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9. 여대 잠입-69-
[이건 진짜 개막장인데요?]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뭐.'
[유리양이 오는 걸 이미 감지하셨지 않습니까?]
'알지만 방법이 없잖아. 금자한테 숨으라고 해도 퍽이나 말을 들었겠다.'
[하긴···.]
"세, 세상에 어떻게."
"하앙, 하항-. 뭘 놀래? 지난번에는 너도 나 몰래 실컷 즐겼잖아? 넌 되고, 난 안 돼?"
"대, 대협씨가 무슨 물건이야?"
유리가 버럭 소리쳤지만, 이내 자신의 목소리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금자는 여전히 엉덩이를 스스로 흔들면서 말했다.
"누가 물건이래? 어쨌든 같이 공유하기로 약속했잖아. 이제 와서 왜 딴소린데?"
"그, 그건···."
따지고 보면 유리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 역시 도훈과 함께 퇴근해서 밖에서 만날 생각이었던 것. 결국엔 누가 먼저 도훈을 차지하느냐의 싸움이었고, 이번엔 금자가 먼저 선수를 친 것뿐이었다.
"안 낄 거면 옆에서 구경이나 하든가? 관전 플레이도 나름쏠쏠할 걸?"
"이이!"
금자가 계속 놀리는 통에 유리는 점점 약이 올랐다.
게다가 두 사람의 적나라한 섹스를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점점 흥분이 되기도 했다.
'이대로 대협씨를 뺏길 순 없어!'
"나, 나도 낄래!"
유리도 서둘러 옷을 벗었다. 금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고, 도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왜 난처한 척 하십니까? 속으론 좋으시면서.]
'티 내면 이상하잖아. 차라리 잘 됐어. 거사가 치러지기 전에 어차피 둘 다 눌러줘야 했을 테니. 일타이피면 시간도 절 약하고 좋지.' 유리까지 옷을 벗고 달려들면서 홀딱 벗은 세 남녀가 침대 위를 뒹굴기 시작했다.
* * *
"···어이 김씨, 자나?"
김씨는 방에 불을 켜고 자고 있었다.
몸을 반대로 돌려 옆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만석은 그의 취침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많이 피곤했나 보군. 방에 불도 다 켜고 말이야."
"······."
여전히 대답 없는 김씨. 만석은 김씨가 잠이 들었다고 확신하고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물건을 앞으로 꺼냈다.
그것은 10Kg짜리 아령이었다. 한 손에 알맞게 쥐어지며, 위아래로 묵직한 원판이 달려있어 언제든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 무기.
'너무 원망말라고. 나도 내켜서 하는 짓은 아니니까.'
만석은 아령을 높이 들고 자고 있는 김씨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 짧은 순간에도 만석은, 어쩌면 사고사로 위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운동하다 덤벨이 머리 위로 떨어진 것으로 꾸밀 수도 있지 않을까? 아, 차라리 덤벨이 아니라 바벨로 목을 짓누를 걸 그랬나? 시체를 벤치 프레스 위에 올려놓으면 자연스럽게 사고사로 위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김씨의 앞에 도착한 만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려서부터 몸집이 거대했던 그는, 쉽게 폭력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평생 수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었다. 때문에 아령을 김씨의 후두부로 내리치면 끝나는 그 순간에도 계속 갈등했다.
'진짜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냥 기절시킨 다음에 밧줄로 묶어 놓으면 어차피 훼방 못 할 텐데.'
만석이 계속 주저하는 순간이었다.
돌아누워 자는 줄 알았던 김씨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언제나 생각하던 거지만, 너도 참 덩칫값 못하는 군."
"!?"
만석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귀신이라도 본 것같은 표정이었다. 그 순간 품속에 사시미를 숨기고 있던 김씨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어, 어떻게!"
"거울로 다 보고 있었지."
김씨가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만석이 슬쩍 보니 침대 머리맡에 손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즉, 김씨는 자는 척 돌아누운 상태로 출입구 쪽을 거울로 계속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만석의 비밀스러운 행동을 모두 들킨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만석이 다급히 변명했다.
"나, 나는 그저 방에 불 꺼주려고 왔다가···."
"방에 불을 꺼주는 데 덤벨은 왜?"
"응? 이거? 아이고, 막 운동 끝내고 오느라···. 이게 왜 들려있지? 하하!"
만석은 계속 고의가 아닌 척했지만, 김씨는 여전히 손에 든 사시미로 그를 노리고 있었다.
"너도 참 거짓말 못 한단 말이야? 스스로 알고 있지?"
"이, 이거 왜 이래? 칼은 놓고 말로 하자고."
