에서 오신아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게 슴츠레하게 뜬 눈은 색기가 넘쳤고, 커다란 가슴은 펑퍼즘한 옷으로도 숨길 수 없게 튀어나와 있었다.
'솔직히 무임 승차녀보다 신아쪽이 훨씬 먹음직스럽긴 한데.'
[혹시 주인님 취향이십니까?]
'둘 중 골라 먹을 수만 있다면?'
[하여간 주인님도 못 말리겠군요.]
"정말 모텔에서 조모임을 하자고?"
범석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되물었다. 모솔인 그로선, 모텔은 커녕 아직 여자친구를 사겨본 적도 없었던것이다.
"왜 자꾸 모텔이래요? 파티룸이라니까. 요샌 시험기간에 시험공부하러도 많이들 가는구만. 시원하고 조용하고."
"그, 그래?"
도훈은 어차피 미리를 공략해야 하는 입장이라 모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긴 역할극 연습을 하려면 거기도 좋긴 하겠다. 그럼 이번 주 금요일에 수업 끝나고 모이는 걸로?"
"좋아요."
"기왕이면 이번 주에 끝내는 게 최고지. 다음주는 축제기간인데."
"신아는 어떻게 할래?"
"저도 뭐 상관없어요."
신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폰만 만지작거렸다.
'또 랜덤 채팅 중인가 본데?'
[정말 폰을 손에서 떼질 않는군요. 저 정도면 중독 아닙니까?]
'수업 시간에 하는 게 더 짜릿한가 보지. 아니면 최근에 연락하는 사람이 있다던가.'
회의가 대충 정리되자 강의실 밖으로 나갔던 제니퍼가 다시 들어왔다.
"조모임 논의는 끝났나요? 그럼 오늘 수업 들어갈게요."
제니퍼는 평소처럼 활기차게 수업을 진행했다. 도훈은 앞으로 3일 뒤에 있을 모텔 조모임을 생각하며 미리를 어떻게 공략할지 고심했다.
* * *
오후 수업을 끝낸 도훈이 도서관에 가려던 참이었다.
"응? 이 번호는···.”
여간해선 먼저 전화를 걸지 않는 육정음이 전화를 걸어왔다.
"어, 정음아.”
-오빠. 수업 끝나셨어요?
"방금 끝냈어. 무슨 일이야?”
-음, 다름이 아니고 주점 일 때문에요.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정음은 2학기부터 1학년 과대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1학년이 주축이 된 집행부에서 그녀는 나름 부회장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응, 말해.”
-서현이랑 얘기해 봤는데 술안주로 살 재료를 싸게 사려면 오늘, 내일 중으로 인터넷으로 배달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근데 예산이···
이번 축제 주점 준비는 1학년 집행부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다. 도훈은 회장으로서 크게 가지를 쳐주긴 하지만, 세부적인 사항들은 과대인 정음과 총무인 서현이 도맡아서 했다.
한참 설명을 듣던 도훈은 쿨하게 결론을 내주었다.
"서현이한테도 어제 얘기했지만 돈 아끼지 말고 일단 좋은 재료로 넉넉하게 사도록 해.”
-그래도 될까요?
"우리 과 이번 주점 컨셉은 싸고 양을 푸짐하게 주는 그런 게 아니야. 안주 하나를 팔아도 퀄리티있게 만들어 낼 거야. 어차피 예산은 가격을 올려받으면 되는 거니까, 너무 세세한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 네. 그럼 그렇게 진행해 볼게요.
"정음이가 중간에서 고생이 많구나.”
-아, 아니에요. 저희가 당연히 해야죠.
정음은 언제나처럼 늘 밝고 씩씩했다.
-저 근데 오빠···.
"응? 무슨 할말있어?”
통화를 끝낼 타이밍인데 정음이 쉽게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이건 정말 개인적인 건데요···.
"편히 말해봐. 무슨 일인데?”
-오빠도 대회 나가시잖아요. 미스터 국성.
"어어. 왜?”
-아···. 오빠는 이런 운동을 많이 해보셨을 것 같아서 여쭤보려고요.
"뭔데?”
-그···. 아, 죄송해요. 민망해서 말을 못 하겠어요.
"아니야. 말해봐. 준비하는 데 어려운 거 있어?”
정음은 한참 쩔쩔매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가, 가슴을 키우려면 어떤 운동 위주로 해야 돼요?
"응?”
도훈은 살짝 당황했다.
'가슴을 키운다고?'
[네, 방금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아니 남자라면 대흉근을 키운다 치지만 여자들 유방을 키워주는 운동도 있나?'
[글쎄요?]
-아, 아니에요. 제가 괜한 질문을 했나봐요. 죄송합니다.
정음이 민망함에 황급히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도훈이 붙잡았다.
"잠깐만.”
-네?
"아무래도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너 지금 어디야?”
-저 학과실요.
"그럼···. 잠깐 나올래?”
-오빠 시간 괜찮으세요? 저녁에 약속 있으시지 않으세요?
