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3. 여대 잠입-63-
[그러고 보니, 이 저택엔 다들 욕망이 득실거리는 사람들 뿐이군요.]
'그렇지. 본래 사람은 비슷한 부류끼리 뭉치기 마련이거든. 박회장이 그런 놈이라, 이리나 승냥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지수 양이 불쌍하게 느껴지는군요. 잠시 페미니즘에 경도되었던 때를 제외하면 딱히 모난 곳 없이 순수한 영혼 같던데요.]
'시궁창 같은 곳에 있기엔 너무 착한 아이지. 안타깝게 되었어.' 도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박회장이 처한 곤경을 나서서 해결해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대리 복수를 바라고 위장 침투한 입장이니만큼, 손도 안대고 코풀게 된 점에 대해 고마워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음이 편치 못한 건 바로 박회장의 금지옥엽인 지수 때문이었다.
[그럼 오늘 밤 사달이 일어나는 걸, 방관만 하실 생각입니까?]
'우선은 나쁜놈끼리 서로 치고 박는 걸 굳이 말릴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단.'
[······.]
'놈들이 내 여자를 건드릴 땐 가만 안 있을 생각이야. 지수라던가 유리는 아무 죄가 없으니까.'
[그럼 금자 양은요?]
'금자도 본질적으론 다를 게 없어. 방법의 차이가 있다뿐이지, 박회장의 유산을 노리고 음모를 꾸몄다는 점에선 말이야.' 도훈은 자신이 구해낼 사람을 명확히 구분했다. 관계의 여부를 떠나 철저하게 인과응보에 따른 귀결이었다.
'그나저나 마침내 무공을 써볼 기회가 생겼군.'
[일전에 박회장의 사업소에서 깽판 칠 때도 무력시위를 하지 않으셨던 가요?]
'피라미들은 시시하지. 이번엔 그나마 민간인 중에선 난다 긴다하는 놈들이니까.'
물론 도훈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전직 동양 복싱 챔피언이건, 3대 1000을 찍는 근육 돼지건, 아니면 진검을 들고 다니는 일본인 킬러건 자신에게는 한 주먹거리도 되지 못한다.
'뭐, 가볍게 몸은 풀어 줄 수 있지 않겠어? 어쨌거나 실전이니까.'
[자신감이 대단하시군요.]
'자신감이 아니라, 실력이라고 해야지.'
도훈은 실력을 과시하듯 지붕 위에서 훌쩍 몸을 날렸다.
단층이라곤 해도 상당한 높이였는데 육중한 몸이 지상에 떨어지는 데 발자국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경신술이었다.
공중에서 수직 낙하해 금자의 뒤를 점한 도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훈을 찾고있는 금자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뭐하는···."
"엄마야, 깜짝이야!"
도훈이 워낙에 귀신처럼 등장했기 때문에 화들짝 놀란 금자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노, 놀랬어?"
"아니, 인기척이라도 내고 오든가!"
울상을 짓던 금자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갑자기 어디서 나오는 건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더만."
"구석에서 담배 피우고 있었지. 기다리기 무료해서."
"지하실로 오기로 한 사람이 뭘 그렇게 밖을 싸돌아다녀?
나 지금 빨래하러 내려갈 거니까 바로 따라와."
막무가내로 나오는 금자의 태도에 도훈이 난처해졌다.
'이제 지하실에 가는 건 의미가 없는데···.'
[거절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명분이 없잖아. 아깐 간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갑자기 맘이 바뀌었다고 하기엔.'
"맞다. 다른 아주머니도 함께 있지 않아?"
"그게 뭐?"
"우리 둘 다 갑자기 안 보이면 의심하지 않을까 싶어서···. 혹시나 세탁실로 따라 내려올 수도 있잖아."
도훈은 금자와 함께 일하는 다른 하녀 핑계를 댔다.
"걱정 붙들어 매셔. 아줌마 허리가 안 좋다고 지하실 계단 안 내려간 지 한참 됐어."
"그, 그런가?"
"뭘 그렇게 겁을 내? 지난번에 유리랑 같이 셋이서 뒹굴던 패기는 어디갔어?"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금자 양은 정말 욕망의 화신이군요. 그냥 후딱 치워버리지 말입니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여자를 선택할 순 있잖아.'
[어쨌든 미션은 해결해야지 않습니까.]
"가만. 근데 그 아주머니도 집에서 숙식하신다고 그랬나?"
"그건 왜?"
"아니 저번에 유리랑 같이 있을 때도 있었나 싶어서. 그땐 생각도 못했네."
"아니야. 예전에는 계속 상주하셨는데 내가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론 나랑 교대로 근무하셔. 오늘도 저녁에 먼저 퇴근하실 거야."
"그렇구나. 그럼 저녁엔 두 사람 중 한 명만 집에 있다는 뜻이네?"
도훈은 최철우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확인한 것이었다.
-오늘 밤, 이 집에 남아 있으면 누구든 살아남을 수 없어.
