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5. 여대 잠입-35-
무공을 익힌 도훈은 오감 역시 극도로 발달한 상태였다.
평소엔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지만, 정신을 집중하면 10M 밖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잡아낼 수 있었다. 따라서 방음이 취약한 별채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엿듣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오늘 사고 났다며?"
"별일은 아니었어. 추돌사고의 중간에 끼는 바람에 사고처리가 늦어졌을 뿐."
"병원까지 들렀다던데? 다친 거 아니고?"
"나보단 아가씨 때문이었지. 사소한 추돌사고라도 나중에 후유증이 오는 경우가 있으니까. 혹시 몰라서."
"그렇구만."
도훈은 둘 중 한 명의 목소리가 일전에 대화를 나눠본 운전기사 김씨라는 걸 구별해 냈다. 다른 한 명은 생소한 목소리였다.
'저놈이 야간에 경호를 선다는 놈이로군. 직접 모습을 확인해 볼까?'
[창문도 안 달린 건물 내부를 어떻게 보시려고요?]
'저 위에 환기구로 보면 되지.'
도훈의 말대로 건물의 위편엔 조그만 환기구가 달려있었다. 별채 자체가 창고를 개조한 간이 건물에 가까웠기 때문에 창문이 없는 밀폐된 구조였던 것.
[설치된 높이로 봐선 주인님 키로 어림없을 텐데요? 밑에 받칠 만한 물건부터 찾아보시는 게.]
'그럴 필요 없어. 위로 올라가서 볼 거니까.'
[위로요?]
도훈은 씩 웃더니 단숨에 서전트 점프로 도약했다.
거의 2M를 솟구친 그는 벽면을 발바닥으로 한 번 딛더니 공중회전을 통해 곧바로 가건물의 지붕까지 솟아올랐다.
회전을 하면서 몸이 거꾸로 뒤집힌 도훈은 난간 끝에 수직으로 물구나무를 서며 중심을 잡았다.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그의 신위에 로시도 놀라워했다.
[와, 어떻게 하신 겁니까?]
'몰라. 그냥 생각난대로 움직여 봤는데 그냥 되네?' 도훈도 처음 시도해본 동작이 완벽하게 성공하자 떨떠름했다.
천상 크래프트 속 가상 공간에서야 이런저런 동작을 수련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펼쳐 보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련의 성과가 엄청나군요.]
'포인트 쓴 보람이 있네.' 자세를 바로 한 도훈은 지붕 끝에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환기구 구멍으로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상황이라 내부가 흐릿해 보였지만, 안력을 집중하자 노이 즈가 사라진 것처럼 또렷하게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월등한 동체시력으로 회전하는 프로펠러의 프레임에 싱크를 맞춘 것이었다.
'벽에 기대앉은 사람은 김씨고···. 그렇다면 저놈인가?'
새로운 경호원을 본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엄청난 덩치의 떡대가 김씨 앞에 앉아 있던 것.
[와···. 무슨 프로레슬러 같은 덩친데요?]
'그러게. 앉은키로 봐선 키가 2M도 넘을 것 같은데?' 실로 어마어마한 거구였다. 단지 키만 큰 것이 아니라, 근육도 엄청났는데, 입고 있는 러닝이 터질 것처럼 벌어져 있었다. 등판에 보이는 근육과 어깨너비가 절로 위압감을 들게 했다.
'몸무게는 적어도 150kg 이상. 슈퍼 헤비급 중에서도 최상급 스텟이겠어.'
[저런 피지컬이면 사람도 맨손으로 때려 잡겠는데요?]
'충분히 가능하지.'
그때 덩치가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도훈은 순간 움찔했으나, 환풍기 반대편에서 누군가 엿본다는 의심을 못 한 듯 덩치는 어슬렁거리며 구석에 배치된 운동기구 앞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벤치 프레스가 놓여 있었는데, 받침대 위에 올려진 바벨 봉이 살짝 위로 휘어질 만큼 어마무시한 무게의 원판이 좌우로 걸려 있었다.
"만석이, 아까 해놓고 또 운동하려고? 거 적당히 좀 하지?"
"20분이나 쉬었잖아. 이미 근 손실 진행 중이라고."
만석이라고 불린 사내는 김씨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벤치 프레스 위에 누웠다.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안력에 힘을 돋우자, 순간 그의 시력이 4 .0 이상으로 올라가며 원판에 적힌 무게가 상세히 들어왔다.
'한판에 30Kg짜리. 그게 한쪽에 5개, 양쪽 10개. 도합 350kg인가?'
[계산이 이상한데요? 30kg 짜리 열개 면 300Kg 아닙니까?]
'가운데 봉이 최소 50kg는 될 걸? 저건 그냥 바벨 봉이 아냐. 저 정도 무게를 견디려면 내부가 꽉 찬 철근으로 만들거든. 그냥 철덩어리로 봐야지.'
