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3. 여대 잠입-43-
* * *
박회장은 간만에 꿈을 꾸었다.
젊은 날의 모습으로 변한 그는, 어두컴컴한 통로를 걷고 있었다. 그곳은 골목길처럼 복잡한 미로였다. 스무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갈림길이 나왔고, 갈림길을 지나치면 또 다시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꿈속에서 박회장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대체 출구가 어디 있는 거야?'
거듭된 선택의 연속.
이는 박회장의 인생과 닮아 있었다.
'All or Nothing'의 상황에서 그는 늘 모든 걸 밀어 넣었다. 동전의 뒤가 나오면 한 순간에 끝장 날 순간에도 그는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삶이었다.
한번만 삐끗해도 지옥불로 떨어질 위기에도, 그는 늘 올바른 선택을 내렸다.
그 결과 지금의 위치까지 올랐다.
대한민국 최고의 사채왕.
물론 옳은 선택이 도덕적으로도 무결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의 선택은 늘 자신의 이득을 위한 판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빠졌고, 때론 길거리로 나앉았다.
상대의 영혼까지 털어먹는다는 악독한 사채업자 박회장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다.
"흥, 왼쪽인가?"
다시 등장한 갈림길에서 그는 본능에 따라 왼 쪽을 택했다.
후회도 미련도 없는 과감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왠지 처음으로 악수를 둔 것 같았다.
막다른 길 끝에는 검은 문이 놓여있었다.
박회장은 꿈속인데도 섬뜩한 감정에 등줄기가 시원해졌다.
'···왠지 길을 잘못 든 느낌인데.'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저 문 뒤가 지옥의 구렁텅이더라도 박회장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흥, 내가 누군 줄 알고? 지옥 끝에서라도 아득바득 기어 올라 온다는 독종이라고.'
젊은 모습으로 변한 박회장은, 지금보다 훨씬 생기가 넘쳤다.
눈동자엔 악다구니로 가득했다. 그는 과감히 문고리를 잡아 돌렸고, 이윽고 검은 문이 열렸다.
방 한가운데 침대가 보였다.
"응? 무슨 침대가···."
끔찍한 광경을 예상한 것치곤 너무나 조촐한 풍경이었다.
긴장했던 자신이 민망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이 휑했다.
그러나 잠시 후 침대 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여자는 자신의 딸인 지수였다.
'지, 지수야!'
박회장은 놀라 소리치려 했지만, 목이 멘 것처럼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 다소곳이 누워있는 지수를 남자가 덮치고 있었다.
금지옥엽처럼 길러낸 딸이 불한당 같은 놈에게 당하는 모습에 박회장은 속에서 천불이 끓어 올랐다.
'내, 내 저 놈을 당장!'
박회장은 가까스로 전진하여 사내의 어깨를 붙잡는데 성공했다. 이윽고 지수를 덮치던 사내가 고개를 휙 돌렸다.
박회장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너는 과외 선생?"
두근!
식은 땀을 뻘뻘 흘리던 박회장이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개꿈이라고 치기엔 너무도 기이한 꿈이었다.
"헉, 헉!"
박회장은 머리맡 협탁에서 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꿀떡, 꿀떡-
물을 들이킨 박회장이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아니 무슨 이런 개떡 같은 꿈을···.'
개꿈도 그런 개꿈이 없었다. 평소 꿈을 잘 꾸지도 않던 그에게, 방금 전 꿈속의 내용은 너무도 기이한 내용이었다.
'별 거지 같은 꿈을 다 보겠네.'
평소 박회장은 꿈을 꾸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따금 꿈을 꾼 뒤 돌이켜 보면, 불행한 일에 대한 경고나 조짐을 품고 있을 때가 많았다. 가령 오래전 앙심을 품은 채무자에게 칼을 맞기 전날에도 살벌한 꿈을 꾼적이 있었다.
나중에 지나고서나 그 꿈이 예지몽 같은 것임을 깨달은 박회장은 별의별 일이 다 있구나 하고 여겼다.
하지만 한 번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라 박회장은 방금 전 자신이 꿈을 꾼 내용이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서 지수가 왜 나왔을까? 과외 선생은 또 뭐고?'
꿈속에서 딸이 나온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최근에 고용한 과외 선생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것도 둘이 한 침대에 있던 장면은 더더구나.
'쓰읍-. 오늘 과외 선생이 자고가는 것에 신경이 과민했던 걸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박회장은 찝찝한 마음을 떨치기 어려웠다. 결국 박회장은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안방을 나섰다. 맨 몸에 가운만 걸친 그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천천히 딸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꿈과 닮은 장면이 데자뷔처럼 겹치자 평소 담대하기로 이름난 박회장도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 무슨 일이 있을라고.'