"왜? 오늘도 자고 가게? 그래서 확인하는 거야? 호호, 나야 자기가 밤새 눌러주면 땡큐지. 이번엔 유리 빼고 둘이서만 찐하게 놀아 볼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저번에는 아침에 지수학생 시험이 있어서 그거 봐주느라 그랬던 거고."
"아무튼 오늘도 과외 늦게 시작할테니 밤늦게까진 있을 거 아냐?"
"그, 그건 그렇지."
"흐음, 그럼 나중에 과외 끝나고 집 밖으로 나가는 척만 하고 다시 돌아올래? 어차피 아무도 모를텐데."
"그, 그게 가능해?"
"뭐 어때? 새벽에 몰래 나가면 되잖아. 내가 뒷문 열어줄테니."
금자가 계속 도훈을 유혹했다.
유리를 빼고 혼자서 도훈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 수를 던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훈의 입장에선 솔깃한 제안이었다.
'이 집에 남아 있을 명분이 생겼구나.'
[결국 금자양이 도움이 되긴 되는 군요.]
'도움은 무슨. 자기 욕심 채우려고 나를 이용하려다 얻어 걸린 거지.'
"그게 가능하다면 안전하게 그때 볼까?"
"왜? 지금 못 하겠다는 거야?"
"아, 아니···. 아직 회장님도 서재에 계시고, 중간에 지수학생이 돌아왔는데 내가 안 보이면 처지가 곤란해질 거 아니야. 지하실이라 도망칠 곳도 없을텐데."
도훈이 핑계를 대며 지하실 행을 거부하자 금자도 뿔이 났다.
"나랑 별로 하기 싫은 가 보네, 아저씨? 왜? 그때 유리가 더 맛있었나 보지?"
"무슨 소리야?"
"왜? 남자들 처녀 좋아한다며? 그래서 그래? 유리 다시 불러줘?"
"아니 그게 무슨···."
[금자 양이 질투가 심하군요.]
'솔직히 말하면 금자보다 유리가 백배는 낫긴 해.'
[금자도 그런 눈치를 채서 길길이 날뛰는 게 아닐까요?]
'어쨌든 지금은 아냐. 어떻게든 설득해야지.'
"지금은 상황이 너무 촉박하다는 거지."
"뭐?"
"내가 워낙에 오래 하는 편이라···. 알잖아. 짧게 못 끝내는 거."
"음···. 그건 그렇지."
"기왕 할 거면 네 말대로 과외 끝나고 제대로 하자는 거지. 번갯불에 콩구워 먹는 식은 나도 싫거든. 불안하기도 하고."
"좋아. 그런 거라면 인정. 대신 오늘 밤엔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걸?"
"아, 알았다고."
그때였다. 저택의 자동문이 열리더니 김씨가 모는 차가 내부로 들어왔다. 도훈은 저거 보란 듯이 말했다.
"봐, 바로 지수학생 도착해 버렸잖아."
"흥. 난 이제 빨래하러 갈 테니까 나중에 봐."
금자는 괜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저택안으로 들어갔다. 지수는 밖에 나와 있는 도훈을 보자마자 헐레벌떡 차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옵!··· 아니 선생님 저 마중 나와 계셨어요?"
도훈에게 안길 듯 뛰어오던 지수가 뒤에 김씨를 의식하더니 가까스로 자제했다.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잠깐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오셨군요. 아니, 갑자기 퇴근길에 걸려가지고 한참 걸렸네요."
"고생하셨겠네요."
"별말씀을요. 근데 아가씨가 아직 저녁 식사를 못 해서···."
"전 괜찮아요. 바로 과외할 게요."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
"제가 괜찮다니까요?"
지수가 김씨의 말에 대꾸를 해 보았으나, 마침 저택에서 나온 박회장이 가만 넘어가질 않았다.
"무슨 소리냐? 식사 차려놨으니 밥은 먹고 해야지. 전 선생도 같이 드시겠소?"
"아··· 저는 저녁을 들고 왔습니다."
"그렇구만. 군소리 말고 식사부터 하고 오너라. 내가 전 선생한테는 양해를 구할테니."
박회장까지 나서자 지수도 하는 수 없다는 듯 풀이 죽어 집으로 들어갔다. 김씨는 별채로 들어가 보겠다며 박회장에게 인사하더니 물러났다.
밖으로 나온 박회장은 도훈을 보더니 물었다.
"기다리는 김에 담배나 한 대 더 태우시겠소?"
"아, 네 물론입니다."
박회장은 도훈을 꽤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우리 딸아이가 전 선생을 무척 잘 따르는구만. 비결이 뭐요?"
"예, 예? 비결이랄게···."
"하하. 재수시킬 때는 날고 긴다는 일타강사를 붙여줘도 그렇게 공부를 싫어했는데, 전선생 과외는 저녁도 안 먹고 한다는 걸 보니 말이요."
"과찬이십니다."
