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3. 여대 잠입-23-
'휘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인인데?'
[저 분이 아까 박회장의 방에 숨어 있던 보디가드일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아, 저는 여기 사모님이신 줄 알고···."
"아뇨. 회장님께선 오래전 사별하신 뒤로 재혼을 안 하셨습니다."
도훈이 일부러 쓸데없는 소릴 꺼내자, 유리가 바로 정정했다.
이제 겨우 서른 초반에 불과한 자신이 나이 든 박회장의 애첩으로 오해받는 것이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다.
"저는 그분의 수행비서입니다. 혹시나 나중에 말실수 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알려드리는 거구요."
"아하, 수행비서님이시구나."
도훈은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 정수리를 벅벅 긁었다. 천상계 가발은 손톱이 긁고 지나가자 주변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리얼했다. 도저히 육안으로는 실제 피부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안 부르셔도 됩니다. 저도 어차피 대협씨처럼 일개 피고용인일 뿐이니까요."
"엇, 근데 제 이름은 어떻게?"
방금 뒷조사를 했던 까닭에 유리는 실수로 도훈의 이름을 언급하고 말았다. 그녀는 혹시나 뒷조사 한 것을 들킬까봐 당황하지 않고 바로 덧붙였다.
"아아, 방금 회장님 방에서 나오는 길에 성함을 들었거든요. 오늘부터 아가씨 개인 과외 하시는 분이시라고. 저는 유리라고 합니다."
실수로 도훈의 이름의 가짜 이름을 언급하는 바람에 유리는 예정에 없던 통성명을 해야 했다.
"성함이 유리씨라고요?"
"네, 외자입니다."
"아아."
도훈은 유리의 이름을 기억하며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저 근데, 초면에 죄송하지만 뭐 좀 여쭤도 될까요?"
"네, 말씀하시죠."
"저도 조카 친구로 소개받고 왔는데, 집이 너무 으리으리해서 엄청 놀랐거든요. 혹시 회장님이라는 분은 뭐 하시는 분인지?"
유리는 도훈이 쓸데없는 걸 묻는다고 생각했지만, 괜한 오해를 사느니 적당히 둘러대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박회장의 집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밖에 궁금증이기 때문이었다.
"회장님께선 빌딩 여러 채를 관리하고 계십니다. 쉽게 말해 건물 관리업에 종사하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아, 건물주셨구나 어쩐지."
도훈은 대단한 갑부를 만난 소시민 시늉을 하며 감탄했다.
물론 유리가 고의적으로 박회장의 불법적인 다른 직업을 누락시킨 것도 알고 있었다. 절반의 진실만 말함으로써, 더 큰 거짓을 덮는 수법이었다.
"그럼 전 이만."
"아, 잠시만요 유리씨."
"네?"
유리는 자꾸 말을 거는 도훈이 성가셨다. 하지만 그녀는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신분이 낮다고 깔보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침착하게 도훈의 질문을 받아 주었다.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가요?"
"다른 건 아니고 회장님께서 과외비로 거금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거든요."
"그런데요? 저희 회장님은 한 입으로 두말 안 합니다. 돈관련해서는 굉장히 깔끔하게 처리하는 편이고요. 혹시나 못받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도훈의 걱정을 지레짐작한 유리가 곧바로 답변하자 도훈이 겸연쩍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실은 사업자 등록이 안 되어 있어서 통장으로 고액이 입금되면 나중에 세무 처리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거든요. 개인 과외도 고액이 되면 신고를 해야 해서···. 유리씨가 비서라고 하시니까. 나중에 잘 좀··
·."
"음, 그러니까 과외비를 꼭 현금으로 받으셔야 한다는 말씀 인거죠?"
"네, 넵. 직접 말씀드리기 민망하니 비서님께 대신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유리는 쭈뼛거리는 도훈을 보고 생각했다.
'국내 굴지의 오일회사에서 일했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소심한 사람이네. 하긴, 가장의 어깨가 무겁긴 하겠지.'
유리는 도훈의 프로필을 살펴보다, 그가 동시 통역 일을 짤린 뒤 한국으로 돌아와 부인에게 이혼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직 미성년인 자녀의 양육비 또한 꼬박꼬박 붙이고 있다는 사실도.
'하긴,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이야. 평생 더운 중동의 사막에서 기러기 아빠로 열심히 일만 했을텐데, 나이 들고 직장에 짤렸다고 이혼까지 당하다니.'
