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2. 대학 축제-7-
* * *
대강 마무리한 나와 민주는 급하게 옷을 추슬렀다.
"하아···. 너무 좋았어요, 주인님.”
"가끔은 야외플레이도 재밌는 것 같네.”
"네, 원하시면 얼마든지요.”
"차를 각각 가져와서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네, 주인님.”
차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민주가 갑자기 손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응?”
민주는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더니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쪽-
"조심히 들어가세요, 서방님♥”
"···으, 응. 그래.”
갑작스럽게 바뀐 호칭에 기분이 얼떨떨했다.
주인님은 그렇다 쳐도, 서방님이라니···.
민주의 차를 나와서 내 차로 가는데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느낌이었다.
[민주 양은 주인님을 섹파 이상으로 생각하는 게 틀림없군요.]
'그건 예전부터 알고 있긴 한데···. 음, 기분 이상해지네.'
[왜요?]
'아직 결혼할 마음도 없는데 나를 지아비로 생각하는 여자가 있다니까.'
[8선녀들과는 입장이 또 다르겠죠. 스무살 대학생들에겐 연애가 우선이지만, 민주양 나이면 충분히 결혼까지 생각할 테니까요.]
'흐음, 그런가?'
내 차에 올라 주머니를 뒤지는데 핸드폰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어라? 내 폰.”
양쪽 주머니와 뒷주머니까지 모두 뒤졌는데도 없었다. 어딘가에 흘린 것이다.
'아씨, 휴대폰 떨군 것 같은데?'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나십니까? 혹시 아까 벤치에서 흘린건 아닐까요?]
'벤치는 아니야.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올 때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거든. 민주 차에서 흘렸나 보다.'
[아까 시트를 뒤로 기울일 때 빠졌나 보네요. 아니면 바지를 풀때 흘러나왔거나요.]
'민주가 아직 출발 안 해야 하는데.'
나는 서둘러 차에서 나와 다시 민주의 차로 이동했다. 다행히 민주는 아직 시동도 안 건 채였다. 집으로 바로 갈 줄 알았는데.
'뭐지? 왜 출발을 안 하지?'
[주인님이 폰을 흘린 걸 발견한 게 아닐까요?]
'발견했으면 가져다줬겠지.'
[혹시나 폰을 훔쳐보는 거라면···.]
'에이 설마. 민주가 그럴 리가 없을걸?'
물론 만에 하나라도 민주가 훔쳐보려고 한들 지문 인식이 걸려있어 절대 풀지 못할 것이다. 최신 스마트폰은 남들이 보고자 한다고 쉽게 엿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특히 나는 깨톡에 여자들과 대화한 흔적이 잔뜩 남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보안에 철저한 편이었다.
'근데 왜 아직도 출발을 안 했을까? 뭔가 수상한데.'
나는 발소리를 줄여 천천히 민주의 차로 접근했다. 내 차로 갔다가 다시 돌아올 시간 동안 여태 시동조차 안 걸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행동이었다.
"으으···.”
그때 내 청력으로 끙끙대는 신음이 들려왔다. 내 귀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밝기 때문에 차 안에서 들리는 미세한 소리까지 감지 할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
[무슨 소리요?]
'신음 같기도 하고···.'
[설마 민주양이 혼자서 자위라도 한다는 말씀인가요? 방금 그렇게 하고서도요?]
간혹 만족감이 채워지지 못한 사람 중에선, 섹스가 끝난 후에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몰래 자위로 보충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와···. 그러면 너무 충격인데. 나랑 했는데 만족을 못 했다고?
'[그것도 좀 이상합니다만.]
갑자기 배신감이 밀려왔다. 정말로 민주가 자위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크나큰 충격일 것이다.
"으흑.”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자위로 인한 신음이라기보단 뭔가 고통을 참는 듯한 소리였다. 수상한 마음에 안력을 돋워 차량 내부를 확인했다.
저녁인데다 선팅까지 진해 안이 잘보이지 않았지만, 강화된 나의 시력은 그것을 뚫고 차량 내부를 흐릿하게나마 들여 볼 수 있었다.
'응? 민주가 근데 왜 뒷좌석에 있지?'
뭔가 이상했다. 운전석에 앉아있어야 할 민주가 뒷좌석으로 옮겨 있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민주의 몸이 180도 뒤집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민주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이해 하기 위해 노력했다. 민주는 비좁은 뒷좌석에서 물구나무를 서듯 몸을 거꾸로 뒤집은 상태였다. 머리는 바닥으로 떨어져 있고, 목을 바쳐야 할 받침대 위치에 두 다리가 올라가 있었다. 마치 전복사고라고 당한 듯한 괴상한 자세.
'저, 저게 뭐람?'
[왜 그러십니까?]
'민주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데?'
