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4. 대학 축제-9-
* * *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온 도훈은 학교 식당 앞에서 남자 후배들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 그래. 밥 먹으러 왔어?”
"넵.”
지금은 군대 간 태영과 자주 어울리던 1학년 남자 후배들이었다. 모처럼 후배들을 만난 도훈은 점심을 사주려고 했다. 어제 여학생들에게만 밥을 사준 게 생각나서였다.
물론 축제 준비로 고생하는 집행부를 위로차 쏜 것이었지만, 괜히 소문이 와전되면 여자 후배만 챙기고 남자들에겐 관심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학교도 조그만 사회다 보니 평판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학식에서 끊는 식권이라고 해봐야 인당 몇 천원 정도.
이제 갑부가 된 도훈에게는 식당 전체에 매일 골든벨을 울려도 부담이 없는 수준이기도 했다.
"먹고 싶은 거 다 골라봐. 형이 사줄게.”
"괜찮습니다, 회장님.”
괜히 미안해 사양하는 줄 알고 도훈이 재차 권했다.
"너희들 다섯 명 식권 끊어줄 정도는 되니까 얼른 골라 인마. 형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저, 그게 아니라···.”
후배들의 사정을 들어보니 오늘 밥을 살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엥?”
"어젯밤 똥 싼 사람이 오늘 점심 쏘기로 했거든요.”
"지훈이가 당첨이에요.”
"솔직히 억울하다. 니들이 갱 호응만 잘해줬어도···.”
알고 보니 이들은 조만간 열릴 축제 게임 대회를 대비해 밤마다 몇 시간씩 연습게임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저 조한 성적을 기록한 이가 벌칙으로 다음 날 밥을 사기로 했다는것. 자기들끼리 분발하기 위해 만든 규칙이니만큼 도훈이 괜히 껴들어서 룰을 깨뜨리기 미안했다.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나저나 이래 가지고 우리 예선 통과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 갑자기 태영이가 그림네. 그넘아가 정글 하나는 기가 막 히게 잘 돌았는데.”
도훈이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는데 오랜만에 태영이 언급되었다.
"군대 간 태영이 말이야?”
"네. 걔 완전 게임 폐인이었잖아요. 그래도 우리 학년에선 가장 티어 높았거든요. 어쩌면 과에서 1등일지도.”
태영은 체육과 1학년 중에서 가장 게임을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태영 군도 잘하는 것이 있었군요.]
'그러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2학기 때 게임 대회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군대를 더 미뤘다가 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니야. 게임 대회 우승 따위가 뭐라고? 태영인 하루라도 빨리 간 게 본인한테 더 좋은 일이었을 거야.'
"혹시 도훈이 형도 롤하세요?”
"아니. 나는 게임은 그닥···.”
"와, 형도 못 하시는 게 있구나.”
다들 의외라는 반응.
사실 후배들 사이에서 도훈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 하는 것이 없었다. 명실상부한 체육과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하의 도훈도 게임만큼은 전혀 관심도 없고, 또 잘하지도 않았다. 남학생들 사이에서 게임 잘하는 학생이 선망의 대상으로 비친다는 점을 봤을 때 도훈의 유일한 약점이기도 했다.
[주인님은 게임은 전혀 못 하십니까?]
'그건 아닌데···. 내가 즐겨 했던 게임은 이미 한물갔거든. 게 임이라는 게 매년 새로운 게 쏟아지니까.'
[그렇군요.]
"역시 인싸는 다르구나.”
"맞아. 우리 같은 아싸랑 당연히 노는 물이 다르시겠지.”
"그래도 센스 좋으시니까 맘먹고 하시면 금방 플레는 찍을 실듯.”
도훈은 본인이 끼어들 주제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후배들 떠드는 얘기를 조용히 경청하기만 했다. 다섯 명은 식사를 받는 내내 어제 연습게임에서 누가 잘했니 못했니, 서로 포지션을 바꿔야 한다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대부분 축약된 게임용어였기 때문에 귀로 듣고 있어도 외국어처럼 낯설기만 했다.
[남학생들 사이에선 정말 게임이 대세인가 보군요. 저렇게 떠들면서 지치지도 않는 걸 보면요.]
'아무래도 우리 세대하곤 다르지. 쟤들은 학교 끝나고 PC방 가는 게 거의 일상이었거든. 지금 40대 들은 컴퓨터 게임을 그닥 즐겨한 세대가 아니야. PC방도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나 등장했고. 우리 땐 그나마 할 수 있는 취미가 당구장이 유일했어.'
[그래도 나중에 대학생 되서 게임을 좀 하시지 않았던가요?]
'그때 인기 있던 게임은 스타크래프트가 고작이었어. 지금은 롤이니 배들 그라운드니 오버워치 같은 거니까···. 그리고 나이 먹고 따라가는 것도 벅차. 피지컬도 갈수록 떨어지니까 애들한테 밀리기만 하고. 지기만 하는 게임이 뭐가 재밌겠어? 이겨야 재밌지.'