유리는 본인이 당장 병든 홀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불법적인 일에 자원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도훈의 안타까운 사연을 떠올리며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맨 처음 같은 피고용인일 뿐임을 강조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또한 한참 나이가 어린 자신에게도 비굴할 정도로 존댓말을 올리며 굽신거리는 도훈의 모습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회장님께 말씀드려서 처리 해 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도훈이 감격하며 덥썩 유리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나름 감사의 인사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아와 남자의 스킨십에 익숙치 않은 유리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뺐다.
"벼, 별말씀을···. 저는 이만 보겠습니다."
"네, 넵. 바쁘신데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언제든 또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유리는 끝까지 예의 바르게 도훈을 배려한 뒤 집을 나섰다.
주방에 홀로 남은 도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싸이코 메트리 스킬은 갑자기 왜 쓰신 겁니까?]
'손목에 찬 시계가 예사롭지 않게 생겼더라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 골동품 같은? 분명 사연이 있겠다 싶었지.' 도훈이 마지막에 유리의 손을 붙잡은 건, 유리가 왼손에 찬 시계를 더듬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싸이코메트리 스킬로 시계에 담긴 그녀의 과거를 들추었다.
'···안타까운 여인이었군. 어머님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박회장 같은 개차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니.'
[유리양에게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싸이코 메트리로 봤는데, 신체적 능력은 평범한 수준이지만 권총 사격술 하나는 정말 끝내주더라고. 미 육군에서 사격술 교관을 했다는 말이 진짜였어.'
도훈의 예상대로 유리가 찬 손목시계는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유리는 아버지의 애장품이었던 손목시계를 늘 차고 다녔기 때문에, 시계는 그녀의 평생의 기록이 담긴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유리의 모든 것을 살펴본 도훈은, 그녀의 약점 또한 모조리 파악할 수 있었다.
'10미터 내 거리에서는 백발백중. 유리컵 위에 붙은 파리만 정확히 맞춰 떨굴 수 있는 귀신같은 사격 솜씨를 지닌 여자야. 하지만, 첫발은 무조건 공포탄을 끼워놓는 버릇이 있더군.'
[벌써 습관까지 파악하셨습니까?]
'응. 싸이코메트리에 기록된 영상을 보고 알았지. 만에 하나 그녀가 박회장을 경호하더라도, 두번째 발이 나가갈 때까진 나에게 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지.'
단 한발의 시간 차.
찰나의 시간이라도 무공을 익힌 도훈에겐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유리 쪽은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나쁜 사람이 아닌 줄 알았으니 같이 묶어서 처리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설마 이런 식으로 박회장의 보디가드들 과거를 하나씩 캐보시려고요?]
'적을 알고 나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는 법이라잖아. 복수를 실행하기 전까지 계속 주변을 탐문해 봐야지. 나머지 보디가드 셋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얼굴도 모르니 말이야.'
그때였다.
유리에 대한 과거를 스캔하고 나자 갑자기 도훈의 머리에 미션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오잉?"
[돌발 미션입니다, 주인님!]
도훈이 스마트 워치에 뜬 미션 알림을 확인했다.
-보디가드의 봊이가드를 해체하라!
*남을 지키는 보디 가드면서 동시에 자신의 봊이도 가드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 발생합니다.
*나이 먹도록 아직 처녀를 못 땐 그녀에게 인생의 새로운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세요.
-정신 조작이나 아이템 사용은 자유입니다, 단 미션의 공간은 해당 저택으로 제한됩니다.
*성공 보상으로 '스킬북(랜덤)'이 제공됩니다.
*남은 시간 : 14Day.
[와, 유리양이 아직까지 처녀였다니···.]
'정말 희귀한 미션이 발동했구만.'
[덕분에 보상도 굉장합니다. 오랜만에 새로운 스킬을 받을 수도 있겠군요. 당연히 받아들이시겠죠?]
도훈은 스킬북이라는 설명에 몹시 흥분했다.
'무조건 콜이지. 레벨업이 더뎌서 스킬 받는 게 얼마나 힘든데.'
대번에 미션을 수락한 도훈은 다시금 미션 조건을 꼼꼼히 살폈다.
'오잉? 정신 조작이나 아이템 제한도 없어? 이거 식은 죽먹기 아니냐?'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일단 장소 제한이 가장 큰 제약으로 보입니다만.]
도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곳에서 유리를 자빠 뜨리려면 과외를 하러 올 때 밖에 기회가 없다는 건데, 박회장의 경호를 맡은 유리를 빼돌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군.'
[게다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지수양도 의심할 거고요. 이 목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의 확보도 선행되어야 합니다.]
'뭐, 어쨌든 미션만 해결하면 스킬도 받을 수 있으니 어떻게든 해봐야지.'
도훈은 주방에 내려와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지수의 방으로 돌아갔다. 지수는 물 마시러 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온 도훈을 보고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아니, 화장실이 급해서 찾는데 어디있는 줄 모르겠더라고."
