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4. 여대 잠입-44-
* * *
"혹시 무슨일 있으십니까, 회장님?"
나의 물음에 박회장이 말을 아꼈다.
"···아닐세. 나이가 드니 자꾸 노파심만 늘어서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만."
"하하, 부모의 마음이 다 그렇죠."
은근슬쩍 박회장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그의 입을 열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말을 거두려던 박회장이 예상대로 다시 얘기를 꺼냈다.
"딸내미 가진 애비 마음이 다 그런건가 싶네."
"네?"
"방금 딸아이가 잘 자고 있나 방으로 보러갔었거든."
"지수 학생 방에요?"
"자넨 아직 모르겠지만, 중학생만 되어도 딸자식들은 자기 방을 절대 안 보여주려고 한다네."
"그런가요?"
"어렸을 땐 애비랑 목욕도 하던 그 쪼그만 것이 말이야. 꼴에 여자라고 어찌나 비밀이 많아지는지."
"하하, 상상이 잘 안되는 군요. 저희 딸은 지금도 아빠만 찾던데."
"그렇겠지. 아무튼 잘자고 있나 보려고 방에 들어가 이불을 다시 덮어 주는데 갑자기 잠꼬대를 하지 뭔가?"
"잠꼬대요?"
"왠 사내놈 이름을 부르더라고. 도훈 어쩌고."
[응? 주인님 아닙니까?]
'지수가 내 꿈을 꿨나본데?'
[곤란하게 됐군요.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하는데.]
'곤란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박회장은 내가 도훈이란 건 꿈에도 예상 못하고 있을 텐데. 오히려 잘 됐지. 도훈이라는 제 3의 인물로 인해 과외선생 전대협에 대한 의심은 완전히 소거된 셈이니까.'
[그럴수도 있겠네요.]
"혹시 아이돌 가수 이름 아닐까요?"
"아이돌?"
"왜, 요새 젊은 남자 아이돌 말입니다. 저희 학원 애들도 BTC니 뭐니 하는 아이돌 그룹 이름을 죄다 외우고 다니거든요. 저는 봐도 누가 누군지 구분도 잘 안 가던데, 그룹 멤버들 생일까지 모두 꿰고 있더라고요.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나는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박회장을 위로했다. 하지만 호의를 보여줌으로써 박회장의 신뢰를 쌓으려는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아이돌이 있었던가? 아이돌 이름치고는 너무 촌스러운데."
"촌스···. 하하, 듣고보니 그렇네요."
"아무튼 뭔가 좀 쌔하더란 말이지. 어떻게 키운 딸자식인데, 날파리 같은 놈이 꼬이나 싶어서."
[주인님 보고 날파리라는 데요?]
'날파리는 무슨. 대물 파리다 새끼야.'
"별일 아닐 겁니다. 수업할 때 보면 남자에겐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수업할 때 태도가 어떻던가?"
기왕 이렇게 된 거 박회장의 호감을 쌓기 위해 없는 말을 지어냈다.
"뭐라더라···. 잠시 쉬는 시간에 갑자기 저한테 묻더라고요."
"뭐라던가?"
"저보고 한남이냐면서."
"······."
"그래서 제가 한남동에 안산다고 했거든요.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요새 젊은 여자애들이 쓰는 남성비하용어더라고요."
박회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딸아이가 최근 페미니즘인가 뭔가 하는 이상한 데 빠져서 말이야."
"그렇군요. 아무튼 오히려 남자를 약간 적대시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한남들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나도 그런 줄로 알았거든. 사실 지수가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는 타입이긴 해. 귀가 얇아서 그런지 뭔가에 꽂히면 한동안 그것만 파고들더라고, 어려서부터."
"집중력이 좋은 학생이군요."
"하하, 자네는 말을 참 듣기 좋게 하는구만."
자식을 칭찬해주는 사람을 싫어하는 부모는 없다.
예상대로 똥꼬를 살살 빨아주자 박회장도 점점 나에게 마음을 여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박회장의 비위를 맞춰주십니까? 박회장은 복수의대상 아닌가요?]
'맞아. 하지만 가장 무서운 적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격언을 실행하는 거 뿐이야. 믿는 놈한테 뒤통수 맞으면 그게 더 아프니까.'
"나도 담배나 한 대 주게나."
"네? 회장님은 끊으셨다고."
"담배를 끊는 게 어딨나? 평생 참고 살 뿐이지. 가끔 기분 내키면 피우기도 하거든."
나는 담배를 꺼내 박회장의 손에 공손히 건넸다.
불까지 붙이자 박회장이 자연스럽게 턱을 내밀었다.
'박회장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주인님의 친화력이 일품이군요.]
'그것도 있지만, 나를 경계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한 느낌이야. 하긴 경계할 게 뭐 있어? 40대 대머리 중년 따위한테.'
"후-. 역시 간만에 피우니 담배맛이 좋구만."
"원래 제일 맛있는 담배는 끊었다 피우는 첫 담배라고들 하더라고요. 근데 괜히 저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우실까 조심스럽습니다."
