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3. 대학 축제-8-
상대는 너무 많고, 도훈의 편은 한 명도 없었다. 같은 편이 되어줄 것이라 믿었던 옥봉 사선자는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볼 뿐이었다.
'젠장. 너무 성급하게 공격했나?'
객잔에서 마주한 상대는 튜토리얼용 산적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나 맨 처음 기습을 가했던 주방장은 기골이 장대한 게 주방장인지 조폭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일 대 다수로 싸우는 것은 중과부적.
도훈은 탁자 앞에 놓인 젓가락 통을 눈여겨보았다.
'잘하면···.'
도훈이 익힌 백보신권에는 투척술 분야가 따로 있었다. 주로 비도술이라 불리는 암기를 뿌리는 기술인데, 연습을 해본 결과 상당한 위력이 있었다.
도훈은 달려드는 상대를 보고 급히 젓가락 통에서 젓가락을 뽑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젓가락을 끼운 도훈이 사방을 향해 흩뿌리듯 젓가락을 쏘아냈다.
슈숙-!
도훈이 뿜어낸 나무 젓가락이 부챗살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덤벼드는 마교 일당의 몸을 관통했다. 이마에 맞은 놈은 머리에 구멍이 났고, 심장을 꿰뚫린 놈은 그대로 즉사했다.
동시에 서너 명이 고꾸라지자 옥봉 사선자 중 한 명이 탄성을 쏟아냈다.
"놀라운 신위군요. 대체 누구일까요?”
"들은 적도 본적도 없는, 근본 없는 무공이구나. 아마도 사악한 마교의 무리일지도···.”
"마교라면 본원의 주적이 아닙니까?”
옥봉 사선자가 한 이야기를 엿들은 왕호충이 독주에 당한 한쪽 눈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무림인이라면 저희를 도와주시오. 저자는 요새 떠오르는 흉악한 마두이외다. 느닷없이 내 얼굴에 독주를 뿌리더니 우리 점원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마두라고?”
듣고 있던 도훈이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무슨 헛소리냐? 술에다 독을 탄 것은 네놈이잖아?”
"새빨간 거짓말이요! 일부러 시비를 걸기 위해 수중에 품고 다니던 극독을 술에 타 나에게 뿌린 것이요.”
왕호충은 연기가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옥봉 사선자는 누구의 말이 맞는지 진실을 가릴 수 없었다. 특히 사선자는 일신의 무공은 빼어난 편이나,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림의 간악한 흉계와 이간질에 대해 전혀 면역이 없는 상태였다.
"이 자의 말이 사실이요?”
옥봉 사선자 중 가장 맏이인 금소소가 도훈에게 물었다.
도훈은 당연히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뭔 개소리야? 저 새끼가 독주를 나한테 줬다니까!”
"사저, 말이 거친 것이 정파의 소속은 절대 아닌 듯 하옵니다.”
"바지춤도 불룩한 것이 위험한 암기를 숨기고 있는 것으로도 보이고요.”
옥봉사선자는 도훈의 행색과 말투를 비난하며 그를 의심했다.
이에 금소소가 다시 도훈에게 물었다.
"그대가 진정 사악한마교의 무리가 아니라면 출신과 별호를 대보시오.”
"아니···.”
도훈은 점점 어이가 없었다.
독주를 뿌린 장면을 그들도 뻔히 봤을 터인데, 왕호충의 간계에 속아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친 제작자 새끼. 여자 캐릭터 능지는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그냥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처자들이 아닐까요?]
'그니까 무슨 무림인이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순진하냐고.' 도훈은 어이가 없었지만 대충 둘러댔다.
"저는 화산파···.”
"화산?”
"화산파 누구요?”
이번엔 금소소 옆에 있던 매산산과 곡청청이 부쩍 관심을 보였다. 도훈은 그들의 눈빛을 보고 대답을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좆됐다. 화산파에 아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주, 주인님. 생각없이 막 나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뭘 어째? 일단 사기치고 보는 거지.'
"···실은 정식이 아니고 속가제자로서···.”
도훈이 순간 머뭇거리는 걸 본 금소소가 다시 물었다.
"속가라면 누구의 제자입니까?”
"······.”
도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무림 체계를 전혀 모르는 탓이었다. 당장 장문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몇 대 제자니 사부가 누구니 하는 기초적인 질문에도 입도 뻥긋 못하는 것이었다.
왕호충은 눈치가 빠른자로 도훈이 소속을 대지 못하자 이를 기회로 여겼다.
"보셨죠? 저자는 정파를 사칭하고 다니는 사악한 마두라니까요? 어디 정파의 제자가 독공을 쓴답니까?”
"네 이놈!”
왕호충에 선동당한 옥봉 사선자가 일제히 무기를 뽑았다.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금소소는 깃털이 화려하게 달린 철 부채를 펼쳤는데 그 기세가 무척 매서웠다.
"어디서 사악한 마두가 정파인 행세를 한단 말이냐!”
