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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48화 (1,315/2,000)

1331. 여대 잠입-31-

* * *

노트북을 열어 놓고 박회장이 시킨 업무를 처리하던 유리는 점점 침울해졌다.

'하아-. 내가 진짜 여기서 뭐하는 짓인지.'

경호원으로 뽑혔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녀는 박회장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비서에 가까웠다.

잘나가는 정치가가 젊고 예쁜 아나운서 출신의 여비서를 발탁해 자신의 위신을 높이는 것처럼, 오랜 밑바닥 생활 끝에 사채업계의 큰손으로 거듭난 박회장 역시 유리를 일종의 트로피처럼 과시하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심지어 불법으로 반입한 총기까지 가지고 다니니 유사시 근접 경호 업무를 수행할 수도 있었다.

'경호원을 뽑는다고 해서 왔는데, 고작 서류 처리라니···.

'박회장에겐 유리를 제외하고도 경호원이 많았다.

다들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었고 사실상 유리는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젠장!"

유리는 그 사실에 짜증이 났다. 한 달 이천만원이 넘는 고액의 월급만 아니었어도 진작 때려치웠을 것이다. 그만큼 유리는 경호원으로서 자신의 커리어와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박회장은 정말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는 그녀를 늘 제외시켰다. 오늘만 해도 갑자기 시답지 않은 지시로 자신을 집으로 보내더니 일본인 경호원과 함께 움직였다.

'회장님은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유리는 그 부분이 가장 불만이었다. 이런 서류 작업이나 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월급을 많이 주고 적게 주고를 떠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 유리에겐 가장 큰 불만이었다.

'진짜···. 수술비만 모으면 그만둔다고 말 해야겠어. 일할 곳이 여기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유리는 미군 예비역 장교 출신에 사격술 교관을 맡았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 직업 특성상 여자 경호원이 필요한 곳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유리는 조만간 박 회장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페이가 줄더라도 익숙한 고향이 낫지.'

유리는 유년 시절부터 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국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친구도 지인도 없는 머나먼 타향에서 돈만 바라보고 참고 버티는 것도 슬슬 한계를 느끼는 시점이었다.

'그래. 어차피 박회장이 좋은 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아무리 내가 불법적인 일에 직접 관여하진 않는다해도 그의 밑에 고용되어 일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묵인하는 거야.'

업무를 마친 유리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문득 아까 마주친 과외 선생 생각이 났다.

'와이파이 비번은 찾았으려나?'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외모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살아온 이력이 너무나 비참했다.

'외국에서 열심히 돈 벌어다 바쳤더니, 부인에게 이혼당하고···.'

마침 자신이 용병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훈이 더욱 불쌍해 보였는지 몰랐다. 동병상련과 같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까 와이파이 비번 알고 싶다고 할 때 좀 더 도와줄 걸 그랬어. 혼자서 폰도 못하고 기다리면 심심할 텐데.'

생각을 먹은 유리는 일도 끝난김에 거실에서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을 도훈을 도와주려고 생각했다. 유리가 막 문을 열려는데 문득 거실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근데 왜 이렇게 밖이 조용하지?'

군인 출신인 유리는 주변의 변화에 민감한 편이었다. 경호 원이라는 현재의 직업 역시 그녀를 보통 사람보다 예민하게 만들었다. 손잡이를 잡던 유리는 순간 동작을 멈추고 문가에 귀를 바짝 갖다댔다.

'이상해. 분명 아까까지 밖에서 금자가 청소하고 있지 않았던가?'

맨날 투덜거리며 청소를 하던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밖은 마치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처럼 너무나 고요했다.

'설마?'

직감적으로 뭔가 일이 벌어졌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회장은 적을 많이 만들고 살았기 때문에, 늘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24시간 경호체계를 만든 것도 그러한 불안감때문. 만에 하나 박회장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이 박회장을 노리고 습격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했다.

'설마 회장님이 집에 있는 줄 알고?'

박 회장이 평소 즐겨 타는 차는 유리가 직접 집으로 가지고 왔다. 혹시나 주차된 차를 보고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유리가 홀스터에 꽂아 둔 권총을 손에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떨리던 유리의 맥박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유리는 총을 잡을 때 오히려 긴장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마치 든든한 보호자처럼, 총을 쥔 상태에서는 두려움이 없었다.

