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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79화 (1,346/2,000)

1362. 여대 잠입-62-

"거참 전 선생에겐 번번이 신세만 지는구만. 오늘 과외가 늦어질 것 같은데 괜찮겠소?"

"별말씀을요. 올 때까지 기다려야죠."

도훈은 어차피 저택에 머무르는 시간이 오래 될수록 좋았다. 그래야 비밀금고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만약 가능만 하다면 오늘 밤에라도 금고를 싹 다 털어 버리고 박회장을 골탕 먹일 생각이었다.

'로시 좋은 생각이 났어.'

[어떤 생각 말입니까?]

'금고 안에 현금다발이 잔뜩 있을 거 아냐. 침대를 만들어도 될만큼.'

[아직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겠죠. 사채왕박회장의 비밀 금고라면요.]

'그 많은 돈을 짊어지고 가려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어? 나르다가 들킬 우려도 크고.'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우리 집으로 바로 옮겨 버리는 거야.'

[바로요? 어떻게 말입니까?]

'마법의 문고리가 있잖아.'

[아아!]

'마법의 문고리에 우리 집 안방을 연결해 놓고 돈을 싹 다 집에다 옮기는 거야. 아니, 안방으로는 부족할지 모르니 2층체력단련실에 잔뜩 쌓아두는 거지. 이거야 말로 완전 범죄아니야?'

[훌륭한 아이디어 같습니다. 역시 주인님은 잔머리 하나는 비상하게 굴리시는 군요.]

'만약 내가 범인으로 의심받는다 해도 그 많은 돈을 순식간에 증발시켰다고는 절대로 생각 못할걸?'

[굳이 남아 있지 않고 마법의 문고리와 함께 집으로 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지. 그렇게 되면 내가 중간에 사라진 걸 의심할 거 아니야. 돈다발이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내가 함께 없어지면 가장 먼저 내가 의심받겠지.'

[아하, 그렇군요.]

'알리바이를 위해서라도 돈만 옮기고 나는 집에 남아야 해.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야.'

도훈이 로시와 함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박회장의 경호원인 최철우가 먼저 일어섰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유리씨도 슬슬 퇴근해야지?"

유리는 도훈을 흘깃 쳐다보더니 괜한 핑계를 댔다.

"전···. 좀 마무리 할 일이 남아서요."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아, 마침 교대시간이니 만석이나 좀 보고 가겠습니다."

"그러게나."

철우가 인사를 마치고 물러나자 박회장도 서재로 이동했다. 비서인 유리는 함께 남고 싶었지만, 박회장이 업무차 부르는 바람에 아쉬운 표정으로 뒤따라야 했다.

거실에 홀로 남겨진 도훈을 향해 주방에 있던 금자가 커피를 들고 왔다.

"호호, 선생님은 오늘도 나랑 힘 좀 빼주셔야겠는데?"

"오늘 집에 사람도 많고 위험하지 않겠어?"

도훈이 일부러 유도 질문을 던졌다. 금자가 냉큼 미끼를 물었다.

"무슨 걱정이야? 우리에겐 비밀 공간이 있잖아. 어차피 아가씨도 늦게 온다면서?"

"지하 세탁실 말이지?"

"응. 내가 잠시 후 빨랫감 들고 지하실로 먼저 이동할게.

바람 쐬는 척 하면서 몰래 따라 들어와. 알았지?"

금자는 도훈을 보자마자 봊이가 벌렁벌렁하는지 흥분을 주체 못 했다. 성욕의 화신인 그녀는, 도훈이 오는 날만 목빠지게 기다린 눈치였다.

'카메라 설치하려면 금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겠어.'

[휴, 힘내십시오.]

금자가 빨랫감을 챙기러 먼저 이동하자 도훈은 핸드폰을 켜 카메라를 확인했다. 일전에 미리 설치 해둔 초소형 감시카메라가 집안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박회장하고 유리는 서재에서 업무를 보는 중이니 상관없을 것 같군. 김씨와 지수는 한참뒤에나 올 거고. 타이밍 나오겠는데?'

[아직 그 복싱선수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누굴 만나고 간다는 것 같던데요.]

'야간에 경호를 하는 근육 돼지 말이지?'

[네. 혹시나 다시 저택으로 들어왔을 때 주인님이 지하실로 사라진 걸 알면 괜한 의심을 살지도 모릅니다. 안전하게 작업을 하시려면 확실히 저택을 떠난 후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그것도 그렇군.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지. 언제 움직일지 결정하기 위해 놈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와야겠다.'

도훈은 기다림에 지쳐 담배를 태우러 가는 척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저택 밖으로 나오자마자 무공을 발휘해 발소리를 확 죽였다. 놀랍게도 땅을 딛는데도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백보 신권으로 익힌 보법을 응용한 동작이었다.

저택 바깥의 별채에 이르자 철우와 만석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물론 남들은 대화를 나누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그만 소리였지만, 청력을 끌어올린 도훈에겐 두 사람의 속삭이는 소리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김씨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힘들 다니?"

