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87화 (1,354/2,000)

1370. 여대 잠입-70-

* * *

"회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양평의 별장으로."

"양평의 별장이면···. 알겠습니다."

박회장이 저녁에 잠시 외출하자고 했을 때 김씨는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은 주로 지수의 경호를 맡고 있었고, 평시에 회장에 대한 수행은 유리나 철우가 도맡았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양평의 별장은 박회장의 또 다른 경호원인 일본인 고스케가 관리하는 곳이었다.

'고스케를 만나러 가실 생각인가? 근데 직접 오라지 않고 왜?'

고스케는 일본에서 건너온 용병이었고, 한국에 별도로 거처가 없어 양평에 있는 박회장의 별장에 살고 있었다. 박회장이 고스케를 부를 때는 주로 피를 본다는 사실을 떠올린 김씨는, 진한 피 냄새를 예감했다.

'같은 편이긴 하지만 솔직히 마주치기 껄끄럽단 말이야?'

박회장 주변의 경호원들은 대부분 또 다른 위장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유리가 수행비서, 철우가 실장, 만석은 야간 경비원, 그리고 김씨 자신은 박회장 딸의 운전기사인 것처럼.

고스케의 위장 신분 박회장의 별장 관리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신분은 바로 박회장의 해결사.

사람을 협박할 때나 실제로 죽여야 할 일이 있을 땐 박회장은 늘 고스케를 찾았다. 그는 인정사정없는 킬러였고, 박회장의 말이면 위험을 무릅쓰고 명령을 수행하는 심복 중의 심복이기도 했다.

난다 긴다하는 김씨도 고스케 앞에선 벽을 느꼈다.

조직 폭력배와 킬러는 애초에 다른 레벨이니까.

"회장님. 별장입니다."

뒷좌석에서 잠시 졸고 있던 박회장을 깨운 김씨가 목적지 도착을 알렸다. 박회장의 차가 도착하자 별장 안에 있던 고스케가 마중 나왔다.

"그럼 차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김씨는 여느 때처럼 차량 대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박회장이 고스케와 용무를 나눌 때는 꼭 단독으로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박회장은 김씨에게 같이 갈 것을 권유했다.

"아니야. 오늘은 자네도 따라오게."

"네? 저도요?"

"그래. 자네도 알아야 할 이야기니까."

"아, 알겠습니다."

김씨는 평소와 다른 박회장의 태도에 살짝 긴장했다.

차 안에서 보니 고스케는 늘 그렇듯 옆구리에 검은 천으로 감싼 막대기 같은 것을 차고 있었다. 김씨는 그것이 놀랍도록 예리한 일본도임을 알고 있었다.

'뭐지? 괜히 불안하네. 갑자기 양평까지 고스케를 직접 만나러 온 것도 이상하고···. 굳이 나랑 같이 오자고 한 것도.'

김씨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는지, 가슴 안주머니에 늘 챙겨 다니던 잭나이프를 확인했다. 본래 주 종은 사시미 칼이었지만, 단검류 무기라면 어떤 것이든 잘 쓰는 편이었다.

물론 잭나이프 따위로 일본도에 비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들어가세."

박회장과 고스케 그리고 김씨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서양식 주택 구조로 된 별장은 거실에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장작이 불길을 내며 타고 있었다. 아직 9월밖에 안됐지만, 양평의 별장은 단열이 빈약한 통나무 집이었기 때문에 저녁엔 늘 장작을 태워야 했다.

벽난로 주변 의자에 걸터앉은 세 사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놈들이 끝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음···."

"?"

두 사람만 아는 이야기에 김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들이라는 것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김씨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때가 되면 설명해 주겠거니 하고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포섭된 자들은? 설마 유리도?"

"아닙니다. 저 포함해서 모두 셋입니다."

박회장은 조금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끼어들 수가 없어 조용히 장작을 채워 넣고 있던 김씨를 향해 박회장이 말했다.

"자네도 내용을 알아야 하니 이제부터 내가 설명해 주지."

"네, 회장님."

"난 근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는다네."

"네?"

뜬금없는 서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박회장이었다.

과거 사채업자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박회장은 괴한에게 습격을 받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상대는 물불을 안 가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지만, 운 좋게 지나가는 행인이 보고 경찰에 신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알고 보니 과거에 내 채무자였더라고. 빚 갚느라고 집안다 말아먹고, 마누라는 생활고에 목매달아 죽고. 본인도 음독을 했는데 미수에 그쳐서 반병신이 되었다던가? 뭐 여튼 그런 사정이었네."