"사저. 사부님께서 무림에 출두하면 꼭 마인을 격멸하라고 하셨습니다!”
"맞아요. 다른 파도 아니고, 저희 사조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화산파를 들먹이다니!”
"악인을 죽여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이런 미친!' 도훈이 낭패감에 무기를 사선자쪽으로 돌렸다. 이제는 어떤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터였다.
[주인님, 또다시 좆된 것 같습니다.]
'아씨, 난이도 진짜 극악이네. 내 편일 줄 알았는데, 적으로 돌아서다니.'
하지만 도훈도 호락호락 당할 생각은 없었다. 백보신권의 수련도 끝난 상태였고, 무엇보다 최근 8레벨까지 올리며 무공의 위력이 더욱 완성되었다.
도훈은 자신의 무위가 어느 정도 레벨까지 통할지 궁금했다.
"에라이씨 모르겠다. 조지러 간다!”
도훈이 묵향을 빼 들고 옥봉 사선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조져지는 건 도훈이었다.
"으악!”
도훈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현실의 운동룸에 볼썽사납게 널브러진 채였다.
"···나 설마 기절했던 거냐?”
[네. 천상 크래프트에서 의식이 갑자기 끊어지면서 여파가 현실까지 미친 것 같습니다.]
'뭐야? 이거 위험한 거 아냐?'
[꼭 그렇진 않습니다만, 가상의 죽음이라도 그게 반복적이게 되면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긴 합니다. 쉽게 말하면 죽음의 공포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된달까요?]
'와씨, 옥봉사선자인지 뭔지 존나게 세네.'
도훈은 자신감을 가지고 덤벼들었지만, 4명이 펼치는 협공에 10초도 못 견디고 폭사하고 말았다.
[아직은 4인 협공까진 무리인 것 같습니다. 또한, 게임 내 설정에서 그들의 무공레벨을 지나치게 높게 잡아놓은 탓도 있을 거고요.]
'그건 또 뭔소리야?'
[천상 크래프트 모드는 말 그대로 게임입니다. NPC 캐릭터의 능력을 제작자가 원하는대로 설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rpg 게임에 흔히 나오는 '무적의 경비병' 같은 개념과 유사합니다.]
'흐음. 그러니까 애초에 저 단계에서 옥봉사선자는 내가 아무리 세도 이길 수 없게 설정되어 있다는 거야?'
[어쩌면요.]
'젠장할. 거지같은 게임 때문에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수련도 제대로 못 하고.'
도훈은 성이 나는지 벌떡 일어서서 구석에 매달아 놓은 샌드백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잽으로 가볍게 날린 주먹임에도 사람만한 대형 샌드백이 수직으로 휘청하며 흔들리더니 천장에 닿고 말았다.
퍼억-!
"현실에선 이렇게 센데, 게임에선 아무것도 못 하고 두 번이나 뒈지다니.”
두 번째 죽음으로 남은 라이프는 이제 한 번이었다.
게다가 페널티는 5일간 접속 금지.
도훈은 분노를 겨우 가라 앉히며 심호흡을 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옥봉사선자가 소속을 물어봤을 때 그들의 머릿속을 스캔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겐 있었단 말이지.'
[그렇죠. 마음의 소리를 왜 안쓰시나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네?]
'내가 가진 진짜 능력을 전혀 못 쓰고 있다는 소리야.'
[무슨 능력이요?]
'생각해 보니 나는 애초에 무림인도 아니잖아.'
[그건 당연히···.]
'난 섹서지.'
[아···.]
'옥봉사선자는 게임 속 캐릭터긴 하지만 일단 여성형 인공지능으로 작동될테고.'
[그, 그렇겠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일이 여자꼬시는 일인데, 내가 왜 무공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냐 이거지. 검을 휘두르기보다 좆을 휘두르는게 쉬운 일인데.'
[역시 주인님은 남다르십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두고 봐. 다음 번 접속에선 옥봉인지 육봉인지 넷 다 돌림빵 때려서 하렘을 차려버릴 테니까.'
도훈이 이를 으득 갈았다.
하지만 어쨌든 다음 재접속은 5일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이다.
* * *
다음날 학교에 온 도훈은 조교부터 찾았다.
"차에 폰을? 정말요? 제가 지금 가서···.”
민주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조교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를 마친 민주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 어쩌죠. 학과장님이 잠시 보자는데. 혹시 시간 있으시면 잠시만 기다리실래요?.”
"아니야. 그냥 차 키만 줘. 내가 직접 찾아볼게.”
"그러실래요?”
민주에게서 차 키를 건네받은 도훈은 교직원 주차장으로 내려가 민주의 차를 찾았다. 멀리서 차량용 리모컨의 잠금 버튼을 누르자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위치가 노출되었다.
도훈은 주차된 차량 중에서 소리가 난 곳을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누구보다 예민한 청각 때문이었다.
"차 안에 있어야 할 텐데.”