'대체 어떤···.'

유리가 바짝 긴장하며 귀를 기울이는데 조용하던 거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앙!

'이건···.'

밖에서 들려오는 야릇한 목소리에 유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면, 그것은 분명 쾌락에 젖은 여자의 신음이었다.

'대체 왜···.'

유리는 혼돈에 휩싸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소리의 출처는 두가지 뿐이었다.

하나는 밖에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볼륨을 최대로 키워 놓고 음란한 영상을 재생했다든가, 나머지 하나는···.

'설마 금자가 과외 선생이랑···?'

망측한 상상에 유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 껏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본 유리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미, 미쳤어? 아니 과외 선생님이 대체 왜 그러겠어? 금자도 그렇고···.'

유리가 알기론 금자가 품행이 바른 여자는 아니었다.

특히 몇 개월 전부터 남들 눈을 피해 박 회장의 특별한 시중을 들고 있다는 것고 알고 있었다. 다만 사생활 부분에 대해선 딱히 터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 척 눈감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박회장이 자신에 대해 조금도 이성적인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소 안심하는 부분도 있었다. 상사의 성추행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군복을 벗어야 했던 유리의 입장에선, 박 회장의 성욕을 풀어줄 상대가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음탕한!'

어쨌든 오랫동안 순결을 지켜온 유리의 입장에서 금자는 당연히 고깝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늙은 박 회장의 몸시중을 드는 이유가 뻔히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이 차를 따져보면 도저히 연정이나 사랑같은 단어를 입에 올릴 순 없는 처지였다. 박회장은 박회장대로 욕구를 풀고, 금자는 박회장의 늙은 몸뚱이를 감수하면서까지 얻고 싶은 게 있을 뿐이었다.

'하-. 그렇다고 새로 온 과외 선생을 꼬셔?'

유리는 금자가 순진한 도훈을 꼬셨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반대는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일단 도훈은 나이도 많았고, 제법 덩치는 컸지만 소심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집에서 일하면서 이상한 복장으로 다닐 때부터 싹수가 보이더니···.'

반면 금자는 본래부터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자였다.

나쁘게 말하면 질질 흘리는 스타일이랄까? 박회장을 먼저 유혹한 것도 어쩌면 금자가 아닐까 의심하는 유리였다.

'근데 취향이 그런 쪽이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긴 하는데···.'

사람마다 취향이 제각각이라곤 하지만 도훈은 아무리 좋게 봐도 대머리에 배나온 40대 중년에 지나지 않았다. 키가 크고 제법 풍채가 있어보이긴 했지만, 이성으로서 매력은 아무래도 떨어지는 상대였다.

막상 두 사람이 밖에서 뭔가를 벌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유리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계속 귀만 기울였다. 처음엔 조심스럽던 신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유리는 긴장해 권총 손잡이를 잡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 우습게 느껴졌다.

'하-. 이게 대체 뭐하는 건지.'

유리는 심호흡을 크게 내뱉더니 문을 열고 나갈 채비를 했다. 유리가 문손잡이를 돌리기 직전이었다.

소파에 앉아 금자의 집요한 애무를 받아내던 도훈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움직인다.'

[네?]

'유리 말이야. 이제 나올 참인가봐.'

[박회장의 서재에 있던 유리 양이요?]

'어. 아까부터 계속 문틈에서 엿듣고 있더라고.'

[아니, 그러면 얼른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알고 계셨으면서 왜 가만히 기다렸습니까?]

무공으로 인해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도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유리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유리가 예상외로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그도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최대한 버틴 것이었다.

끼이익-

문소리가 들리는 순간 도훈이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금자를 소파 밑으로 굴리며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문제는 지퍼를 뚫고 나온 그의 대물이었는데, 여의 봉 스킬을 이용해 빠르게 크기를 줄여 게눈 감추듯 쏙 숨겼다.

따라서 유리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시야에 보이는 건 소파 앞에서 일어선 도훈 뿐이었다. 도훈은 침착한 표정으로 유리에게 물었다.

"엇, 나오셨어요?"

유리는 현장을 덮칠 요량으로 벌컥 문을 열었는데 도훈밖에 보이지 않자 빠르게 좌우를 훑었다. 예상했던(?) 장면이 보이지 않자 살짝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혼자 계셨어요?"