"무슨. 피우고 싶으면 피우는 거지. 앞으로 살아봐야 얼마나 산다고."
"아직 정정하십니다, 회장님. 어디가면 저희 형님인 줄 아시겠어요."
"하하. 이 친구 진짜. 자네랑 나랑 10년은 넘게 차이날 걸세."
"그만큼 동안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원참, 별 말을 다 듣겠구만."
박회장은 동안이라는 소리가 싫지는 않은지 멋쩍게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빨아주는 느낌이라 속이 울렁거렸다.
[이햐, 아주 똥꼬 헐겠습니다 주인님.]
'나라고 아부하고 싶겠냐. 이렇게 해서 박회장에게 눈도장찍으려는 거지.' 박회장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는 소리는 가끔 듣긴 해. 근데 껍데기가 뭐가 중요한가? 속은 이미 골병들었는데."
"회장님 어디 편찮은데 있으신가요?"
"아니 뭐··· 딱히 그렇다기 보다."
박회장이 목소리를 낮추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부부관계 괜찮은가?"
"네?"
"아니 가끔 잠자리를 갖냐는 말일세."
"송구스럽지만, 저 이혼했습니다."
"아, 그래? 내가 괜한 소릴 했구만."
[프로필을 확인했을 텐데 전대협으로 위장한 주인님이 이 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 못하는 군요.]
'유리에게 보고는 받았겠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 잊어 버렸을 뿐.'
"암튼, 이 나이가 되니까 말이야. 확실히 힘이 부쳐."
"아직 정정하십니다, 회장님."
"아니, 그게 아니라···."
박회장이 고개를 밑으로 떨구더니 사타구니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이게 안 선다고."
"아, 앗."
"자네는 아직도 팔팔한 가 보군."
"그, 그 정도는 아니지만."
"뭐, 같은 사내끼리 감출 게 뭐 있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써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써먹으란 소릴세."
"조언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이 집 여자들 죄다 따먹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
[박회장이 주인님을 정말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요?
저런 개인적인 비밀까지 얘기를 해주다니.]
'그것보단 그냥 오늘 금자랑 있던 일 때문에 현타가 왔나 봐.'
[현타요?]
'돈이 아무리 많고 권세를 누려봐야 사내로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면 그것만큼 서글픈일이 없거든. 솔직히 100억 받고 고자돼봐야 돈이 무슨 쓸모야? 그걸로 여자도 못 사먹는데.'
[어찌보면 안타까운 사람이네요.]
'안타깝긴 개뿔. 미쓰리한테 한 짓을 생각해. 악행의 업보를 받는 것 뿐. 이마저도 부족하지만.'
"거 참. 이럴려고 아득바득 살아왔나 싶구만."
"아닙니다. 회장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박회장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담배는 잘피웠네. 내일 비서 시켜서 한보루로 갚음세."
"아, 아닙니다 회장님. 그러실 필요까지는···."
"하하,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준다는 소리니 사양 말게나.
알고보니 아주 괜찮은 친구구만 그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지수가 외국어 공부 포기하면 나중에 다른 과외라도 맡아보면 어떤가? 오늘 가르쳤던 한국사라든가 말일세."
"저, 정말입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그래. 그건 나중에 따로 얘기해 보세나. 들어가게."
"넵."
박회장은 나와 대화를 나누고 불안했던 마음이 해소가 되었는지 이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가 방으로 돌아가기까지 한참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허술한 노인네구만.'
[네? 국내 사채업계의 대부가요? 피도 눈물도 없는 독종이라고 하던데요.]
'젊어서나 그랬겠지, 이젠 이빨 빠진 호랑이신세야. 이렇게 되면 복수가 훨씬 수월하겠는데?'
[어떻게 말입니까?]
'지금의 박회장은 그저 딸바보에 지나지 않아. 특히 딸아이의 일이라면 자다 깨서도 전전긍긍할만큼 걱정이 많은 편이고. 지수만 잘 이용하면 박회장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아. 어차피 지금 지수는 내 노리개나 다름 없으니까.
'[역시 주인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그나저나 얼른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응?'
[유리와 금자를 방에 방치하고 오셨는데요?]
'아, 맞다!' 나는 서둘러 두 사람이 숨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 * *
"하, 변태인줄은 꿈에도 몰랐네."
"······."
도훈이 박회장의 시선을 돌려 밖으로 나간 사이, 둘 만 남게 된 유리와 금자는 한동안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만큼 박회장의 깜짝 방문은 정신이 확 들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
다행히 귀가 밝은 도훈이 다가오는 소리를 먼저 듣고 유도 리있게 대처를 했기에 망정이지, 오늘 밤 당장 셋다 집에서 쫓겨나도 할 말없는 상황이었다.
처음엔 조용히 밖의 상황을 기다리던 두 사람은 기다림이 지루해지자 목소리를 낮춰 대화를 시작했다. 대화라기 보다는 우위를 잡은 금자가 일방적으로 유리를 갈구는 형태였다.
