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9. 여대 잠입-49-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네. 오늘은 11시가 첫수업이거든요. 지금 출발해야 여유있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아···."
결과적으론 아침 식사를 먹고 함께 공부할 시간이 1시간 남짓밖에 안 되었던 것. 그마저도 금자와 들락날락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만 도훈이었다.
'아침에 약만 잔뜩 올려서 지수가 삐지겠는데?'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 수업을 늦을 수도 없으니.]
결국 지수는 도훈의 예상대로 입이 한껏 삐져나온 채 김씨의 차를 타고 등교 해야했다. 지수가 없는 이상 도훈도 더 저택에 머무를 명분이 없었다. 또한 그 역시 본인의 오후 수업을 위해 슬슬 움직일 시간이었다.
"그럼 저도 이만···."
지수가 등교한 뒤 도훈이 집을 나서려고 하자 금자가 그를 붙잡았다.
"왜? 벌써 가게?"
"저도 슬슬 출근 준비를···."
"출근이라니? 다른 과외도 같이 뛰는 거였어? 근데 이 시간에 과외를 하는 학생이 있나?"
금자의 물음에 어느새 두 사람에게 다가온 유리가 대신 대답했다.
"대협씨 직업은 본래 학원 강사예요. 아가씨 과외는 잠깐 시간 내서 하는 알바일 뿐이고요."
"아···. 학원 선생이었어?"
모처럼 세 사람이 모이자 자연스럽게 새벽녘의 분위기가 났다. 금자는 도훈을 이대로 떠나보내기 아쉬웠는지 그를 붙잡았다.
"갈 땐 가더라도 차 한잔하고 가."
"지금요? 근데 시간이···."
"커피 한잔 마시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유리도 마실 거지?"
"저는 그럼 홍차로 부탁해요."
금자가 차를 준비하러 가자 둘만 남게 된 도훈과 유리가 어색하게 거실에 남았다. 도훈이 뻘쭘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침에 바쁘셨나 봐요?"
"네. 어제 못을 다 한 일 마무리 하느라요. 어제 누구 덕에 전혀 손을 못 댔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농담한 거예요.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인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니까."
유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체념했다기보단 현실을 빠르게 수긍하는 태도처럼 보였다.
'확실히. 유리는 박회장에 대한 충성심 같은 건 조금도 없던 모양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어제 작당 좀 했다고 곧바로 돌아섰군요.]
'어쨌든 나에겐 좋은 일이지. 같은 편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니까.'
"잠깐 앉아서 기다릴까요?"
"네, 넵."
유리와 도훈이 거실에서 기다리는 사이 금자가 금방 차를 준비해 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며 진한 향이 퍼져나갔다.
"좋은 커핀가 봐요. 향이 엄청 진한데요?"
"당연하지. 여긴 무조건 최고급 재료만 쓰거든. 남미에서 직접 공수한 자메이칸 블루마운틴을 손수 로스팅한 거야. 업소에서 사용하는 에스프레소 기계로 추출했고."
"아···."
도훈은 무슨 소린 줄 이해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비싼 재료로 만든 훌륭한 커피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보통의 가정집에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긴 무엇이든 예상을 뛰어 넘었다.
'박회장이 정말 돈이 썩어 넘치는구나. 사치가 극에 달했어.'
[숨겨놓은 재산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걸까요?]
'짐작하기가 힘들 정도야. 얼추 이 집에 들어가는 돈만 봐도···.'
박회장이 가진 회사와 조직은 차치하고라도, 경호원과 하녀만 해도 장난이 아니었다.
대저택에 상주하는 하녀만 둘, 운전기사 하나, 수행비서 하나, 그리고 경호원이 셋.
유리같은 경우 경호원에 준하는 월급을 받을테니 어림잡아 월에 천만원 넘게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토탈 인건비로만 월에 억 단위로 깨지고 있었다.
그밖에 저택을 꾸리는 데 드는 비용을 포함하면 못해도 수억 단위. 그것이 월 단위로 유지하는 비용인 것이다.
'이 정도 사이즈면 일전에 애자매 집보다 훨씬 잘산다고 봐야지. 재벌가 손녀 고은성 집안 정도는 아니지만.'
[근데 애자매 집안도 나름 중견기업 오너 아니었던가요?]
'회사 사장이란 건 직함만 높을 뿐 실제로 자산이 많은 건 다른 문제야. 박회장이 어지간한 기업 사장들보다 실제론 훨씬 더 부자라는 뜻이지.'
[하긴···. 사채업계 큰손이라 불릴 정도면, 가진 재산이 어마어마하겠군요.]
'현금 동원력으로만 따지면 우리나라에서도 손에 꼽지 않을까? 일단 사채업이나 여자장사도 모두 현금을 굴리는 일이니.'