[그래도 주인님은 이제 20대 초반이신데, 대화에 끼어들려면 게임에 대해 조금은 아셔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다. 이것도 흥미가 생겨야 빠져들 텐데, 나이 먹으니까 게임이 영 안 당기더라고.'
[왜 그렇습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인생이 더 흥미진진한 게임이거든. 레벨업하는 건 회사에서 연봉 올리고 승진하는 거랑 비슷하고, 아이템모으는 건 외제 차나 값비싼 전자제품, 명품 옷을 사는 것과 유사하지.'
[호오.]
'그뿐이겠어? 못된 상사는 문자 그대로 보스몹이고 자질구레하게 터지는 사건 사고는 게임에 등장하는 이벤트라고 생각하면 돼.
즉,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현실이란 게임에 빠져들고 가상 게임하곤 멀어져 가는 법이랄까? 철이 드는 걸지도 모르지만.'
[역시나 독특한 해석이군요.]
도훈이 조용히 밥만 먹고 있는 게 민망했던지 후배 하나가 넌지시 물어왔다. 괜히 자기들만 아는 얘기로 도훈을 소외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형은 그럼 게임 같은 거 전혀 안 하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어? 그럼 어떤 게임 하세요?”
도훈은 예전 대학생 때 즐겼던 게임을 말하려다가 너무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을 아꼈다.
"음··· 그게 너희는 잘 모를 거 같아서.”
'괜히 한다고 말했나? 그냥 관심 없다고 할걸.'
[주인님도 최근에 게임 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게임을 해? 아···. 설마 천상 크래프트?'
[네. 그것도 일종의 게임이니까요. 아니, 어지간한 게임들은 싹다 발라먹을 수준의 현실감 넘치는 게임이라고 봐야죠.]
천상 크래프트의 게임 모드를 떠올린 도훈이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RPG같은 거야.”
"오, 혹시 그거 플스 게임이에요? 저도 집에 한 대 있는데.”
"도훈이 형은 비디오 게임 하시는구나.”
"아니 그건 아닌데···.”
도훈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천상크래프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차피 설명해봐야 믿지도 않을 것이고, 상세히 설명하자니 플레이어의 규칙에 위배되었다.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게임이야.”
"인디 게임요?”
"얼리엑세스 같은 건가 보네.”
얼리엑세스란 게임이 출시되지 않은 상태로 개발자들이 미리 공개한 게임을 뜻했다. 정식 출시가 아니다 보니, 게임 중에도 계속 대규모 패치로 게임이 바뀐다는 게 특징이었다. 또 미완성이다 보니 소수의 게이머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었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둘러대는 게 낫겠네.'
"응, 맞아. 무협 기반 RPG게임이라고 불러야 하나?”
"오. 무협 게임. 재밌겠다.”
"정식 출시가 언제래요? 개발사는요?”
도훈은 우연히 알게 된 게임이라 잘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아는 친구가 베타테스터인데 우연히 참여 코드를 보내줬다고.
"그냥 가끔 시간 날 때만 해. 근데 난이도가 너무 어렵더라.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완전 하드코어 모드네요.”
"하드코어?”
"로그라이크류 기반 RPG게임이 대체로 그렇거든요. 죽으면 부활하는 거 없이 처음부터 완전히 리셋되는 거요. 그런 걸 하드코어라고 해요.”
도훈은 음란한 의미로 알고 있던 단어가 게임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하드코어라면 내가 좀 하는데.'
[주인님은 늘 그 생각뿐이시군요.]
안 그래도 계속 죽어나가던 도훈은 게임을 잘하는 후배들에게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물었다.
"그런 게임은 어떻게 공략하는 거야?”
"무슨 상황인데요?”
도훈은 자신이 겪을 일을 적당히 축약해서 들려주었다. 튜토리 얼이 끝나고 처음 주어진 미션에서 진도를 못 나가는 중이라면서.
"들어보니 난이도가 꽤 어렵네요. 제 생각엔 아마 그 여자 캐릭터들이 공략의 열쇠일 것 같아요.”
"정말?”
"직접 싸워봤는데 엄청 셌다면서요?”
"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만큼.”
"그럼 그 여캐들은 대적하기 위한 캐릭터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난이도가 높은 게임이라도 공략불가인 게임은 없거든요.”
"맞아요. 너무 어려우면 사람들이 금방 포기해 버리니까.”
도훈은 게임을 좋아하는 후배들에게 몇 가지 팁을 전해 들었다.
확실히 밥 먹고 게임만 하는 애들이라 그런지 대강 설명만 듣고도 마치 천상 크래프트를 직접 해본 사람마냥 게임의 핵심을 짚어내는 것이었다.
"와, 니들 정말 잘하는구나. 많은 도움이 됐다.”
"정말요? 회장님한테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도훈은 마침 오전에 통화 한 하린의 제안이 떠올랐다.
