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1. 여대 잠입-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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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빡공 모드로 공부한 도훈은 잠시 쉬는 시간에 자판기 커피를 뽑기 위해 휴게실로 향했다. 건물의 로비에 위치한 자판기에는 삼삼오오 학생들이 몰려들어 도훈은 잠시 기다려야 했다.
'동전이 어딨더라?'
주머니를 뒤지던 도훈은 이내 동전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 아공간에 잔뜩 쌓아 뒀잖아?'
이럴 경우를 대비해 도훈은 인벤토리로 쓰이는 아공간을 휴대용 창고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동전뿐 아니라 상당량의지폐, 그리고 담배 등도 보루 단위로 쌓여 있었다.
도훈이 몰래 뒤로 손을 뻗어 아공간에 손을 집어 넣었다.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것처럼 사라졌지만, 워낙에 재빠른 동작이라 눈치를 채는 사람은 없었다.
'이건가?'
인벤토리의 장점은 특별히 위치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옮겨놓은 물건을 떠올린 뒤 손을 집어 넣으면 알아서 해당 물건이 딸려 나오는 식이었다. 어떠한 인공지능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 같은데 도훈으로선 알 수 없었다.
500원짜리 동전을 집은 도훈이 씩 웃으며 손을 꺼냈다.
어느새 그의 손가락 사이엔 동전이 잡혀있었다.
'정말 편리하구만. 천상계에서 산 아이템 중에서 가장 일상 활용도가 높은 것 같아.'
[아공간 인벤토리 말씀이시죠?]
'응. 귀찮을 걸 들고 다닐 필요가 없잖아.'
지갑도 가방도 필요 없었다. 늘 맨몸으로 다녀도, 사실상 원룸 하나를 등에 이고 다니는 셈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만족스러운 건,
'담배지.'
[담배요?]
'너 여름 바지에 담뱃갑 꾸깃꾸깃 넣어서 다니면 얼마나 볼품없는 줄 모르지? 라이터는 또 어떻고? 밖에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라이터 깜빡한 날에는 진짜로 개빡친다니까? 근데 인벤토리에 넣어두면 그럴일이 없으니까.'
[하하, 주인님은 참으로 소박한 곳에서 행복을 찾으시는군요.]
'그만큼 활용도가 높다는 뜻이지.'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자판기 커피를 뽑아 나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
말을 건 사람은 알이 커다란 안경을 쓴 여학생이었는데, 피부가 유난히 희고 깨끗한 편이었다. 안경을 벗으면 훨씬 예쁠 것 같은데, 아직 꾸밀 줄 모르는 순수한 학생 같았다.
"네? 저 부르신 거예요?"
"저랑 같은 수업 들으시는 분 맞죠?"
"저희가 그랬던가요?"
지금 듣는 수업은 우리 학과에서는 도훈 혼자 듣는 교양수업이었다. 사실, 이것도 약간의 사연이 있는데 1학년 당시 들었던 수업을 재수강하고 있는 것으로 현재의 도훈이 아닌 원주인의 귀책이라고 볼 수 있었다.
군대 가기 전 공부에 손을 놓았던 원주인은 학점관리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 특히 2학기 때 여친에게 차이고 군대 갈때쯤엔 멘탈이 반쯤 나가버렸는지, 기어코 선동렬 방어율에 준하는 평점을 찍고 말았다.
학고는 겨우 면했지만, 이대로는 임용시험 시 반영되는 내 신에서 불리할 게 뻔했기 때문에 도훈은 2학년 2학기부터 1학년 수업 때 빵꾸 난 교양과목들을 하나씩 재수강하기로 마음 먹었다.
비유하자면 보수공사 같은 것으로, 그런 식으로 평점이 빵구난 과목들을 하나씩 메워 4학년 1학기가 되었을 때 전체적인 평점을 끌어 올릴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재수강을 듣는다는 사실이 창피하기도 해 굳이 후배들이나 동기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듣던 수업인데 불쑥 누군가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역사의 이해 수업요. 쉬는 시간에 방금 나오셨잖아요."
"아, 네."
도훈은 영문을 몰라 일단 아는 척을 했다.
'누구냐 쟤는?'
[주인님도 모르시는 분이죠?]
'사범대 학생이 아닌 것 같은데? 하긴 1학년 때 교양수업이라 전교생이 모두 듣는 수업이니…. 혹시 일전의 원주인과 친분이 있는 사인가?'
[아닙니다. 기억에 전혀 없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원주인이 알려면 군대 기간 포함해서 3년 전에 안면을 터야 하는데, 나이도 이제 겨우 신입생 정도로 보이는걸요?]
'그렇지? 대체 무슨 용문지 모르겠네?'
"음··· 저, 다른 게 아니고···. 혹시 동전 좀 빌려주실 수 있나 해서요. 제가 지갑을 깜빡 놓고 와서."
"아, 네. 네."
알고 보니 자판기 커피를 뽑는데 동전이 없어서 돈을 빌리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도훈은 재빨리 손을 허리 뒤로 돌려 동전을 끄집어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꼭 갚을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도훈은 굳이 500원을 돌려받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다했다. 하지만 여학생은 연신 감사를 표하며 도훈에게 조르는 것이었다.
