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51화 (1,318/2,000)

1334. 여대 잠입-34-

* * *

우여곡절 끝에 과외가 시작되었다. 지수는 나를 보자마자 자신이 겪은 교통사고에 대해 한참 떠들어 댔다.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요? 갑자기 뒤에서 차가 쿵- 하고 박는데 저희 차가 밀려서 또 앞 차를 박아버리고···."

대충 4중 추돌사고로 도로가 한동안 마비되었다는 것과 경찰차나 렉카, 구급차가 몇 대씩 현장에 출동했다는 이야기였다. 대체 몇 번을 박혔다는 건지 알수는 없었다. 박히고 싶다는 건가?

"나한테 연락하지 그랬어?"

"하려고 했죠. 근데 사고 수습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나중에 병원에 있을 땐 하필 배터리가 똑 떨어져서 충전 맡기느라 못 했구요. 저희 기사님이 대신 연락해드린다고 했는데, 혹시 연락 못 받았어요?"

"전해 듣긴 했어. 근데 나는 뭔 상황인 줄 모르니까···."

"오빠 나 걱정했구나?"

"당연하지. 교통사고를 났다는데 연락도 안 되니까."

"진짜로 별거 아니었어요. 전 괜찮다고 했는데, 혹시 모르니 무조건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해서요. 히히, 그래도 기분 좋다. 오빠가 내 걱정도 해주고."

지수가 손을 꼭 잡았다. 대머리 분장을 한 상태임에도, 여전히 나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는 것 같았다. 본 모습을 알기 때문에 껍데기는 신경 안 쓴다는 걸까? 하긴 나는 속이 꽉찬남자, 99 .9니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이군요. 지수 양에 대해선 일도 신경도 안 쓰셔놓고선.]

'들켰냐? 이게 다 금자랑 유리 때문이잖아. 차라리 더 늦게 오길 바랐는데. 결과적으론 둘 중 아무도 공략 못 하고 입맛만 다신 꼴이니.'

[한 술에 배불러지려고 해선 안 됩니다. 상황도 복잡하고 여러 사람이 얽힌 미션이니까요. 최대한 신중하게 진행하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과외를 빙자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세요?"

"저예요, 아가씨. 저녁 식사는 어떻게···."

"이모, 저 지금 과외 중이에요. 끝나고 먹을게요."

목소리로 보아 이 집의 하녀인 금자로 보였다. 금자는 지수가 사양했는데도 다시 물었다.

"회장님께서 저녁 시간이 늦겠다고 우선 식사부터 들고 하자고···."

"배 안 고프다니까요?"

거듭된 질문에 지수가 살짝 짜증을 냈다. 지수는 나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듯했다.

'저녁이라면···.'

[왜 그러십니까?]

'공략 대상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거 아니야?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는데?'

[네?]

꼬르륵-

뱃 속에서 나온 소리에 지수가 당황하며 물었다.

"오빠. 혹시 배고프세요?"

"아, 아니야. 그냥···. 시간이 늦어지다 보니."

"죄송해요. 전 제 생각만 하고."

지수가 다시 밖에 서 있는 금자에게 말했다.

"과외선생님은요, 그럼?"

"회장님께서 함께 식사를 들자고 하십니다."

"정말요? 갈게요 그럼."

"네. 30분 내로 준비하겠습니다."

금자가 돌아가자 꼬르륵 소리를 일부러 낸 내가 민망한 듯 말했다.

"괜찮은데···."

"오빠 배고프시잖아요. 저희 집 이모들 요리 잘하세요."

"그게 아니라 가족 식사 자리에 눈치 없이 끼는 것 같아 민망해서 그렇지."

"가족 식사는요 무슨. 비서 언니도 같이 먹을 때도 있고, 가끔 이모들도 다 같이 먹는데요."

"정말?"

"네. 식구가 둘 뿐이라서 아빠가 그러자고 했어요. 식사는 여럿이 함께 먹는 게 더 맛있다면서."

"혹시 집에서 일하시는 분이 모두 몇 분이야?"

"모두요? 음··· 그러니까."

지수의 답변을 통해 한 번 더 인물 관계를 정리했다. 저택에는 박회장과 지수 부녀를 제외하고 크게 두 그룹이 있었다.

집안에 상주하는 가사도우미 둘과 운전기사 김씨.

그리고 24시간 박회장의 경호를 전담하는 3명의 경호원들이었다.

이중 가사도우미는 3일씩 번갈아 교대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집에 계속 머무르는 사람 숫자는 운전기사인 김씨와 함께 도합 둘.

경호원 그룹은 출퇴근을 하며 3교대로 운영되었다.

"집에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쓸데없이 집만 커서 그래요. 아버지는 늘 바쁘고, 엄마도 안 계시다 보니 집안일 해줄 사람이 따로 없기도 하고."

"내가 괜한 얘기를…."