"어젯밤에도 슬쩍 찔러 봤는데, 의외로 충성심이 강하더라고."

"뭐? 박회장 새끼가 지한테 해준게 뭐가 있다고? 조직에서 잘나가던 건달을 운전기사로 10년 가까이 썩혀놓고 말이야."

"그게 아니라 아가씨 때문이지."

"아가씨? 설마 김씨 이 새끼 아가씨랑 그렇고 그런 사인 거야?"

대화를 엿듣던 도훈은 순간 움찔 놀랐다.

내용을 듣고 있으니 뭔가 비밀스러운 음모를 꾸미는 분위기였던 것.

'뭐냐 이건?'

[아무래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수상한데요?]

'그치? 이게 무슨 일이지?'

도훈은 발소리를 죽인 채 대화 내용을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별채 바깥벽에 귀를 바짝 붙였다. 그러자 조그맣게 들리던 목소리가 마이크를 댄 것처럼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게 아니라 허구한 날 아가씨랑 붙어있다보니, 자기가 무슨 보호자라도 되는 듯 착각하더란 얘기야. 아마도 아가씨에게 잘 보이면 박회장 사후에 어느정도 입지를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

"하하, 한마디로 줄을 잘못 섰다는 얘기군. 하여간 미련한놈."

"됐어. 김씨가 껴봐야 어차피 우리들 몫만 줄어들 거니까.

그 여군처럼 그냥 반대편이라고 생각하면 속편 해. 어차피 그래 봐야 둘이잖아. 그나저나 켄타로와는 얘기 끝난 거 맞지? 난 그 쪽바리 새끼 영 못 미덥던데. 말 수도 없어서 무슨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고."

"어차피 뭐 일본말로 말하면 알아는 듣고?"

"그 새끼가 제일 불안하단 말이야. 내가 말했잖아. 그 일본 놈이 포섭되지 않으면 어차피 우리 계획은 물거품이라고."

"흐흐, 걱정은 붙들어 매라고. 슬쩍 찔러보니까 나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뭐라고?"

"자기 몫은 얼마나 떨어지냐고 묻더라."

"와, 역시 간사한 쪽바리 새끼 같으니. 음흉하게 칼 차고 다닐 때부터 눈치챘다니까? 그 놈이 제일 먼저 배신할 거라는 거."

"쉿-. 입 조심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새끼가 듣는 법이야."

거기까지 대화를 듣던 도훈은 어이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실소했다.

'허, 이게 무슨 전개냐?'

[박회장의 오른팔이라던 최철우가 만석과 짜고 배신을 계획 중인 거죠, 그러니까?]

'그런 것 같은데? 그 일본인까지 한패가 된 것 같아.'

[세상에···. 믿었던 보디가드 중 셋이 동시에 배신을 하다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박회장에게 접근했을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뜻이죠?]

'박회장이 현금 부자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잖아. 일전에 습격을 당한 뒤로 겁나서 경호원을 넷이나 고용했고.'

[그렇죠.]

'하지만 오히려 그게 늑대 새끼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은 거지. 박회장은 조만간 노환으로 골로 갈테고, 후에 유일한 자신의 혈육인 지수가 모든 재산을 혼자 물려받을 테니까.

평생 주인을 위해 사냥개 노릇을 했는데, 결국 챙기는 것도 없이 끝난달까?'

[그렇다면 저 셋이 박회장의 재산을 빼앗기로 한 것이군요.]

'일단 더 들어보자.'

"금고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기까지 무려 십 년이 넘는 시간을 허비했어. 그리고 저 금고는 박회장 없이는 절대로 열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랬지. 그래서 박회장이 꼭 살아 있어야 하잖아."

"박회장이 얼마나 독한 놈인 줄은 알지? 금고에 있는 돈을 안고 죽으면 죽었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지 않을 놈이야.

세상에, 비번을 연속해서 틀리면 내부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도록 설계했다니 믿어져? 평생 번 재산을 저승길까지 끌고 가겠다는 거잖아."

"하여간 독한 노인네."

"하지만 저런 노인네도 자기 딸이라면 껌뻑 죽지."

"모든 아빠는 딸바보라잖아. 흐흐.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 건 참아도, 자기 딸이 과도에 베이기만 해도 술술 불어 버릴걸?"

"근데 아가씨까지 끌어들이면 나중에 어떻게 뒤처리 하려고?"

"어떻게 하긴? 그래서 칼잡이까지 끌어들인 건데. 오늘 밤이 집에 있는 사람은 절대 못 살아 나가. 죽음보다 확실한 입막음은 없거든."

[주, 주인님!]

'호들갑 떨지마. 나도 들었으니까. 하필 오늘밤이 거사일인 모양이군.'

도훈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점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건 씨팔 해도 너무한 새끼들인데? 뭐? 집 안에 있는 사람을 다 죽이고 돈을 빼앗아 가겠다고? 나는 그냥 훔쳐만 가려고 했는데 세상 나쁜놈들이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그것도 경호원이란 사람들이.]