한 사람의 인생이 자신의 사채 때문에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꺼내는 박회장이었다.

"그때 깨달았지. 인간이 바닥을 찍고 나면, 제 목숨을 잃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난 마른 수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이네. 하지만 나중엔 그 마른 수건이 내 목을 조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네."

"그래서 경호원을 늘리기로 결심했네. 길에서 칼 맞고 객사할 순 없지 않는가? 돈을 아무리 벌어봐야 죽고 나면 말짱헛것이니. 그때 영입했던 게 지금의 철우였네."

"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철우 소개로 회장님 밑에서 일을 시작했으니까요."

"철우는 수완이 좋았네. 뭐 실력도 있지만, 밑에 조직원들 관리는 참 잘했어. 타고난 보스 기질이 있달까?"

"그런가요?"

"그 뒤에 유리도 오고, 자네도 오고···. 나중에는 고스케까지 합류했지."

고스케는 여전히 장검을 손에 쥔 채 고개만 끄덕였다.

"경호원 넷이 24시간 붙어서 지켜주니 든든하더구만.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사람 부리는 데 그리 인색한 편은 아니지 않는가? 최고의 실력자들을 모집한 대신,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 줬네."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처럼 계산이 깔끔한 분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 난 능력을 보이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거든.

사채 이자는 10원 한 개까지 싹싹 받아내고야 말지만, 훌륭한 인재에게 주는 월급은 1000만원도 아깝지 않았네."

"네."

"그러다 어느 날엔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떤···."

"나를 지키는 검들이 나를 겨눌 땐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회, 회장님.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습니다."

김씨가 황급히 대답했다. 여전히 고스케는 자기 옆에서 장검을 쥐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박회장의 테스트라고 오해했다.

박회장이 그 모습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아니 이 사람아. 내가 자네를 의심했으면 이런 얘기까지다 했겠는가? 안심하게."

"···아, 넵."

"자네는 소박해서 좋았어. 우리 딸아이 챙기는 게 어찌 보면 자네에게 걸맞지 않은 유치한 일 일 텐데, 큰 불만 없이 10년 가까이 잘 수행해 줬지."

"···감사합니다."

김씨는 그간의 고생을 인정받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박회장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 자네같이 충성스러운 인재만 옆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혹시 그럼···."

대화가 이쯤 돌아가자 김씨도 눈치가 있었기 때문에 박회장이 지금 누굴 지목하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최실장과 만석이 나를 배신했다."

"아!"

"그리고 내가 예전부터 미리 심어둔 고스케가 모든 전말을 나에게 알려주었지."

김씨는 그제야 자신이 왜 야밤에 양평의 별장으로 고스케를 보러 왔는지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고스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놈들의 배신은 오늘 밤 자정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생각보다 유창한 고스케의 한국말에 김씨는 움찔 놀랐다.

평소에 벙어리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말을 아끼던 고스케였기에 더욱 그랬다.

'하긴 재일교포 출신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고스케는 오늘 밤에 벌어질 일들을 상세하게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김씨는 만석이 자신을 기습할 거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마, 만석이 그 새끼가 나를?"

"그렇습니다. 당신이 포섭되지 않고 저항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놈들은 당신을 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저택에 쳐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이런 돼지같은 새끼가 감히!"

김씨는 분노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솔직히 만석과는 성향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함께 해왔기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의리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만석이 자신을 죽이려 할 줄이야.

김씨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정말입니까? 확실하냐고요. 제가 아는 만석이는 사람을 죽일만한 위인이 못 되는데···."

"큰 돈이 걸리면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고스케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을 많이 죽여본 킬러의 말이니 김씨도 반박할 수 없었다.

"허면 여기서 왜 이렇게 있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밑에 애들 풀어서 그 새끼들 싹 다 조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김씨가 흥분해 소리쳤다.

박회장의 조직은 진짜 조폭 급은 아니었지만, 인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사채업의 특성상 십수명 이상은 있었다. 쪽수로 밀어붙이면 천하의 철우나 만석이라도 상대가 안 될 것은 분명했다.

"그건 내가 설명하지."

이번엔 박회장이 대신 대답했다.

"철우는 내 대신 오랫동안 조직관리를 해왔네."