"왜? 뒤통수 까려다가 실패하니까 이제 와서 말로 하자?
그거참 편의적이군."
"아냐! 내가 왜 자네 뒤통수를 치겠어? 오해라니까 그러네?"
만석이 계속 변명했지만 김씨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만석은 그 와중에도 속으로 잔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좆됐다 진짜. 그냥 한 대 찔리고 힘으로 제압해 버릴까?'
만석은 힘이 장사였다.
쇠파이프로 두들겨 맞아도 버틸 수 있는 맷집을 자랑했다.
하지만 김씨의 사시미 칼은 무서울 정도로 날이 잘 서 있었다. 아무리 단단한 근육이라도 잘못 베이면 치명상을 입을지도 몰랐다.
'맞다. 저 새끼 빵에 들어간 이유가 연장질하다가 간 거였잖아?'
만석은 김씨를 결코 우습게 보지 않았다.
철우와 처음 배신을 계획했을 때도 제일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그가 한때 잘나가던 조폭이었고, 회칼로 사람을 찔러 죽여 감빵에 들어간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씨발, 근데 저 새끼가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만석이 눈알을 굴리며 그 이유를 떠올려 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마치 지금의 모든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까 회장님하고 누굴 만나고 왔을 것 같아?"
"누, 누구네?"
"고스케."
"그 쪽바리 새끼가! 감히 배신을!"
"배신이라니? 웃기고 있군. 네가 감히 배신을 입에 올려?"
만석은 마침내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 모의를 했던 셋 중 일본인 킬러 고스케가 먼저 배신한 것이었다. 박회장을 만나 오늘 밤 계획을 모두 밀고해 버린게 틀림없었다.
'아씨, 어쩐지 순순히 낀다고 할 때 의심했어야 하는데.'
"자,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왜? 더 할 말이 남았나?"
"난 진짜 죽일 생각까진 없었어."
"아하, 그래? 요샌 뚝배기 깨져도 살 수 있나 보구나? 고맙네 거참. 평소 자주 들던 20kg 짜리가 아니라 10kg 짜리로 골라줘서. 배려심에 눈물이 날 지경이야."
"지, 진짜라니까. 거울로 다 봤을 거 아냐? 내가 망설이던 거. 내가 널 죽이려고 했으면 진즉 해치웠겠지."
"흠···."
"난 철우의 꼬임에 넘어간 거야. 그 새끼가 나한테 먼저 배신하자고 했다고."
"···돼지 새끼, 얍삽한 데다 의리까지 없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만 끝내자. 넌 이 방에 아령을 들고 들어온 순간부터 날 죽일 생각을 한 거야."
김씨가 칼을 역수로 거머쥐더니 공겨 자세를 취했다. 연장질을 해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예사롭지 않은 폼이었다. 만석은 아령을 들고 맞서며 그에게 소리쳤다.
"날 죽이면 또 빵에 들어가야 할 걸?"
"걱정마. 이번엔 정당방위니까."
"전과자 말을 사람들이 퍽이나 믿어줄 것 같아?"
"회장님이 좋은 변호사 붙여 주겠지. 돈 많으면 그게 참 좋아."
"으으! 정말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분명히 경고하지만 난 절대로 혼자 안 죽는다. 날 죽이려면 너도 죽을 각오 해야 할 걸?"
만석은 더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최후 통첩을 날렸다. 이른바 동귀어진을 하겠다는 선언. 사실 칼을 든 김씨가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저 돼지 새끼를 한 방에 보내지 못하면 도리어 내가 위험해질 거야.'
만석은 근육뿐 아니라 지방층도 제법 두터운 편이었다. 만에 하나 잘못 찔렀다가 근육에 칼날이 붙잡히는 날엔 그 다음 부턴 본인이 만석에게 잡힐 수도 있었다. 저 괴물의 손에 걸리는 순간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긴장된 상황 속에서 지루한 대치를 이어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 * *
"이 돼지 새끼는 왜 연락이 없어?"
"······."
고스케는 당연히 대답이 없었다. 저택 밖에 차를 세워두고 만석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철우는 점점 조급함이 밀려왔다.
"설마 김씨한테 역으로 당해 버린 건 아니겠지?"
"···글쎄."
간만에 입을 연 고스케가 검은 천으로 감싸진 장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것은 모종의 사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되겠다. 뭔 일인지 몰라도 일단 들어가자. 더 시간 끌다간 일정이 다 꼬이겠어."
철우가 서두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새벽에 밀항을 위해선 도착시간을 정확히 맞춰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는 날엔 배는 먼저 떠나버릴 것이고, 자칫 모든 걸 그르칠 수도 있었다. 한국에 남아 있으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가자."