[그리고 그 현금이 이 저택 지하에 잔뜩 숨겨져 있고 말이 죠.]
'그러니까.'
도훈은 지하에서 본 금고를 생각하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 속에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감추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도난당했을 박회장은 또 얼마나 좌절할 것인가?
복수의 강도로 생각하면, 여기 세 사람을 모두 따먹은 것보다 훨씬 큰 충격을 줄 수 있었다.
'그냥 힘으로 부수면 부서질 것도 같은데···.'
[그 커다란 금고를요?]
'지금 내공이면 나는 무쇠도 뚫을 수 있어.'
[철판 한 장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죠. 하지만 그 정도 두께면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어려우실 겁니다. 폭탄을 터뜨려도 흠집도 안 날 것처럼 보이던데요?]
'그러려나?'
[그리고 문제는 강제로 훼손했다간 경보가 울릴 거란 점입니다.]
'경호원들이 몰려들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정면 대결해도 다 한주먹거리니까. 딱히 문제될만한 상대는 없을 거야. 적어도 일반인 수준에선 말이지.'
[경호원이 문제가 아니죠. 절도가 되면 경찰력이 개입할 것이고, 자칫 형사 사건으로 번지면 주인님의 이력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내 이력이라니?'
[잊으셨습니까? 주인님은 원주인의 꿈을 이루어야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교사가 되지 못하면 나중에 능력을 회수당할지도 모르니까요.]
'아···. 형사처벌이라도 받아서 빨간줄 그이면 교사임용을 못 한다는 소리구나.'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럼 몰래 훔쳐야겠네. 어차피 강간만 아니면야, 내 능력을 쓰는 데 딱히 제재는 없는 거잖아.'
[하지만 보안이 너무 철저합니다. 비번입력과 동시에 지문인식을 같이 해야 하니까요. 이중잠금장치라서.]
도훈도 그 부분이 가장 복잡한 문제라는데 동의했다.
'손가락을 확 잘라버릴까?'
[예?]
도훈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금자가 말을 걸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네?"
"이제 한 배를 탔다면서? 그럼 서로 도와야지."
"무슨 말씀인지 잘···."
"하, 답답하네. 솔직히 까고 말할게. 난 박회장의 본부인이 되는 게 목표야."
"보, 본부인이요?"
"그래. 첩이나 애인 같은 거 말고, 재산 분할을 나눌 수 있는 혼인 관계 말이지."
금자는 참으로 노골적인 인물이었다.
원하는 목표를 거리낌 없이 밝혔다. 그녀의 솔직함에 유리도 사뭇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게···, 가능할지."
"왜? 내가 비천한 출신이라?"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회장님은 재혼하실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서."
유리가 현실적으로 충고했다. 따지고 보면 부인을 잃고 오랫동안 홀로 살아온 박회장이 불쑥 환갑이 다 되어 재혼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정말 재혼을 생각했다면 훨씬 이전에 결혼을 했을 테니까.
"꼭 혼인을 해야지만 재산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박회장의 애를 밸 거야."
"아!"
금자의 계획은 이랬다. 박회장은 금자와 결혼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을 것이다. 그저 욕정을 배출하는 용도로만 생각하고 있으니.
하지만 금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혼인이 아니더라도 그의 아이를 임신해 애를 가지면, 자연스레 박회장의 유산 일부는 아이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애를 가졌다는 핑계로 결혼을 해주든 안 해주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유산의 관리는 전적으로 그녀의 몫이 되기 때문이 실질적인 상속자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
"그, 그런 방법이라면···."
금자의 대범한 계획에 유리도 납득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한테 최대한 협조해야 해. 그래야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테니까."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잘 이해가 안 가나 본데, 천천히 설명해 줄게. 유리 너는 박회장의 비서잖아, 맞지?"
"응."
"가까이서 박회장을 수행하니만큼 무척 가까운 사이일 거 아니야. 앞으로는 박회장의 동태를 수시로 나한테 알려주란 말이지. 그래야 내가 계획을 세우기 용이하니까."
"음···."
유리는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협조했을 때 자신에게 무엇이 이득인지 따져보는 눈치였다.
"그렇게만 해주면, 내 몫으로 떨어지는 유산의 10%를 너한테 줄게."
"10 프로?"
"그래. 너도 어차피 돈 벌려고 박회장에게 붙어 있는 거 아니야?? 10%라고 해도 지금 월급보다는 훨씬 큰돈일 걸."
유리는 계산을 해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조건은 아니네."
"그리고 대머리 너."
"저, 저요?"
"너도 과외 계속하고 싶지?"
"마음이야 그렇죠. 하지만 저는 진짜 잠깐하는 거라서···."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오래 붙어 있게 해줄게.