철우가 최실장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그는 박회장의 오른팔로서 사업소 및 기타 여러 조직들을 직접 관리해 오고 있었다.

"과연 놈들이 누구 말을 따를지 믿을 수가 없더라고."

"아···."

"또 작당 모의한 증거를 밝혀내지 못하면 오리발을 내밀수도 있고. 철우는 교활한 녀석일세. 수완이 나 못지 않게 좋지. 분명 퇴로를 열어 두었을 걸세."

즉 박회장은 배신하는 현장에서 그들을 직접 처단하겠다는 이야기였다.

"해서 오늘 밤 자네를 부른 것일세. 자네가 만석이만 처리 해 준다면 고스케는 내 편이기 때문에 철우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것이니까."

"아···."

"할 수 있겠나?"

김씨는 오랜만에 긴장으로 몸이 떨렸다.

만석은 괴물같은 피지컬의 소유자다. 조폭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김씨였지만, 1:1 대결에서 만석과의 승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단순한 힘대결이라면 고스케도 역부족일 것이다. 2미터가 넘는 키에 150KG에 육박하는 거한을 맨몸으로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자네가 힘들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작전을 변경할 생각일세. 하지만 자네가 해낼 수 있다고 하면 놈들을 제대로 일망타진할 수 있겠지. 어떤가?"

박회장의 계획에 김씨는 신중히 고민했다. 위험할 수 있지만, 그 보상은 확실할 것이다.

박회장의 오른팔인 철우가 제거된다면, 그 빈자리는 자신이 차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조직관리라면 조폭 간부까지 올랐던 자신도 충분히 잘해낼 수 있다.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10년간의 운전수 노릇도 청산할 수 있다.

'···만석이 힘이 장사긴 하지만, 사시미 칼 한 방이면 뒈지는 건 똑같은 거 아닌가?'

급소는 누구도 방어할 수 없기에 급소다. 그가 알기론 만석은 무기를 다뤄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맨몸으로 링 위에 오르는 것이 아닌, 규칙이라곤 없는 생사박이다. 그리고 그런 개싸움이라면 김씨는 쉽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까 회장님도 말씀하셨잖아? 그간 지수 아가씨를 잘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겠어? 철우를 쳐내고 나면 그 자리에 나를 꽂겠다는 소리잖아?'

김씨는 희망에 부풀었다. 다소 위험할 순 있지만, 기습을 하는 상대에게 역공을 가하는 작전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는 만석은 악인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자였다.

'우유부단한 근육 돼지일 뿐.'

만석은 아마 조직생활을 했어도 높은 자리까진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힘만 좋고, 잔인함이 부족한 자들은 결국 방패막이로 쓰일 뿐이다.

사람을 담글 수 있는 배짱은 여간해선 갖추기 쉽지 않다.

자신은 배때기에 사시미를 쑤셔 박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 때문에 옥살이까지 했었으니까.

"···해 보겠습니다, 회장님."

"으음."

"맡겨 주십시오. 제가 어떤 놈인지 회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박회장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자네가 그렇게 해줄거라고 믿고 있었네."

"그렇게만 된다면 일이 수월해집니다. 아가씨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위협하는 역할은 제가 맡기로 했기 때문에, 따님이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알겠네. 철우 이 새끼가 감히···. 오냐오냐 하니까 키워 준 주인을 물려고 하다니. 내가 이래서 사람을 못 믿는다고 한 걸세. 고스케가 아니었으면 제대로 뒤통수 맞을 뻔 했지 뭔가?"

박회장은 배신자를 처단하는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철두철미함에 스스로 도취한 인상이랄까?

김씨는 여전히 장검을 들고 있는 고스케와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면서 생각했다.

'···근데 회장님은 무슨 근거로 고스케를 완전히 신뢰하는 거지? 사람을 근본적으로 믿지 않는다면 고스케까지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김씨는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차마 지금의 박회장 앞에서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은 어떻게 배신자 최철우의 시체를 처리할 것인가로 상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애써 자신의 생각을 떨쳐버렸다.

'에이, 설마 배신을 직접 밀고한 고스케가 딴생각을 품었겠어? 지금은 만석에게만 집중하자. 간만에 침대 밑에 모셔둔 사시미를 꺼낼 때가 왔구나. 이 돼지 새끼, 정말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라면 절대 사정 봐주는 일 없을 줄 알아.'

김씨는 만석과의 대결을 상상하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여전히 승산은 높지 않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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