도훈은 일부러 대머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쑥스러운 척을 했다. 볼품없는 외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박회장이 다른 의심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박회장은 도훈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아무튼 오늘도 과외가 늦어져서 미안하오. 내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리리다."
"아닙니다. 잠깐 기다리는 건데요 뭘."
"그리고 우리 딸아이 말로는 한국사를 그렇게 잘 가르친다는 데 맞소?"
"하, 한국사요?"
도훈은 실제로 한국사를 가르친 기억이 없기 때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아마도 지수가 도훈을 두둔하기 위해 없던 일을 지어낸 모양이었다.
"덕분에 쪽지 시험 다 맞은 것 같다고 자랑하지 뭐요? 하하. 외국어를 부탁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한국사를 맡길걸 그랬구만."
"지수 학생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그 쓸데없는 아랍어 과외 얼른 때 려치워버리고 한국사나 가르치는 게 어떻겠소?"
"네?"
"아니. 우리 딸아이 말로는 스펙 쌓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한국사 자격증을 따고 싶다고 해서 말이요."
'지수가 나를 오랫동안 붙잡아 두려고 머릴 굴렸구나.'
[그런 것 같은데요?]
"저야 써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우리 딸이 전 선생을 이렇게 따를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장기계약을 맺어두는 건데."
"저 근데 회장님."
"응?"
"외람된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뭐든."
"제가 짧은 생각일지 몰라도 지수양에게 한국사 자격증 같은 게 필요할까 싶어서요."
"무슨 뜻이요?"
"저도 학원에서 가르치긴 하지만, 사실 그런 자격증이라는 게 결국엔 취업을 대비한 스펙쌓기용이거든요. 공무원 시험가산점 같은. 근데 지수양은 굳이 취업을 준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괜한 시간 낭비가 아닐까 싶어서요."
"하하. 당연히 취업을 위해선 아니지."
"···?"
"전 선생이 보기엔 돈 많은 집 여식이 공부를 하는 모양새가 이상해 보이나 보군."
"그, 그런 뜻은 아닙니다 회장님."
"아니야.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지. 근데 난 딸아이를 나처럼 살게 하진 않을 거요."
"회장님처럼이라뇨?"
"전 선생처럼 무탈한 삶을 살아온 사람과 달리, 나는 결이 다른 삶을 살았소.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말이요."
"아···."
"그래서 딸아이만큼은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소. 지식을 쌓아 교양도 넘치고, 늘 좋은 것만 보고, 나이 들어도 아이처럼 순수하게 말이요."
"아버지의 마음이 다 그렇지요."
"시집갈 때까지라도 건강해야 할텐데 그게 걱정이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여전히 정정하신데요."
"겉보기만 멀쩡하지 속은 이미 골병들었소. 독하게 살다 보니 몸 안에 독이 가득 차버린 꼴이랄까? 나참, 내가 별소릴 다했구만? 어째 전 선생이랑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말이요."
[박회장이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 들리네요.]
'늙은이의 예감 같은 거겠지. 경호원을 넷씩이나 고용해서 24시간 옆에 상주시키는 불안감이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해.
그러니까 사람이 죄짓고 살지 말았어야지.'
[혹시 박회장에게 동정심을 가지시는 건···.]
'동정 같은 소리. 내가 신경 쓰는 건 오로지 지수뿐이야.
아무리 박회장이 범죄자라도, 그의 딸에게까지 죄를 물을 순없는 법이니.'ㄷ
[당연합니다.]
"아빠, 나 밥 다 먹었어!"
그때 지수가 헐레벌떡 저택 문을 열고 나와 소리쳤다.
"벌써?"
"응. 그니까 이제 과외 시작해도 되지? 선생님. 얼른 공부하러 가요."
지수가 하도 안달을 부리자 박회장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껄껄 웃고 말았다.
"거참, 그럼 전 선생. 오늘도 수고하시오."
"네."
* * *
지하실에서 빨래를 돌리고 나온 금자는 마침 퇴근을 하려던 유리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원래 데면데면했으나, 며칠전 쓰리썸 이후 단둘이 있을 땐 말을 놓는 친구 사이가 됐다.
"이제 퇴근?"
"응. 일이 늦게 끝났네."
"그래. 살펴 가, 그럼."
유리는 서두르는 금자의 태도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왠지 나를 빨리 쫓아보내려는 느낌인데.'
그러다 문득 도훈이 과외를 늦게 시작해서 저녁까지 집에 남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저 미친···. 오늘도 대협 씨한테 달려들 작정인가?'
두 사람은 암묵적인 동맹이긴 했으나 사실상 도훈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금자가 호시탐탐 도훈을 노리는 모양새가 유리의 신경을 자극했다.
'흥. 내가 그냥 지켜볼 것 같아?'
"아···. 그러고 보니 회장님께서 시키신 일이 하나 더 있었는데 마무리를 다 못하고 나왔네?"
"뭐?"
"음, 미안한데 오늘도 하는 수없이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아. 나 커피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유리가 금자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맞불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