딸아이 방 앞에 도착한 박회장은 귀기울여 방 문 앞에 가져갔다. 방안은 고요한 가운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흐음. 곤히 자나 보네. 내가 괜히 과민한 마음에 허튼 생각을 했구나.'
하지만 박회장은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제눈으로 본 것 외에는 잘 믿지 않았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박회장은 거실에서 열쇠 꾸러미를 가져와 딸아이의 방 앞을 재차 방문했다. 그는 열쇠를 이용해 딸애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끼이익-
소리가 안나게 연다고 했지만, 경첩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박회장은 문을 끝까지 잡으며 소리가 멈추길 기다렸다.
'휴. 내가 진짜 야밤에 무슨 꼴인지.'
딸애의 방문까지 열고 들어간 그는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자고있는 지수의 얼굴을 직접 확인한 다음에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개꿈 같은 걸 꾸고 괜히 찝찝해져서는.'
안도와 동시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오밤중에 다 큰 딸아이 방에 몰래 열쇠를 따고 들어와 무슨 짓인가 싶었다.
그때 뒤척이던 지수가 불쑥 이상한 잠꼬대를 했다.
"아앙··· 오빠, 도훈 오빠앙···."
"응?"
박회장은 제 귀를 의심했다.
딸아이는 어떤 사내의 이름을 분명하게 언급했던 것이다.
'뭐, 뭔 소리야 갑자기?'
박회장이 놀라 딸아이를 쳐다보는데 지수는 잠에 빠져 계속 몸을 배배 꼬며 중얼거렸다.
"아앙, 오빠···."
!?
박회장은 순간적으로 혈압이 치솟아 눈 앞이 핑 돌았다.
이는 분명 딸아이가 꿈속에서 어떤 사내와 음란한 행동을 하는 동작이었다.
"이, 이런···. 개 호로 자식을!"
놀란 박회장은 당장 딸아이를 흔들어 깨우려다 겨우 자제심을 발휘해 그만두었다. 잠꼬대를 한 것 가지고 새벽에 딸아이를 깨워 추궁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이겠냐는 우려에서였다.
괜한 오해로 딸과 오랫동안 유지해온 오붓한 관계가 파탄 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박회장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머릿속엔 온통 딸아이가 언급한 '도훈 오빠' 라는 호칭이 메아리쳤다.
방문을 잠그고 거실로 나온 박회장은 소파에 앉아 한 동안 고심에 빠졌다.
'대체 어떤 새끼지? 도훈 오빠라니? 딸애가 남자애를 만난다는 소리잖아?'
지수를 여대에 보낸 것은 혹시라도 사내놈들이 꼬일 것을 우려해서였다. 젊었을 적 아내의 얼굴을 꼭 빼닮아 미인으로 자라난 지수에게 날파리가 꼬일 것은 자명한 일.
그런 꼴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보는 박회장으로선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다. 그런데 도훈 오빠라니?
"이··· 이···. 김씨 이자식을 당장!"
이런 일을 우려해 딸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관리하라고 붙였던 김씨였다. 아무리 여대라도 남학생을 접할 기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고, 그런 이유로 김씨를 붙여 감시하게 했던 것이다.
"아니야. 지나치게 흥분했어. 순진한 지수가 뭘 알겠어?
그냥 이상한 꿈을 꿨나보지."
박회장은 총각인 남자들이 몽정을 할 때 생전 해본 적 없는 섹스에 대한 꿈을 꾸듯, 처녀인 지수도 분명 상상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을 거라고 여겼다.
설마하니 자기딸이 벌써 처녀 딱지를 뗐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애지중지 키운 딸아이였는데···.
"젠장. 내일 김씨를 불러 추궁해 봐야겠군. 어떻게 도훈이라는 놈이 우리 딸에게 들러붙었는지 말이야."
박회장은 이를 부득 갈더니 다시 침실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꿈에서 본 것이 딸아이 뿐만 아니라, 대머리 중년 과외선생 대협도 등장했던 것을 떠올렸다.
'가만, 근데 그 과외선생은 왜 나온 거야?'
찝찝한 생각이 든 박회장은 불쑥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과외 선생을 게스트룸에 재우기로 했던가?'
꼭 제 눈으로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박회장이었기에 오밤 중에 다시 도훈이 자고 있는 게스트 룸으로 향하는 박회장이었다.
그의 손엔 집안의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흐음, 굳이 과외 선생까지 확인할 필요가 있겠냐마는···.
'박회장은 쓸데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괜히 꿈 속에 나온 과외 선생의 모습이 떠올라 발걸음을 옮겼다.
도훈과 유리, 그리고 금자가 스리섬을 펼치는 게스트 룸으로.
* * *
'음? 이게 무슨 소리지?'