"아···. 저한테 물어보시지. 저희집이 조금 크긴 하죠?"
"조금 큰 게 아닌데? 너 이렇게 잘 사는 줄 몰랐어. 왜 나한테 미리 말 안했어?"
지수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리 말씀드리면 오빠가 절 부담스러워 할까봐서요.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들도 저희 집에 한번 놀러 오고 나선 다시는 안 오더라고요."
"그럼 전에 차 태우러 오셨다는 삼촌이라는 분도 혹시···."
"네, 저희 기사님이세요."
"100평도 넘어 보이는 대저택에, 운전기사까지 딸린 집이었다니···."
"오빠도 혹시 제가 부담스러우세요?"
지수가 긴장한 체 물었다. 도훈이 자신에게 실망할까봐 걱정이 든 것이었다.
"아니야. 뭐, 잘사는 사람도 있고 못 사는 사람도 있는 거지."
"헤헤, 다행이다. 전 오빠가 아버지 만나고 주눅들까봐 걱정했거든요."
"주눅이라니?"
"과외비 많이 주신다지 않으셨어요?"
"음··· 뭐. 적진 않지."
"예전에 과외 하셨던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시험 성적이 약간 올랐는데 너무 큰 돈을 주시더라면서."
"그랬어?"
"그랬는데 저한테 살갑게 대하던 선생님들이 보너스를 받고 나더니 오히려 거리가 멀어지더라고요."
"거리가 멀어지다니?"
"그냥···. 위화감 같은 걸 느꼈나 봐요. 저를 되게 조심스러워하고. 전 그런거 싫더라고요."
"잘됐네."
"네?"
"다행히 난 돈에 주눅드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정말요?"
"잊었어? 너 만나기 전까지 내가 신부 되려고 했다는 거.
그래서 인지 난 물욕같은 게 없거든. 혹시나 여기서 과외비를 받더라도 다 헌금으로 낼 생각이야."
"와, 역시 오빠 최고예요!"
물욕이 없다는 말에 감동한 듯 지수가 도훈을 와락 껴안았다.
[뻥 치시긴. 주인님이 물욕이 없다고요? 누구보다 돈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돈을 싫어하진 않지. 근데 방금 한 말은 진심이야. 박회장이 어떤식으로 돈을 긁어 모았는지 뻔히 아는데, 그걸 좋다고 날름 받아 먹을 순 없지.' 지수가 도훈을 껴안고 있는데, 문득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했다.
"아가씨, 다과를 좀 가져왔습니다."
"지금 공부중이니까 문 앞에 놓고 가주세요."
"네, 아가씨."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열심히 과외를 받는 지수를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과일 그릇을 내려놓은 아주머니가 물러나자 도훈이 말했다.
"역시 아직은 무리겠어. 방문까지 활짝 열어 놓고 있으니 언제 누가 와도 위험하잖아."
"그럼 어쩌죠? 이대로면 힘들게 집까지 들어온 보람이 없는데."
"조금만 기다려보자. 분명 기회는 있을 거야. 괜히 처음부터 욕심부리다 그르치지 말고."
"네, 오빠."
지수는 도훈의 말이면 껌뻑 죽는 시늉도 할 수 있다는 듯 신뢰를 가득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도훈의 대머리를 보고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와, 근데 이건 너무 진짜 같아요. 대체 어떻게 분장한 거에요? 얼굴을 전혀 못 알아보겠어요."
"내가 예전에 특수분장 익혔다고 말했잖아. 3시간 동안 공들인 거야. 감쪽같지?"
"네. 아까 처음 봤을 때 진짜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근데 계속 이 모습이어야 하는데 괜찮겠어?"
지수는 다른 얼굴로 변한 도훈을 이곳 저곳 꼼꼼히 살폈다.
"음···. 변태 같은 아저씨한테 당하는 느낌이려나?"
"뭐, 뭐?"
"아니예요. 히-. 괜찮아요. 전 오빠 진짜 얼굴 아니까. 그리고 얼굴이 뭐가 중요해요?"
"그럼?"
지수가 몰래 손을 뻗어 도훈의 대물을 바지밖에서 만지작거렸다.
"이게 오빤데."
"아, 앗! 아직은 위험하다니까."
"치, 밖으로도 못 만져요?"
"오늘만 참아."
그날의 과외는 별다른 사건 없이 종료되었다.
도훈은 박회장과 그의 보디가드 중 하나인 유리에 대해 파악한 것으로 만족 해야 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박회장의 집에 드나들 명분을 갖춘 이상, 박회장에 대한 복수는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