"진짜로요. 혹시 연락처 알려주시면 제가 저녁에라도 계좌이체로 넣어드릴게요."
"…예?"
도훈은 이쯤에서 뭔가 어색함을 느꼈다.
'500원을 갚겠다고 굳이 연락처를 달라고? 뭔 소리야 이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닙니까? 혹시···.]
'에이, 설마. 날 언제 봤다고.'
도훈은 긴가민가했지만 괜한 오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다음 수업 때 커피로 갚으세요."
"아니에요. 저희 부모님께서 절대 빚지고 살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정말로 바로 보내드릴게요."
도훈은 곧 수업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핸드폰에 연락처를 남겼다.
"성함은 뭘로 저장할까요?"
"도훈이예요. 이도훈."
"아, 넵 감사합니다!"
도훈의 번호를 저장한 여학생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핸드폰을 받아들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
"아니 저 커피."
커피를 뽑은다고 해놓고 그대로 강의실로 들어가는 여학생을 보며 도훈이 뒤통수를 긁었다.
"커피 마신다고 돈 빌려달라더니 참나···."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수업에 들어간 도훈은, 방금 전동전을 빌려 간 여학생이 강의실 맨 뒷좌석에 앉아있는 걸 확인했다. 여학생은 도훈과 잠시 눈이 마주치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뭐지 쟤는?'
[정말로 주인님께 관심있어서 저러는 거 아닐까요?]
'관심이라고?'
[솔직히 주인님 외모 정도면 모르는 여자한테 대쉬를 받을 수도 있을 법 하잖습니까?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는 게 더 신기한걸요?]
'그런가?'
강의에 집중하려 했지만 괜히 뒤통수가 따가운 도훈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뒤를 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도훈은 청각을 집중하며 여학생의 목소리를 찾았다.
내공을 가하자 청력이 덩달아 상승하며 강의실내에서 소곤거리는 여러 학생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와, 수업 존나 지루하지 않냐? 수면제로 딱인 듯."
"나 어제 소개팅 간 거 있잖아. 여자애 완전 존예보스 나온 거 있지?"
"오늘 점심 뭐먹을까? 귀찮은데 그냥 컵라면 때울래?"
쓸데없는 목소리들을 필터링하고 나니 바로 전 대화를 나누었던 여학생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도훈은 그쪽으로 청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다른 목소리들이 자연스럽게 페이 드아웃되면서 포커싱을 맞춘것처럼 여학생 주변의 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 호 땄어."
"진짜? 다은이 대박!"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옆에 앉은 여학생과는 친구사이였던 모양이었다.
[여학생 이름이 다은양인 모양이군요. 근데 번호를 얻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일단 더 들어보자.'
"완전 창피해 죽는 줄 알았잖아. 눈앞에서 보니까 더 잘생긴 거 있지? 키도 엄청 커!"
"어떻게 땄는데?"
"자판기 커피 뽑을 동전 빌려달라고 하고, 나중에 갚아준다고 번호 달랬지. 히히."
"흐흐흐 미친년. 그게 무슨 헛소리야? 저 오빠는 그걸 또 받아주던?"
"아니. 괜찮다고 했는데 내가 끝까지 졸랐지. 그러니까 나중에 정말로 번호를 주더라고."
"이야, 다은이 이제 그럼 썸타는 거야?"
"아직은 몰라. 여자친구 있을수도 있잖아. 아니 분명 있겠지. 저 얼굴이면."
"다은아. 남자들은 여자친구 있어도 굳이 오는 여자 안 막아. 네가 확 뺏어버려."
"아유, 뭘 김칫국부터 마셔? 일단 친해지는 게 먼저지."
"또 아니? 저 오빠가 은근 바람둥일지. 여자가 들이대는데 마다하는 남자 별로 없다."
"설마? 지금도 공부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뜨끔.
도훈은 귓속말을 엿듣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자신의 번호를 따간 여학생의 속셈을 알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딱히 싫지 않았다.
'헐, 진짜로 헌팅이었잖아?'
[제 말이 맞죠?]
'아니 근데 나를 언제 봤다고···.'
[언제 본 게 중요합니까? 주인님의 인기를 증명했다는 게 핵심이죠. 이제 어쩌실 겁니까?]
'뭘 어째? 나 좋다는 여자들 다 상대해주다간 미션이고 업적이고 공략할 시간도 없을텐데?'
[그게 아니라 지금 이게 업적인데요?]
'엉?'
[잠시만요. 디스플레이에 업적을 띄워드리겠습니다.]
49 . 먹튀의 명수(당신에게 먼저 들이대는 여학생을 공략한 후 먹튀합니다. 단, 상대가 처녀여야 합니다.)
-예상대로 당신은 쓰레기군요.
-정신 조작류의 스킬은 일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업적 보상 : 식탐의 젓가락(아이템), 해당 젓가락으로 먹는 어떤 음식도 미슐렝 쓰리스타급 음식으로 만들어 줍니다.
젓가락을 집은 순간, 그곳은 이미 저세상 맛집입니다.