대신 너도 나한테 협조해야 해."
"음···. 협조라는 건···."
"지금처럼 아가씨를 맡아주면 돼. 이 집에서 제일 신경 쓰이는 존재니까."
"그게 전부입니까?"
"물론···. 나랑 유리가 가끔 재미도 보면 더 좋고."
"아···."
'미친년이군.'
[확실히요.]
'그러니까, 나는 사실상 금자와 유리 사이에서 노리개 역할이라는 거잖아?'
[노골적으로 말하면요. 보통 이런 역할은 여자가 맡는 거 아닌가요?]
'굳이 남녀 차별적인 문제를 떠나서, 박회장의 애를 임신할 생각을 해놓고선 재미는 나랑 보겠다는 소리잖아? 유리가 배신 못하게 붙드는 역할도 하고.'
[금자는 정말 악녀 중에 악녀군요.]
'상관없어. 금자가 무슨 계획은 세우든 박회장의 돈은 다 내 차지가 될 테니까. 혼자 헛물이나 캐라고 하지.' 세 사람은 겉으로는 동맹관계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는 유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금자가 박회장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계속 눈만 감아주면 된다는 뜻이니. 하지만 대협씨를 멋대로 가지고 노는 건 정말 못 봐주겠어. 금자를 대협씨와 어떻게든 떼어놓아야지.'
각각의 노림수를 숨긴 채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회의가 끝이 났다.
"다음 과외는 또 언제지?"
"이틀 뒤입니다."
"그럼 그때 보자고."
"대협씨, 퇴근하는 길인데 제가 태워다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저도 차를 가지고 와서."
"···그렇군요."
유리는 아쉬운 눈치였지만, 차를 두고 가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차를 마신 세 사람은 이내 헤어졌다. 어차피 더 저택에 남아봐야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무엇보다 또 다른 하녀가 왔기 때문에 작당 모의도 지속할 수 없었다. 나이든 하녀는 짬밥에서 금자보다 위였기 때문에 아무리 기고만장한 금자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저택에서 나와 차를 탄 도훈은 가발부터 벗어 던졌다.
"와씨,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그럴리가요. 실제 두발처럼 환기가 잘 되는 천상계 제품인데요.]
'난 그냥 대머리가 싫어. 자존감 존나 떨어진다고.'
[아···.]
도훈은 룸미러를 꺾어 얼굴을 확인했다.
가발은 벗었지만, 여전히 역용술의 흔적이 남아 제 얼굴로 돌아오지 못한 채였다.
'큰일이네. 나도 1시부터 수업인데 그때까진 원상복구가 어렵겠지?'
[눈 위쪽은 좀 풀린 것 같은데 차라리 마스크를 써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마스크? 한여름에?'
[한여름에도 감기는 걸리니까요.]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뭐 암튼 다른 뾰족한 수가 없겠군. 어쨌든 눈만 보면 누군지 잘 모를거 아냐? 그사이에 제 얼굴로 회복할테고.'
도훈은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만 노출한 채 학교로 향했다.
수업을 듣는 와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박회장의 금고를 어떻게 털 것인지 조사했다. 인터넷으로 비슷한 금고 형태를 샅샅히 검색했다.
'로시 네 말이 맞았네. 이거 폭탄으로도 안 뚫리는 종류같아.'
[정말요?]
'어. 강판이 10cm에 달하는 구만. 게다가 이중 잠금 장치는 연속으로 3회 이상 실패하면 안에서 잠금장치가 부서지면서 못 열게 되어 있어.'
[아니면 문을 제외한 다른 곳을 파고 들어가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땅굴을 파란 소리야?'
[문은 두꺼워도 다른 곳은 얇을 수 있으니까요.]
'그것도 불가능해. 찾아보니 금고가 통째로 쇠로 만들어져 있어. 쉽게 설명하면 땅속에 강철로 된 직육면체 금고를 통째로 박아 넣은 셈이랄까? 땅굴을 파고 결국엔 금고 벽에 가로 막히겠지.'
[와…. 정말이지 철두철미 하군요. 대체 얼마를 숨겨 놓았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숨긴 돈이 금고의 수백배는 된다는 소리겠지. 금고값이랑 설계비만 해도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보이는데.'
도훈이 수업을 끝내고 요기나 할겸 간식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멀리서 노랗게 염색 여자애가 선글라스를 쓰고 다가왔다.
"와아! 연예인이다!"
도훈은 자신을 보고 하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가까이 다가온 희주가 생글거리며 다시 말했다.
"얼굴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완전 연예인이라고요 회장님!"
선글라스를 벗은 희주가 환하게 웃었다.
희주는 그새 더 예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