한창 섹스에 열중하던 도훈이 인기척을 감지했다. 놀랍도록 발달한 오감은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안되는 예민함을 자랑했다.
[왜 그러십니까?]
'밖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네?!]
'이쪽으로 오고 있어.'
[그, 그럼 큰일 난거 아닙니까?]
방 안에서는 여전히 두 여인의 신음이 서라운드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특히 유독 신음이 큰 금자의 목소리는 집안 전체에 다 울려퍼질 정도로 컸다.
'방음 패치를 붙여서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문제는 방안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라는 거지.'
세 사람이 뒤엉킨 방구석은 난장판이었다.
온갖 곳에 섹스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철컥-
그때 밖에서 자물쇠에 열쇠를 꽂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당장이라도 잠긴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올 기세였다.
'젠장할, 이대론 숨을 시간도 없는데!'
도훈은 재빨리 두 사람에게 속삭였다.
"쉿! 밖에 누가 있어요!"
"뭐라고?"
"하앙, 무, 무슨 소리예요?"
"숨도 쉬지 말고 여기 있어요."
섹스를 하다 말고 재빨리 몸을 일으킨 도훈은 바지만 잽싸게 걸치고 방문으로 달렸다. 그 동작이 워낙에 재빠르고 민첩해 한창 쓰리썸에 빠져있던 두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윽고 박회장이 문을 따고 여는 순간 바지만 달랑 걸친 도훈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엇!"
새벽에 갑자기 방에서 사람이 튀어나오자 방문을 연 박회장이 오히려 더 놀랐다.
"엇, 회장님?"
"흠흠, 자는 데 혹시 불편할 게 있나 와봤네만."
"괜찮습니다. 자다 깨서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길입니다."
"그, 그런가?"
박회장은 도훈이 불쑥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몹시 당황했지만, 그가 문을 땄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을 알고는 급히 말을 돌렸다.
"나도 잠시 물 마시러 나왔다가 잠자리가 불편할지 몰라 둘러보러 온 것일세."
"그러시군요. 정말 제 집처럼 좋습니다. 하하,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팬티로 바지만 입은 도훈은 상반신이 모두 드러나 있어 박회장의 이목을 끌었다.
'근데 이 놈 몸이 제법이구나. 배 나온 줄 알았더니만, 의외로···.'
박회장이 떨떠름하게 서 있는데 도훈이 문을 완전히 닫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저 그럼 담배 한 대만···."
"거실에서 피우시게나."
"네, 네? 건물 안에서요?"
"뭐 어떤가? 공기청정기 돌아가는데."
"아···."
도훈과 함께 거실로 나온 박회장은 맨몸으로 나온 도훈을 향해 물었다.
"근데 담배는 어딨나?"
도훈은 순간적으로 손을 허리춤으로 돌려 아공간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끄집어냈다. 그의 아공간에는 각종 비품들이 저장되어 있었는데, 담배만 10보루 이상 쌓여 있었다.
"여기 한 대밖에···. 혹시 담배 태우십니까?"
"끊었네. 편히 피우시게."
"아, 넵. 감사합니다."
도훈이 예의상 고개를 돌려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박회장이 어디선가 유리컵을 하나 가져왔다.
"재는 여기에 떨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도훈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박회장과 독대를 하기는 면접 볼 때 이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긴장된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젊어서는 나도 담배를 많이 피웠었지."
"그러시군요."
"지금은 완전히 끊었네. 나이가 드니 건강이 제일 중요해져서 말이야. 자네도 나중에 끊게나."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도훈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자 박회장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도훈은 자기 딸을 범할만한 위인으론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딸아이가 잠꼬대에서 언급한 도훈 오빠라는 사람의 존재와 40대 대머리 과외선생인 대협 사이에는 안드로 메다만큼의 간극이 있어 보였다.
'그냥 꿈자리가 사납다보니 저 친구가 튀어나온 모양이군.
'"혹시 자녀가 있으시던가?"
"네? 아, 예. 아들하나 딸하나 있습니다. 올해 큰 아이가 초등학교 올라가고요."
대협의 프로필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도훈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박회장이 기억을 하든 못하든 완벽한 위장을 위한 준비였다.
"그렇구만···. 그만한 나이 땐 뭘 해도 예쁘게 보인다네.
하지만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박회장은 푸념을 하는 심정으로 도훈에게 물었다.
자녀에 대한 상담을 나눌 대화 상대가 마땅치 않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우리 딸아이 말일세, 지수."
"네."
"최근에 수업 하면서 남자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나?"
"남자요?"
도훈은 뜨끔했지만,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저는 따님분하고는 사적인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
박회장도 그럴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한테도 안 한 얘기를 자네에게 했겠냐마는."
도훈이 뭔가 낌새를 채고 박회장에게 되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