도훈은 혹시나 다른 곳에 흘렸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급히 보조석 문을 열었다. 시트 밑을 뒤지자 뭔가 손에 걸리는 게 있었다.
"찾았다.”
도훈은 폰을 꺼내 어젯밤 온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대부분 불필요한 안부문자였지만, 한가지 눈에 띄는 메시지가 있었다.
'응? 이건···.'
그것은 바로 교대생 하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박하린 : 오빠. 잘 지내셨어요? 친구한테 들었는데 다음 주 국성대 축제한다면서요? 저 오빠 보러 가도 돼요?
-박하린 : 응? 오빠 벌써 자요?
-박하린 : 설마 저 차단한 건 아니죠? 혹시 나중에 메시지 보시면 연락 좀 주세요.
하린은 무려 3차례에 걸쳐 메시지를 남겼는데 마지막 메시지는 거의 자정이 다 돼서 온 것이었다. 도훈이 폰을 잃어버려 답장이 안되자 씹는 줄 알고 계속 남긴 것 같았다.
'하린이가 축제에 온다고?'
[박하린 양이면···. 편의점주 허영자의 딸 말씀이시죠?]
'그치. 몇 달 전에 보고 한동안 연락이 뜸하긴 했는데.'
고의는 아니지만 하린의 답장을 씹은 꼴이 되었기에 미안해진 도훈이 그녀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어, 하린아. 미안 어제 깜빡하고 일찍 잠들었지 뭐야. 깨톡 이제 봤어.”
-어휴, 뭐예요. 나 차단당한 줄 알고 깜놀했네.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널 차단해?”
-모르죠. 여자친구 사귀는데 걸리적 거릴까봐?
"웃기네. 농담이 좀 늘었는데?”
-뭐래요. 암튼 오빠. 저 축제 때 놀러가면 안 돼요? 저희 그때 실습 끝나는 주간이라 시간 엄청 널널한데.
"축제는 너네도 있잖아.”
-에이, 교대 같은 조그만 대학이랑 국성대같은 종합대랑 비교가 되나요? 서울 사는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했단 말이에요.
"서울 사는 친구들이라니?”
-저희 학교가 비록 시골에 있지만 나름 전국구잖아요. 서울 출신들도 많거든요. 최근들어 많이 친해졌어요.
'하린이 친구면 다른 교대생들인가?'
[그게 왜요?]
'교대생이면 대부분 여자일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왜 중요합니까?]
'뉴페이스 여자들을 소개 받을 수 있다는 소리잖아.'
[아니, 주인님은 진짜!]
"아, 그리고 오빠한테 해줄 얘기도 있고요.”
"무슨 얘기?”
"오빠가 저번에 말했던 거요.”
도훈은 오래전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하린이한테 무슨 얘기 했었지?'
[남자친구를 감시하라고 했었잖습니까?]
'하린이 남자친구? 아아, 그 PK단 끄나풀 같다는?'
[네.]
'호오, 그럼 이번에 하린이 만나면 PK단 정보도 얻을 수 있는 건가?'
"그래? 전화로 얘기하면 안 될까?”
-안 돼요. 그럼 오빠가 용건만 듣고 나 안 만나 줄까봐서.
"뭔 소리야. 내가 왜?”
-어제도 연락 씹었잖아요.
"씹은 게 아니라···.”
-암튼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 축제 때 봐요. 참, 친구들 모두 셋이서 갈 건데 숫자 맞춰줄 수 있어요?
"무슨 숫자?”
-얘네들 다 솔로거든요. 저만 빼고.
"남자들 소개시켜 달라고?”
-괜찮은 애들 있으면요.
도훈은 후배들을 떠올렸으나 막상 생각나는 인물이 없었다.
하지만 축제 때 교대생과의 단체 미팅이라면 좋아할만한 남자 후배들이 많을 것 같았다.
"한번 알아볼게. 잠깐, 근데 넌 남자친구 있잖아.”
-저 빼고요. 저는 오빠 있잖아요.
"나참.”
-암튼, 그때 봐요. 저 지금 수업들어가야 해서.
"알았어 연락줘. 서울 오면.”
도훈은 간만에 하린과 통화해서 기분이 좋았다.
어찌보면 초창기때부터 인연을 맺은 멤버이기도 하고, 그의 어머님과도 인연이 각별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랑 사이가 안좋다고 우울해하더니 목소리 많이 좋아진 것 같네.'
[그래 보이네요. 근데 PK단 관련 내용이라면 더 캐물으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주인님에겐 중요한 정보가 될수도 있는데요.]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 급하고 중요한 내용이었으면 통화로 알려줬겠지. 어쩌면 별거 없는데 괜히 나 만나려고 핑계대는 걸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
'그나저나 축제 때 하린이가 오면···. 으음, 후배들 눈치보이겠는데.'
[조용히 처리하셔야죠.]
'그래야겠다.'
도훈은 민주에게 차키를 가져다 주러 조교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민주가 교수실로 불려갔는지 자리에 없어 컴퓨터 앞에 차키만 올려놓고 강의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