'가만. 하린이가 후배들 소개팅 주선해 달라고 했는데 얘들이라면···.'
"근데 너희들 혹시 여자친구 있는 애들 있어?”
"저랑 지훈이는요. 나머진 없고요.”
"그래? 그럼 너희 셋은 솔로란 말이지?”
"네.”
"근데 왜요?”
"아니 다름이 아니고···.”
도훈은 뭐라고 설명할까 하다 하린을 알바했을 때 만난 동생이라고 둘러댔다.
"내가 올봄에 편의점 알바 했었잖아. 그때 사장 딸이랑 가끔 주말 알바하면서 친해졌거든.”
"오오! 사장 딸이요?”
"예뻐요?”
"걔가 재수해서 지방교대를 갔는데···.”
교대생이라는 소리에 체육과 1학년 후배들이 입이 귀에 걸렸다.
"헐, 교대생이라고요?”
"어. 이번 축제 때 시간 내서 친구들이랑 서울 올라온다더라고.
혹시 너희들만 괜찮으면 소개해 줄까 하고.”
"회, 회장님!”
"평생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여윽시 우리 회장님이다!”
교대생을 소개해 준다는 말에 솔로인 후배들이 감격한 표정으로 도훈을 떠받들었다. 심지어 여자친구가 있다는 나머지 둘까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아니 뭐 아직 확정은 아닌데 일단 물어는 보려고.”
"형, 진짜 저희 대회 준비 열심히 할게요. 꼭 우승해서 체육교 육과의 명예를 드높이겠습니다!”
"아니 명예까지는···.”
"그리고 형 하시는 게임 막힐 때 저한테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RPG게임 엄청 많이 해봤거든요. 아무리 새로운 게임이라도 공략하는 방법은 다 있어요.”
"그래, 고맙다.”
그렇게 게임 공략 팁 전수와 소개팅을 맞바꾼 도훈은 만족스러운 점심 식사를 마쳤다.
'괜찮겠지? 애들 소개시켜 줘도?'
[게임 폐인이란게 좀 걸리긴 하지만, 요즘 남자 대학생 중에서 게임 안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있으려고요.]
'그래. 뭐 나야 소개만 시켜주면 그만이지.'
* * *
오후 수업은 1학점짜리 영어회화 수업이었다.
금발의 미녀 강사 제니퍼가 수업하는.
제니퍼는 다음 주 축제를 대비해 휴강 공지를 알려왔다.
"···해서 축제 끝난 다음주엔 조모임 과제 제출이 있겠습니다.”
"네?”
"갑자기 조모임 과제라고요?”
휴강 공지 뒤에 곧바로 과제 제출이 이어지자 다들 반발했다.
조삼모사라고 하지만, 차라리 과제 제출을 먼저하고 휴강공지를 뒤에 했더라면 반발이 훨씬 덜했을 것이다.
"교수님. 준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한데요.”
"맞아요. 갑자기 공지하시면···.”
제니퍼도 집단적인 반발에 당황했는지 잠시 시간을 주었다.
"그럼 조별로 잠시 모여서 얘기를 해보세요.”
그렇게 도훈의 조가 오랜만에 모였다. 학기 초 단톡방을 미리 만들긴 했지만, 별도의 조모임 과제가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진전이 없던 참이었다.
도훈의 조에 속한 학생은 같은 동갑내기인 경영대생 범우와, 자칭 공대미녀라는 윤미리, 그리고 비밀스러운 취미를 지닌 오신아였다.
"오랜만이네요 오빠?”
"어, 그렇네.”
윤미리는 조모임이 시작되자마자 도훈에게 관심을 보였다.
'쟤가 무임승차한다는 걔였지?'
[맞습니다. 미션도 하나 걸려있죠.]
'미션이 뭐였더라?'
[어장관리녀를 어장에 넣어라 미션입니다.]
'맞네. 한동안 다른 일로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네.'
"근데 교수님 좀 너무하지 않아요? 다음 주 축제라 대부분 휴강 주는데 거기에 조모임 과제를 줘버리다니.”
여학생들이 불만을 토로하는데 범우가 침착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원래 영어회화 수업 빡센 걸로 유명하잖아. 지금까지 잠잠했던 게 안 그래도 신기하긴 했어. 작년에 우리과 졸업반 선배 한 명은 마지막 과제 제출 못 했다고 F 떠서 방학 때 급하게 재수강 했거든. 그 과목 때문에 졸업학점 부족해서 인턴 합격한 회사에서 짤릴 뻔 했다고.”
"와···. 심하다 진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러니까 이번에도 혹시나 축제 핑계로 괜히 과제 제출 미뤘다가 우리 조 전체가 패스 못할 수도 있다는 소리야.”
도훈 역시 학점 관리에 신경쓰고 있었기 때문에 재수강을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 축제 전에 미리 끝내 버릴까? 아무래도 축제 시작되면 각자 스케줄 때문에 모이기 힘들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