'적어도 유리가 이 일에 끼어들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야.'

[김씨라는 운전기사도 빠진 것 같은데요?]

'그러게. 그건 좀 의외네. 난 김씨가 제일 음흉해 보였는데.'

[사람은 겉만 보곤 모르는 법이죠. 이제 어쩌실 겁니까?]

'뭘 어쩌긴 어째? 박회장의 돈은 애초에 내가 빼앗기로 한 거야. 그것으로 미스리의 복수를 대신해주기로 했다고.'

[그렇긴 하죠.]

'근데 이 새끼들이 감히 남의 물건에 침을 흘려? 확 지금이라도 반 병신 만들어 버릴까?'

[자중하십시오. 아직 놈들이 개시도 안 했는데 먼저 움직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겁니다.]

'하긴 그렇네. 듣다보니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아. 잠깐 심호흡 해야지.'

충격적인 음모의 전모를 듣게 된 도훈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때 대화를 마친 것인지 별채의 문을 열고 최철우가 밖으로 나왔다.

숨을 곳이 없었던 도훈은 그대로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지붕위로 훌쩍 올라갔다. 무려 4M 높이를, 가볍게 벽을 차는 것으로 단숨에 도약한 것이었다.

심지어 지붕에 착지할 때도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도훈이 지붕위에 있는 줄도 모르고 최철우는 계속 떠들었다.

"잊지 말라고. 오늘 밤 12시니까. 넌 곧바로 김씨부터 제압해."

"잠깐만."

"왜? 얘기 다 끝났잖아."

"혹시나 유리가 계속 집에 남아있으면 어떻게 하지? 지난 번에도 야근한다고 늦게까지 머물렀던 적이 있거든."

"말했잖아. 오늘 밤 이 집에 남아있으면 누구든 살아 남을 수 없을 거라고. 굳이 꼭 말로 해야 하나?"

"그게 아니라···. 유리에겐 총이···."

"뭐? 권총? 가까운 거리에서 총이 빠를까 켄타로의 검이 빠를까? 총을 꺼내는 순간 켄타로에게 손 모가지 날아가고 말 걸?"

"으음, 그래도 유리는 나름 착했던 것 같은데 죽이긴 미안한데."

"웃기는 소리 하네. 야, 예쁘다고 눈독 들이고 있었나 본데 박회장 현금만 나눠 가지면 유리 같은 미녀들 한 트럭은 몰고 다닐 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흐흐. 난 돈 생기면 헬스장부터 차릴거야."

"지랄. 한국부터 떠야지. 여권 다 준비해 놨어. 중국으로 넘어갈 배편까지. 오늘 일만 무사히 끝나면 평생 다 써도 못쓸 돈을 만질 수 있을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알았어. 나중에 봐. 나 근손실 나기 전에 운동하러 가야 해."

"미친놈."

철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저택을 빠져나갔다. 지붕위에 숨죽이고 있던 도훈은 명백한 살의를 드러내며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이것 참 하는 짓이 역겨워서 못 봐주겠네. 이대로 초살로 끝내버려?'

[자중하십시오. 주인님이면 일격에 최철우를 죽일수도 있겠지만, 괜히 민간인에게 먼저 손을 썼다간 플레이어의 율법을 어기는 셈이 됩니다.]

'알아. 그래도 정당방위면 상관없지?'

[음, 그건 그렇죠.]

'두고 봐. 정당방위로 끌고가서 아주 아작을 내줄테니까.

동양 챔피온 같은 소리하네. 확 그냥 한 방에 강냉이 싹 다 털어버릴라.'

[아참, 주인님. 금자에게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이제 와서 금고에 카메라 설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자정이 되면 경호원 나부랭이 놈들이 강도로 돌변해 들이닥칠 텐데 말이야.'

[하긴 그렇군요. 그럼 계획을 전면 수정하셔야 할지도.]

'오히려 잘됐어.'

[네? 오히려 잘 되다뇨?]

'놈들이 먼저 나서주면야 돈은 내가 털고, 죄는 놈들에게 싹 다 뒤집어씌우면 좋지 않겠어?'

[오호, 그런 방법이?]

'주인을 무는 개새끼들의 말로가 얼마나 처참한 건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

[그나저나 주인님이 박회장을 구해주게 되면 복수의 목적과는 맞지 않는 것 아닙니까?]

'구해준다고는 안했는데?'

[네?]

'이번엔 박회장이 당하는 입장이지만, 따지고 보면 박회장도 저놈 들보다 더 하면 더했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나쁜 놈이야. 나쁜 놈끼리 아귀다툼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나름 구경하는 재미가 있겠지. 강건너 불구경이랄까?'

그때였다. 도훈의 행방을 찾아 나선 금자가 결국 저택 밖의 정원까지 걸어 나왔다. 지붕 위에서 조용히 보고 있던 도훈은 금자를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방금 사악한 음모를 듣고 나니, 박회장의 애를 갖겠다는 금자가 오히려 순진해 보일 지경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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