[물구나무를요?]
'아무리 봐도 물구나문데 대체 왜···. 아, 아니 설마!'
퍼뜩 그런 얘기가 떠올랐다. 고려 시대를 연 왕건의 부인이, 그의 씨를 잉태하기 위해 사정 직후 물구나무서기를 했더라는 야사를.
[미, 민주양이 임신을 하려고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게밖에는 해석이 안 되는데. 와···. 어쩐지 출발도 안 하고 조용히 있더라니. 조용히 임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민주의 의도를 알게 되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난 임신에 대해선 철벽 방언데 말이야.'
[민주양은 주인님이 무정자증 상태인 걸 모르나 보군요.]
'말은 똑바로 해. 무정자증이 아니라, 선택적 불임인 거라고.'
[그거나 그거나요.]
나는 일전에 받은 스킬을 통해 정액 속의 정자를 비활성화 시킬 수 있었다. 즉, 언제든 씨 없는 수박 상태로 지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당연하지만 무정자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는 그것을 모른 채 질싸받은 정액을 임신하기 위해 물구나무까지 섰던 모양이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액이 자궁까지 닿는데 도움을 주기위해 난임의 경우 저러한 자세를 취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었다.
'나참···.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괴상망측한 자세로 차 안에서 낑낑대는 민주의 모습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어쩐지 아까 서방님이라고 부르더라니.'
[임신공격으로 주인님을 옭아맬 생각이었나 보군요. 아무래도 임신을 하고 나면 주인님이 결혼을 고민할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흠.'
민주의 행동이 안타깝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나에겐 피임약을 먹는 것처럼 속여 질싸를 유도한 것은 일종의 기만행위다. 소위 임신공격이라 불리는 여자들 최후의 공격.
하지만 그 상대가 민주라는 데 약간의 미안함이 들었다.
오죽하면 저럴까하는 마음에서 였다.
'흐음, 이건 그냥 못 본 척해야겠다.'
[정말요? 주인님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는 행윕니다. 기만이라고요.]
'의도는 그렇긴 한데, 절대 그럴 일을 없을테니 말이야. 저렇게 노력해도 결국 민주만 헛물만 켜는 거잖아.'
[흠···.]
'그냥 이건 안 본 거야.'
[주인님 핸드폰은요? 폰은 찾아가야죠.]
'내일 학교 가서 받지 뭐. 어제 빠뜨린 것 같다고.'
[다른 여자들한테 급한 연락이라도 오면 어쩌시려고요?]
'정말 급한 일이라면 집으로 직접 찾아오겠지. 반나절 정도 연락 안 된다고 별일 없을 거야. 집에 가서 따로 해야 할 일도 있고.'
나는 결국 핸드폰을 되찾지 못한 채 돌아섰다.
민주는 여전히 차안에서 혼자 낑낑대고 있었다.
* * *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도훈은 목욕재계를 하고 2층 운동 룸으로 향했다.
[설마 미스터 국성 대비 근육 보강 운동을 하시려는 건가요?]
'그럴 리가? 어차피 지금은 숨만 쉬어도 근육이 나오는 지경인데.' 도훈의 상의를 훌렁 벗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그의 말처럼 한동안 헬스를 하지 않았음에도, 근육의 크기나 선명도가 오히려 더 좋아진 상태였다.
마치 대회에 참가하기 직전 보디빌더 몸 상태처럼 더욱 쫄깃해진 근질로 체지방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사실 도훈의 현재 몸 상태는 24시간 도핑을 하는 것과 유사했다. 몸 안에 호르몬이 극도로 활성화되어 스테로이드 주사를 링거를 꽂은 것과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숨만 쉬어도 강해져. 그게 내 장점이지.'
도훈이 별도로 근력 운동을 따로 하지 않는 이유는 또 있었다.
사람의 힘은, 근육의 크기와 비례한다.
물론 빼어난 근질로 단위 면적당 더 많은 파워를 뿜어내는 특이한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은 근육의 크기가 곧 파워 임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내공을 다룰 수 있게 되면 물리력은 크게 의미가 없어진다. 애초에 내공은 물리력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수련하는 것으로, 몸속의 내공을 응용해 폭발시키면 근육량을 훨씬 뛰어넘는 강력한 파워를 지니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 도훈의 반응 속도와 균형감각 및 파워는 보통의 사람이 이룰 수 없는 지경까지 와 있었다. 70억 분의 1이 있다면 바로 자신이었다.
[그럼 왜···. 혹시?]
'맞지? 저번에 그 게임 다시 실행할 수 있는 거.' 도훈은 일전에 천상 크레프트에서 '구음진경을 찾아서' 라는 시나리오팩을 구입한 적 있었다. 그러나 튜토리얼이 끝나자마자 객잔에서 끔살당하는 바람에 3일간 접속 금지라는 패널티를 받고 라이프도 깎였다.