철우가 차에서 내리고 고스케가 뒤따랐다. 저택의 대문 앞에선 철우가 긴장된 표정으로 비번을 눌렀다. 저택의 경호원인 그는 당연히 비번을 알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가장 먼저 불 켜진 별채부터 확인했다.
"만석! 대체 어떻게 된··· 헉!"
별채 내부를 확인하던 철우가 격한 비명을 터뜨렸다. 온통 피칠갑이 된 운동 룸에 만석과 김씨가 서로 포개져 쓰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씨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고스케가 재빨리 쓰러진 두 사람의 경동맥을 각각 확인하더니, 무덤덤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다 사망했다."
아마도 기습을 회피한 김씨가 칼을 꺼내 저항했고, 육탄전을 벌이던 만석과 서로 동귀어진을 한 분위기였다. 사방에 튄 피는 두 사람의 혈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제기랄. 하여간 저 돼지 새끼 근육 키울 시간에 살부터 빼라니까."
철우는 동료의 죽음을 짧게 평하고는 그대로 별채를 빠져나왔다. 처음엔 만석의 죽음에 놀라고 당황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어차피 가장 골칫거리로 여겨지던 김씨는 이미 처치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만석의 몫도 결국 우리 몫이 되었으니까.'
철우는 나눌 입이 자연스럽게 줄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어차피 저택에 남은 사람들이야 자신과 고스케 둘이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유리가 좀 위협적이긴 해도, 총을 꺼내기 전에 제압하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서두르자고. 너야 비행기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우린 중국까지 배 타고 넘어가야 하니까."
"······."
저택으로 들어온 철우는 제일 먼저 지수의 방으로 향했다.
금고를 열기 위해선 박회장을 겁박해야 했고,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그의 딸인 지수를 위협하는 일이었다.
지수의 방문 앞에서 고스케가 먼저 칼을 뽑았다.
스릉-.
섬뜩한 소리와 함께 고스케의 일본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휘유. 살벌하구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지수는 먼저 죽이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
고스케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고스케는 잠들어 있는 지수의 목에 칼을 겨누며 말했다.
"일어나."
"으, 응··· 누구야 오빠예요?"
인기척에 눈을 뜬 지수는 눈앞에서 번뜩이는 칼날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꺄아! 누구야! 가, 강도?"
그녀는 잠결에 두 사람을 강도로 오인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아빠의 경호원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 철우 삼촌?"
"누가 니 삼촌이야? 난 너 같은 조카 둔 적 없어. 예쁜 얼굴에 괜히 칼 맞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고분고분 듣는 게 좋을 거야."
"이, 이게 지금 무슨 짓이에요?"
지수는 마침내 자신이 협박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일본인 킬러인 고스케는 가끔 얼굴을 마주치긴 했지만,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사내가 갑자기 목에 칼을 겨누니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고 시키는 대로 말을 따랐다.
"저, 절 납치하려는 건가요?"
고스케에게 위협당한 채 끌려가던 지수가 철우에게 물었다.
"납치라니? 널 유괴해서 푼돈이나 뜯어내자고?"
"그, 그럼···."
"살고 싶으면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아버지 앞에 가서 비밀 금고를 열라고 말해."
"그, 금고라뇨?"
"이 집에 살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만, 그래? 돈을 아주 바닥에 깔고 살았어."
"그, 그게 무슨···."
"닥치고 따라와."
지수를 앞세우고 박회장의 방으로 향하던 철우는 순간 갈등했다.
'아씨. 만석이 새끼가 갑자기 뒈져버려서 쪽수가 부족하네.'
본래 그들의 계획은 목격자까지 모두 죽이는 것.
자신과 고스케가 지수와 박회장을 협박해 금고를 여는 동안, 만석이 이 집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제는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나머지를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된 것이었다. 만에 하나 두 사람이 박회장을 협박하는 것을 눈치채고 누군가 경찰에 신고라도 한다면 모든 작전이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제압하다 박회장을 놓치는 경우는 죽도 밥도 안된다. 이미 만석까지 희생된 마당에 빈 손으로 돌아가기엔 너무나 쓰라린 것이다.
'별수 없지. 박회장이 금고를 열 때까지 아무도 눈치 못 채 길 바라는 수밖에. 아니, 만약 마주치면 그때 곧바로 제압해도 늦진 않을 거야. 어차피 인질은 우리한테 있는데, 누가 감히 경찰에 신고하겠어?'
결심을 마친 철우가 박회장의 방문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