[와···. 그럼 벤치 프레스로 350kg를 든다고요?]
'미친 헬창 새끼였구만.'
도훈은 과격한 신음과 함께 벤치 프레스를 시작하는 만석의 쇠질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어마어마한 무게에 만석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바벨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저 정도 파워면 주인님하고 맞먹는 거 아닙니까?]
'벤치는 나랑 비슷할 것 같아. 아마 3대 운동 총량도 나랑 맞먹지 않을까? 벤치가 350이면 나머지는 더 나온다는 소리니까. 1Rm 기준으로 1000은 우습게 넘겠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수준이죠?]
'전문 헬창. 아니, 이쯤 되면 보디빌더라기보단 스토롱맨이라고 봐야지. 3대 1000이면, 국대 역도 선수급이니까.'
[와···. 정말로 괴물이군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합니다.]
"쓰읍 하! 씁- 하!"
"거 적당히 좀 해. 어제도 하루 종일 해놓고 오늘도 운동만 하는 거야?"
보다 못한 김씨가 나무랐지만, 만석은 전혀 멈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어제는 일부러 등만 조졌다고. 밤새 집 지키는 개나 다름없는 꼴인데, 운동이라도 쉬지 않고 해야지. 월급도 받고 몸도 만들고, 얼마나 좋아?"
"어휴, 정말이지···."
김씨는 보기만 해도 질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더니 옆방으로 들어갔다. 내부에 방이 두 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방금 환기구로 들여다 본 방이 만석의 방인 듯했다.
'김씨가 작은 방, 만석이라는 헬창이 큰 방을 쓰고 있나 보구나. 하긴 운동기구가 저렇게 들어차서야 방이라기 보다는 그냥 헬스장이라고 봐야 할 것 같지만.'
도훈이 좀 더 자세히 방안을 둘러보니 가장자리 주변으로 온갖 운동기구 가널려 있었다. 벤치를 끝낸 만석은 이번엔 양손에 50kg이 넘는 덤벨을 들고 사이드 프레스를 시작했다.
"습-하! 습-하! 하하! 좋아, 근육 찢어지는 이 느낌! 하하!"
한동안 지붕에 거꾸로 매달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훈은 더 이상 관찰할 필요가 없다는 듯 엿보기를 멈추고 자세를 바로했다.
'더 관찰할 필요도 없겠어. 그냥 머리까지 근육으로 가득찬 똥멍청이였어.'
[네? 저런 괴물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너무 무시하는 발언인데요.]
'힘만 세면 뭐해? 뭐, 보통 사람들은 덩치만 보고도 쫄겠지만, 나한테는 그냥 때릴 곳이 더 많은 샌드백이나 다를 바 없거든.'
[그래도 상대를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지.]
'정말이라니까? 무식하게 힘만 키운다고 싸움을 잘하는 건 아냐. 차라리 한방이 있는 유리 쪽이 훨씬 까다롭지, 저런 놈은 내가 100대 때릴 동안 내 털끝도 못 스칠걸. 덩치가 큰 만큼 스피드는 형편없이 느려터지니까.'
[그런가요?]
'그리고 근육을 키워서 몸을 두껍게 만들어봐야 급소는 단련할 수 없는 법이거든. 그래서 급소잖아. 저놈은 길게 잡아도 3방이면 끝낼 수 있어. 3방도 많이 쳐준 거야.'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박회장이 저놈을 야간 경비로 쓰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실제로 가장 뛰어난 실력자는 오히려 주간에 경호를 한다는 복싱선수일 걸?'
[아니면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검객이든가요.]
'어쨌든 놈들은 오늘 밤 마주칠일 없으니까.'
정찰을 끝낸 도훈은 가벼운 동작으로 착지했다.
축골공을 통해 몸집을 일부러 불려 놓았는데도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착지하는 모습은 묘기에 가까웠다.
도훈이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담배 너무 많이 피우시는 거 아니에요? 밖에 자주 나가시는데."
"아···. 네, 습관이 돼가지고."
다가온 사람은 박회장의 비서인 유리였다.
그녀는 도훈에게 볼 일이 있는 듯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시죠?"
도훈이 순진한 척 되물었다. 방금 전 자객처럼 지붕을 뛰어 오르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 자고 가기로 한 거. 아가씨 생각인가요?"
"아···. 그게, 네. 갑자기 내일 한국사 시험을 본다고 그래서."
"그런데 정말 한국사도 가르치세요?"
"···네?"
"아, 아니에요. 저는 중동어만 배우신 줄 알았거든요."
유리는 자신이 몰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어 에둘러 물었다. 도훈이 의심을 눈치 채고 변명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공식적인 수업은 아닙니다."
"그럼요?"
"그냥, 원장한테 하도 하소연했더니 빈 강의실에 몇 명을 모아서 그룹 과외식으로 잡아주더라고요. 그래서 돈도 현금으로만 받고 있고요."