미션을 확인한 도훈은 보상 아이템의 허접함에 코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미션 보상이 고작 젓가락 한 벌이야?'
[식탐의 젓가락이 왜요? 저렇게 훌륭한 아이템도 몇 없습니다.]
'아니 내가 무슨 맛집에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도훈은 곰곰이 따져보다 젓가락이 의외로 활용도가 높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거 다른 사람이 집어도 똑같은 효과지?'
[그렇죠. 공유가능한 아이템입니다.]
'그럼 괜찮네.'
[활용 방법을 찾으신 겁니까?]
'가령 우리 집에 여자를 초대해서 내가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잖아.'
[그렇죠.]
'그 경우 음식을 맛있게 만드느라 고민하는 것보다 저 아이템을 손에 쥐어주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는 거지.'
[오, 그런 방법이!]
'그리고 나도 입맛 없을 때 밥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듣고보니 괜찮은 거 같습니다. 그럼 이대로 공략 진행하실겁니까?]
'아… 근데 양심에 좀 찔리는데.'
[왜요?]
'쉽게 말하면 날 짝사랑하는 여자애 슬쩍 꼬드겨서 먹고버리라는 거 아냐?'
[먹튀한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근데 좀 이상한데? 저렇게 대놓고 들이댄 여자가 몇 없긴 했지만, 이제껏 한 번도 미션이 안 떴던 이유가 뭐지?'
[처녀라는 조건 때문이 아닐까요?]
'아! 그렇네. 나한테 들이댄 여자들이 처녀가 아니었을 확률이 크니까. 보통 아다브레이킹 할 때는 내가 먼저 들이댔고.'
[그렇죠.]
'흐음. 좀 촌스럽게 스타일링한 걸 감안하면 와꾸는 봐줄만 한 것 같기도….'
도훈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여학생을 마주쳤다.
옆에 있던 여학생이 평균보다 못 생겨서 그런지 다은의 외모가 훨씬 빛나보였다. 안경만 벗기면 상당히 포텐이 높은 얼굴임엔 틀림없었다.
도훈과 눈이 마주친 다은이 깜짝 놀라자 도훈이 씽긋 웃어 보였다.
[양심에 찔리신다면서요?]
'업적이 먼저다.'
[역시, 업적밖에 모르는 바보.]
'근데 일단 오늘은 아니야. 정신 조작없이 하루 만에 자빠뜨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럼요?]
'일단 지금은 박회장 미션에 집중하고 싶어. 슬슬 축제 준비도해야하는데 굳이 지금 업적에 들어갈 필욘 없지.'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괜히 미뤘다가 다은학생의 마음이 식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여자 마음은 갈대라는 거 잘 아시는 분이….]
'보통은 꼴린 김에 박는 게 맞지. 하지만 지금의 경우가 다르잖아. 다은이가 날 한동안 지켜보다 겨우 용기내서 말 걸었으니까.'
[뭐가 다르죠?]
'쉽게 말해 짝사랑이란 소리야. 저렇게 소통없이 일방적으로 꽂힌 애들은 오히려 가만 놔두면 감정이 더 커지는 경우가 많거든.'
[오.]
'물론 계속 방치플레이를 하면 제풀에 지쳐 떨어지겠지.
하지만 최소한 한달간은 나랑 연락처 주고받은 사실만으로 혼자 상상의 나래에 빠져 감정이 폭발할거야.'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터뜨리겠다?]
'그렇지. 그땐 찌르면 넘어오는 순간이 올테니까. 업적 하나 거저 먹겠네.'
[다 주인님 복이지요.]
도훈은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지능을 발달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인지 1학기 때보다 훨씬 이해가 잘 되는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깨톡을 확인하는데 망부석이 되지마요 아이템에서 몇가지 중요 메시지를 알려왔다.
[주인님. 인공지능이 판단을 못하는 사안 같은데 주인님께서 직접 확인하셔야할 것 같습니다.]
'뭔데?' 도훈이 보니 요일별로 할당된 1학년 여학생들의 불만접수였다. 한동안 박회장 미션에 집중하느라 근 일주일간 약속을 계속 캔슬했더니 날짜를 다시 잡아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었다.
'음, 서현이랑 아영이… 얼래? 희주는 또 뭔데?'
망부석이 되지마오의 자동응답이 최대한 약속을 미루다가 결국엔 날짜 확정에 대한 통보를 받게 된 것이었다.
'쓰읍. 이것들이 정말 한 번 빼먹었다고 사람 잡아 먹으려고 하네.'
[그렇다고 또 미루면 돌려막기밖에 안 될 겁니다. 하루에 한 사람씩 돌려 만나다보니 결국에 이렇게 민심이 폭발하지 않습니까?]
'그럼 어쩌지? 당장은 박회장 미션이 중요한데.'
[음…. 그냥 아프다고 하시죠.]
'그랬다간 병간호 한다고 집으로 다 달려올걸?'
[흐음, 그렇다면….]
'네 말대로 이대로 계속 미뤄봐야 돌려막기 밖에 안되니 오늘 빚잔치 한 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