이제 부활의 시간이 돌아왔으니 게임에 다시 접속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아, 어제 이후로 재접속이 가능하게 풀렸군요. 그럼 다시 수련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응. 드가자.' 도훈이 운동 룸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기필코 허무하게 죽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죽었다 부활을 하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 산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넌 저번에 봤던 그 산적이구나?”
"뭐라고? 이 자가 미친 자로구나 애들아 쳐···.”
도훈은 순식간에 산적을 제압했다.
"···으으, 산자락 아래 객잔이 하나···.”
여전히 똑같은 힌트를 주는 조무래기들이었다.
'로그라이크류 게임이었나?'
[그게 뭡니까?]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극악의 난이도 말이야. 세이브포인트가 없으면 굉장히 힘들어지겠는데.'
[지난번엔 너무 일찍 죽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거의 시작하자마자 객사를 당했으니까요.]
도훈은 이번만큼은 절대 독공에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지난 번엔 방심해서 인육만두에 뿌려놓은 독에 당하고 말았어.
이번엔 어림없지.'
똑같은 객잔에 들어선 도훈은 점소이의 안내에 따라 자릴 잡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객잔 안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를 스캔하고 있던 거구나. 실력으로 제압 못할 것 같으니 독을 뿌려서 암살을 시도했어.'
[그렇네요. 지난번에 적들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알다마다. 중식도로 내 머리 내리친 새끼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도훈은 주방에서 열심히 요리를 하고있는 주방장을 힐끔거렸다.
'저 새낀 내 손으로 직접 모가지 딴다.'
그때였다.
지난번처럼 예쁘게 차려입은 여자 넷이 가게로 들어왔다.
'옥봉 사선자라고 했던가? 저들도 나처럼 독공에 당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게임이다 보니 진행이 비슷하게 이어졌다.
사선자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켰고, 도훈의 자리에 곧 점소이가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도훈은 이번에도 똑같이 독이 들어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먹는 척만 해야지.'
도훈은 음식을 입에 대는 척하다 내려놓고, 잔에 술을 따랐다.
탁주로 보이는 술에도 독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응?”
"이 객잔의 주인 왕호충이라고 합니다, 나으리. 방금 보니 음식을 입에 대다가 말던데요.”
왕호충은 4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머리에는 전형적인 중국식 빵모자 쓰고 있었다. 수염은 메기처럼 양옆으로 길게 자랐는데, 눈이 가늘고 눈동자가 날카로운 게 제법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아, 네. 술 냄새가 더 향긋해서 목부터 축이려고요.”
"그러시군요. 저희 용문객잔의 죽엽청은 사천 제일로 불린답니다.”
'사천? 이곳 배경이 사천이었어?'
[사천이 어딘가요?]
'중국 남동쪽에 붙어있는 곳이야. 유비가 촉나라를 세웠던 곳이기도 하고, 독공으로 유명한 사천당가가 있는 곳이지.'
"하하, 알겠습니다.”
도훈은 주인의 권주에 따라 술을 입에 대는 듯 했다.
그러나 독이 들어있을 게 뻔한 독주를 마시자니 여간 껄끄러운게 아니었다.
"···안 드십니까?”
"자꾸 쳐다보시니 불편해서요.”
왕호충은 마치 도훈을 감시하듯 좌석 옆에 딱 붙어 있었다.
도훈이 끝까지 마시는지 지켜보겠다는 속셈. 아직 사선자가 중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도훈은 차라리 이때 승부를 걸 생각이었다.
'연기 좀 해야겠다.'
도훈을 술을 쭉 들이키는 가 싶더니 갑자기 왕호충을 향해 푸학- 하고 뱉었다. 얼굴에 술이 뿌려진 왕호충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악! 누, 눈에 독이!”
"독이라니? 이 작자가 내 술에 독을 탔다!”
도훈은 일부러 사선자 쪽을 향해 소리쳤다.
이곳에 사실 마교의 비밀지부이며, 손님들을 독극물로 중독시켜 죽인다는 얘기를 퍼뜨릴 속셈이었다.
그러나 놈들이 한 발 더 빨랐다. 지난 번 도훈의 머리에 중식도를 내리친 주방장이 난데없이 주방에서부터 중식도를 손도끼처럼 내던진 것이었다.
휘리리릭-!
회전하며 날아오던 중식도가 도훈의 이마를 쪼갤 듯 쇄도했다.
도훈은 묵향을 꺼내 쳐냈다.
챙-!
"저런 문도 같은 새끼가!”
하지만 중식도 공격을 시작으로 객잔 안에 있던 마교의 잔당들이 동시에 도훈을 공격해 왔다.
중과부적의 상황.
도훈은 곧바로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 이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