"언제부터 알게 된 거야?"
"네?"
"본인이 변태란 사실 말이야."
"그, 그게···."
유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실제론 관음증 변태도 아니고, 오히려 오늘까지 처녀를 굳건히 지켜온 순결한 사람이라고 항변하고 싶었으나 이미 오해는 겉잡을 수 없이 깊어진 상태였다.
"하긴, 변태가 뭐 어디 배워서 하는 건가. 타고나길 그런 거 겠지. 맞지?"
"그, 그런것 같아요."
"갑자기 웬 존댓말? 그냥 편하게 해. 어차피 나랑 나이차이도 안나는 거."
"그래도···."
"이봐. 유리씨. 좋든 싫든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탔다 이말이야. 어차피 나랑 회장님 관계도 다 알고 있었다면서?"
"···네."
"또 존댓말 하네? 자꾸 그럴 거야?"
"으, 응."
"어차피 다 아는 거 같으니까 솔직히 까놓고 말할게. 난 박회장의 총애를 받고 싶어. 지긋지긋한 하녀 생활말고, 부잣집 사모하고 싶은 게 꿈이거든."
"······."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금자의 발언에 유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회장의 심복으로 그녀를 저지해야 하는 마당에 드러내놓고 선전포고를 하는 셈이었다.
"뭐, 나를 창녀라고 불러도 좋아. 그래 뭐 까짓거 창녀 소리 들으면 어때서? 다 부러워서 하는 소리지."
"으, 음."
"난 솔직히 유리 너 처음부터 마음에 안들었어."
"내가?"
"회장님 곁에 꼭 붙어서 말이야. 맨날 나한테 차갑게 말하고."
"그건···."
"아니. 이제 이해해. 회장님과의 관계를 알았다니 당연히 고까워 보일수도 있겠지. 혹시 너도 나랑 같은 목표인 거야?"
"무, 무슨!"
"깔깔깔. 역시 그건 아닌가 보네."
자칫 오해를 받았다는 생각에 유리가 발끈했다.
"이봐요, 금자씨. 아니 말 편하게 하기로 했으니까 나도 이제 이름으로 부를게. 금자 너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회장님에게 정식 경호원 자격으로 고용돼서 온 거야.
수행비서는 위장일 뿐이고."
"경호원이라고? 경호원은 다른 사람 아니었어?"
"아무튼. 그래서 경호원에 준하는 월급을 받고 있다고. 그 돈으로 미국에 계신 어머님 병원비를 대고 있고."
"아···."
"너도 솔직히 말했으니 나도 그냥 말할게. 난 니가 박회장을 노리는 거 조금도 관심없어. 병원비 다 벌고나면 미련없이 떠날 테니까."
"호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사실 유리 네가 제일 신경쓰였거든."
"왜?"
"예쁘니까."
"······."
"알잖아. 너도. 니가 예쁜거. 회장이 널 건드릴까봐, 그래서 나에 대한 애정이 식고 너한테 마음을 줄까봐 얼마나 신경쓰였는데."
금자의 말에 유리가 극구 부인했다.
"미안하지만 난 나이든 남자는 취향 아냐. 아니, 적어도 박회장 같은 사람에겐 조금도 관심없다고 분명하게 말할게."
"풉. 진작 이렇게 서로 허심탄회하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네가 날 엄청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싫어한다기 보다는 그냥 거슬렸지."
"뭐라고?"
"목적이 뻔히 보이는데 좋게 보일리 있겠어? 그리고 나도 네가 고깝게 보는 것 같아서 차갑게 대한 거고."
"좋아. 그럼 이제 한배를 탔으니까 서로 손 잡는 걸로?"
"손을 잡는 다니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야. 나는 내 목적대로 움직일거야. 너도 네 목적 대로 움직여. 기왕이면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가 되면 더 좋지. 내가 박회장의 애첩이 되면 네 월급을 더 올려줄지도 모르니."
"흐음."
"어때. 저딴 카메라로 영상 찍어서 협박하는 것보다 이 편이 낫지 않아? 어차피 저건 우리 둘 모두에게 족쇄가 될 거라고."
유리는 금자의 기민한 상황판단에 놀랐다.
단순히 욕망 덩어리 하녀인 줄 알았건만, 심계가 깊다고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제까지 적이었던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걸로 봐선 배포가 큰 여자였다.
'흐음.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겉으로라도 친선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나을지도.'
금자가 내민 손을 유리가 맞잡았다.
"좋아. 그렇게 해. 그럼 저 카메라는 그냥 치워버리는 걸로."
"얼마든지. 아, 너 영상 보관한다며?"
"뭐?"
"다시봐도 새롭고 흥분된다면서."
"아, 아니 그건!"
그때 불쑥 방문이 열리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얼어 붙었다. 하지만 나타난 사람은 다행스럽게도 도훈이었다.
"회장님은 방으로 들어가셨어요. 들키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