"아···."
유리는 그제야 도훈의 뒷조사에서 한국사 관련 내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개인적인 얘기긴 한데, 제가 좀 사정이 급해서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괜히 불편한 질문을 드렸네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사실, 이번 과외 못 잡았으면 배달아르바이트라도 더 하려고 했거든요."
"배달이요?"
"요새 새벽 배송 잠깐 뛰는 알바자리가 있는데, 제법 수당이 괜찮다고 들어서요."
도훈이 계속 앓는 소리를 하자 유리도 마음 한켠이 짠해졌다. 그녀 스스로도 돈 때문에 한국으로 넘어와 경호일을 하는 입장에서 도훈의 처지가 딱해 보인 것이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닙니다. 이 나이 먹고 모은 돈 하나 없다는 게 한심할 뿐이죠."
"그런 말씀 마세요."
"근데 방금 하실 말씀 있다고."
"아참, 실은···."
유리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금자 때문이에요."
"아···."
"오늘 밤 금자가 대협씨를 또 노릴 수 있거든요."
"설마 또 그럴까요? 이제 회장님도 집에 와 계신데."
"제가 본 바로는 금자는 그런 거 조금도 신경 안 쓰는 여자예요."
"그럼 어떻게 하죠? 문을 꼭 잠그고 잘까요?"
"아니에요. 잘하면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몰라요."
"증거요?"
유리가 차분히 작전을 설명했다.
금자가 도훈을 덮치는 장면을 몰래 영상으로 남기자는 내용이었다.
"사진만으론 금자의 죄를 밝힌 증거가 부족해요. 그러니 동영상을 찍어서 회장님께 보여드리는 거죠."
"아···. 몰카 같은 거군요? 근데 그걸 누가 찍죠?"
"게스트방에 이불장이 있어요. 제가 거기 숨어서 몰래 촬영을 할게요."
"유리씨가요?"
"네."
[이게 대체 무슨 계획이죠?]
'덮치는 현장을 영상으로 찍어서 남기겠다는 거 같은데?
근데 굳이 직접?'
"괜찮을까요? 괜히 들켰다가는 상황만 복잡해질 것 같은데···."
"이불장에 누가 숨어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할 거예요."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도와주시는 이유가···."
유리는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저는 회장님의 비서니까요. 금자는 이 집안의 골칫거리에요. 오늘 보셔서 알겠지만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대협씨 문제가 아니었어도 금자는 쫓아낼 생각이었어요."
"음···. 그냥 회장님께 사실 그대로 말씀드리면요? 금자가 절 협박한 사진이 있지 않나요? 아까 찍으시지 않았어요?"
도훈의 날카로운 물음에 유리가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 그게···. 금자 폰의 비번이 바뀌어 있더라고요."
"아, 그러면 못 보신 거예요?"
"네. 구할 수가 없었어요. 어쩌면 지금쯤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고요."
"그렇군요."
[왜 갑자기 거짓말을 할까요?]
'내 나체 사진을 봤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지. 사진을 구했다고 하면 자신도 결국 봤다는 소리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확대까지 해서 뚫어지게 구경하던 걸요?]
'그러니까. 어쩌면 유리도 솔직하지 못한 걸지도.'
유리는 스스로의 변명이 구차하다고 느꼈는지 불필요한 말까지 덧붙였다.
"대협씨는 모르겠지만, 회장님의 금자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편이세요."
"신뢰가요?"
"암튼 그런 일이 있어요. 그래서 어지간한 증거가지고는 회장님이 쉽게 금자를 내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동영상증거가 남는다면 얘기가 다르죠."
"혹시 일이 잘못되면 저에게 피해가 오는건···."
"그렇지는 않을거예요. 대협씨는 제가 끝까지 책임져 드릴 게요."
"아···.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도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요."
"근데 옷장안에 숨으시면 너무 답답하지 않을까요? 날이 더운데···."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모든 증거가 수집되면 제가 회장님께 금자의 비행을 싹 다 보고 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저는 비서님만 믿겠습니다."
"네."
작전을 모두 설명한 유리는 먼저 저택으로 들어갔다.
도훈은 혼자 남아 마저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오늘밤 아주 스릴 넘치겠는데.'
[근데 유리가 금자와 주인님의 관계를 회장에게 이실직고 하면 오히려 일이 파탄 나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자신의 애첩과 놀아난 주인님도 함께 내쳐질지도 모르는데요.]
'당연하지. 유리는 아마 영상을 다 촬영해도 회장에게 보고 못할 거야.'
[어떻게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역시 주인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금자건 유리건, 아니면 지수건. 이 집 여자들은 오늘 밤 다 내가 따먹게 될 거야.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하는 구만.'
[어째 복수극이 아니라, 야동을 찍으러 가는 것 같은 건 제 기분탓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