"괜찮아요. 어차피 모르는 사실도 아니고. 이모님 중 한 분은 제가 엄청 어렸을 때부터 보모를 해주시던 분이라 정말로 가족 같아요."

"저번에 과일 갖다주신 분 말이지?"

"네. 오늘은 아마 집에 돌아가셨을 거예요. 그 이모가 진짜 요리 잘하는데."

"젊은 분은 별로야?"

"금자 이모요? 이모를 알아요?"

"아까 너 기다리다가 거실에서 잠깐 얘기했어."

"금자 이모도 요리 잘해요. 큰이모가 더 잘한다는 뜻이죠.

근데 전 금자 이모랑은 별로 안 친해서···."

"왜?"

"그냥 좀 사람이 쌀쌀맞다고 해야 하나? 저랑은 평소에 말도 잘 안 하거든요."

[성격 좋은 지수양이 불편해 할 정도라니.]

'후처를 노리는 금자 입장에선 지수가 걸림돌일 테니 둘사이가 좋긴 힘들겠지. 처음 나를 대하던 태도도 싸가지 밥말아 먹었었잖아.'

[하긴, 안주인 행세를 하더라고요. 일개 파출부 주제에.]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 같아. 아마 박회장과 내외하는 관계가 되면서 스스로의 입지가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주인님 말대로 정승집 머슴이 정승이 된 꼴이네요. 그러면서 주인님을 협박해서 성추행까지···. 정말 가관이군요.]

'이 집구석에선 가장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봐야지.

아주 욕망의 도가니 같은 여자야.'

"으음. 김씨인가 하는 기사분은? 그분도 같이 식사해?"

"아뇨. 삼촌은 별채에서 따로 드세요. 예전부터 겸상이 불편하다고 하셔서."

"별채라면 밖에 차고지 옆에 있는 건물 말이지?"

"네. 보셨어요? 거기 사시거든요."

[별채가 김씨의 숙소였나 보군요.]

'그리고 심야 경호원의 대기 장소기도 하고.'

[집안에 무조건 경호원 둘 이상은 상주해 있다는 소리네요.]

'그러게.'

집 안에 있는 인원 파악은 대충 끝난 것 같다.

이제 나머지 경호원들에 대한 정보만 입수하면 박회장을 어떻게 요리할지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지수는 30분가량 과외를 빙자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식사 호출에 주방으로 향했다. 날먹으로 고액의 과외비를 받으려니 살짝 양심에 찔렸다. 하긴, 박회장도 떳떳하게 번 돈은 아니니 조금 갈취한다고 무슨 상관이겠냐만.

* * *

8인용 식탁 테이블에는 5명의 사람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박회장과 그녀의 딸 지수, 그리고 젊은 하녀인 금자와 수행비서인 유리였다.

평소 참여를 꺼리던 유리까지 웬일로 자리에 앉은 모습을 보고 박회장은 무척 만족한 듯했다.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들게나."

"아이고, 진수성찬인데요."

도훈은 식탁을 가득 채운 한정식 반찬에 진심으로 놀랐다.

30첩은 넘을 듯한 각양 각색의 반찬에, 가운데는 너비아니와 갈치찜이 메인으로 올라가 있었다.

'이런 밥상을 매일 먹는다는 소린가?'

[박회장이 부자는 부자군요. 가정부를 둘이나 두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지수도 도훈이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가 마음에 드는 듯 평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은 저녁 늦게까지 과외를 해야겠구만. 사정이 그리 됐으니 이해하게나."

"아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그런데 과외 선생님 그냥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면 안 될까요?"

"과외 선생님을?"

"네, 너무 늦게 보내드리면 죄송하니까요. 집에 빈방도 많고."

박회장은 지수의 뜬금없는 제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랍어 공부가 딱히 밤늦게 공부할 만큼 재밌을 것같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너무 실례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실은 내일 한국사 과목 쪽지 시험이 있어서 선생님한테 여쭤보니까 잘 아시더라고."

"한국사라고?"

박회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도훈을 쳐다보았다. 도훈은 미리 지수와 말을 맞춰놨기 때문에 정수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제가 실은 전공만으로는 수입이 적어서 얼마 전부터 학원에서 한국사 자격증반 수업도 병행하고 있거든요."

"호오."

"내가 어쩌다 선생님한테 모르는 걸 여쭤봤는데 너무 쉽게 잘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내일 시험 대비해서 오늘 밤만 특별 과외 좀 부탁하려고."

"아니 그래도…. 갑작스럽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데. 괜찮으시겠소?"

박회장은 부쩍 공부에 의욕을 보이는 지수가 수상했다. 어려서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은 지수였기에 1학기 평점도 엉망으로 받은 것이 떠올 랐던 것이다.