"네? 아뇨. 여기 일하시는 분이랑요."

그때 소파 밑으로 굴러떨어진 금자는 도훈이 자신을 숨긴 것을 알고 재빨리 걸레를 집어 들고 엎드려 바닥을 닦는 척했다.

소파에 가려진 금자의 모습은 상반신만 밖으로 나와 팬티가 내려간 아래쪽은 시야에서 가려졌다.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척 걸레질을 이어가더니 유리를 보고 꾸벅 인사했다.

"새로 오신 과외 선생님이 바닥에 음료를 쏟아서 닦고 있었어요."

"아···."

유리는 두 사람의 변명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현장에서 확보한 증거도 없는 이상 더 따질 수 없는 일이었다. 도훈이 걸레질을 하고 있던 금자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닦아야 했는데···."

"아니에요. 이게 제 일인 걸요. 일 보세요."

도훈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유리에게 물었다.

"학생은 소식이 좀 있나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할지."

"아···. 아가씨요? 아직 연락 온 건 없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그럼 밖에서 담배 한 대만 더 태우고 오겠습니다."

도훈이 양해를 구하고 물러나자 이제 거실에는 유리와 금자만 남았다. 유리가 금자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금자는 이미 내려간 팬티까지 수습한 상태였다. 도훈이 임기응변을 발휘해 그녀에게 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

유리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금자에게 물었다.

"이상한 소리 못들었어요?"

"네? 무슨 소리요?"

금자가 시치미를 떼자 유리도 더 추궁할 수 없었다.

'분명 들었는데···.'

유리는 자신이 헛소리를 들었다고 여기기보다, 금자가 운좋게 사태를 모면했다고 의심했다. 다만 금자를 다그친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것 같지 않았다.

"저도 바람 좀 쐬고 와야겠네요."

유리는 도훈 쪽을 추궁하기 위해 밖으로 뒤따라 나갔다.

그제야 위기에서 벗어난 금자가 걸레질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 씨발, 하필 그 타이밍에···."

한껏 달아올랐던 금자의 팬티는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저기요, 선생님?"

밖으로 도훈을 따라나온 유리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도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 넵."

도훈이 담배를 비벼 끄려고 하자 유리가 만류했다.

"아뇨. 괜찮아요. 제 앞에서 피우셔도."

"그, 그래도···."

"정말로 괜찮으니까 편하게 피우세요."

"감사합니다."

도훈이 다시 담배를 입에 물자 유리가 도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금자라면 몰라도 도훈은 순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리의 시선을 느낀 도훈이 당황해하는 척 연기했다.

"왜, 왜 그러시죠? 저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대협씨. 제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네, 네?"

"무슨 말인 줄 알겠죠?"

"뭐, 뭘요?"

"방금 저희 집에서 일하는 분이랑 뭐한거죠?"

"네?"

도훈이 감정을 숨기지 않고 화들짝 놀랐다.

"솔직히 말하세요."

"아, 아무일 없었습니다. 그냥 커피를 쏟아서."

"정말이에요?"

유리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투로 다시 물었다.

도훈의 당황한 기색을 보고 감을 잡는 느낌이었다.

물론 도훈은 들키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저, 정말입니다."

"음···. 이러시면 곤란한데."

"네?"

"저택 내부에 방범용으로 CCTV가 설치되어 있거든요. 제가 지금 가서 확인해 볼까요?"

"C, CCTV요?"

도훈은 정말 까무러치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들고 있던 담배도 떨어뜨릴만큼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가증스럽게 왜 연기하고 계십니까?]

'이래야 나를 믿어줄 것 같아서.'

[근데 CCTV는 무슨 말일까요? 오히려 감시카메라를 설치한 쪽은 주인님인데요?]

'뻥카 치는 거지. 그렇게 협박하면 내가 다 털어 놓을 줄 알고.'

[호오. 유리양이 보기보단 수완이 좋군요.]

"왜요? 저한테 더 할말 있으신가요? 없으면 지금 확인하러 갈게요."

"자, 잠시만요."

도훈이 유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유리가 빼려고 했으나 워낙에 도훈의 악력이 강했기 때문에 유리도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세담?'

"저기, 진짜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한테 피해가 가지 않는 거죠?"

유리가 뭔가 감을 잡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저한테 다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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