"에이, 정음이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쯤이야.”
잠시 후 정음이 민망한 표정으로 도훈을 만났다. 평소와 달리 눈도 잘 못 마주치는 게 어지간히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질문을···.”
"아니야. 내가 PT 트레이너는 아니지만 어느정도는 지식이 있으니까.”
"네, 그래서 오빠한테 여쭤봤던 거예요.”
"음, 근데 굳이 특정 부위를 키우려는 이유가 있어?”
도훈의 질문에 정음이 고개를 푹 떨궜다.
그러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애들이 그러는데 의상이 좀···.”
"의상이?”
"네, 좀 파여있다고 해서···. 그게 중요하다고.”
"누가 그러는데?”
"···희주랑 경희가요.”
'하, 요것들이 순진한 정음이한테 못된 것만 가르쳤네.'
[희주랑 경희양은 둘 다 글래머 아닙니까?]
'뭐, 글래머라기엔 좀 부족하지만 둘 다 C컵이니 작은 사이즈는 아니지.'
[하긴 서현양 정도는 되어야 글래머라고 부를 수 있겠군요.]
'정음이가 대충 꽉b정도는 되나?'
[꽉비요?]
'꽉찬 비.'
[아마도요.]
'절대로 작은 편은 아닌데, 워낙에 큰 애들이 많이 좀 꿀릴 순있겠네.'
[모든건 상대적이니까요.]
'안 되겠다. 정음이도 최소 C로 만들어 줘야겠다.'
[아까는 특정 부위만 키우기 어렵다지 않았습니까? 근육이 아니라 피하지방층이면요.]
'그건 맞는데, 어차피 내가 쓰는 방법은 마법이라서.'
[설마, 마법의 정액을?]
'응. 풍유환 좀 발라줘야지.' 도훈은 정음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할 비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운동으로 의한 것은 아니고, 마법의 정액을 가슴에 펴 발라 가슴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갑자기 가슴이 커지면 본인 스스로도 의심할 수 있잖아.'
[그렇겠죠.]
'그러니 특별한 운동을 해서 커진 것처럼 믿게 만들어야겠어.'
"정음아. 오늘 저녁 시간 돼?”
"네? 시간이요?”
"말 나온 김에 몇 가지 자세 좀 알려주려고.”
"어, 어디서요?”
"우리 집 몇 번 가봤지? 2층에 운동룸 있잖아. 거기서 알려줄게.”
"아···.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오빠 평일에 바쁘시잖아요.”
정음의 로테이션은 날짜는 일요일.
그녀는 도훈이 평일 스케줄이 꽉 차 있어 주말에만 자신을 만난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박회장 건으로 로테이션이 깨졌기 때문에 도훈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오늘은 딱히 별일 없어. 학교 헬스장도 이미 닫았고.”
"아···. 그렇겠네요.”
"일단 몇가지만 배우고 나면 대회 전까지 혼자서 준비할 수 있을 거야.”
"네, 오빠. 고마워요.”
도훈은 정음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축제 준비에 관련된 사무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만큼 정음이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음이는 참 착실한 것 같아. 뭘 맡겨도 믿을 수 있겠어.'
[정음양의 특징이죠. 머리 회전이 좀 아쉽긴 하지만요.]
'사람이 다 잘할 수 있나. 그러니 서현이처럼 여우같은 계집애가 옆에 붙어 있어 줘야지.'
"옷은 그걸로 되겠어?”
"네. 오늘은 운동복이라 괜찮아요.”
정음은 빨간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는데 1학년 실습과목 때문에 아예 학교로 입고 온 것 같았다. 도훈은 뭘 먼저 가르쳐야 정음이 속을지 고민했다.
"원래 남자들 가슴 키우는 운동은 대표적인 게 벤치 프레스거든.”
"네.”
"근데 단기간에 해서 될 건 아니고, 차라리 등운동이 더 나을지도 몰라.”
"등 운동이요?”
"응. 예로부터 몸을 크게 만들려면 등부터 키우라고 하잖아.”
"아항.”
도훈은 어차피 마지막에 마법의 정액으로 발라버릴 참이었기 때문에 나오는대로 지껄였다.
"턱걸이는 좀 할 수 있어?”
"턱걸이요? 고등학교 때 체력장할 때 해봤어요.”
"아니 매달리기 말고 당기는 거. 풀업.”
"어떻게 하는 건데요?”
도훈이 머신에 부착된 철봉에 매달리더니 가볍게 풀업을 당겼다. 사실 지금의 그에겐 한 번도 안 쉬고 100개는 당길 정도로 가벼운 운동이었다.
"이렇게 팔을 쭉 폈다가 올라가는 거야.”
"아하.”
"근데 초보자들은 한 개도 어려··· 어라?”
도훈은 정음의 턱걸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작하자마자 정식 자세로 가볍게 당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훈은 정음의 운동능력에 경악하며 흥미롭게 그녀를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