하지만 여느 부모가 그렇듯 공부를 하겠다는 자녀를 말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지수가 이상한 여성주의 운동에 관심을 끊고 학업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음…. 원하시면 해드릴 순 있습니다. 평소에 가르치던 것이니까요."

"그럼 잘 됐군. 한국사 특강 부분에 대해선 따로 비용을 드리도록 하지."

"안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지금 받는 과외비로도 충분합니다."

"아닐세. 계산은 칼 같아야지. 유리가 챙기도록."

"네, 회장님."

조용히 대화를 듣던 유리도 속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대협씨가 학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저번 조사할 때는 없던 내용인데….'

유리 역시 의심스럽긴 했지만, 딱히 따지진 않았다. 설마 하니 순진한 지수가 40대 아저씨를 보고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그런 요청을 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자의 입가에 화색이 도는 것은 빠르게 캐치했다.

'금자가 오늘 밤 가만있지 않을 것 같네….'

금자는 집에서 상주했기 때문에 도훈이 자고가는 것을 가만 지켜볼 리 없었다. 조바심이 든 유리는 자기도 박회장에게 제안했다.

"회장님.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까 맡기신 일을 아직 정리를 덜 한 것 같은데, 남아서 야근을 하고 가도 될지."

"자네가 웬일로?"

늘 시간 내에 맡은 일을 처리하던 유리의 업무 스타일을 알기 때문에 박회장이 물었다.

"생각보다 사안이 복잡해서 처리가 늦었습니다. 자료를 내어주시면 집에 가서 마무리를 해볼 수 있습니다만."

박회장이 절대 자신의 자료를 남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묻는 것이었다.

"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네, 최대한 일찍 끝내보겠습니다."

물론 유리는 일찍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새벽까지 일을 하다 피곤한 척 자고갈 계획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금자가 대협씨를 덮치면 빼도 박도 못하는 현장 증거로 남기고 말이야.'

서로의 목적을 감춘 음모들이 횡행하는 사이 저녁 식사가 끝이 났다. 박회장은 도훈을 방으로 따로 불러 진행 상황을 물었다.

"딸아이는 어떻소? 아랍어에 흥미가 좀 떨어지고 있소?"

"네. 일부러 어려운 내용을 지도하는 중입니다. 전혀 수업이해를 못하는 걸 봐선 이번 달안에 포기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사는 어떻게 된 거요?"

"그게…. 갑자기 뭘 물어보는데 저도 모르게 정답을 알려 주는 바람에. 불편하시면 그냥 과외마치고 돌아가겠습니다."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고 지수가 갑자기 공부에 흥미를 느낀다니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요. 너무 늦게까지만 붙잡지 마시오."

"네."

할 말은 마친 박회장은 밖에서 설거지를 하던 금자를 불렀다.

"이 아이가 자고 갈 방을 준비해 줄 거요. 선생님 주무실 방을 준비하도록."

"네, 회장님."

금자는 박회장에게 정중히 인사하더니 도훈을 안내해 손님방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방에 도착하자 방문을 걸어 잠그더니 도훈에게 말했다.

"무슨 꿍꿍이지?"

"네?"

"솔직히 말해봐. 나 때문에 자고 가려고 한 거지? 아가씨꼬드겨서?"

금자가 불쑥 도훈의 물건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꽉 잡는지 도훈은 저도 모르게 "헉!"하는 신음을 토했다.

"아, 아닙니다."

"아니야? 우리 아까 하던 거 마저 해야 할텐데?"

"저, 근데 지금 과외를…."

"흥. 과외는 무슨. 저 꼴통이 밤샘 공부한다고 제대로 성적이나 받을까 봐서?"

"그, 그래도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니…."

금자가 사악하게 웃더니 대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 어쨌든 끝나는 대로 이 방으로 오라고. 이부자리는 내 몸으로 덥혀 놓을 테니까."

"아…."

도훈은 쩔쩔매는 척 연기하며 금자를 방심시켰다. 물론 그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금자를 이용해 박회장을 옭아맬 수 있을지 고민했다.

'금자를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겠어.'

[어떻게 말입니까?]

'대물로 못 할 건 없지. 일단 금자를 이용해야 박회장을 파멸시킬 수 있을 것 같거든.'

[유리는 어쩌시고요? 그녀도 낌새를 눈치챈 것 같은데요?]

'메뚜기처럼 두탕 뛰어야지.'

[야간 경호원에 대한 해결책은 강구해두셨습니까? 밤 귀가 밝은 자라면 주인님이 벌이는 엽색 행각이 발각될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한번 구경한 번 가보려고. 지금쯤 출근 했겠지?'

금자와 방에서 나온 도훈은 잠시 담배를 피우러 가는 척 저택 밖으로 향했다. 동시에 내공을 이용해 기척을 완전히 지운 채 별채로 살금살금 이동했다.

별채에 다가가자 김씨라 불린 사내의 목소리와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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